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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우리도 모르게 첫 걸음을 뗄 때최근 장신대 논쟁을 지켜보며
이승훈 목사  |  oikos78@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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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12  10: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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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 우리도 모르게 첫 걸음을 뗄 때

최근 장신대 논쟁을 지켜보며 (이승훈 선교사)

   
* 장신대 정문에 와서 교회사 교수들을 규탄한 단체들의 연합체(통합측 목사는 단 한 명)

장로회신학대학교에 대한 염려와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나의 교회(교단)와 역사신학교수분들의 국정화반대성명에 관한 글이다. 이 글은 본의 아니게 상당히 길어졌다. 장신대에 무관한 분들이 아닐지라도 혹 읽어내려면 인내가 필요한 글이 될 수 있겠다. 지나치면 될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서두삼아 이 시대의 아픔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먼저 어린시절이야기이다. 내가 비교적 신학적 지평을 가능한 넓히려 하는 이유, 혹은 신학적 이견에 대해서 관대하게 보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은 것은 내 성격 탓도 있을 수 있겠으나 어린 시절 부친의 사랑방에 모였던 그 당시 목회자들의 대화에서 자주 들었던 보수.진보논쟁을 귀동냥했던 기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학교부터 서울에 거주하기 전, 부산에서였으니까 초등학교때였다. 그 시절, 부친의 활달하신 성품 탓이었는지 우리 집에 목회자들이 모여 대화하는 중에 "칼", "에이" 등등의 말이 들릴 때면, 칼이 무엇인가? 에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었는데 자주 듣고 보니 칼은 에큐메니칼, 에이는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였다. "칼"과 "에이"에 강세가 들어갔던 것이다.

정통주의, 신정통주의, 신사참배, 신의주 제 1, 2, 3교회, 평양, 맥킨타이어, 빌리그래함 등의 이름도 그때 들었다. 해방 전 후, 평안북도 압록강 인근의 신의주에서 목회하셨던 부친께서는 좌우가 대립했던 그 당시 이북의 상황에 대해서도 민감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월남이후에도 그러하셨다.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서로 오가는 대화에서 범람하는 용어들은 나의 호기심을 북돋았고 그것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학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신학논쟁과 교회분열, 선교사들이 남긴 유산 중 극히 부정적인 미국신학계의 상황의 불똥이 한국까지 튀어 교단의 분열을 겪는 추태 등을 보면서 나는 애초에 교회에 몸담을 것을 피했고, 담더라도 신학적논쟁이 인간을 겨냥하는 싸움이 되는 상황이나 교회정치의 주변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물론 정치는 없을 수 없으니 바른 교회정치도 해야 하고 참으로 바르게 정치하려는 교단의 인사도 있어야 할 것이다. 신학도 올바른 신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신학적 담론거리에 대한 바른 논쟁까지도 악의 발화점이 되는 것을 제법 보아왔기 때문이다.

졸업 한참 후 들었던 소식이었지만 예전의 모교에서 한 젊은 신학교수가 학장을 향하여 "당신은 자유주의자이다"라고 딱지를 붙일 만큼 동료교수에게까지도 가리지않고 공격하는 극보수신학자도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나마 행복했던 신학교시절을 보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당시 보수신학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몰지각한 신학싸움꾼은 스승들 중에 없었다고 기억되고 존경의 염을 드릴 수 있는 분들이 우리 신학교 시절이었으니 그러하고 그분들이 내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몇 분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스승님들 모두가 건강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언제 어디나 있다. 자기확신을 넘어 자기신학맹신으로 노년의 학자들을 향하여까지 붉은 딱지를 붙여대는 확신의 망령들이다. 신학으로 인간을 공격하고 저주하고 조롱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스스로를 진리의 전사로 자리매김하는 사람들이 늘 있지 아니한가.

