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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心(허심) 유재기 목사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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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21  12: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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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虛心(허심) 유재기 목사의 생애와 사상

유재기(劉載奇) 목사(1902-1949) 는 경북 영주 용상리에서 태여났다. 영주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대구 사립교남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여 3년간 고학을 하며 졸업을 한다. 재학중에도 교남학교 안의 무산아동을 상대로 한 야학을 개설하여 봉사함로 그의 생애에 출발을 이미 보여주었다. 졸업후 큰 배움을 위하여 홀홀 단신으로 일본으로가 고등학교를 전전하다가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주경야독하며 기독교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방학이면 고향인 영남일대에 돌아가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훗날 주창하게 되는 “예수촌 운동” 으로 발전이 되엿다. 그 때가 유목사의 나이 약관 19세였다고 전한다.

건강과 경제란으로 일본대학을 1년간 다닌다가 귀국하여 한 3년 동안을 마음에 정한  예수촌 운동에 대한 일념으로 영남일대에서 전도인으로 사역하다가  24세에 경북 영일교회에 전도사로  정착을 한다. 첫 단독목회를 하면서 자신의 부족과 교직에 대한 열망을 체우기 위하여 평양의 숭실학교를 거쳐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도 농촌문제에 대한 염원을 키우며 재학중 농촌소년지도론과 협동조합론이라는 책자를 저술한다. 그리고 학기중에도 평양일대를 순회하며 “예수촌 운동” 을 실현한다.   1931년 8월 대동군 청용면 이천리에서 그가 처음으로 조직하여 개회한 "기독청년소년단" 집회는 실로 장관이였다고 전한다. 그중의 “농산가공품 전람회는 자못 이채롭고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고 적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협동조합을 통한 농산물 가공이라는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가난한 농민들과 빈민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였기에 사람들은 그의 별명을 누더기(유재기)라고 불렀다. 27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립을 받고 경북 칠곡교회에 부임을 한다. 그리고 장로회 총회 농촌부를 창립하고 이 일을 위하여 전국을 누미며 농촌운동을 통한 통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결국 일경의 눈밖에 나서 8개월간의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이 유목사는 4번째의 감옥생활이라고 자료는 적고 있다. 38년 6월 8일 대구시내 침산교회로 부임을 하였고 경북노회 종교교육부 총무가 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경의 미움을 받아 다시 3년 징역형을 받고 형을 살지만  1940년에는 경북노회장이 되였다.  그후 대구경북의 유수한  약전의 대구제일교회 목사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때 까지 5년간 시무하게 된다.
   
 

그 기간도 경찰서 유치장을 자기 방 처럼 드나드렀다고 전한다. 그는 8.15 해방도 유치장에서 맞이 하였지만 석방되자 다시 예수촌 운동을 역설하며 이 일을 구체화 하기 위하여 “기독교흥국단” 을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동지들로는 최성환, 송창근, 신후식, 박재석, 구와삼, 이태학씨등이였다. 이 조직으로 청년 동지들이 모이고 힘을 받자 중앙(서울)로 으로 이전하여 “기독교흥국형제단” 이라고 개명하고 흥국시보라는 조그만한 소식지도 발행하였다.  그리고 1936년 처음 연 제 1회 “조선농민복음학교” 는 농촌계몽운동으로 이후 모두 14번을 개최하여 438명의 십자가 정병을 배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가리봉 뭇지리(훗날 가리봉교회)에서 거주하며 교육으로 밀양을 다녀온 오고 나서 와병으로 44회의 생일에 부인 장덕순 사모와 모친과 1남 3년을 두시고 소천하신다.

그를 이르기를 기독교사회주의자, 사회복음주의자,무교회주의자 혹은 정통교리에서 보면 이단자 등으로 불려진 당대의 별호들이다. 그가 실상은 많은 시간을 교단 밖에서 활동을 한 것 같지만 당시 동역자들과 교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와 민족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북노회는 유 목사를  경북노회장으로 대구제일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한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로 보여진다.  옛 어른들의 안목과 기계,  진심을 볼수가 있지 않은 가? 당시 선교사들이 농촌과 오지를 가지 않고 도시집중의 폐을 통찰하고 가난한 대중의 모판 농촌중심의 교화 개화운동을 했다는 면에서 대단한 혁명가로 보여진다. 그리고 단순히 개인구령으로 교회안의 교세확장에 메몰된 것이 아니라 협동조합 운동과 예수촌이라는 이상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은 사회구원 영역까지 확대된 그의 열린 신학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유재기 목사의 생애를 2008년 유재기 목사의 "예수촌 사강(思想)과 농촌운동(農村運動)" 이라는 제목으로 서변제일교회 서병희 목사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자료화 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유의신 목사는 부산의 믿음찬 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부친의 유고 집을 낸바있는 데(예영커뮤니케이션, 2011년) “세대를 뛰어넘는 경계인, 허심 유재기 목사 유고집 - 예수촌 사상과 기독교농촌운동” 이란 책이다.

