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신학의 기원, 특징, 최근 이슈들 - 예장뉴스
예장뉴스
Voice강연/성명/논평
공공신학의 기원, 특징, 최근 이슈들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11.27  10:25:34
트위터 페이스북

공공신학의 기원, 특징, 최근 이슈들

최경환 (프리토리아 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가 지난 11월 22일(2014) '한국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주제로 개최한 제14차 정기 논문발표회에서 발표된 강연

1. 서론
그동안 개별적으로 연구되어 오던 공공신학은 2007년에 “공공신학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Global Network for Public Theology)가 프린스턴에 설립되고, 동시에 「공공신학 국제저널」(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Theology)이 발간되면서 비로소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이 단체는 매년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면서 그 결과물을 『공적 영역에서의 신학』(Theology in the Public Square)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미국과 독일, 영국과 호주, 그리고 남아공과 남미의 신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신학의 모든 분과를 초월해서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학회가 설립되고 학술지가 창간되면서 공공신학에 대한 연구 성과들이 누적되기 시작했고, 이에 발 맞춰서 상당한 양의 단행본과 결과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장신근은 1980년대 이후 세계의 신학계는 “실천신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는데, 2000년대 이후에는 가히 “공공신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사이에서는 여전히 공공신학의 내용과 개념 규정, 그 범위와 적용에 대한 일관된 합의점이 도출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공공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더욱 가열되어 연구가들 사이에서도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공공신학 국제저널」이 발간된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공공신학을 어떻게 정의 내릴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에 대한 합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학자들이 2011년 독일의 밤베르크 대학에 소재한 “공공신학을 위한 본회퍼 연구소”(Dietrich Bonhoeffer Centre for Public Theology)에서 “공공신학에 있어서 맥락성과 상호맥락성”(Contextuality and Intercontextuality in Public Theology)이라는 주제의 컨퍼런스를 열었다. 여기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모두 공공신학이 형성된 각 지역의 상황과 맥락을 중요하게 다루고, 어떻게 공공신학이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 속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

이 컨퍼런스에서 주제 강연을 맡은 남아공의 대표적인 공공신학자 스미트(Dirkie Smit)는 하나의 일관된 개념으로 공공신학을 정의내리기가 매우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역사적으로 공공신학이 발흥하게 된 배경과 맥락을 다양하게 소개하면서 공공신학을 발생학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그는 공공신학의 기원을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로부터 추출해 내고,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오늘날 공공신학이 하나의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린다.

이 논문은 스미트가 제시한 공공신학의 기원과 발전양상을 따라가면서 그동안 「공공신학 국제저널」에서 논의되었던 다양한 이슈들과 특징들을 덧붙여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절에서는 공공신학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대략적인 공통점들을 추출해 보고, 공공신학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어서 4절에서는 공공신학자들이 지속적으로 논쟁하고 있는 핵심적인 이슈 두 가지, 즉 ‘공공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해’, ‘해방신학에서 공공신학으로의 전환’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공공신학에 대한 시대적 요청과 필요성을 넘어서 이제는 ‘누구를 위한 어떤 공공신학’을 연구해야 하는지 간략하게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2. 공공신학의 기원: 6가지 이야기

2.1 벌거벗은 공적 영역에서의 신학
일반적으로 공공신학의 기원은 1960년대 벨라(Robert N. Bellah)에 의해 시작된 ‘시민종교’(Civil Religion)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벨라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시민종교는 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나란히 존재하는데, 이는 미국 대중들의 경험들을 통해 가시화되었고, 미국의 제도와 조직을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미국적 삶’이라 불리는 전체 구성체에 종교적인 차원을 제공해 주었다. 그럼으로 미국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기독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신념체계와 상징, 의례를 드러낸다.