2년 전 "칼"의 세계적 기구인 WCC부산 모임에 참여하고 서울로 잠시 올라와서 가깝게 교제하던 어떤 중년의 기독교인을 만났었는데 나의 귀국목적을 묻기에 WCC 참여라고 하였더니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후로 아예 나에게 연락조차 않고 있다. 그에게 신앙인의 WCC참여는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증표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칼"모임에 참여하였다가 "칼"을 맞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대개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의외로 선한 인상에 착해보이고 자기신앙에 올인하는 분들이다. 그렇게 자신의 신앙이나 신학적 확신을 지렛대로 하여 상대죽이기와 마녀사냥과 교회분열을 일삼는 이들은 성도들이건, 신학자이건, 목회자 직임에 있는 분들이건 대개 개인적으로는 겉보기에 문제없어보이는 선량한 분들이 태반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선하고 신실해 보이는 이들, 철두철미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악한 싸움에 적극적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본다.

그후 대학입학전에 끌렸던 쉐퍼박사의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를 읽고 기독교에로의 지적인 회심을 경험하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내 곁에는 1970년 12월 초판의 그 책이 책장 한 구석에 누렇게 색이 바랜 채 놓여있다. 그런데 쉐퍼박사의 많은 저술 중에서도 "20세기말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표지"라는 책이 특히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그의 경험, 교회분열이전에 신학분열이 그 얼마나 악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로의 분열, 또 다시 훼이스 신학교 등등과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새 교단 창설은 언제나 신학적논쟁으로 상대방을 타격했던 신학자들의 논쟁, 아니 전쟁과 전투로 인한 것이었다. 순전한 신학에 대한 열정은 순기능을 때로는 삼켜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같은 언약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타격을 입혔으며 그 해결되지 않는 투쟁의 와중에 휩쓸렀던 프란시스 쉐퍼의 쓰라린 체험과 고뇌가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런지 나로서는 한참동안이나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데 주저하였다. 그러나 어떤 거역하기 어려운 힘에 항복하여 다시 교회문턱을 넘어서게 되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부친의 이야기 속에서 여태까지 마음에 남아있는 용어들 중에서 강하게 기억되는 한 마디 말은 "악"이라는 말이었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악하다"는 표현을 쓰셨다. 교회내의 이야기이고 범기독교의 범주내의 이야기였다. 즉 선해보이는 X가 악하지 않아야 정상인 것 같은데 예상외로 악해보이는 Y보다 더 악하다는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후의 나의 교회생활에서 자주 잊혀지지 않았던 질문은 어떻게 해서 "선해 보이는 이들이 악행을 범할 수 있느냐", 아니 악행을 범하되 "전혀 꺼리낌없이 악을 행하느냐"하는 문제였다. 적용하자면 어떻게 정통을 표방하는 신앙인들이 그렇게 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이후로 "악"의 문제를 연구하게 된 주된 동기는 그같은 문제로 한동안 교회를 떠나면서였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주 어려운 풀이가 아닌 듯 하다. "악"의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악행은 선해보이는 자든, 악해보이는 자든 자기정당화를 통해서 시작되고 강화된다. 그리고 자기정당화에 빠진 자는 그가 비록 악인이 아닐지라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악의 첫 발걸음을 주저없이 뗀다.

악의 얼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그 폭력성에 앞선 자기정당화이다. 심지어 "선"의 동기조차 악행이 되기도 한다. 악이나 선이나 악행을 정당화할 때는 자기정당화라는 가면을 쓴다. 가면인줄도 모르면서 그렇게 한다. 자신의 정당화에 확신이 더해진다. 그리고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해 본 적도 없다. 자신의 확신은 무오하다. 이론적으로나 감정의 상태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 악 중의 악, 죄중의 죄가 있는데 이는 악행을 행하려는 자가 악행의 대상과 전혀 무관한 자로 하여금 자신이 악을 행할 표적의 대상에 대하여 악을 주저없이 행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은 코를 풀기 위해서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무고한 타인으로 하여금 그 악행을 정당화하여 짓게끔 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가 죄라는 의식을 가지고 짓는 악은 회개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런데 자신의 죄가 죄가 아니라 선이라는 정당화의 기틀위에서 짓는 무의식적인 참여의 죄악은 그 무고하고 무관한 자가 악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가책이 되지 않는다.

이 제 3자는 악행을 행하거나 당하는 양자 사이에 아무 관련도 없다. 그런데 이 3자가 악을 행한다. 스스로도 죄악이라는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이렇게 무관한 제 3자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악을 성경은 악행 중의 악행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같은 죄를 짓게 하는 자는 그 스스로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리우고 바다깊음속의 더 깊음에 빠져버리우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이다.

