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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죽 강신명 목사 30주기 추모예배강신명 목사와 서울장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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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21  2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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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竹 강신명 목사 30주기 새문안교회에서 열려

   
(앞줄 좌로 부터) 강석공, 김창근,박종순,정영택,이수영,안주훈, 김종희, 홍성현 목사

새문안교회에서 25년간 목회하시고 은퇴한 후 모교인 숭전(숭실)대학의 이사장(1981-1982)과 총장(982-1985)을 재임 중 1985년 6월 22일에 소천하신 강신명 목사의 30주기 추모예배가 생전에 시무하시던 새문안교회에서 교우들과 교계인사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6월 21일(주) 오후 5시에 열렸다.

새문안교회 담임 이수영 목사의 인도와 안주훈 목사(서울장신대 총장)의 기도, 총회장 정영택 목사가 빌 2:5-8 을 본문으로 “우리는 누구, 무엇이어야 하나? ”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정 총회장은 개인적으로 강신명 목사님과의 인연은 없으나 어려서 피어선 성서학원에 강습을 갔다가 수요예배에 참석하면서 머리서 뵌 적이 있다고 하면서  강 목사님은 교단의 전 총회장으로 교회와 교계, 기독교 교육 분야에서 걸출한 지도자이셨다고 전했다. 

특히 고인의 마지막 설교제목을 인용하면서, “고인께서 지금 여기 다시 오셔서 설교 하신다면 무엇을 말씀하실까? 돈 많이 벌어라, 출세해라, 높아져라, 명예을 얻어라... 이처럼 목회자들이 잘못된 복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한다. 예수님의 복은 마태 5장의 8복인데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존재의 문제다. 제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이며 그 복은 천국의 주인이다. 땅에서 잘 되고 높아지고 복 받고 권세 얻고 대박 터뜨리는 것을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누리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존재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교계의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 되니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나도 개혁을 이야기하던 사람인데 이제는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도자가 되면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라고 전했다.

추모사는 현 숭실대 이사장인 박종순 목사(전 총회장)가 강 목사님께서 교회와 연합사업 특히 숭실대의 발전에 기여 하신 것을 중심으로 추모하였다. 이어 유가족을 대표하여 막내 자제인 강석공 목사(광야교회)가 감사의 인사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인도자의 소개로 강 목사님의 가족들을 소개하고 인사한 후 서울노회장 김창근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족적
고 강신명 목사는 1909년 경북 영풍면 천본리에서 부친 강병주 목사와 최영주 사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후 1934년에 평양 숭실학교, 1938년에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시고 1940년부터 동경신학대학, 프린스턴 대학원, 스털링대학 명예박사를 받으셨다(1964년).

경력으로는 1947년 영락교회 동사목사, 1955년에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1962-85년까지 서울장로회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셨다. 1963년에는 본 교단의 총회장을 역임하셨고 1977-85년 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 회장과 기독교지도자 협의회 회장을 지내셨다. 고인께서는 이처럼 온 생애를 걸쳐 목회와 한국 기독교 연합사업 그리고 기독교 교육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언더우드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로 한국의 어머니 교회였다. 이 교회를 세운 언더우드의 후손들이 당회원으로 대를 이어 봉사하고 있으며 192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화(NCCK)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설립예배가 새문안교회에서 있었다. 그때 장로교회에서 19명 남북감리교회에서 17명 그리고 4개의 장로교회 선교부에서 17명 53명이 참석하였는데 최대회장에 당시 새문안교회 담임목사인 차재명이 회장에 피선되었다. 이후부터 새문안교회는 에큐메니칼운동의 중심이 된다.

강 목사는 평소 조용하시고 검소하시며 교권에 대한 집착과 활동이 없는 분이었다. 은퇴 후 숭실대학 총장으로 청함을 받고도 “모교가 아니라면 가고 싶지 않다” 는 말을 하셨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직 목양에 일념을 보이신 분이다. 소천 후 유품으로 남은 목회수첩에는 1954년부터 1982년까지 본인이 주례한 727쌍의 부부들 이름과 장소가 기록되어 있었다. 모든 어린이들의 이름까지 불러주셨고 특히 많은 동요를 작곡하여 남기시기도 했다.

