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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남산교회 1백년 중 '시련' 가려...기독교계 친일 맥락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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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31  11: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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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ㆍ종교인 보도와 언론
 
 <매일신문> 대구남산교회 1백년 중 '시련' 가려...기독교계 친일 맥락 생략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항일 운동·사회사업…사랑으로 나눈 한 세기 은혜" 대구남산교회(일제강점기 남산정 교회)가 제일교회(일제강점기 남성정교회)에서 분립된 지 백년을 맞는 남산교회를 매일신문은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 백년을 사랑을 나누어 은혜로 새겨졌다고 평가했다(3월 8일 18면).

   
▲ <매일신문> 2014년 3월 8일 18면(문화)

매일신문의 이 기사는 매일신문에 거의 매일 수도 없이 실리는 매일신문 유(類) 기사 가운데 한 꼭지에 불과하다. 매일신문이 남산교회를 이렇게 다뤘기에 독자들은 남산교회를 「항일 운동·사회사업…사랑으로 나눈 한 세기 은혜」의 교회로 기억하게 된다. 남산교회도 남산교회 신자들도 대구사람들이다. 대구의 한 부분, 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간다. 대구사람들이 대구를 살아가고, 대구가 대구사람들의 터전이 된다. 그리고 매일신문은 기록자가 되어 그날의 ‘대구일기’를 쓰게 된다. 일기는 그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나는 오늘 하루 이렇게 살았다.”는 정직한 자화상이다. 그런데 그 자화상이 내가 쓰고, 내가 그리는 자화상이 아니라 “그 카더라”를 인용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일기일까, 인용문일까, 아니면 ‘그 무엇’-‘평가’일까?

매일신문이 정리한 남산교회 ‘열쇠구절’은 이렇다. ▷교계 확대에 큰 기여 ▷나라의 아픔을 함께 나누다 ▷의료선교로 하나님의 사랑 실천 ▷재단 만들어 모범적인 복지사업 전개 ▷100주년 기념사업

남산교회 활동·계획 ‘부각’

대구남산교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9일 만세운동 기념행사를 가졌고, 기미만세운동 관련 주제 강연도 열었다. 이만집, 김태련, 김용해, 백남채 부조 제막식도 가졌다. 매일신문 이날 기사가 부각한 ‘열쇠구절’ 가운데 많은 부분은 현재 전개하고 있는 교회활동들이다. 그 가운데 해외의료선교, 다양한 나눔의 북한선교, 장애인선교는 앞으로의 계획이기도 하지만 현재 활발히 펴나가고 있는 활동들이기도 하다. 남산교회 하면 장애인 예배, 이주근로자 예배로 교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대구에는 근본주의 기독교 계통의 초보수교회가 적지 않고, 이런 교회들은 남산교회를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 매일신문의 이날 기사에는 제일교회(남성정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로서 교계 지평을 넓힌 교계, 나라의 아픔을 함께 한 교회란 점도 부각했다.

좋다. 참 좋다. 매일신문의 위 기사대로라면, 참 좋겠다. 장애인 복지, 이주근로자 선교가 앞으로 더 풍성하게 이뤄져 풍년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종교가 다르더라도 대구의 교회, 대구사람들이 풍성한 나눔의 손길을 뻗는 게 싫을 리 없다. 북한선교도 심양의 단동이나, 연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사랑 나누기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변신하는 ‘지사들’

하지만 남산교회의 지난 일기 쓰기 대목에 이르면 “어, 정말?” 하는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린다. 대구사람들 입을 통해서. 매일신문이 이름을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언급한 인물들을 보자. 이만집 목사-그는 계성학교 교감을 역임했으며 대구 3.8 만세운동의 실질적인 리더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만집과 이성해 부자, 김태련과 그의 아들 김용해도 대구 만세운동의 지도자였고 일본 헌병, 경찰의 총칼을 온몸으로 막아선 인물들이다. 권희윤과 권영화, 정재순과 그 아들 정원조는 부자가 모두 만세운동을 가담했다. 백남채도 마찬가지. 그러나 그들에겐 곧 이어 시련이 닥친다.