이와 같은 시민종교의 한 형식으로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1974년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의 신학을 연구한 논문에서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소개했고, 몇 년 후에 ‘공적교회’(public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미국의 공적인 삶 속에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혀냈다. 마티가 보기에 니버와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공공신학의 모델을 제시한 공적 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신앙 전통, 그리고 성서와 역사와 철학적인 관점에 따라 미국 대중들에게 행동의 지침들을 제공해 주었다. 스미트는 니버가 이후 세대에게 “공공신학을 위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지배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뉴하우스(Richard John Neuhaus)가 지적한 대로, 종교와 정치적인 삶 사이에 어떤 “분리의 장벽”이 존재한다는 기존의 통념은 무너지고, “벌거벗은 공론장”(naked public square)이 시민종교의 중요한 특징이 되어 이후 공공신학의 기원과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된다. 특별히 미국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그들이 공적인 이슈들과 논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질문하고 도전한다. 이들은 에드워즈(Jonathan Edward), 카이퍼(Abraham Kuyper),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와 같은 신학자들에게 영감을 받아 공공신학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스택하우스(Max Stackhouse), 벤(Robert Benne), 티만(Ronald Thiemann)과 같은 신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의 세부적인 논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최근에는 브라이텐베르크(Harold Breitenberg Jr.)가 매우 세심하게 공공신학의 발전과정을 기술하면서 다양한 변이와 전이를 소개해 주었다.

2.2 공적 담론으로서의 신학
마티가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시점과 거의 비슷하게 시카고에서는 트레이시(David Tracy)가 한 잡지에 “공적 담론으로서의 신학”(Theology as Public Discourse)이라는 글을 개제했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여기서 마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공신학을 이야기한다. 트레이시는 신학이 다른 학문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는지를 질문했고, 신학이 어떤 의미에서 공적인 담론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그가 밝히고자 한 것은 ‘공적인 삶 속에서 신학이 어떤 윤리적인 기여할 수 있는가?’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신학이 ‘어떤 의미에서 학문의 조건과 본질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공적인 담론 속에서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가 내린 대답은 신학이 공적 담론의 한 형식으로서 적절한 패러다임이 될 수 있고 이 물음을 지속적으로 묻는 것이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아젠다라는 것이다.

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진리에 대한 이해, 의사소통의 규범, 타당성 구조, 비판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대화에 열린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특별히 트레이시는 ‘교회, 학문, 사회’라고 하는 신학의 세 가지 공적 영역을 유형화했는데, 모든 신학은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유의미한 담론을 제공해야 하고, 이들의 관심사를 포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학의 공공성은 특정한 전통이나 도덕성이 아닌 비판적인 기준을 가지고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 “신학이 보편성은 갖추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순히 진리를 변호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적인 신념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논증의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트레이시는 이러한 현대의 신학적 아젠다를 통해 기초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이 어떻게 진정한 공적 담론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신학이 공적인 담론으로 기능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이 속한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어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트레이시는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전통과 역사를 존중한다. 다만 그 역사가 오늘날 새로운 언어와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실천적인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니버(H. Richard Niebuhr)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이러한 아젠다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니버의 신학은 여전히 ‘고백적’ 신학의 유용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의 신학는 단순히 신앙고백을 사적인 차원에서 개인적으로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공동체를 통해 다시 재현하도록 만들어 준다. 그리고 하버마스를 통해서는 실천의 방법을 배울 수 있는데, 비판적 이성의 해방하는 능력은 대화 당사자 간에 진정성 있는 대화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 준다.

트레이시가 제시한 세 가지 공적 영역(교회, 학문, 사회)은 많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어떤 이들은 오늘날 윤리적인 도전이 세 번째 영역에만 속한 것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트레이시의 비전은 모든 신학이 반드시 공적 담론을 공유하고, 모든 관심들을 포괄한다는 것이었다. 트레이시는 자신의 글을 결론지으면서 두 가지 핵심적인 신념을 자신 있게 말한다. 첫째, 신학의 다양한 주제와 대상은 확실한 야망 혹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이다. 둘째, 신학은 항상 현대의 모든 방법론적 규칙들에 가장 기초적인 것에 위탁되어야만 한다는 신념이다. 그는 신학적 거장들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한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서로 상보적인 노력을 지속한다면 공적이고 상호소통적인 기독교신학의 결과들을 생산해 낼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2.3 신학과 공론장
독일에서는 미국에서의 논의와 다른 방식으로 ‘공공신학’ (öffentliche Theologie)이 발전했다. 아마 후버(Wolfgang Huber)가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일 텐데, 그는 1972년에 교수자격 취득 논문으로 『교회와 공공성』(Kirche und öffentlichkeit)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후버는 이 책에서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독일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신학의 공적 역할에 대해서 폭넓게 분석했다. 그의 교회론과 윤리학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구성적이고 비판적으로 보여준다. 후버는 칸트와 하버마스, 그리고 요나스를 통해 책임윤리와 사회적 실천에 대한 철학적 토대를 제시하고, 본회퍼의 신학을 통해 자신의 신학적 사회윤리를 구체화한다. 수많은 논문과 책을 저술하면서 그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공적 역할, 그리고 공공신학의 형식을 정교화시켰다.