이같은 자기정당화는 때로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긍정화된다. "신념"은 긍정적 이미지를 지닌 용어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 신념이라는 말의 이면에는 악도 함께 드리워져 있다. "신념"이란 인격의 아주 차원높은 결정체이기도 하지만 악마의 얼굴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최고책임자가 "신념의 정치인"이라는 말은 그 내면의 신념의 실체가 무엇인지 기대보다는 두려울만한 실상을 늘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이의 신념도 악행의 발화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주 활활 타오른다.

-여기에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이같은 악행의 위험에 빠져 깊이 들어갈 것 같은 한 성서신학 교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내가 속한 교회의 신학교의 역사신학자 일곱분이 국정화에 대한 반대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같은 학교의 성서신학교수 한분이 이 성명에 대해서 비판문을 게시하였다.

근 한 달 전, 페북친구의 한분이 그 글을 올렸기에 주마간산식으로 일독해 보고서는 국정화염원의 제단에 돌 하나 더 얹는 사람이 추가된 모양이다 했다. 자기확신에 가득한 자의 자가발전적논리를 과장하여 전개하는 글처럼 보였다.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글쓰기는 계속되고 있으며 심지어 강연을 한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환호와 찬사를 외치는 사람들이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3일전에 한 교회에서 한 강연에서 행한 그의 행태를 보고 이 사람이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이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행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가 위에서 언급한 악에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다.

이 악의 가능성을 그에게서 발견하기 전에는 우선 역사학자들의 성명과 그에 맹렬한 비판을 감행한 그 교수의 글에서 과거의 이 나라의 광기와 더불어 과거 내 부친의 시대의 신학과 교회의 이야기가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현실을 다시 만난 우울함이 내마음을 짓눌렀다. 마음에 폭력을 가하지 말라는 어느 정당의 책임자의 발언이 나의 내면을 표현해 주었다.

이 "성서신학" 교수가 국정화 문제로 자신의 도발을 시작하였지만 현 권력행태는 국정화로만 상징되지 않는 폭력적억압을 내면에 깊이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예민하여 홀로 느끼는 고통이 아니다. 이 해괴한 권력의 현재진행적인, 거센 발길질은 헛발질이 아니다. 작심하고 프로그램화되어 의도적으로 내밟는 발길이다. 군홧발이 아닐 뿐 짓밟고 그 남겨 연이어진 긴 자국들로 볼 때 내가 보기에는 거의 군홧발과 유사하다.

이같은 현 권력 행태는 삼척동자라도 눈에 보일 터인데 이상하고 괴이하다. 세월호에서의, 그리고 그 유가족들에 대한 권력의 행태, 예술검열, 노동탄압, 역사검열 등등, 단지 국정화문제만이 아니다. 이 모두가 거의 사상검열과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총체적인 것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동료교수들의 성명에 심하게 태클을 걸고있는 이분에게 신앙은 무엇이고 왜 신학을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그에게 있어서 신약신학은 무엇이며 바울신학은 무엇일까.

아마 이분을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현 정부의 예술검열과 역사검열같은 수순이 인간검증, 궁극적으로 사상검열까지 갈 것이라는 염려는 기우라고, 그리고 혹 그렇게 될지라도 자신들과 교회는 제외라고 아주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술을 검열하는 정부가 신학을 검열하지 않겠으며 설교를 검열하지 않을까? 순진한 생각이다. 한때 아모스의 정의를 인용하여도 검열을 했던 그 시대가 오늘날 재현되거나 그렇게까지는 설마 될 리가 없다고, 다른 형태로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태평해 하는가.

-권력의 악한 속성과 정부는 그렇다 치자. 권력이 손쉽게 빠져드는 유혹과 그 속성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진리와 자유의 길을 가르쳐야 할 신학교수 한분이 "(좌편향 세력에게) 수도 서울도 빼앗겼다"고 하면서 수도 서울에 속한 영혼들의 자유가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에는 둔감한 것 같다.