이만집은 대구3.8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남성정교회 목사로 돌아온다(이만집 목사는 1918년 1월 3일 어도만 선교사와 함께 동사 위임목사로 남성정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그가 직면한 고민은 대구사람들이 만세운동에 피를 뿌리는 것을 미국선교사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정치는 일본이, 종교상 도의지도는 (미국) 선교사들이 담당하기로 이등박문과 선교사 대표가 협정을 맺었기 때문인데, “왜 한민족이 문명한 일본의 통치를 거부하고 만세운동을 저렇게 하는 거지?”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와 경북 교회와 교인들을 명실상부하게 통제하고 있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구역에서 그들은 이만집 목사를 곱게 여기지 않았다. 이만집 목사는 1923년 3월 26일(조선총독부 관방 문서과의 문서 「조선의 기독교 독립 자치운동」에 따름), 또는 3월 18일 대구에서 자치독립선언서를 발표, 외국인선교사들로부터 독립된 교단조직을 계획하고 자치교회운동을 전개한다. 선언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30성상에 비록 각오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면 진리에 속하자. 교회는 신성한 것인데 불의의 구속을 어찌 당하리오. 금아(今我) 대구교회는 저 권리를 주장하는 선교사의 정신적 지배를 받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함"


이만집, 교회자치운동 ‘깃발’

그것은 일단 미국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북노회 탈퇴로 가시화됐다. 외국인선교사들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의 한민족에게 동정심을 보이곤 했으나 그것은 교세 확장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집 목사가 대구에서 시작한 자치교회 운동이 대구와 경북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또 어떤 기관을 세우면 그것을 내 교회, 내 학교, 내 기관으로 여기고 영도권을 행사했다. 자치독립선언서 발표와 함께 자치교회운동이 파급되면 그럴수록 미국선교사들이 가지는 반발도 커져갔다. 일제도 자치교회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이라는 한민족의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제2의 3.1독립만세운동으로 전환되지 않을까 예의주시, 이를 한민족 ‘민중’ 운동으로 보고 매섭게 주목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민족의 동태를 수집, 분석, 대책을 마련하는 총독부 문서, 경찰 보고서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만집 목사는 이후 외로운 선각자, 기독인으로서 일생을 보내다 금강산 기도처에서 생애를 마친다. 김태련의 아들 김용해는 대구 도심 대구3.8만세운동 현장에서 아버지가 일제 헌병과 경찰에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 시궁창에 내다 처박혀 20일 만에 숨을 거뒀다. 대구3.8만세운동을 전개한 죄로 이만집은 징역 3년, 김태련은 징역2년6월, 백남채와 정재순 등은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독립만세운동을 부른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신음해야 했다.

3·1운동 이후 ‘흔들’

전 조선을 울린 3·1독립만세운동은 외형상 실패로 끝났다. 대구3.8독립만세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실패라고 한 것은 3·1독립만세운동의 한 부분을 두고 말한 것이지만 3·1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해 피 흘린 민족지도자, 학생, 유생, 농민이 있는가하면 좌절의 기간을 거쳐 일제에 협력하는 전날의 애국지사들도 잇따랐다. 그들의 변신은 대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구남산교회는 제일교회에서 분립한 7처교회, 또는 8처교회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교세가 커서 대구 종교계의 친일 가속도, 종교계 인사의 친일 전향을 살필 수 있는 바로미터 구실을 한다. 이제 그들의 친일 전향, 변신이 어느 정도인지 보자. 그들의 친일은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된 여파였지만, 일제경찰과 군, 친일파 중진들의 회유, 이권 획득의 징검다리 확보 등을 따라 다방면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적으로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절대 거부해야 하는 기독교 목사나 장로 등 지도자들이었던 점에서 회유, 협박, 이권 획득 수단 확보 등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신자들이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도 막고 말리고 기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 경찰, 군의 협박과 회유에 정면으로 맞서 대구 봉덕동 일본군 연대 부근과 대구역 주변에서 잇따라 격문을 살포, 첩부하면서 저항의 강도를 높여간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저항은 이후 해방의 그날까지 대구 항일학생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일제 군경의 협박, 회유에 타협하고, 심지어 일제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회 지도자들의 나약하고 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경제난이 가중되자 만주로, 만주로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이들도 줄을 이었다. 사월교회사를 보면 그들의 절망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일제, 비호의 손에 문화인들도 ‘합류’


