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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존직(종신제) 이대로 좋은 가?항존직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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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15  20: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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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존직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

한국 장로교회의 위임목사 제도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나온 제도이다. 이 말은 성경적인 근거가 아니라는 말이다. 시대와 정서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과 변해야 하는 일반론적인 주장에서 논의를 시작해 본다. 복음은 불변이지만 제도나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를 받아 드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중 하나가 목사의 위임제라고 볼 수 있다. 교단마다 다르지만 형식적으로는 위임이나 임시목사 모두 연임을 별도로 제한하지 않고 있으니 사실 상 둘다 종신제로 운영된다고 볼 수 있다.

위임은 목사가 부임하거나 시무하는 교회에서 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인 공동의회에서 무기명 비밀투표로 2/3이상이 찬성하면 노회의 허락을 받아(파송) 자의 사임 혹은 은퇴할 때까지 목회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한번 위임목사가 되면 사임을 하지 않는 한 20년을 시무한 후에는 온갖 명예를 갖는 원로목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원로목사가 되면 개 교회는 예우를 해야 되고 그 원로와 후임이 갈등을 하게 되는 등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외국의 교회는 원로라는 제도가 없으며 무엇이든지 어디서든지 임기없는 종신제는 안 된다. 이 위임제가 바로 목사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교회와 노회 총회에 가서도 교권을 행사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그러니 자기가 한 것도 모자라서 자식들에게까지 교회를 세습을 하는 것이고 이것을 막는 법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법으로 막는다고 못하는 것도 아니다. 징검다리세습이나 위장세습(지점형)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호칭하는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은 신약성경에 언급된 직분이기는 하나 목사라고 하는 말은 명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오래 되었다. 신약시대는 지금과 같은 형식의 사회속에서의 교회나 목회라는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담임목사직은 교파 교회라는 제도가 일반화 된 종교개혁 이후로 시작된 것이며 특히 장로교회의 정치제도에서는 회중이 청빙한 목사를 노회가 파송하는 형식의 임명직이다.

따라서 담임목사직은 결코 회중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고, 오히려 필요하면 회중은 그 직위를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인사권을 회중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군왕이 종교를 이용하여 자기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본사상으로 군신도 갈아치우고 때로는 신도 갈아버리는 사상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 발전이다. 종묘와 사직이 그것이다. 백성은 결코 특정한 종교나 제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사는 신의 대리자가 아니다.

칼뱅은 일찍이 “안수는 직분자를 하나님께 맡기고 바치는 일을 상징하는 예식일 뿐 그 외에 다른 심오한 신비가 깃들여 있지 않다”고 했다. 즉 안수 자체가 직분자들에게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최근 교회가 성장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목사에 대한 예우도 달라지고 자기 회중이 늘어나니 마치 교회를 성공한 기업으로 생각하게 되어 회중 위에 군림하거나 그 성장의 결과나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잘못된 목회자들이 연일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 결정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실 한 교회에서 거의 70세까지 담임목사 직위를 보장해 주는 현행 ‘담임목사 종신제’가 문제라는 지적을 한지는 벌써 오래 되었다. 이 제도는 아주 역사가 깊은 것이나 예전에는 목사가 적고 대중들의 교육적 수준이 낮았을 때의 일이고 사회보험이나 연금도 없을 때의 일이다. 일부 목사 숫자가 적은 카나다와 일본의 예는 정년이 없는 종신제지만 우리교단과 선교 협약을 맺고 있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미국의 장로교회들은 5~7년의 임기를 두고 본인과 교회 그리고 상회가 연장을 해주거나 제한하여 특정 목사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한 교회에 머물러 사역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와 목사가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고 이에 따른 분열의 단초를 제거하기도 한다. 가톨릭의 수장이나 성공회 관구장은 종신제지만 그 외의 사목은 모두 임기제로 종회가 발령을 낸다. 정기적으로 순환 보직 사역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교회에 대한 소유 의식이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머리이며 노회의 것이다. 교회에 대한 사유화가 아닌 공적 영역으로 과도한 개교회주의나 경쟁을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순환제도는 교회에서의 목사들의 부정을 막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왜 유독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흥을 하면서도 가장 부패한 교회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목회자가 교회에서 예배, 구원, 헌금, 주일, 그리고 교회 봉사 등에 큰 관심을 두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진리의 핵심인 예수를 따르고 본 받는 것은 간과하고 있다. 설교로는 바른 진리를 말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진리의 추구보다 은혜, 감사, 축복을 더 강조한다. 즉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말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교회의 양적 성장이 더 목표이다. 더 많이 내고 출석하고 순종하라는 것이 거의 모든 교회들의 목표이다. 거의 성직자처럼 살자는 식이다. 그러니 거기까지 이르지 못하면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물질로 환치하도록 한다. “가든지, 보내든지, 내든지 하라“ 가 좋은 구호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 의장 등 교회의 중요한 회의체들의 의장 지위를 갖는다. 그리고 이 의장을 보좌하는 임원회나 견제 구조는 사실상 없다. 그러나 목사가 준비하고 기도하고 응답받았다고 하면 거기다가 뭐라고 할만한 사람이나 형편은 안된다. 그러나 노회나 총회는 그렇치 않다. 임원회장은 집단체제의 장이다. 그러나 당회는 서기가 있기는 하지만 임원회와 같은 구조가 아니고 그 당회장을 견제하지 못하는 거의 1인지하의 구조다.