내 눈에는 과거 1979 이전 권력의 광기가 거의 반복된 것처럼 보이고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 광풍에 아직도 목도리를 둘러야 한 만큼 서늘해지는데 그 복사판에 가까운 현재의 권력에서 그 서늘함을 느끼지 못하는지, 1979 이전의 그 미친 야만의 바람몰이를 경험했던 50대 이후의 중년과 60대이후의 노년들이 현재의 권력의 주요지지기반이라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카오스적 공동체의 나이계층에서 이 분들이 가장 이해난망한 또래들로 여겨지게 된다.

이 한국사회의 퇴행, 내가 어느 시대를 사는가 하는 의아함이 있다.

-그래서 더욱 괴이한 것이 이 신약학 전공의 교수의 시선이다.

전혀 부끄러움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친일청산의 때가 아니라 좌파를 청산할 때다라고. 나는 그의 이 주장이 "지금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할 때다"로 들린다. 이 무슨 망발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가.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이 그에게는 환각인가. 지금은 독재망령을 청산할 때이고 그 깊은 뿌리인 친일을 분명히 청산할 때라는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인가. 이처럼 그는 분명 현실을 똑똑히 뜨고 보고 있을 터인데도 전혀 다르게 보고있는 것이다. 아니 현재의 모든 상황을 혼자서 온전히 실증적으로 분석해 낸 양 하면서 왜곡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시민 모두의 양심과 사상을 실증적으로 온전히 분석한 듯한 오만함을 떨치고 있다

한편 이 사람이 다른 교수들에게 훈계하고 요구하고 있는, 신중하고 보편타당한 진실의 태도를 스스로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렇지 않은것 같다. 그는 국정화반대의 교수들에게만이 아니라 교단직전총회장의 세월호 성명, 현총회장의 국정화성명까지 반대한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자신에게 진실하려면 그같은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소위 스스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한기총의 정치적행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었어야 한다. 그랬었더라면 나는 그의 진실성을 인정해 줄 수 있었겠다. 그에게 있어서 한기총의 정치발언과 정치편향이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애국행위이며 신앙행위이며 신학행위로 보여지는 것인지 의아하다. 신학자들이 깨어있지 않다면 신학자들에까지 기대할 것이 없다. 나로서는 단 한번도 나의 신앙적 대표성을 넘긴 적도 없는 한기총의 인사들이 정부와 권력의 정치적 꼭둑각시역할에 대해서 그가 한 신학교수로서, 신앙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오늘처럼 사자후로 표방한 그의 의견 이상으로 비중있게 문제삼았어야 했다고 본다. 자기입맛에 맞는 집단의 성명에는 침묵하고 있다가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을 때는 나서는 용맹함은 용기가 아니라 비겁함의 다른 얼굴이다. 만일 그가 한기총의 정치행위에 침묵했다면, 그가 교단총회장의 국정화 담화를 비난하고 역사학자들의 신중함을 탓하고 있는 것은 그의 비겁함을 감추려는 사자후에 불과할 뿐, 자가당착이 아니면 그 무엇인가? 이 질문을 이 교수에게만 묻는다면 불공평할 것이다. 교단총회장의 국정화성명에 대해서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목회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만일 진정 자신의 신념에 진실되다면 동료들인 역사신학자들을 넘어 애초부터 그가 이미 좌파에 평정되어 위험천만하다고 실증적으로 확실하다고 자료삼아 넣어놓고 판정지은 이 땅의 전체 역사학계와 맞짱뜨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그의 순수성을 믿으랴.

-더 나아가 그에 대한 의아함은 증폭되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원인이다. 그것은 그의 동료들에 대한 그의 행패적 태도때문이다.

이 사람은 국정화의 제단에 경배드리는 돌을 얹어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자칭 정통신학의 보수자로 자임하면서 신학적 입장과 다르다고 같은 캠퍼스의 동료교수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신학을 검증하고 있다.

물론 신학하는 자가 그 스스로 정통신학이라고 믿는 바가 어떠하든 신학적확신을 역설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가 전혀 엉뚱한 자리에서 그의 동료들을 싸잡아 도매금으로 팔아버린다는 것이다.

내 눈에 그가 그의 맹렬함만큼이나 더 비열하게 보이는 것은 신학캠퍼스와 학계의 신학마당을 피하여 멀찍이 한 지역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선정된 주제와 무관한 강연을 통해서 그의 동료들의 뒤에서 햄머를 내려치는 꼴이다.