대구 지역 교회들이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은 대구 지역 교회들을 친일 부역 활동 기관으로 삼으려고 일제가 내민 비호의 손을 잡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 명칭은 대구기독교연합회. 대구기독교계가 일제의 회유 반, 협박 반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1938년 5월 31일 결성한 이 조직은 일제가 패망한 해방의 그날까지 위력을 떨치면서 대구지역교회와 신자들을 일제의 침략기구로 삼아 교회를 탄압했다. 문제는 대구 기독교회를 일제침략기구로 삼은 이 조직에 수많은 대구의 기독교 지도자는 물론 문화방면 지도층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사실이다. 그 명단을 보자.

   
 
   
▲ 대구방면위원 명단. 매일신문이 보도한 백남채가 정총대, 방면위원으로 기록돼 있다.

위원장 좌등신오랑, 부위원장 고교신일, 동 이문주, 서무위원 마장아부, 동 신후식, 재무위원 등정충치랑, 동 백남채, 위원 상전의웅, 동 최재화, 동 정재순, 동 김봉도, 동 허곤, 동 조용기, 동 전재섭

평의원(순서부동)
계 말랑,  포천광호,  포야언사랑,  강본방웅,  취방겸장,  가가미애민,  삼촌항장, 평정청일,  길무갑자남,  소증호준남,  팔목등일,  암정 상,  진궁 충,  박래승,  김정오,  이경욱,  오병기,  김덕배,  김병욱,  배승환,  김성국,  박문영,  이태학,  김삼도,  김원휘,  강신창,  이명석,  유재기,  김태묵,  박태준,  김재명,  강시영,  유양선,  이철락,  김만성,  권덕찬,  최종철,  임복수,  차인차,  이우항,  조용해,  김홍배,  곽운오,  김경삼,  강만희,  주재성,  김칠룡,  박덕일,  김성도,  최경학,  오종환,  심 천,  양찬언,  김성관.

매일신문이 위 기사에서 소개한 백남채, 정재순을 비롯해 최경학(이들은 모두 대구3.8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등 적지 않은 인사들이 이 조직에 중직으로 참가했다. 해방 이후 대구에 주둔, 군정을 편 미군정경상북도 지사의 주요 측근인 김태묵을 비롯, 문화계의 박태준 등이 1938년 무렵 일본의 종교침략기관에 멍석을 깔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박덕일은 경북교회사(1894~1923년까지 경북지역 교회사를 정리한 교회사)의 공동 저자(편집인)이었고, 교열목사였던 이문주는 부위원장이었다. 대구·경북지역 교회 태동기부터 독립만세운동, 교회자치운동을 지켜보고 이것을 교회사란 이름으로 기록했던 교회사가들이 일제 침략기구의 임역원을 맡은 사실은 한편으로는 집요한 일제의 종교탄압 강도를 짐작하게도 하지만 태프트-카츠라 밀약, 이등박문-선교사 대표의 협약이라는 그동안 미국-일본의 끈끈한 관계를 고려하면 미국선교사 편에 섰던 대구지역 교회지도자들과 교회를 터전으로 교육받고 활동한 문화계 인사들의 민족적, 역사적 정체성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또한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이문주 목사는 남산정교회(남산교회) 목사였다. 이문주 목사와 백남채 등은 일제가 각 교회별로 애국반을 조직시킬 때 남산정교회 애국반장, 애국반원이 된다. 한 술 더 떠 백남채는 일제의 정 총대, 방면위원이 된다. 방면위원에는 백남채 외에 종교인들이 다수 포진해 있고 이 가운데 목사들이 많다.
남산정교회 애국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소화 15년(1940) 1월 18일 남산교회 애국반장 이 문 주, 국민정신총동원총회연맹 경북노회지맹  이사장 전(殿). 애국반결성의 건 보고. 수제의 건 좌기와 여히 결성되여삽기 자에 보고함