특별히 후버는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에 영향을 크게 받아 그동안 독일교회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의 공공성의 구조변화를 탐구했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공성’은 사회의 규범적인 비전에 대한 공적인 의견을 만들고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적 영역, 공적 실천이다. 특별히 근대 이후 ‘공공성’에 대한 담론은 공적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적인 의미로 좁혀지게 되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시켰다. 하버마스는 모든 대화 당사자들이 공론장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특정한 집단이 명확하게 배제되는 공론장은 불완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공론장이 아니다. 부르주아 법치국가의 주체로 여겨질 수 있는 공중은 그의 영역을 이렇게 엄격한 의미에서의 공공영역으로 이해한다. 공중은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이 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고려에서 선취하고 있다.

이렇게 공론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공개성’(open)과 ‘접근가능성’(accessibility)인데, 이는 정보가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하고,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권력의 감시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공론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것은 차이와 타자에 대해서 열린 자세를 취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공성 개념은 국가와 시장에 대해 공적인 토론을 통해 비판할 수 있으며, 저항도 할 수 있다.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시설과 서비스, 교육과 통신이 올바른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공론장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혹은 교회가) 민주적인 방식과 절차에 따라 공론장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건강한 시민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또한 교회는 공론장에 참여함으로 다양한 시민사회의 요구와 목소리를 경청할 줄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비판과 질책의 목소리까지 겸허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공론장은 보다 건강하게 보존될 수 있고, 시민사회는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사회로 거듭날 수 있다. 교회 또한 공론장이 제기하는 비판의 무게를 견디면서 끊임없이 갱신과 혁신을 추구해야 하며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를 만들어야 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아공의 스미트를 비롯해서 미국의 스톨라(William Storrar), 영국의 아더톤(John Atherton)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적극 수용해서 다원적이고 비판적인 공공신학을 전개한다.

2.4 신학과 공적 투쟁
일반적으로 공공신학은 세속화 이후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서로 합의와 협력을 통해 공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만들어 가는 서구적 기독교윤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투쟁과 갈등보다는 조화와 화합, 소통과 같은 가치들이 중요하게 다룬다. 그런데 이와 다른 맥락에서 공공신학을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앙과 공적인 삶의 관계가 때로는 투쟁과 갈등의 모습을 취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주로 제3세계의 공공신학자들이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정치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투쟁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공공신학은 조화로운 것도 아니고, 합리적이거나 토의를 통한 추론과정도 아니다. 이들은 공공신학이 권력과 갈등, 그리고 다양한 투쟁(해방을 위한 투쟁, 자유를 위한 투쟁, 정의와 인권을 위한 투쟁, 평등과 동등성을 위한 투쟁)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러한 투쟁은 공공신학이 목표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시민사회와 형식인 다원주의, 그리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위한 투쟁일 것이다.