이 책에는 유재기 목사의 연보와 설교 특히 아동설교와 농촌계몽 강연록 일제하와 해방후 저작들 사진들과 추모 글, 자녀들의 회상이 실려 있다.  이 학위 논문에 처음으로 다뤄진 것은 그가 복음전도자로 혹은 목사로 운동가로 개인적 활동을 한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의 활동과 신학사상은 지평을 넓히면 종교적 범주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해방문제(외세) 계급문제(농민) 분단문제(통일)에 까지 가 있다.  그렇기에 그의 사역은 당시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긴밀히 연계되여 있어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한 지도자는 한 영역에서 뿐만아니라 민족과 현실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자리하고 있는 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닳게 된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과연 이런 선진들의 정신과 신학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의 논단 글에는 지금 봐도 심금을 울리는 글귀가 많은 데
“믿음에서 인격을 건설하라, 아이들아 하루를 살고 싶거든 하루를 일하고 백년을 살고 싶거든 백년을 일하라 노동은 생활의 양식이다, 아이들아 요사이 잘난 체하고 돌아다니는 목사님이나 선생이나 어른들의 본을 받지 마라, 그들은 남이 하는 것을 시기하는 싸움꾼의 마음새를 가졌으므로, 아무쪼록 앞날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 추잡한 꼴들을 헐어버리고 주의 뜻이 너희들을 통하여 이뤄지기를 바란다. 또 다시 간절히 권고한다”
   
                          

동시/ 우리주님 오시네
우리 주님 오시네 나귀 타고 오시네 와랑 자랑 오시네 나를 보러 오시네
우리 주님 오시네 낙타 타고 오시네 사막 으로 오시네 나를 보러 오시네
우리 주님 오시네 산을 넘어 오시네 골을 지나 오시네 나를 보러 오시네
우리 주님 오시네 흑암 세상 오시네 등불 들고 오시네 나를 보러 오시네

그러나 예장과 기장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고 유재기 목사가 시무하였던 가리봉교회는 기독교 장로회에 소속되여 고인의 자취와 약력은 우리교단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였다. 그러나 그의 생전의 자취가 대구 경북지역인 것을 감안 한다면 우리 교단과 신학교에서도 외면하지 말고 이 분의 자취를 연구하고 새롭게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교단의 60년 전통의 유수한 신학대학으로 경북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온 경산의 영남신학대학교가 개교 이래 큰 혼란을 겪고 있는 데 하루 빨리 극복하여 학문과 교역자 양성에 매진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두가 이 분의 자취를 돌아보아 큰 꿈을 키우기를 바란다. 일부 배부르고 철없는 교수들과 정치지향적인 이사들의 사심이 공동체에 얼마나 큰 폐헤가 되는 지를 배우는 기회가 되였다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기도 하면서 잠시 눈을 멀리 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선배들의 소명과 삶을 통하여 우리의 갈길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고 유재기 목사는 민족적으로 외세의 강압적 상황에서 민중들의 가난을 긍휼히 여기며 자립농촌의 생활운동을 전개 하였으며 특히 소년과 청년들의 학습에 많은 관심을 기우렸다고 했다. 그리고 서구 선교사들의 도시적 유희적 선교에 저항하여 가난한 삶의 자리로 시작하여 도시목회 까지 감당하는 저력을 보였던 것이다. 어떤 지경에서도 우리는 받은 바 사명과 정신으로 목양을 하고 이 민족과 민중의 구원을 위하여 일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로가 이를 돌아보아 교훈으로 삼는 계기가 되였음은 한다.

유재기 목사 년보
1905년 경북 영주 용상리에서 부친 유추열씨 모친 손기운씨와 4남매중 장남으로 출생
1920년 영주공립보통학교 졸업 1923년 대구교남학교 중퇴
1923년 영일 포항지방 순회 전도인을 하다가 도일    1924년 일본일진 고교 중퇴
1925년 일본대학 중퇴  1926년 평양숭실전문학교 농과 청강생(협동조합론 저술)
1927년 요천교회 전도사 1929년 평양신학 입학
1929년 경북 하양, 신녕교회 전도사  1931년 장순덕과 조만식의 중매로 혼인
1934년 평양신학교 29회 졸업  1934년 칠곡교회에서 안수, 경북노회 농촌부장
1934년 칠곡교회 사임 1935년 의성읍교회 부임  1936년 총회 농촌부 서기 1937년 침산교회 부임
1937년 경북노회 종교교육부 총무(유급상근)  1938년 대구지방법원 구속 수감
1940년 경북노회장  1941년 대구제일교회 부임
1945년 건준 대구 경북지역 연락부장   1945년 흥국형제단 창단
1947년 제 1회 조선농민복음학교 개강 하여 1949년 14회까지 열림
1949년 7월 14일 경기도 가리봉 자택에서 소천, 가리봉교회 언덕에 안장
1955년 전 함태영 부통령(흥국형제단 총재) 주관 시흥군 과림리 기념예배당 건립과 동시에 묘소이장
1977년 자서전 “이 목숨 바쳐서” 주태익 저(선린출판사)
2010년 교향인 용상교회당에서 저작집 출판감사예배,  김병희 저, (예영)
2011년 62주년 유고집 “세대를 뛰어넘는 경계인” 출판,  아들 유의신 저(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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