과거에는 그런 구조가 통용되고 필요한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진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성직자 독점적 당회운영을 바꿔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장로교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분들이 더 많지만 이것을  개인의 양심이나 신앙 역량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이제는 시스템으로 하게 해야 한다. 그 권한을 평신도들과 나눠야 한다. 장로 당회장도 나와야 하고 부당회장제도 둬야 한다는 요구를 장로들이 하고 있다. 

이런 구조가 통용되는 이유로는 성장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목회의 모든 목표와 핵심은 교회 성장만을 목표로만 삼기 때문이다.  성장을 하지 말고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장 우선으로 할 때 간과되는 것이 있다. 다른 신앙적 요소들이 뒤로 밀리거나 관심 밖이 된다. 그 결과 세속주의적이고 기복주의 신앙으로 단순화 되고 우민화 되어 순종과 축복이라는 구도 속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나 “축복과 저주”라는 극단적인 구도가 등장한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한다.

그러니 설교도 그렇고 교인들 관리도 일사분란하게 명령 통제식으로 가는 것이다. 그게 편하고 시간이나 잡음이 없다는 이유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의 우민화와 쇠뇌가 작용한다.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기분이 좋아야 헌금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성경의 말씀보다 목사의 설교와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게 세뇌 훈련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된 삶을 왜곡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르침에도 유대교의 지도자나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대한 도전과 논쟁,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간과하고 예수님이 한번도 하신 적이 없는 말씀들을 서슴없이 만들어서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거짓말을 일삼는다. 갈릴리의 예수가 한 말과 행동보다 부활하신 이후의 기적과 이적, 축복에 대하여만 가르친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복” 이라든지, 천국에 쌓는 것을 교회에 쌓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다. 만일 이런 것들이 복이라면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광야에서 고생하다가 목이 잘린 세례 요한, 그리고 톱에 잘려 죽은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

목사 임기제가 안되는 이유

왜 한국의 일부 목사들은 성경의 복음을 제대로 균형있게 가르치거나 따르지 않고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교회를 사유화하고 신도들을 우민화 기복화 할까? 이것은 바로 목사직에 대한 대단한 계급 의식 때문이다. 즉 신적 권위의 대리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지키고 누리기 위해 안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형교회일수록 교회 헌금의 개인적 사용, 성추행, 교권 남용, 사유화 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심성이 나쁘고 우발적이며 일회적인 실수만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멀쩡한 사람도 한 교회에서 목회를 오래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면 어김없이 빠지는 병이다.

