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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바닥에서 읽는 한국교회사순천노회 대방교회(1908-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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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4.23  15: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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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 바닥에서 읽는 한국교회사

순천노회 대방교회(1908-2015) / 주소: 전남 광양시 옥룡면 신대로 708, 담임목사 정은채

   
100주년 기념 교회당

100년의 교회 역사 간단하지 않다.
일본 오사카에는 100년 이상 된 가게들의 모임이 있는 데 이 점포(店鋪) 들을 노포(老鋪)라고 한다. 이들은 한 지역에서 한 가지 업종을 고집하며 100년 이상을 지켜온 자긍심과 존재감으로 고객들의 대물린 사랑을 기억한다. 가게를 상징하는 문장이나 상호가 새겨진 빛바랜 낡은 노렌(가게 정문 위에 막대 위에 걸어 놓은 천)은 그 점포를 상징한다. 기독교도 한국보다 먼저 들어갔으니 100년을 넘는 교회가 많다.

한국교회 선교 130년을 지나면서 100년을 지나는 교회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귀한 일이다. 100년이란 세월은 간단하지 않다. 그런 교회들이 개교회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자료와 의미들을 정리하고 있는 줄 안다. 서울에만 해도 새문안교회나 연동교회, 안동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가 있다. 전국의 대도시에도 긴 역사를 간직한 유수한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교회들은 하나 같이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의 중심 즉 관공서나 사람들이 많이 살거나 왕래하던 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지방으로 가면 꼭 그렇지 않은 곳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번에 찾은 광양의 大芳교회가 그렇다. 光陽(햊빛고을)으로도 불리는 이곳의 옛 지명은 馬老(밝은 고을), 또는 暿陽(더운 고을)이었는데 서기 740년 이후 광양으로 약 1천 60년 이상 불려왔다. 지금 광양하면 제철소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좋은 해와 공기, 물이 유명하고 농사와 해초양식 등이 유명했던 곳이다.

역사적인 인물로는 고산 윤선도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백운산 자락 추동마을에 집터가 있다. 어사 박문수는 "망포"라는 그의 시에서 "백성이 살기 좋은 곳으로는 조선에서 전라도요 전라도에서 광양이요 광양에서는 성황이라“고 하였다. 중앙 정부의 가렴주구와 세도정치에 농민들이 저항한 1869년대 1차, 2차 광양농민봉기도 있었는데 사회적 모순에 저항한 민중들의 역동성의 저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00주년 기념 조형물                                          역대 교역자와 출신 목사, 장로들

순천, 광양의 기독교 선교
한국선교역사 초기인 1892년 미국남장로교회는 호남과 순천을 중심으로 선교했다. 1891년 언더우드가 안식년으로 귀국, 내쉬빌의 한 집회에서 조선 선교를 호소한 결과 우여곡절을 거쳐 젠킨 등 6명의 선교사가 파송된다. 당시 순천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스크랜턴 목사는 한국선교에 남다른 공이 큰 언더우드를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호남을 거점으로 하여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에 선교 거점을 정하고 학교 병원 교회 등을 세워 나갔다.

광양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는 웅동교회(1908) 인데 이 교회는 한국인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다. 그것도 기가 막힌 역사를 갖고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정부 사주를 받은 당시 공사 삼포(미우라)가 낭인들을 시켜 일으켰는데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이때 한태원이라는 하급관리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도주하는 낭인들을 인천까지 쫓아가 강화도의 양곡보관소에 불을 지르고 그대로 도보로 도망한 곳이 바로 웅동마을이라는 곳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마흔의 동갑내기 박의원, 서병준, 장기용이라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태원을 추적하던 한 관리가 이 젊은이들이 술과 노름으로 허송세월을 하는 것을 보고 한심하다 하여 광주 양림동에 가서 “야소교인들을 만나보라”고 전한다. 이들은 큰 호기심으로 사흘 길을 걸아서 광주에 가서 조상학과 오웬 선교사를 만났고 이들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아 고향 웅동으로 와서 모임을 시작한 것이 바로 웅동교회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진취적인 마음과 신학문에 의욕을 가진 이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자생적으로 설립된 귀한 교회다.