현 권력의 속성과 끔찍하도록 닮은 꼴이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유일한 척도로 삼아 타인들의 양심과 신학마저 검열하고 검증하려는 것이다. 권력이 공동체의 영혼까지 지배하려는 속성이 신학, 그것도 성서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태도에 그대로 전이 되어 있다. 아연실색이다. 신학까지도 억압의 도구가 된다.

이같은 신학자의 퇴행, 내가 어느 시대를 사는가 하는 의아함이 있다.

-우선 그가 비판하는 역사신학자들의 성명서를 생각해 보자. 사실 만시지탄이었다. 사안의 발단인 성명서는 현 권력의 괴물스러움에 대해서 비록 아주 뒤늦었지만 적절하였다. 교단신학교의 교수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인지, 너무 "신중"하여 뒷북을 칠 수 밖에 없었을지라도 적절했다.

진리의 인식에 투철해야 하고 한편 목회자들의 신학에도 기여할 만한 신학자들이 이렇게 반응이 늦고 때로는 시대의 징조를 뒤늦게 깨닫는 경향이 크게 의아하지는 않다. 역사 속에서 신학의 세계는 대개 사태파악도, 사태대응도 그 시대의 눈이 밝은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보다 덜 예언적이고 늘 만시지탄의 갈짓자걸음을 해 온 것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록 늦긴 했으나 역사신학자들의 선언이나 성명서는 일반성도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일조를 했을 것이고 그 소임을 충분하지는 못할지라도 부족하나마 메꾸었다고 본다.

선언문이나 성명서 형식은 일종의 절규이다. 이는 역사학교수들만이 아니라 모든 선한 양심을 가진 깨어있는 지식인들, 아니 시민의 최소한의 표현의 첫 걸음이다.

왜 성명이고 선언이냐.

모든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요구가 사방팔방으로 가로막혀 양심이 짓눌리고 빠져나갈 길이 없을 때, 그 외침, 양심의 외침에는 무슨 법적근거나, 논증이나 허락이나 그런 것이 필요없다. 외치면 된다. 그것이 선언이고 성명서다. 이는 신학이전의 사안이며 이데올로기 이전의 문제다.

사실 이 양심의 외침은 학자들의 것도 아니고 인간고유의 것이다. 양심은 억압당할 때 인간이기에 분노하며, 분노하지 않는 인간은 미성숙하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생물이다. 정당한 분노를 성명으로도 토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숨쉬는 나라가 아니다. 공기를 억압하는 것이고 공기까지 검열하는 것이다. 그같은 공기부족의 나라에서 그같은 검열을 찬성하는 자들은 인간되기를 스스로 거절한 생물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감옥을 느끼게 된다. 이유없이 갇히게 된 감옥살이는 인간을 절규하게 한다. 자유를 박탈당한 동물들은 정신이상에 걸리게 된다. 온 몸으로 느껴지는 광기의 감옥에 갇히지 않으려는 절규의 한 표현양식인 성명서는 생명있는 것들의 최소한의 반응이다.

따라서 역사신학자들의 선언은 역사학자이전에 천부적인 양심자유의 존재이기에 시민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아주 적절하였다. 그리고 좀 머뭇거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역사학자들로서 적절한 책임감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성서학자라는 분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만사지탄인 성명서에 일갈하며 맹렬히 성토, 훈계하고 나섰다. 선언에 대해서 하챦은 논증으로 반응하고 시에 대해서 거친 산문으로 응답하는 몰지각함이여.

그런데 이분의 몰지각한 발길짓도 글을 읽어보니 헛발질한 것이 아니었다. 내면 깊이 프로그램화되어 있던 것을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다. 오래도록 그의 심중에 스스로 무겁게 여겼던 덩어리를 토해야 살 것 같았다고 보여진다. 아마도 열과 불이 나는 심사를 토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것 같다. 이해한다. 임계점에 이미 도달하여 울고싶은지 오래였는데 단지 역사신학자들의 성명서를 빌미로 터뜨린 것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터뜨리고 싶은 욕구때문에 성급히 썼다는 내증이 곳곳에 보여진다. 그리고 평소에 품었던 울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터뜨렸다.