목사의 임기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반대하는 이들은 자기가 쌓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다. 그렇기에 담임목사 임기제는 목회 부정과 교회 사유화는 물론 망국적인 교회 세습까지 철저히 응징할 수 있는 좌우에 날 선 검이다. 우리가 정치인을 가장 썩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어찌되든 4년 마다 공천심사와 투표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도 유급직원으로 시무를 한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소비자에게 인사권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도 법에 따라서 자기 대중에게 판단받고 신임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교회의 사유화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 등 중직인 직분자들의 임기제도 도입하여 평신도들에게 그 인사권을 돌려줘야 할 것이다.

목사 위임제는 그 역할이 끝났다.

목사 위임제는 그 동안 자기 역할을 해 왔다고도 본다. 복음의 초창기 신도들의 교육 수준과 교회의 자립화 시기에 안정적인 성장을 위하여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각종 부패를 양산하는 축이 된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또 위임을 받았다고 해서 평생 사임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사실 상 위임의 의미는 없다.  

현재 우리 교단의 담임목사 제도와 같이 3년마다 신임을 묻는 것이 민주적이고 현대적인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위임제가 목사의 비리나 문제를 온존하고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락을 했다는 것이 문제다. 계약은 일정하게 서로가 조건을 걸고 그 약속들을 지키는 것이 민주적이고 성경적인 원리이기에 계약으로 가야한다.

서구교회에서는 위임제가 없으며 모두가 계약제이다. 한 마디로 교회와 목사가 잘 맞지 않으면 좋게 헤어 질 수도 있다. 계약종료 기간 동안 서로가 인내하며 기다릴 수가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을 때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위임목사제가 폐지되면 교회의 모든 항존직도 신임제가 될 것이다. 한번 장로이면 영원한 장로로 교회에서 군림하며 경험과 연륜을 앞세워 기득권으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또 모든 목회자들이 순환해야하므로 자연스럽게 교회에 새로운 바람과 기풍을 주게 된다.

기존처럼 중견 목회자들이 평생 한 자리에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과도한 기득권을 누리다 못해서 세습발상까지 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제도적으로 끊어지게 해야 한다. 이제 신학교를 나오는 젊은 목사들은 갈 곳이 없다. 교회개척 외에는 대안이 없는 데 개척지도 포화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미자립 교회가 난립하게 되고 문을 열고 실패하고 잦은 이전이나 폐 교회를 할 수 밖에 없는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어려움은 어려움이고 교회가 끊임없이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희생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더 버림을 받을 것이다.

목회자가 스스로 희생하는 방식의 개혁은 현재의 위임목사들이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그렇게 가야 한다는 이해를 가져야 한다. 이제 신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이 이런 사고를 하게 되면 앞으로 10년이내에 뜻을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외국처럼 3-40대에 부목사 훈련을 하고 도심에서 와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하고 도시에서 목회하던 50대 후반은 자녀들도 성장했으니 농촌으로 가는 순환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나라만 종신제인 장로들도 교회와 당회 심지어 노회에서 터줏대감이 되고 목사처럼 원로가 되어 교회를 가장 잘 아는 기득권을 파워로 목사를 길들이고 좌지우지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 즉 장로도 임기제로 하여 평신도로서 사역을 하는 것이다.

노회,총회,연합회 구조도 종신제가 문제다.

특히 대형 교회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아무래도 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로가 공생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분들 중에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올 초에만 사회적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비리를 보면, 명성교회 재정장로였던 박ㅇㅇ 장로와 서산성완종 장로의 자살에 방산비리, 신원에벤에셀의 박성철 장로, 방산비리 해군 총장 정옥근 장로) 학원비리한영신학교 한영훈 목사, 기독대학교 이강평 목사, 백석대학교 장종현 목사, 공금횡령 CTS 감경철 장로) 등이 있다.