또 하나는 1950년대 이후 기장과 예장,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 일어나는 데 그때부터 교회연합에 대한 일념을 가지고 교회의 일치운동에 혼신의 노력을 하신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도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당회의 공개화와 청년회의 방청도 새문안교회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프린스턴 유학시절에는 매카이라는 학자에게 사사 받았는데 그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후 합동과 분열의 원인이었던 WCC 재가입을 서울노회에서 헌의하는 데 한경직 목사와 김형태 목사(노회 서기) 홍성현 목사와 수송교회(김용진) 당회가 헌의한 것을 총회에 상정하여 통과시키게 한다. 그후 1970년대 군사정권의 연장 시도인 유신시대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권력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균형을 지켜갔다. 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새문안 교회 대학부실에서 추모기도회를 할때 조용히 들어와 엎드려 기도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는 청년, 학생들도 있다는 증언도 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후 열린 장례식에서의 기도와 말씀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둔다. 선을 심으면 선을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둔다” 라는 요지의 말씀은 지금도 목회자들이 예식에서 어떤 자세를 갖아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와 강신명 목사
서울장신은 1982년 이전까지만 해도 야간으로 수업을 하였는데 당시에 주경야독한 만학도들이 지금은 한국교회를 이끄는  인물들이 되었다. 지금은 서울장신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어 경기도 광주시에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데, 강신명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강신명 기념관'이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울장신은 1954년 4월, 교단 제 39회 총회에서 ‘총회 야간 신학교’ 설립을 결의한대로 그해 7월에 서울시 중구 동자동의 동성교회당에서 개교하여, 초대 교장에 김규당 목사와 이사장에 김윤찬 목사가 각각 취임하여 출발했다.

그 후 1962년 서울시 중구 도동의 한성교회당으로 이전하는 한편 1962년 제 2대 교장으로 강신명 목사가 취임한 후 1963년에는 서울장로회신학교로 개명하고 1969년에는 새문안교회당으로 다시 교사를 이전하여 신학과와 성서과를 개설하였다. 또 1980년 이후에는 교회음악과도 개설한다. 설립 당시 학훈은 지금도 이어지는 것으로 강신명 목사의 좌우명인 “한알의 밀” 인데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을 모토로 한국교회와 양들을 위하여 주님처럼 희생하는 목양을 독려해 오고 있다.

새문안교회 교육관을 교사로 사용하고 있던 신학교에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자 신설동의 동인교회 건물을 신축하고 이사를 하게 된다.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건물의 소유주는 누구인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강신명 목사의 자녀들이 현재 동인교회의 장로로 있는 것으로 보아 강 목사님과 관계는 있어 보인다. 이전후 수도권 교회들의 비약적인 성장과장로회신학대학의 정원으로는 부족한 목회자 수급을 위하여 1982년(27기) 부터 주간반이 생겼는데 한 때 신학과, 성서과, 교회음악과까지 합치면 주 야간 약 1,5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보인다.

입학생들이 늘어나고 학교도 법에 맞게 현대화 정규화할 필요가 있어 1982년에는 광명학원이라는 법인을 만들었고 1984년에는 문교부로부터 각종학교(4년제)인가를 받았으며, 1985년에는 제 3대 교장으로 곽선희 목사가 취임을 하면서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에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고 주간 신학과를 시작한다.

그후 1997년에는 정식대학으로 인가를 받아 학교의 이전을 완료한다. 2003년에는 학부 신학과 외에도 교회음악과, 복지학과 3개 학과와 총회 목회자 위탁교육기관으로 신대원(3년제)이 개설 된다. 그리고 학교의 설립자와 다름 없는 강신명 목사의 가족들은 학교의 경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고 강석중집사와 강성열 교수, 사위 권영후 장로 등).

사실 강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큰 어른으로 그 그늘 밑에서 통합측의 진보적인 목회자와 신학자들인 황광은, 김종희, 홍성현, 김용복, 서경석, 권진관, 윤경노 박사 등이 나왔다. 새문안교회에서 서울장신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은 강 목사님의 관심과 새문안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에 있었다. 그리고 은퇴를 하시면서 당시 강남에서 소망교회를 개척하여 세운 곽선희 목사를 교장으로 영입한다. 곽선희 목사도 미국 프린스톤과 훌러에서 공부한 한 시대 최고의 설교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후의 4대 학장으로 숭실대에서 은퇴한 박근용 목사가 취임하여 상근하였고, 5대는 영남신학대 학장을 지낸 이용원 교수가 1998년에 부임하여 대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초대 총장을 지낸다. 그리고 제 2대 총장으로는 연세대를 은퇴한 민경배 교수가 그리고 제 3대 총장으로는 2006년 대전신학교 총장을 지내고 광주에서 목회를 하던 문성모 목사를 총장으로 초빙하여 광주의 교사를 증축하고 대학원도 설립하는 등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다.

2008년에는 학교 성장에 공이 큰 곽선희 목사를 명예 총장으로 추대하고 주성훈 목사를 이사장으로 영입하여 학교 설립 50주년 기념관을 건축하고 박사 과정도 신설하게 된다. 그리고 2009년에는 서울장신 역사에 족적이 있는 강신명 목사 100주기념 행사를 학교가 주관하여 열게 된다. 문성모 전 총장의 학교 정체성 찾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공이었다.

또 전국의 총회 직영신학교 졸업생들을 하나로 묶어 '신총련' 이라는 조직을 통하여 그간 교단 총회의 교권이 이북에서 영남 호남의 중부로 권력화 된 것을 넘어 전국적 파워러 만들어 낸 고시영 목사가 이사장이 되면서 총동문회는 크게 활성화 되었고 2010년 문성모 총장이 연임하여 4대 총장이 된다. 그리고 지난 2014년에는 동문 총장으로 최초로 중량제일교회에서 목회하던 안주훈 목사가 취임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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