사실 그의 글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자리매김한 것도, 요한복음해석에 성서신학교수답지 않게 도그마(dogma)를 들이댄 것도 국정화반대논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입장과 동기의 변변치 못함이다. 그는 성명에서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그를 지목하지도 않았는데도 마치 자신이 겨냥당한 듯 심각하게 고민하였다고 과장한다. 이같은 성명서 대상의 자기개인화는 반박을 터뜨리기 위한 값싼 자기변명, 자기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비판문의 끝문장에서 마지막으로 악수를 둔다. 역사신학자들이 인용한 요한복음 본문의 해석을 전혀 본문과 무관하게 훈계조로 덧붙였다. 이는 성서학자가 해서는 안될 해석적 오만이고 오류이다. 이것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터뜨리고자 하는 의욕이 너무 앞서서 "신중치" 못하게 자신이 배설하고자 하는 말을 긴급히 뱉었다는 내증이다. 이는 그가 그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생각했고 시간을 들였느냐와는 상관없는 사안이다. 그가 성서학자로서 큰 실수를 한 것은, 다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요한복음의 구절에 쑤셔 넣어 성서학자의 명예와 관계될만한 금기사항, 성경을 자기증명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요한복음의 "진리"라는 용어는 공관복음에는 생소한 용어이다. 그 용어는 공관복음의 관련된 빛에서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요한의 이야기구조 속에서 그렇게 해석하면 안되게끔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용어의 히브리개념인 구약의 용어와의 관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가 더 잘 알 것이 분명하다. 그의 해석은 참으로 성서신학교수답지 않은 그 자신의 선입견적인 도그마(dogma)적 해석을 억지로 붙여놓았던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가 그렇게 통박하는 역사학자들의 인용보다 더 비학자적으로 남용하였고 오용하였다. 이는 그가 자신이 하고싶은 말을 하고자 하는 의욕에 사로잡혀 신중하게 본문을 해석하려는 동기조차 상실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싶은 그의 조급함 때문에 학자적 양심조차 팽개쳤다. 오히려 그에 비하면 역사학자들이 인용한 그 구절은 그들의 선언에 적합해 보인다. 진리라는 용어가 이 성서신학교수가 쓴 용어보다는 더 적절히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의 성급함을 용서해야 할 것 같다. 의욕이 과하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무엇일까. 그가 동료교수들의 신학적 성향을 통째로 성토하면서 동료들의 신학과 신앙을 검증하되 그것도 전혀 다른 남의 마당에서 동료들을 명예살해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동료교수들의 사상이나 신학을 자신의 잣대로 검증하고 검열하려는 이 못된 버릇은 어디서 배웠을까. 왜 이 사람은 동료교수들과 일반신앙인들의 신앙이 자기같아야 한다고 생각할까? 왜 이 사람은 정권의 폭력에 가까운 일방적인 국정화 추진을 업적이라고까지 찬사를 할까. 편견이 크면 자신의 오성의 기능이 멈추게 되는 법이다. 모든 역사신학자들 내지 다른 교수들이 함께 찬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 터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참으로 비열하다. 그의 진정한 비열함은 교회의 성도들의 모임, 즉 동료교수들이 없는 자리에서, 국정화문제가 아닌 동료들의 신학을 비난하고 그들의 명예를 난도질했다는 것이다. 그 교회를 지렛대 삼아 겨냥하는 실체는 저 너머에 있다. 무고한 성도들까지 이 사람이 휘두르는 일방적인 논리에 희생물이 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신학교의 신학까지 일방적으로 재단하여 매도되게 한다.

신앙인들이 아닌 일반인들도 그의 무고한 동료들을 뭉뚱그려 그들이 없는 데서 싸잡아 비난하는 이같은 비열한 행동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무고한 자를 지렛대 삼아 그 너머를 겨냥하여 타격하는 것, 이는 혹시라도 그가 한 때 "몸담았다가 버렸다는 그 자신 류의 좌파"가 사람을 잡는 방식의 잔재인가?

자신의 마당에서가 아니라 남의 마당에 가서 자신의 마당에 함께 머리를 맞대어 왔던 동료들을 뒤에서 칼부림하는 태도는 신학자는 고사하고 신앙인 이전에 인간의 태도가 아니다.