공공신학이라는 용어가 이런 투쟁적인 의미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런 관점은 오늘날 평화롭고 민주적인 조건 속에서만 공공신학을 연구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기존에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이라 부른 상황신학들과도 어느 정도 중첩되는 개념이다. 최근에는 서양의 공공신학자들도 제3세계 신학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서 공공신학이 가지고 있는 성격 가운데 ‘공적 분노’(public anger)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스톨라(William Storrar)는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투쟁의 방식과 형식은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충분히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특별히 스톨라는 세계화 시대에 직면해서 교회의 사명은 낯선 이방인을 적극적으로 만나는 것인데, 이는 선한 시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지구촌 공론장에서 선한 이웃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성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공공신학의 목회적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야기와 통곡을 통해, 그리고 비판적인 사회 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통해, 배제되고 침묵을 강요당한 다양한 억압자들과 주변화된 이들의 공적인 분노를 표출시키고, 치유하고, 구성해 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신학자 말루레케(Tinyiko Maluleke)는 “과연 공공신학이 오늘날 남아공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한 가장 적합한 신학인지를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땅 위에서 여전히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폭발하고 있는데, 과연 공공신학이 이들에게 어떤 대안과 대답을 제공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그에게 공공신학은 지나치게 보편적이고 통합적이며, 지나치게 권력에 침묵하고 있으며 포스트모던하다. 따라서 기존의 이러한 공공신학은 남아공의 현실을 다루는데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말루레케가 지적한 것처럼 아직도 투쟁의 상황 속에 있는 많은 나라에서 공공신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에는 다소 성급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공공신학을 수용하는 지역적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2.5 세계화 속에서 신학과 공적 삶
점차 증가하는 세계화에 대한 인식은 공공신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 공공신학과 관련된 책들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이런 경향을 파악할 수 있다. 스택하우스(Max Stackhouse)의 “하나님과 세계화”(God and Globalization), 스톨라의 “모두를 위한 세상?”(A world for all?), 헤인스워스와 패스의 “세계화 사회를 위한 공공신학”(Public theology for a global society)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난 세계화와 다원화된 종교, 문화, 사회의 조건 속에서 공공신학은 보편적인 규범적 타당성과 가치를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각각의 국가와 지역에 전파된 정치 경제 시스템은 동일한 형식으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양식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적용되었다. 공공신학은 분명 미국의 시민종교라든가 독일의 민주주의 공론장이라는 지리적 기원을 가지고 발생한 학문이지만, 이제는 그 내용과 구성이 특정한 지역적 상황을 초월해서 세계적인 이야기로 발전하였고,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스미트는 공공신학이라는 학문이 마치 미국적인 상황과 경험으로부터 기원했고, 이것이 다른 나라로 이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공공신학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했던 안했던 상관없이 모든 사회는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공적인 삶에서 신학의 역할 또한 다르게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공신학은 하나의 동일한 신학적 범주로 묶어 낼 수 없을 만큼 다원화되었고 각 지역의 상황과 문화에 맞춰 상호의존과 협력을 통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공공신학을 만들어 냈다. 세계화를 통해 공공신학은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듯 하면서도 그것이 각각의 지역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과 형식으로 분화되어 적용된 것이다. 이를 두고 스톨라(William Storrar)는 “신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of theology)라고 불렀고, 이는 오늘날 모든 공공신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을 연구하는 모든 신학자들이 세계화 현상을 진지하고 다루면서도 이에 대한 평가는 상이하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꾸프만(Nico Koopman)이 지적한 것처럼 각자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공공신학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신실하게 참여하면서 동시에 다른 지역에 있는 공동체로부터 진지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공신학은 편견 없이 서로에게 겸손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이들이 접근가능한 방식으로 문턱을 낮추어 다가가고 있는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세계화를 등에 업고 등장한 공공신학은 국제질서에 편입하지 못한 주변국가와 이방인에게 전지전능한 위치에서 주권자의 모습으로 폭력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택하우스는 세계화로 인해 경제성장과 부의 분배가 보다 확장되었기 때문에 이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세계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주어진 공적 역할은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럴 경우 우리는 세계화가 가져온 또 다른 부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

2.6 신학과 종교의 공적 귀환
오늘날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경험과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롤즈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를 제시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롤즈나 하버마스와 같이 자유주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동안 ‘포괄적 교의’나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공론장에 나오는 것을 반대했다.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개인들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모두 내려놓고 공정한 방식으로 공론을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으로 폄하 되었던 종교적 가치와 신념이 최근 정치적 다원주의와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로 말미암아 그 목소리를 다시금 광장에서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학자들 사이에서 후기 세속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세속화와 세속도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하버마스, 카사노바(Jose Casanova), 테일러(Charles Taylor)와 같은 정치철학가들은 근대 자유주의 사상과 전혀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종교와 정치의 상관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유주의 공론장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종교로부터도 초연하게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공론장은 다양한 욕구와 신념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고, 이러한 다양한 인정욕구가 사실은 정치의 근원적인 의지이자 뿌리였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함(Elaine Graham)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신앙’과 ‘이성,’ ‘종교’와 ‘세속화’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모두 공론장은 당연히 중립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신화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재로는 정반대다. 정치는 철저하게 신학적이고 신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의지의 각축장이다.

후기 세속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설은 공론장에서 종교에 대한 요구는 부흥하면서도 제도로서의 교회는 쇠퇴한다는 것이다. 즉, 공론장에서 종교의 역할과 기능이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여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앙공동체가 공론장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나고 신앙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의 권리가 정당화되고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공공신학과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공공신학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현상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유럽의 저명한 정치철학자들(아감벤, 바디우, 지젝, 이글턴)이 정치와 종교의 상관관계를 직접적으로 다룸으로써 가히 ‘종교의 귀환’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이 되었다.