목사들은 교회에서 그렇게 은혜로운 설교를 하고 경건하고 거룩하신 분들인데 강단에서 내려와 사회속에 들어가면 최소한의 윤리와 정의마저 지키지지 않고 있다. 그런 설교를 하고 듣고도 이런 짓들을 한다. 직업에 대한 윤리성이 전혀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들을 치리할 만한 자체 정화 능력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점이다. 우리의 현실이 이 지경이고 그 원인이 담임목사 종신제와 장로 항존직제인데 왜 그것을 고치지 못할까? 그것은 그들이 바로 교권의 힘이 되는 노회와 총회의 총대가 되고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보는 제도들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은 뻔하다. 그렇기에 후진들이 나서야 하고 의식있는 평신도들이 나서야 한다.

종신제가 되어야 목회를 할 수 있고 은혜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역설적인 말을 한 분이 있었다. 마찮가지로 ”항존직자들이 죽어야 교회가 산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주장과 기득권 자리 권위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힘으로 능으로 안 된다. 양심과 윤리로도 그것을 죽일 수 없다. 오직 제도와 구조로만 가능하다.

즉 그 직분자들을 받아 들였고 선출한 이들에게 재신임을 받자는 것이다. 양심이 있는 목사와 장로들이 먼저 스스로 종신제 폐지에 앞장 선다면 그야말로 선각자들이 될 것이다. 시무제나, 재신임을 받아들인 분들이 많이 있고 65세에 은퇴하신 분들도 있긴 했으나 소위 큰 교회에서 위임 자체를 포기한 분들은 없었는데 앞으로 나와야 한다.

목회자들만 갖고는 개혁 안되

이제 한국교회는 가난하던 시절의 눈물과 감동, 감격이 사라지고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목사의 책임이다. 그 자신이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희생하지 않는다. 헌신과 희생의 자리에서 양들의 탄식과 눈물이 넘치고 있다. 목사가 더 울고, 낮아지고, 머슴처럼 섬겨야 하는 데 주인인 교인들은 시간 내고 돈 내고도 쩔쩔매는 종이 되었다. 종이 상전이 되고 주인이 머슴이 된 꼴이다. 이미 대형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키워놓고 목사 성공시키고 버림받는 꼴이다. 담임목사 심방을 받아보지 못한지도 오래 되었다.

본 교회서 생활비 주고 자동차 주고 집까지 주는 데도 교회나 교인 위해서보다 나가 돌아 다니며 강사비 챙기고 접대 받는 일에 더 관심있다.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만나기가 하나님 만나는 것 만큼 힘들다. 그렇게 되니 빈손으로 만날 수 없게 된다. 목사에게 대접들을 하지만 밥을 먹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은 없다. 그 목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자기가 필요한 사람과의 연결과 줄을 대고 싶은 자들이 줄을 서는 것이다. 그러니 빈손으로는 안 된다.

사도행전의 바울은 결코 한 자리에 안주하며 사역하지 않았다. 왜 그는 그렇게 많은 지역을 여행하며 사역을 했을까? 전도여행을 통하여 교회들을 세우고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도 직분을 감투 삼지 말고 한 동네에 눌러앉지 말고 기득권의 바벨탑을 쌓지 말고 전도자의 마음으로 부지런히 ‘다른 동네’로 가는 것을 강조하셨다.

이런 문제는 목사 개인이 인격적으로 나쁘고 물질을 탐해서 일어나는 문제만은 아니다. 처음의 사역과 사명은 겸손하였지만 익숙해지고 설교가 되고 성장이 되고 힘이 되니 결국은 교만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루 빨리 담임목사제와 위임목사제를 통합하여 기본 계약 5년 정도로 하고 연장해 가는 방안으로 가야 한다.

나도 언제든지 주님의 교회를 그만 둘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해야 겸손하게 사역할 수 있고 교회의 평신도들이 성장하고 교회의 주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 벌어 나 먹기 식” 의 세속주의를 합리화하여 내가 세웠고 내가 성장시켰으니 내 교회라는 망상을 버릴 수 없게 되고 내 아들이 이어 받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이 나오는 것이다.

