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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사도, 이승만 목사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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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1.17  10: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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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교수가 회고 하는 '화해의 사도, 이승만 목사'

   

어제 한동대학교의 류대영 교수로부터 이승만(1931-2015) 목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치몬드에서 자녀들이 있는 애틀랜타로 옮겼으며 투병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정정하시던 분이 이렇게 급히 돌아가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흑백차별 철폐와 남북 화해를 위해 애쓴 그의 공적은 미국 기독교사와 남북 통일운동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평양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해방 직후 평안공업학교의 학생간부로서 시위를 주동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고 그 후 진로를 모색하던 중 평양 성화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박대선, 김용옥, 김학수 교수 등을 만나 뒷날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는 6.25전란 중에 어머님과 네 여동생을 남겨둔 채 남동생(이승규 장로) 및 성화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남하했다. 피난생활에서 생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이 피난온 성화신학교 동지 및 동생과 함께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의 아버지 이태석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식에 눈뜬 분이었다. 경신학교 학생 때에 3.1운동에 참여했고 그 후 평양 숭실학교에 편입, ‘학생의열단’에 참여,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일본 중앙대학과 경성성서학원을 마친 후 목회자로 나섰지만 늘 일제 감시하에 자유롭지 못했다. 평안공업학교 퇴학 후 그는 숭실전문에 다녔던 아버지가 남긴 영어책과 사전을 가지고, 당시 소련어 외에는 궁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북한에서 독학으로 영어공부에 몰두했다. 생존 수단으로 입대했던 해병대에서는 군사교재 번역요원으로 활동했고, 휴전 후에는 반년간 미 군사학교에 유학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좋은 계기가 되어 제대 후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성화신학교에 적을 둔 적이 있는 그는 해병대에 근무하면서 부산의 감리교신학교 및 서울의 중앙신학교에서 주경야독으로 공부했다. 미국 유학에서 켄터키 루이빌 신학교를 마친 후에는 <루이빌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의 담임 목사 몇 <루이빌 신학교> 교목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예일대학 신학부(석사)를 거쳐 시카고신학교에서 종교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뒷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와 아시아지역 총무 등을 거쳐 미국 NCC회장과 미국 (남북연합)장로교회 총회장을 거치는 동 동양인으로서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직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그로 하여금 <화해의 인물>로 되게 한 것은 루이빌에서의 활동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이승만은 루이빌에서 목회 및 교목 활동을 하는 동안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화해운동에 깊이 공감하게 되어 그의 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때까지 대학에서조차 흑백차별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았는데, 흑인학생들을 도우면서 그는 기독교 복음이 강조하는, 소외되고 학대받는 사람에 연민하는 진리에 행동으로 응답하게 되었다. 그 무렵 흑인인권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루이빌에 와서 힘있게 외쳤다. “용서는 얻어맞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화해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복을 할지 용서를 해 줄지는 가해자의 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가해자가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불신과 의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만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내놓고 하는 인권운동은 다만 억압을 당하는 흑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일 뿐아니라 억압자인 백인들도 함께 해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외침에 이승만은 인생관을 바꾸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 순간이 내 삶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 무렵까지 응어리진 복수심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피난할 때나 해병대에 복무하던 시절은 물론이고 미국에 유학가서도 한 동안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품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수 없어 가슴이 터지도록 원망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가 순교하던 1950년 10월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그는 말한다. “며칠을 실성한 사람처럼 들로 산으로 다니며 시체 구덩이마다 뒤지던 어머니가 결국 50여구가 뒤섞인 시체 가운데서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한 날 ‘어떻게든 복수하겠다. 이렇게 살인한 자들을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이를 갈며 뜬 눈으로 지새던 밤들……어머니와 동생들 때문에 차마 내지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더 안으로 박혀 들어갔던 억울함과 분노는 ‘과연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응어리졌다.”(이승만 목사 자서전, 『기도 속에서 만나자』28쪽)

이렇게 완고했던 그가 뒷날 ‘화해꾼’에게 주는 ‘톰슨상’을 받게 된 것은 마르틴 루터 깅 목사를 통해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화해를 지기 속에 체화(體化)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동양인으로서 미국 NCC의 회장이 되고 미국장로교 212차 총회장이 된 것도 이같은 화해자로서의 인품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남북화해에 앞장 섰을 뿐만 아니라 카터의 북한 방문 등 북미관계를 개선시키는 데에도 막후의 숨은 역할을 감당했다.

필자가 이 목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북장로교 선교부 아시아담당 총무로 있을 때다. 1980년 신군부는 대학에서 80여명의 교수들을 4년간 내쫓았다. 그 때 이 목사는 남장로교의 김인식 목사와 함께 미국교회를 설득하여 이들 해직교수들을 도우는 데에 앞장 섰다. 필자도 그 도움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한국교회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프린스턴 신학교에 갔다. 그 때 이 목사는 뉴욕에서 몇 차례 내려와 위로의 말과 함께 생활비도 걱정해 주었다. 그는 또 필자가 뉴욕 등 여러 지역에 자료수집을 위해 순방할 때 해당 기관에 편의를 부탁해 주기도 했다. 복직 후 1991년 뉴욕 스토니포인트에서 개최된 남북기독학자회에 참석했을 때, 그 폐막을 앞둔 저녁, 북한에서 막 돌아왔다면서 남북대표들과 합류, 한마당을 이루었던 추억은 화해의 사도로서 그가 얼마나 분주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늘 만면에 웃음을 띄고 양보하기를 좋아했던 분, 갈등과 억울함을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사랑과 평화로 승화시킨 목회자, 이 땅에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이승만 목사, 그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축복받을 것으로 믿으며, 사모님과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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