3. 공공신학 다시 정의하기
이처럼 공공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의미와 강조점 역시 다양하다. ‘공공성’(public)이라는 개념은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고, 여전히 공통적인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공공성’의 개념이 통일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여러 가지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슈를 집중화시키지 못하고, 공공신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론을 사용해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지 통일된 합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신학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공공신학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스미트는 “공공성의 개념과 행동신학”(Notions of the Public and Doing Theology)이라는 논문에서 오늘날 공공신학을 둘러싼 개념적 다양성과 모호성을 상세하게 소개해 준다. 그는 공공신학이 가지고 있는 규범적이고 기술적인 의미를 소개하면서 ‘공공성’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공공성’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어떠한 협박이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서로 비판적인 논의들을 주고받으면서 공적인 삶과 여론을 통해 형성하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공공성은 내용이 선험적으로 미리 주어진 개념어가 아니라 토의와 협의를 통해 함께 구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 과정을 통해 건강한 시민사회가 유지되고, 시민들이 이러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 투쟁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지표가 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공공성’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국가에 충성하고 봉사하기 위해 이러한 공적인 삶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시민들을 위해 공영방송, 공중보건, 공공교통, 공교육과 같은 서비스를 유지하고 제공할 책임이 있다. 시민들을 위해 국가가 다양한 혜택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히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공적 서비스가 특정한 이념적 정책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하거나 오용될 위험이 있다. 공영방송이 가져야 할 공공성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스미트는 공공신학에서 말하는 ‘공공성’은 “더 이상 단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없고, 다양한 방식으로 각각의 차이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신학에서 공공성의 개념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방식은 “복음, 교회 그리고 신학이 항상 세상과 관련이 있다는 통찰, 구체적으로 공적인 삶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즉 복음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에서의 삶, 실재 그리고 인류애 전체를 포괄한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와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전통적으로 신학에 많은 주제와 이슈들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주로 다룬다. 공공신학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기독교의 복음은 다양한 방식과 형식으로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와 세상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교회와 세상, 교회의 정치,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참여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반 오르호트(Frederike van Oorschot)은 각각의 상황 속에서 전개된 서로 다른 공공신학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공공신학이 발생하게 된 조건으로는 사회의 다원화와 세속화에 대한 경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분명한 정치적 조건을 꼽을 수 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아공과 호주에서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자리가 축소되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박탈당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신학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교회는 세계화와 다원주의에 직면해서 전통적인 신앙의 양식들이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으로 붕괴되는 경험을 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을 해야 했는데, 여기서 공공신학이 그 역할을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공신학은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신학이 어떻게 건설적이면서 비판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지를 다룬다. 특별히 이러한 논의는 비교적 최근에 민주화를 경험한 남아공과 브라질에서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사회정치적 조건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다양한 공론장을 통한 여론 수렴, 협의와 토론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는 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공공신학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공공신학은 모든 사람들이 지적으로 동의하고 인지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즉, 신학의 언어가 내부자들끼리만 통할 수 있는 게토화된 문법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공공신학이 제기하는 아젠다는 타종교와 세속화된 시민사회 속에서도 충분히 소통이 가능하고 이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합리성과 보편성을 담지해야 한다. 둘째, 공공신학은 신앙의 사사화와 개인주의에 반대하고, 성도들의 삶이 교회 내적 윤리로 환원되는 것을 반대한다.

공공신학은 사회와 문화 속에 내재된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특정한 권력이나 기관에 의해서 사회적 재화가 독점되거나 지배받는 것을 거부하고, 공정한 부의 분배와 복지제도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은 타자와 세상을 향한 책임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셋째, 공공신학은 사회참여의 당위성을 넘어 그 방법의 정당성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여론을 수렴하고 공동체의 공적인 의사를 결정한다. 공공신학은 이러한 공론장의 규범적이고 합리적인 소통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질서와 원리를 존중한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를 향해 일방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세우지 않고,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방식으로 사회변혁을 꾀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공공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공공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하게 정의되고 있어서 그 개념이 다소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공공성’이 함의하고 있는 내포적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를 다소 얇고 가볍게 기술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공공신학이 의미하는 공공성을 지나치게 하나의 의미로 환원시킬 경우 배제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톰슨(Heather Thomson)은 이렇게 공공신학이 말하고 있는 ‘공공성’의 의미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정의할 경우 상당히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형태를 공공신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거나 용인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라든가, 나치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같은 사회적 실재들이 신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소지가 있고, 실재로 이러한 명백한 역사적 과오들이 공공성을 증진한다는 이유로 승인되기도 했다.