그가 비난했다는 사회복음과 공공신학비판에서는 백년전 신학논쟁을 보는 것 같아 하품이 나올 정도다. 그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을까. 아니면 현대에 살면서도 공중누각에 거처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그가 신념처럼 여기는 "그 자신의 이해의 지평"안에 사로잡힌 류의 정통보수신학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인식을 누가 고칠 수 있으랴. 그는 척결할 신학의 대상까지 지정한다. 예컨대 "공공신학"과 "사회복음"을 그 대상으로 한다. 여기가 공공신학을 논할 공간도 아니지만 복음서의 예수복음 전체를 훝어보기만 해도 신학의 공공성, 복음의 공공성, 진리의 공공성을 말하지 않는다면 복음서의 절반 이상이 가위질당해야 한다. 그는 무엇을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면서 동료들을 무차별 공격해도 스스로 가책하지 않는 자기정당화를 품고 있을까. 그는 왜 자신과 동료들 사이에서 아무 관련도 없고 무고한 제 3자인 성도들의 마음에 그 동료들을 칼질하고자 하는 자신의 검증자료를 주입시킬까. 자신의 코를 푸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도들의 마음 속에 무고히 신학교 교수들과 신학교에 대한 턱없는 비판을 풀어내게 할까.

-"악"의 유혹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타인을 매장시키기 위해서 공격적 논증으로 무장하고 인격적으로 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살해하려는 대상을 온 천지를 오염시키는 괴물로 둔갑시켜야 한다. 이 교수가 하는 일이 고의든 아니든 그것이다. 역사학자 일곱분과 복음의 공공성을 신학하는 교수들이 온 신학교와 신학생들을 오염시키고 보수정통신학을 망치는 흉악한 범죄자처럼 묘사하여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신학 교수들을 넘어 전선을 확대하여 불특정의 모든 역사학교수들과 신학마당의 다른 교수들의 신학까지 불온할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같은 방식을 택할까. 악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신학을 넘어 심지어 그 신학교수들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화를 빌미삼아 실제로는 동료교수들을 폄하시키면서 그분들을 진정한 신학과 교회의 원수처럼 자리매김시키는 그의 비열함과 흉악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의 행태는 도를 넘어섰다. 진실성이 의심된다. 그가 말하는 진리의 사람됨이 의심된다.

그런데 그는 결코 자신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 의심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자신의 확신은 무오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는 스스로 정통이기에 무관한 제 3자인 성도들로 하여금 다른 신학교교수들을 마음껏 판단하는 죄를 짓게 하는 악을 악이라고 생각지 않고 저지르고 있다. 나는 이 사람같지 않은 정통주의자들을 상당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이사람같은 식이 된다면 그 자신의 정통보수적 "신념"은 악을 향한 첫 걸음이 된다.

이처럼 나는 오늘 이같은 악행의 위험에 빠져있는 한 성서신학 교수를 그의 글에서 만나고 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나는 "학자"라는 용어는 아주 엄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학자가 아니어도 교수인 분들이 허다한 세상이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교지가 "학문과 경건"이 아닌 "경건과 학문"이다. 학문 이전에 사람이 되라는 뜻일게다. 신학자 이전에 신앙인이자 목회적 성품을 지닌 자가 되라는 뜻일게다. 아니 그저 사람이 사람처럼 되라는 아주 단순한 상식표제처럼 생각되지 않는가.

-"에큐메니칼"대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절연을 경험했던 2년전의 일은 일종의 에피소드처럼 기억될 뿐이다. 사실 그 중년의 신앙인은 개인적으로 나에 대해서 행악을 저지른 일이 없고 늘 고마운 분이었다. 그러나 한 성서신학자가 그 동료들에게 칼을 휘두르라고 무고한 성도들에게 쥐어주는 정당화와 신념류의 칼을 보니 사람을 잡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두렵기보다 어처구니없기도 하다.

그런데 그 칼에 베어 넘어지는 자는 누구일까. 공공성 없는 허공의 누각에서 살고 있는 그 자신이 영순위가 아닐까.