애국반장   이 문 주, 동 반위원  백남채 김만성 최종철 이종옥 박인서 임복수 권덕찬 장기효, 동 평의원  박종석 조호근 이경만 전유복 김수천 김태도 김경숙 한우달 김청숙 구정희 서병길 편상순 배삼운 이상량 김재권 이상
여성보국교육 착착


일제는 한편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보국교육을 착착 진행시켰다. 일제가 진행시킨 이른바 보국교육은 당시 조직다운 조직을 갖춘 민간 조직이 별로 없던 때라 종교기관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은 소화 13년(1938) 9월 8일 대구부윤이 남산정교회에 보낸 교육참여 독려 공문을 보면 분명하다. 전문은 이렇다.
    
소화 13년(1938) 9월 8일 대구부윤 남산정교회 전(殿). 총독부촉탁 겸 부인문제연구회원 서은숙 씨(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초빙하여 「가정보국생활양식기준」을 중심으로 오는 9월 13일 오전 9시 반 (시간엄수)부터 공회당 소집회실에서 좌담회를 개최함에 부쳐 좌기에 의하여 여자직원 또는 회원을 출석시킬 것을 의뢰함


   
 
여학교, 소학교, 군사 관련 여성조직 외에는 대구지역 종교계를 망라해서 참가시켰는데 기독교계가 압도적으로 많다. 총독부가 장악하고 있던 학교는 물론이고 종교기관도 이미 일제에 투항하고 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당시 기독교계가 얼마나 일본의 탄압 대상이었는지, 역으로 기독교계 내부에 친일성향이 얼마나 강했는지(세속적이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기독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간주하고 신사참배를 하도록 가결한 것이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로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였다. 당시 총회가 발표한 ‘중대성명서’는 이렇다.

성명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참배를 솔선여행(率先勵行)하고 추(追)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 우 성명함. 소화 13년(1938)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


총회가 신사참배를 종교가 아니고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신사에 참배하여 충성을 보여야 한다는 신사참배 결의에 대구지역 목사들이 대거 가담한 것은 일제의 종교탄압이나 목사들의 친일 성향에 비춰보면 ‘올 것이 온’ 사건이었다. 기독교를 일본기독교에 예속시킨 마당에 국민정신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이렇게 해서 국민정신총동원(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북노회지맹이 결성식을 가진 시각은 1939년 12월 13일 오전 11시였다. 당시 참석자는 목사 27명, 장로 71명, 선교사 6명이었다. 이렇게 기독교(장로교)는 일제의 어용종교로 변신한다. 어느 정도 어용적이었는지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 경북노회지맹 결성식에서 신후식 목사가 낭독한 「선언」이 잘 드러낸다.

선언. 동양의 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양함은 황국의 부동의 국시이다. 아등은 이에 더욱 단결을 공고히 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고 내선일체전능력을 총발휘하여 국체수행에 협력하며 또한 복음선전사업을 통해서 장기건설의 목적을 관철함을 기함.