또한 톰슨은 그동안 다양하게 제시되었던 공공신학에 대한 정의가 필요조건만을 제시했을 뿐 충분조건은 만족시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대부분 공공신학의 성격과 특징을 규정하는 논의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신학을 고착화시키는 것을 우려해서 최소필요조건만을 제시하려다 보니 공공신학에 대한 형식적 틀만을 제시하는데 그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공공의 선을 증진하고 도모하고자 시작한 공공신학은 역설적이게도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폭력적이고 반역사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다. 따라서 톰슨은 이제 공공신학에 대한 소극적인 개념 규정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톰슨은 자신의 주장이 자칫 편협하고 특정한 신학적 아젠다에 함몰되거나 특정한 교파 신학에 휘둘릴 수 있다는 위험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신학의 잘못된 오용과 그로 인한 폭력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 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톰슨이 제시하는 공공신학의 충분조건은 그동안 기독교역사가 만들어낸 각각의 신학전통과 예전, 그리고 그 속에서 배양된 신앙습성과 성서해석들이다. 공공신학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이고 규범적인 틀을 통해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확보하면서도, 각각의 신학 전통이 만들어낸 사회윤리적 특징들을 통해 충분조건을 보충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있는 신앙공동체는 ‘회복적 정의’라든가 ‘평화주의’에 대한 내용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공공신학의 아젠다로 상정하고, 개혁파 전통에 있는 그룹은 ‘정의론’이나 ‘하나님의 형상론’에 근거한 윤리적 이슈들을 신학적으로 설명해서 자신들의 공공신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공공신학은 진정한 공적인 ‘신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4. 공공신학의 최근 이슈들

4.1 공공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적으로 기독교사회윤리의 과제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적절하게 설명해 내는 것이다. 어느 하나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이 둘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은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논쟁이다. 최근에 공적담론 속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되면서 이 논쟁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기독교신학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독특성과 신학의 전통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기독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공공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복음이 사적이지 않고 공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모두를 향해 개방되어 있으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에 복음이 적극 참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반면 공공신학이 말하는 복음의 공공성은 특수한 상황과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면서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고유한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 함을 동시에 강조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트레이시는 공공신학이 보편적인 도덕 실천이성에 기반해서 공통적인 인간의 경험과 전통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의 대상, 즉 청중은 모든 사람들이고,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스택하우스에게도 공공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바라보는 우주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스택하우스에게 공공신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한 공공선(common good)에 집중해서 기독교와 세상이 서로 중첩되는 영역에 어떤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에토스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인간이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섭리의 은총 속에서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이 모든 것이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공적 영역으로 나가야 하며, 이 세상의 영혼과 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

스택하우스에게 진정한 신적 현실은 반드시 보편적 현실이어야 하고, 신학자는 이 현신을 보다 간문화적인 연구를 통해 적절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신학은 윤리, 법, 사회의 각 영역에서 모든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스택하우스가 말하는 공공신학은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변증적인 성격을 취하게 된다.

이처럼 트레이시나 스택하우스에게 ‘공공성’은 ‘보편성’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처럼 쓰인다.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합리성이라는 검증 기준을 통과해야 하며, 이성적인 언어로 번역 가능해야 한다. 공적인 학문의 영역에서 신학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선택해야 하고,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방법으로 신앙의 확신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신학이 공적 담론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정합성, 일관성이라는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공공신학의 딜레마가 존재하는데, ‘공공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기독교 전통과 언어를 상실하면서까지 세상과의 소통과 보편성을 추구해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신학이 소통과 번역의 과정이 거쳐야 한다면, 이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특수한 종교 전통과 거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실천들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의 장으로 편입되기 위해 보다 추상적인 단계로 축약되거나 축소될 위험에 처한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방법론을 비판한다.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위탁으로부터 벗어나, 이를 추상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 공동체에 대해서 정직하지도 않고 비판적인 태도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학문의 영역에서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역설적으로 전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적 지침들이 구체적인 현장의 필요와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보편적인 담론 속에 편입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남아공의 신학자인 드 그루시(John de Gruchy)는 다른 신학자들과 공공신학에 대한 정의를 공유하면서도 공공신학을 보편적인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신학은 일반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공공신학의) 실체는 특수한 지역공동체에 속한 공적인 영역과도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 그루시는 우리가 “보편적인 ‘공공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꾸프만은 미국과 남아공의 공공신학을 비교하면서, 남아공의 공공신학은 미국에 비해서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상황에 보다 민간하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영미 공공신학자들에 비해 제3세계의 신학자들이 공공신학의 특수성과 구체적인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스톨라(William Storrar)와 아더톤(J. Atherton)과 같은 영국의 공공신학자들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으로부터 공공신학에 대한 보편적인 함의를 전제하면서도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적극 수용함으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스톨라는 공공신학이 공적 이슈에 대한 공적 의견들이 서로 순환하면서 정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하버마스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공론장에 대한 영(Iris Young)의 비판을 수용해서 공공신학의 목회적 과제는 “이야기와 통곡을 통해, 그리고 비판적인 사회 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통해, 배제되고 침묵을 강요당한 다양한 억압자들과 주변화된 이들의 공적인 분노를 표출시키고 치유하고, 구성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교회의 사명은 낯선 자들을 만나는 것이며, 선한 시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구촌 공론장에서 선한 이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찰하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목회적 공론장은 의사소통 합리성의 다양한 형식과 다원주의를 환영하고, 동시에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 버림받은 공공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한다.