   
 

이를 시발로 하여 마을에 전도의 문이 열렸고 인근의 신황리에도 1907년 예배처소가 분가 되었는데 이것이 신황교회이다. 그 후 1910년 한태원은 서리집사가 되었고 박희원의 아들이 바로 순천, 광양 기독교 역사의 큰 어른 고 박정식 목사(PCK  2000년 85대 총회장)이다. 그 후 광양, 순천의 첫 교회였던 웅동교회의 최초 자리에 2008년 광양 기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그 후 이 교회들은 인근 마을에 학당을 세우고 이것이 학원이 되어 인근의 청소년들이 순천의 명문 기독교 학교인 매산학교로 편입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광양이라는 조용한 시골 바닷가 마을이 크게 변모하고 대도시가 된 것은 산업화과정에서 제철 공장이 준공된 이후다. 광양 제철소는 연간 1,800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곳이다. 1992년에 준공된 포스코에는 6.400명의 종업원과 15년 이상 꺼지지 않고 타는 용광로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하여 바닷가를 주변으로 배후에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고 대형교회들이 줄줄이 세워졌다. 광양교회, 광양제일교회, 광양중앙교회 등 지방에 있는 교회라고는 보기 힘든 큰 교회들의 세워졌다.

   
현재, 대방교회 주보

광양 대방교회의 설립
1908년 백운산 자락의  대방리에 25세의 서한옥 씨(현재 손자들이 출석)는 '야소교' 진리를 받은 후 혼자서 그 먼길의 진상면 신황리교회로 출석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형 서한봉(광양 향교 유림)은 동생이 야소교에 젖어드는 것을 걱정하며 반대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신황리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박희원과 한태원의 간곡한 권유로 회심하였고 그의 친구 정기영도 전도하여 매 주일 머슴에게 점심을 지우고 2년 동안 출석한다. 신도가 늘자 부락의 한문 서당으로 사용하던 용곡리 초가를 매입하여 대방동교회를 설립하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초대 장로가 된다.

대방교회는 1908년-1918년까지는 교역자 없이 순회 목사나 조사들에 의하여 교회가 자체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증언된다. 그 후 1918년 4월에 선재련 조사가 1대 교역자로 부임한 이후 지난 2003년 3월부터 현재의 정은채 목사(20대 교역자)가 목회하고 있다. 그리고 창립 후 여섯 번째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100주년 조형물과 기념비를 세웠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로 받은 은혜와 사랑을 갚기 위하여 교회 설립이 포화상태인 국내에서 눈을 돌려 필리핀에 100주년 기념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웅동, 신학, 대방교회들은 백운산 자락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이 산이 주는 천혜의 혜택에 감사하면서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그리고 백운산과 그 계곡은 이들 삶의 젓줄기이다. 그 산의 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산이 주는 재목, 각종의 열매와 산채, 버섯 등이 조상들을 먹여 살렸다. 옥룡으로 불리는 국도변에 들어선 이들 교회당의 위용도 그렇지만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자력으로 모두 이런 교회들을 세웠다는 것이 대단하다.

당시 읍내도 아니고 교통의 요충지도 아닌 산골 마을에서 신앙심을 가진 이들이 복음을 받아 들였고 자녀들을 길러 성장시키며 함께 교회를 세워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귀한 사실들이 교회역사 연구에서 과소평가된 측면도 많이 있다고 보겠다. 대방교회는 그후 답곡기도처, 동곡기도처, 추산기도처 등을 세워 교회로 그리고 옥룡중앙교회를 분립하였다. 이 교회에서 나온 교계의 지도자만도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서계현, 정봉규(영등포 노회), 채규현, 서정우,  김상우 목사 등이 있다. 또 평신도 지도자들로 많이 나왔는데 대방교회 현재 당회원으로는 이병원, 서정화, 이춘삼, 서인현, 문양호, 이삼식 장로가 있다.

   
100주년 감사 행사 순서지

당회원들과의 대화를 하면서 100년 교회의 자긍심도 느끼고 순박하고 열정적인 신앙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맹호부대로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한 장로님은 얼마나 농사일을 많이 했던지 손이 다 닳았다. 그 손을 보니 참으로 한국교회의 바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그 장로님에게 물었다. "장로님,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 아세요?" "아, 알지요." "그러면 그 교회의 장로가 자살을 한 얘기를 들어보셨나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요, 허어! 장로가 자살을 해서는 안 되지요. 어떻게 무엇을 가르쳤길래 장로가 자살을 할꼬? 장로는 누가 죽이면 죽을 지언정.....자살을 해서는 안 되지요." 하여 내가 대답했다. "오죽했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요?" 그래도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절대로 자살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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