그러면 현장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체제는 교회현장에서 어떻게 가동됐을까. 경북노회연합여전도회장 김성매(백남채의 부인)가 이 연맹 여자부결성식을 통지한 통지서를 보자.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여자부결성식통지서.……소화 16년(1941) 6월 12일.경북노회연합여전도회장 김성매.표어 「총력발휘는 여자의 시국 재인식에서」. 기(記). 3. 대구시내 각 교회는 여신도 총동원하야 참집할 것……행사예정, 전원 대구신사 참배 결성식 후, 4. 시국대강연회 24일 오후 2시, 5. 시국좌담회 24일 오후 3시 30분


   
▲ 김성매의 친일활동 자료

신사참배는 당연시되고 시국강연회, 시국좌담회가 이 사업의 주요 메뉴였다. 시국강연회, 시국좌담회가 열리면 여기서 강조된 메시지는 우리민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옭아매어 시간과 체력, 노동력, 물자는 물론 목숨까지도 ‘황국’을 위하여 초개처럼 버리도록 강요되었다. 일제가 전쟁물자를 수탈하는데 교회 조직이 일제의 입이 되고 채찍이 되어 갔다. 실제로 민간에서 식기로는 물론 다양한 용도에 사용해오던 유기를 헌납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교회는 전통문화의 산물인 유기를 아래와 같이 비위생적이라고 강변하고 유기 아끼는 마음을 애국심으로 바꾸라고 강변했다.

“유기는 비위생적…헌납을”


   
▲ 제일교회(남성정교회 목사 천성허심=유재기)가 육군부에 국방헌금을 내자 담당관이 발급해준 국방헌금수령증.

경북노련 제  호. 소화 16년(1941) 8월 13일.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연맹이사장 천성허심(유재기). 동 여자부장 김성매, 동 사무취급 옥천춘도(김봉도), 각교회애국반장 전, 유기물(鍮器物) 헌납에 관한 건

유철노(로) 제조한 기구는 조선인가정에서 가장 애용하는 것이며 다량을 점하고 잇난 것임니다  연하나(그러나) 이 기구는 대용품이 얼마던지 잇난 것이오 오히려 대용품이 위생상으로나 기타 여러 가지 원 유제품(諭製品)보다 승한(나은) 것임니다 그러니 각 가정에서는 유기를 사랑하는 마음(애유기지심-愛鍮器之心)을 나라사랑하는 마음(애국지심)으로 환하야(바꾸어) 헌납함으로 국방사업에 큰 도움이 잇기를 요망하나이다.

추(추신)
1. 금월 24일 주일을 유기헌납주일로 할 것
2. 대구부내중 제일, 신정, 남산, 대신, 중앙, 칠성정, 동원정, 원대동 등 8곳(팔처) 교회는 헌납자의 주소, 씨명(氏名), 품점수(品点數)를 기록한(기한) 명부를 작성하야 현품과 공히(함께) 경북노회사무실노 지래할 것(가지고올 것),
3. 그(기) 외 타방 각 교회는 편의를 수하야(수(隨)하야-따라서) 해(해당) 지방 당국에 의뢰하야 헌납수속을 행할 것.


위 추신에서 보듯이 교회는 주일을 유기헌납주일로 지정하기도 했는데 말이 헌납이지 수탈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경북노회연맹은 유기를 헌납한 신자들의 이름, 헌납한 그릇 수, 헌납자 주소를 대구지역 주요 교회로 하여금 일일이 파악하도록 하고 있는 사실이다. 경쟁적으로 헌납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 민족, 기독교 신자들은 종교기관 통제 속에서조차 모든 것을 털리고 말았다. 처음엔 유기 헌납 등 특정 물자 공출에서 시작됐지만 식민지이긴 하지만 일본이 공급하는 현금 경제를 쥐어짜는 방향으로 진전됐다.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장 육군소장이 1941년  남산교회 애국반장(목사)에게 감사장을 준 기록(사진)은 이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애국반장이란 조직원을 신자들의 경제력을 수탈하는 중간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장 육군소장이 1941년 남산교회 애국반장(목사)에게 감사장을 준 기록

   
▲ 남산교회(암촌문주=이문주 목사)가 해군부에 휼병금을 내자 조선군사령부 출납담당관이 감사하다며 발급해준 휼병금가수령표.