그가 스스로 진리라고 말하는 그 진리를 향하여 뒷발길질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의 발뒤축으로 진리만을 발길질하고 있을까, 또 누구를 갈겨버리고 있을까? 무고한 이웃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까지 발길질 하다가 그 자신이 다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웃들을 무고히 공격하면 더 깊이 상하는 자는 그 공격대상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 되기에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맹목의 인간은 용맹스럽다.

그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의 글이 아닌 그로 인해서다. 맹목의 인간은 어두움을 기어가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두움을 기는 자는 총을 쏘아서는 안되는데 그런 자들일수록 그가 "잘 본다"고 확신하면서 쏘아대지 않아야 할 표적을 대상으로 총을 쏘아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불행한 것은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불 태우든 그는 국정화추진자들의 지렛대나 불쑤시개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국정화는 그의 의지여부를 떠나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국정화도 화석이 되고 이 나라 권력이 섬김이 아니라 지배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한 인물이 역사 속에서 미쳐 잊혀지기도 전에, 이 역사의 의미있는 공간에서 이 교수 역시 자리할 것이 없는 죽은 화석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올인하는 그의 의지와 확신이 안타깝다.

-그에 권고할 것은 이것이다. 뒤에서 동료들의 명예에 먹칠하는, 스스로 왕이 된 그의 입을 스스로 닫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비겁한 칼잡이됨을 면제하는 유일한 길이다. 지나가는 무고한 자의 등 뒤에서 칼을 꽂는 이를 불한당, 흉악범이라 한다. 혹은 정신이상자 일 수도 있다. 악인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뒤에서 쇠칼로 찌르는 것만이 범죄가 아니다. 지식의 무기는 가장 견고하고 무정한 무기이다. 지식의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이 악인의 범주에 포함될 가능성이 훨씬 많은 법이다. 악은 지식인의 세계에 범람한다. 지식을 무기삼는 지식인의 폭력은 그 지식인들이 활동하는 종교계와 정치계와 학계에 많은 법이다. 거기에 권력을 더하면 악은 그 기어다니는 흉칙한 발톱들의 횡포가 무한하게 뻗치게 된다. 교수직도 인정하든 않든 일종의 권력의 자리이다. 지식의 권력이다. 무식한 이들은 그 앞에서 입을 닫을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에 권력의 열쇠까지 쟁취한 자들은 더욱 스스로 조심할 일이다. 악인이 될 가능성이 더 증폭되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너무 말을 많이 하였다. 과유불급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다. 근신할 때가 되었다. 때로는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 잠잠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인 법이다.

그리고 장신대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멈추고 동료교수들에게 사과할 일이다. 다른 엉뚱한 자리에서 저 너머 신학마당의 다른이들의 신학을 정죄하는 그 오만한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야 할 것이다. 동료신학자들, 교수들을 우회하여 찌르는 행위를 멈추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할 바이다.

-악은 우리 모두를 지렛대로 삼고자 한다. 악이 우리도 모르게 첫 걸음을 뗄 때 우리로 하여금 부지부식간에 그 첫 걸음을 떼게 한다. 한편 생각해 보면 성서신학 교수라는 그도 나라를 사랑하고 신학교를 사랑한다는 확신에 찬, 선한 심정으로 연속적인 활동을 했을 것이다. 악이 선의 정당화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첫 발걸음을 떼게 할 때, 우리는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 악인이 두번째 걸음을 걷기 전에 악의 첫걸음은 대개 부지부식간에 나 자신도 모르게 온다. 그런데 이 두번째 걸음부터는 나의 것이다. 두번째 걸음부터는 대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내가 스스로 악의 수렁을 찾아 깊이들어가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 모두가 이같은 "악"의 유혹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면제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나와 다른 지평에 놓여있다고 하여 칼을 들려는 이 자기정당화의 유혹에서? 이 교수가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 유혹의 함정에서, 밑없는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타인을 보고 악인이라고 정죄하는 그 사람이 악인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을 정죄할 위험성이 있는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이 악의 위험에 빠져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라는 용어에 생소한 공관복음서로 요한복음을 풀어보자.  "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그러나 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우리의 눈이 떠져 이 세대를 밝히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때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할 때이다.

낙엽이 쌓여있을 아차산, 그리고 광나루 동산을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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