아더톤은 신학자들이 공론장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에게 집중함으로 “포용성을 향한 편견”(a bias for inclusivity)을 공리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편견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편견이며, 이들을 위한 사회와 이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는 공공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결국에는 차이와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고 연대와 연합의 정치체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공공신학의 가장 큰 과제이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을 담아 낼 수 있는 ‘구별된 연대’(differentiated solidarity)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며, 공론장의 주변부와 주변화된 이들을 기독교와 어떻게 연결해서 재구성할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이다. 결국 공공신학의 중요한 테마는 보편성과 특수성, 차이와 연대를 어떻게 적절하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다시 회귀한다.

4.2 해방신학에서 공공신학으로
80년대 후반부터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민주화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신학의 패러다임도 빠르게 변화되었다. 그동안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해방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과 서구 사회에 대한 대립과 투쟁을 자신들의 고유한 사명으로 인식하고, 투쟁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존의 해방신학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서 다른 모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남아공의 신학자 빌라-빈센치오(C. Villa-Vicencio)는 이러한 시대를 향한 새로운 신학적 메타포로 ‘재건 신학’(reconstruction theology)을 주장하는데, 이는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 투쟁과 갈등이 아닌, 새로운 인간성의 회복과 민족들의 재건을 돕고, 공동체적 연대와 개인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긍정의 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의 신학을 ‘포로기 이후의 신학’(post-exilic theology)이라고 명명한다. 포로기 이후의 신학은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이는 투쟁을 위한 기존의 연대를 해체시켜 새로운 의제를 상정한다.

이를 통해 재건 신학은 인종과 계급, 성적 차별과 같은 부당한 관계들을 종식시키고, 창조된 모든 것들을 포괄하며, 다양한 가치들을 새롭게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신학은 기존의 해방신학과는 전혀 다른 임무를 수행해야 하고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념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을 넘어 해방신학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여 공공의 신학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라질의 공공신학자 폰 시너(Rudolf von Sinner)는 그동안 해방신학의 성과를 스스로 반성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가장 대표적인 정치신학이라 알려졌던 해방신학이 실제로는 정치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즉, 그동안 해방신학자들은 효과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구체적인 행정제도의 개선과 입법제도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심지어 민주주의를 일찌감치 이룬 미국에서도 흑인신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웨스트(Cornel West)는 흑인신학자들이 공적인 삶, 특별히 경제 영역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으며, 자신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정치체계나 사회이론에 대해 무지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웨스트는 구체적인 생산시스템과 외교정책, 그리고 정책입안과 문화적 실행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예언자적 선포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은 이전의 사회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지배구조와 피지배 계층을 만들어 냈다. 따라서 오늘날 해방신학의 의제는 피지배 계층에 대한 새로운 분석, 여성들의 인권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개발로 인해 생태계 파괴와 같은 문제들로 재편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해방신학의 새로운 혁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페트렐라(Ivan Petrella)는 사회주의 몰락 이후 해방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명제의 재설정. 둘째, 일상생활과 시민사회와 같은 기본적인 범주에 대한 재규정. 셋째, 우상화된 자본주의에 대한 폭로가 그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해방신학자들은 공공신학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변혁의 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제3세계에서는 공공신학의 유입이 시기상조라는 주장도 있다. 제3세계 국가들이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도전과 변화 속에서 여전히 가난한 자들과 해방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존의 해방신학을 공공신학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직 성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펠름(Vuyani S. Vellem)은 민주화 이후에도 공공신학이 해방신학의 대체물로 기능해서는 안 되고 해방신학과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드 그루치(John W. de Gruchy) 역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행동신학의 과제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남아공에서는 해방신학과 공공신학이 서로 공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남아공은 세계화의 강한 영향 아래 다종교 국가로 변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이후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양극화라는 문제 앞에 놓여 있다. 그동안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으로 모든 영역을 새로운 식민 통치 아래 포섭함으로 경제적 민주화는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공공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국가의 기반을 세우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남아공 공공신학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점점 확장되고 있는 세계화의 도전 앞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자본의 외부를 만들지 않는다고 주장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모든 분야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계화의 도전 앞에 서 있는 신학의 위기는 이전의 해방신학자들이 문제로 삼았던 속박과 종속의 문제를 더욱 첨예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전에는 이념적 갈등과 정치적 종속관계로부터 시작된 해방으로의 부름이 이제는 경제적 속박과 이에 따른 문화적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해방신학이라는 트랜드는 구시대의 유물에 불구하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반대로 이 시대에 해방신학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공공신학은 다시금 해방의 주체와 대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재정위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분명 과거의 해방신학과는 다른 목적과 과제를 제시하고, 기존의 공공신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도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5. 결론: 누구를 위한 어떤 공공신학인가?

