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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교회 30년 김규복 목사 이야기바닥이 하늘이다, 빈들이 희망이다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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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0.29  12: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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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교회 30년 김규복 목사 이야기

10월 28일(화) 대전 대화동 공단에서 시작된 빈들교회가 창립 30년 맞이 행사 중 하나인 열린 문화제가 한남대학교 서의필 기념홀에서 열렸다. 일하는예수회 동지들과 방문하여 함께 한 옛  추억을 정리해 본다. 

   
 

김규복 목사는 1952년 전남 승주군 주암면 백록리에서 몰락한 선비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다. 마침 3대째 기독교 집안이었던 외가 쪽의 영향으로 어려서 기독교를 접하지만 가문의 엄격한 유교영향을 받아 교육을 위해 광주로 나와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71년도에 연세대학교 정외과에 입학을 하기까지 교회에 열심있는 편은 아니었다. 1971년의 대학생활은 교련강화반대운동, 군사독재반대운동과 위수령, 계엄령을 겪으며 3학년부터는 학내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당시 김대중씨 납치 사건 유인물 배포로 서대문서에 잡혀가 매와 고문으로 유신독재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는 데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건강이 좋지 않다.

그후 다시 학생운동으로 1975년 봄 구속되어 8월간 징역을 살고 소위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제입영되어 최전방에서 두 번째 군사독재의 혹독한 시간을 지낸다. 1978년 봄 제대 후 아무런 희망이 없어 상록수의 꿈을 안고 한 농촌에 들어가 고등공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되면서 우리의 농촌과 아이들의 삶을 체험한다. 1979년 겨울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찾아 온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복학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운동 과정에서 무장된 이론이 농촌에서 구체화 되었기에 학교생활에 순화되지 않고 다시 학생운동의 전면에 서게 된다. 6개월의 도피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도피 기간 동안 외삼촌이 시무하는 순천 신흥교회에서 지내면서 어렸을 때 읽었던 성경을 다시 보게 되는 데 특히 나치에 저항하다가 순교한 독일신학자 본 회퍼의 책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신념과 신앙은 새로운 것으로 융합되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라는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체생활”에 대한 이상을 가슴에 품고 그 동안 쌓인 사회과학적 인식과 성서의 말씀이 하나되어 그의 독특한 “예수운동”으로 구체화 된다.
   
                    * 김목사 부부와 필자
한편 1981년 초에 집행유예로 감옥에서 풀려나왔으나 온전치 않은 몸으로 당시 대전에서 목회하던 이모부 댁으로 가서 요양을 하며 소일하다가 대전신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부흥회식 스타일의 강의에 적응 되지 않았지만, 당시 문전섭 교장 청빙으로 교무과장으로 부임한 김진영 목사를 만나면서 그의 신학적 지평은 열리게 된다. 지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균형적으로 갖고 있던 스승을 통하여 많은 대화와 도서를 소개받게 되는 데 특히 구약학자 문희석 박사의 광범위한 논문과 책을 탐독하면서 성서신학에 매료되어 다시 한 번 자신이 그 동안 공부한 사회과학적 패러다임이 모두 성서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 체험을 하며 예수운동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교회의 용어로 “은혜를 받았다” 고 한다. 그렇게 되니 그동안 힘들고 방황했던 신학교 생활이 신이 났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로 소모임을 조직해서 공부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시 침신대 기독교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황선업 사모를 만난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황선업은 김 목사를 만나면서 큰 변화를 얻었고, 장청운동에 투신하여 전국 장청 회장에까지 이르게 되고 나중엔 김목사를 내조하기 위해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장체험까지 했던 보기드문 사모이다.

1983년 대전신학를 졸업하고 장신대 목연 77기 과정에 입학하고 서울로 올라 간다. 그의 신학은 많은 고민은 있었으나 아직 구체화 되지 못했는데 그의 진보성을 더 끌어 줄 스승도 또한 그것을 담을 그릇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잘 나가는 교회가 목회자의 희망이라고 보고 소망교회, 영락교회, 명성교회, 경동교회, 순복음교회 등을 탐방하면서 그런 목회를 배우려 했다.  한편  문희석 박사의 구약신학 강의에서 아모스 연구에 대한 발제로 크게 평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당시 장신대에 막 조직된 현대신학연구회에 2기로 목연 과정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참여를 하면서 짧은 기간이지만 폭넓게 동지들을 사귀게 된다. 훗날 이 과정으로 인하여 산업선교에 헌신하고 현장노동을 하면서 대전에 민중교회를 개척하는 계기가 된다.

1학기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방문하고 ‘성문 밖 교회’의 예배에서 인명진 목사의 설교로 다시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정리하면서 예수님처럼 이 땅의 민중인 가난하고 억울린 자들을 위한 헌신을 결심한다. 그리고 신군부의 억압적 통치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들과 만나고 교제하게 되면서 예수님은 바로 이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며 차라리 평생 노동자로 살고자 하는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그리고 조지송 목사를 통하여 동기들과 산업선교훈련을 받게 되면서 직접 노동현장을 체험한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센터 방식의 산업선교를 할 수 없다는 변화되는 상황 속에 인명진 목사의 제안으로 노동자교회에 도전을 하게 된다. 그동안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순수하고 신실한 신앙을, 대전신학교에서는 학문에 대한 개방성과 신학적 지성을, 장신대에서는 '현신'동지들을 만나고 '영등포산선'에서는 노동자들과 조지송, 인명진 목사을 통하여 3번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으로는 조지송 목사로 부터 세상을 보는 바른 관점과 노동운동의 개념, 산업선교에 대한 역사와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 전설적인 투쟁 내용, 알린스키의 주민조직론, 프레이리의 민중교육론, 대안사회운동으로서 협동조합운동 등을 배웠고, 인명진 목사로부터는 민중교회 설교와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등을 배웠는데 이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새롭게 운동적으로 정리한 된 셈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까지는 교회를 산업선교와 노동자지원을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엔 민중선교공동체로서 교회의 형성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센터가 아닌 민중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훈련이 끝나고 동기들과 중심보다는 지역으로 흩어지자고 하여 그는 대전에서 가장 낙후된 대화동 공단지역을 택하여 그곳에 개척교회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다시 용전교회에서 사역하는 황선업과 1984년 결혼을 하지만 양가로부터 그렇게 환영과 축복을 받는 결혼식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인명진 목사로 부터 200만원을 지원받아 대덕구 오정동의 한 지하공간을 임대하고 결혼축의금을 모아서 부족한 개척기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년후 대화동으로 들어왔고, 다른 교회에서 빌려 사용하던 낡은 창고를 예배당과 교육실, 주방과 사택으로 김목사가 직접 망치를 들고 개조하여 사용하게 된다. 이후 노동자교회로서 노동자 야학과 노동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한다. 황 사모는 수입이 없는 남편을 대신하여 피아노 레슨과 아르바이트로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수고를 수년 간 하였다.
(구술 정리)

빈들이 희망이다(2) 는 추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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