친일파 거물 박중양까지 나서

내밀한 신앙 공동체인 종교기관을 황국신민 만들기의 전위부대로 탈바꿈시킨 일제는 대구기독교연합회→신사참배 결의→국민정신총동원(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연맹(→경북노회지맹) 체제로 확대, 강화해나간 일제는 전시종교보국회 체제를 결성한다. 경상북도지부는 1945년 2월 24일 경상북도도청회의실(현재의 경상감영공원 내 전 도청청사)에서 조직된다. 지부장은 도지사, 고문은 박중앙 등이었다. 박중양은 한일합병전 대구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을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일본인 등을 동원해 부단 파괴한 장본인. 거물급 친일파인 박중양은 3.1독립만세운동이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자 이 운동을 파괴하려고 자제단을 전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구에서 조직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 전시종교보국회는 행정기관장을 비롯, 일제가 우리민족을 회유하기 위해 빛 좋은 개살구 격으로 조직한 중추원 조직(박중양은 중추원 부의장 자격으로 가담하는 등 중추원 조직원도 여럿 가담했다), 어용종교조직을 가담시키기도 했는데 기독교 목사(애국반장)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 역원으로 가담한 기독교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다.

   
 

전시종교보국회가 도 단위까지 결성됨에 따라 일본의 전쟁 부담은 더 커져간 사실을 반증하지만 종교기관을 통한 통제는 그만큼 가혹해져갔다. 종교보국회에 고위 공무원, 열성 친일파, 어용종교기관장들이 대거 포진했다는 것은 신자들(우리민족)의 정신적 신앙생활에서 종교 본연의 그림자조차 지워나가려 한 의도를 읽게 한다.

민족말 지우기 나선 교회


   
▲ 기독교대구연합회 암촌문주 위원장(이문주 남산교회 목사) 명의로 남산.지산.중동교회에 고꾸고(일본어)를 강습하도록 촉구하는 공문. 고꾸고 강습회 목적을 기독교도에게 일본어를 습득시키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고, 중간 관리자가 신후식으로 돼 있어 당시 대구지역 기독교 관계자들의 친일성향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내고 있다.

일제는 마침내 교회를 우리민족 탄압을 넘어 민족성을 말살하는 도구로 내몰아갔다. 비록 나라의 통치권은 일제에 빼앗겼지만 민족만은 살아남아 민족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민족성은 없앨 수 없었으므로 민족사를 주체로 일제에 저항하고 투쟁하고 독립을 전망할 수 있었다. 민족사는 민족성의 정신적 기둥-정체성이었다. 그런데 그 정체성을 허무는데 교회가 내몰리고 만다. 대구 남산교회, 지산교회, 중동교회에 기독교 대구연합회 위원장 이문주(남산교회 목사) 명의로 내려보낸 국어강습회 개최 신청 접수 관련 문서는 ‘국어’가 한글이 아닌 ‘고꾸고’ 즉 일본어란 점에서 우리 민족에게서 우리말을 빼앗는데 교회를 활용한 것을 보여준다.

소화17년(1942) 9월 23일. 기독교 대구연합회 위원장 이문주. 남산. 지산  각 교회 어중(御中) 중 국어강습회 개최 신청에 관한 건

국어강습회를 개최하려 하는 교회는 좌기의 사항을 따라 상당하는 난에 기입상 지급(9월 26일 경까지 도착할 것)으로 대구 신정 계성학교 동원후식(신후식) 앞으로 제출하여

記강습의 목적  (기독교도의 국어보급을 위하여) 강습기간 자 소화 17년(1942) 소화 18년(1943)   3월 31일 강습사항 조선연맹 발행의 교과서 「국어(고꾸고)」에 의함 강습장소  교회당 강사 주소 씨명 직업 연령 수강인원  교수시간  주간(매주)  시간  야간(매주) 시간  연 시간. 소요교과서 「국어-고꾸고」  군 읍 면 연맹으로부터 입수 가능한 경우는 대구연맹으로부터 주문 수배함에 덧붙여 필요 부수를 기입할 것.