지금까지 필자는 공공신학은 어떠어떠한 것이라는 규범적인 접근을 지양하고, 스미트의 연구에 힘입어 그 발생학적인 기원을 추적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해 보았다. 공공신학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대략적인 공통점들을 찾아보고, 그 장단점을 역시 제시해 보았다. 공공신학을 규정하는 이론적이고 형식적인 틀을 공공신학의 필요조건이라 부르고, 그 안에 담겨질 구체적인 내용과 목적을 공공신학의 충분조건이라 제안해 보았다. 그리고 그 충분조건은 공공신학을 전유하는 각 개별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역사적 전통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날 공공신학을 둘러싼 논쟁점 두 가지를 소개했는데, 그 중 하나는 공공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신학과 공공신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독립된 논쟁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주제이고, 더 나아가 공공신학을 이해하는 두 개의 큰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고 복지체제와 경제민주화를 고민하는 북미와 유럽에서의 공공신학은 당연히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에서의 공공신학과 다른 고민과 문제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는 스트레인(Charles Strain)이 말한 것처럼 다양한 공공신학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마치 각 사람의 개성을 설명하려는 것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어떻게 하면 공공신학을 보다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여성 정치철학자 프레이져(Nancy Frazer)가 제시한 삼차원적 정의론(theory of justice)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녀는 그동안 정치철학자들이 정의의 내용에 대해서만 몰두했기 때문에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논쟁해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어떤 사람들 사이의 평등인가?”라는 문제로 전이 되었는데, 이는 정의를 결정하고 수행하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의의 주체를 인과적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자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의의 ‘당사자’를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제도와 규범적인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 결국 그녀는 기존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초국적 공론장’을 맞이해 “무엇에 관하여 누가 참여하는지”가 오늘날 정의론의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론장의 정당성은 다음의 두 가지 특징, 즉 포용성(inclusiveness)의 정도와 그것이 동등한 참여(participatory parity)를 실현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포용성의 조건이 공적인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승인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는 반면에, 동등성 조건은 대화 참여자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오늘날 공공신학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도 프레이져가 제시한 틀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서 그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본다면, 공공신학은 ‘신앙 공동체의 모든 당사자들이’ (누가)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어떻게) ‘공공선을 도모하는 것’ (무엇을)이라 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 투쟁이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다양성을 수용하고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논의를 진행하는 대화 당사자가 출신이나 조건에 의해 배제되지 않고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호혜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공신학의 역할과 과제는 다름 아닌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시켜 주고 이들을 위한 자리와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닐까? 희생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적인 자리를 만들어 주고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 주는 것, 그리고 희생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과 함께 울어 주는 것, 이런 작은 행동과 몸짓이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신학이 아닐까 한다.

 

[관련기사]

예장뉴스 보도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3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4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5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6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7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쓰레기 시멘트 '맞짱' 뜨던 목사, 이렇게 산다
10
본 교단 채영남 총회장 행보 언론들 주목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발행인 : 유재무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덕정 17길-10   |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주사무소 : 상동발행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왕보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