우리민족 기독교가 일본 기독교로 접수되고, 일본의 전쟁수행에 도구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일제는 우리민족 최후의 마지노선인 우리말을 없애려 시도한 것이다. 일제로 보면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우리말을 지우고 ‘고꾸고’로 입력시킨 머리에서는 결국 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그 악역을 현장의 교회들이 떠맡았다는 사실이다. 위 기록에서 우리말 지우기 책임자는 우리민족 구성원(남산교회 이문주 목사)이고, 강습장소는 여러 교회당이며, ‘고꾸고’ 강습 중간 연락책 역시 우리민족 구성원(계성학교 신후식)이다.

교회사가조차 일본지배 올라탄 이유


일제가 종교-기독교(나아가 문화)를 지배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우리민족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황국신민’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애초 계획한 바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종교-기독교 지배 체제 구축이 가능했을까? 경북교회사를 저술, 역사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인사들조차 일본 종교 지배체제에 올라탄 이유/배경은 뭘까?

남산교회가 지나온 백년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나눈 은혜의 한 세기를 자의식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게 보인다. 종교를 달리하는 사람이라도 대구사람이라면 복을 빌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신문이 다룬 ‘남산교회 스토리텔링’은 사실 홍보에 가깝다. 거기에 남산교회를 포함한 대구의 근대 기독교가 지나온 이야기가 일부는 배제되고, 일부는 선별해서 ‘일기’를 썼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인위적인 부분이 배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인위적인 부분이 배어 들어가면 사실보다 ‘인위’가 더 중시되고, 또 부각하게 된다. 그럴 때 기록성은 사라지고 평가는 뻥튀기 된다.

대구사람이 대구를 만들고 대구다움을 만든다. 거기에 언론이 할 일은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그늘을 가리고 볕이 활짝 들게 하려 한다면 그늘에 사는 식물은 어찌 될까? 필자가 들은 말 한 토막으로 맺으려 한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묵은 흙이 있어야 집다워


“유럽사람(독일사람)은 집을 짓는데 우리처럼 시멘트로 고층건물을 짓고 이전 것은 모조리 치워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고층건물을 아무데나 짓지도 않지만, 집을 지을 때는 최소한 이전에 있던 흙을 깊이 60㎝가량 한 곳에 잘 모아 둡니다. 집이 다 완성되면 그 때 그 흙을 가져다가 다시 마당을 덮습니다. 왜냐구요? 그 흙, 그 흙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은 자그마치 2억5천만년 동안 그 곳에서 살아오면서 그 곳 풍토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되돌려놓아야 그곳다움이 유지될 테니까요.”


대한제국의 역사를 지워버린 사람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미국의 행위를 지워버리지 않고 마당에 되 채워놓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왜 기독교회가 그 모양으로 침략의 도구가 됐는지도 그대로 역사의 마당에 채워놓아야 한다. 거기서 얻는 교훈은 다시는 역사가 거꾸로 가지 않도록 하고, 앞으로 우리가 정신 차리고 살아나가는데 활력소가 된다. 남산교회가 장애인 선교, 복지 남산교회, 이주노동자 예배를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전개하고 북한선교 전망을 밝게 하려면 남산교회와 대구 7처, 8처교회의 밝은 모습과 함께 냄새나는 부분도 되살려놓아야 한다. 그늘을 가려 거짓 영웅을 만들고, 뻥튀기 ‘일기’를 쓰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몫은 남산교회, 대구지역 교회와 신자들, 그리고 독자와 언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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