평가와 결론

나는 이런 문제의 원인을 우리나라 마지막 왕조인 조선의 유교와 성리학으로 부터 오는 장유유서와 복음이 들어오는 초창기 상황속에서 복음의 안착을 위한 필요성과 일제하라는 식민지국가라는 이중적 구조속에서 교회의 생존과 번성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교권구조의 수직적 정착이 필요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로 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와 기독교 가치관은 가히 선진국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왕적 목회를 즐기거나 숭상하는 잘못된 이론이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대형화가 목회성공이고 이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 교권의 지배 그들의 리그인 연합기관이나 정치거래가 관행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총회도 그렇고 어느 누가 바로잡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운동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스스로 그 권한을 내려놓는 사람이 나오면 되는 것이다.

65세 조기은퇴자와 원로 목사 반납자들이 없는 게 아니다. 거기서 한걸움 나아서 위임제지만 신임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미 거룩한 빛 광성교회 정성진 목사가 그런 약속을 했다. 실천한다면 최초의 신임제와 65세 은퇴 원로목사를 포기한 사람으로 각인될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켜볼 것이다. 우선  목회자가 자기의 권한을 내려놓으면 당회를 민주화할 수 있다.

그렇게 목회자도 견재받는 구도를 스스로 만들고 민주적으로 논의하는 당회제도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옛 선배들이 난 당회 오래안합니다. 하는 게 잘하는 목회가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논의와 결정의 책임주제로 하고 권한과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재정 인사 목양 다 나누는 것이다. 그러면 치리권도 나눈 것이지만 여전히 남는 것은 강대권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교회들로 평신도들을 단에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적거린다. 그러나 이미 구역예배등에서 평신도들의 참여는 오래된 전통이다. 따라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권위 전통으로 억압된 구조를 당연시 말고 보다 진보되고 나은 방향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세반운동에서의 이견도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세습은 결과다. 그것을 못하게 하고 중단키 위해서는 하나의 상징이 필요하다.

세습은 결과일 뿐이다.

그게 명성교회라는 것도 이해가 된다. 가장 큰 교회 번영신학과 성장주의 결과로 교권을 지배하는 대표선수를 도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비판하기엔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표적화이고 다분히 감정이 실린 것을 부정못한다. 따라서 결과를 놓고 비판하는 것은 운동의 정석이 아니다.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목사의 신임 없는 위임제다. 장로교 원리인 교회나 교인의 자유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세반반대자들이 이 점을 주장하는 데 장로교가 성공회가 국교회인 영국에서 나온 이유다.  이들은 국가와 교권화된 성직자 구조가 교회와 신앙 모두를 통제하는 것을 못견디오 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대륙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리고 보스턴과 첫 도시에서 그런 교회의 자유권을 기초로 하여 교회을 세우고 국가를 세우고 수정헌법을 만들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근의 도시들에게 다른 종파들의 자유도 준다. 그러니 장로교회만이 아니라 조합교회 루터교회 성공회등이 뿌리는 내린 것이다. 어디다가 어떤 이름으로 어떤 목회자를 정하고 직원을 세울 것인가를 정하는 게 바로 장로교회의 최고 회의인 공동의회다. 

따라서 상회의 허락이라는 것은 지 교회의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연계된다. 따라서 지교회의 청빙권을 상회의 법이 가로막는 것은 자유권에 위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교단의 헌법상 제정된 목회 대물림 방집법은 헌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체 특별법으로 제정되고 부수조항도 완벽하지 못해 큰 혼란을 초래한다. 

따라서 이 법은 이미 101회기 헌법위가 해석한 대로 미자립 제외, 다른 항존직자 자녀 제외 자녀가 지원조차 못하게 하는 것도 평등권과 차별금지법에 해당된다는 견해로 수정 보완 삭제하라는 해석을 하지만 교단 분위기상 세반운동권에 밀려 보고도 못하게 된 것은 헌법의 무력화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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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XXX.XXX.162)
만약 목사직에 임기제를 도입하고 신임 투표를 한다면, 적어도 장로교회에서는 목사만이 아니라 당회의 신임을 물어야 합니다. 장로교회에서 목회는 목사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치리회인 당회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를 따를 때 신임 투표에 동의하는 장로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네요.
(2022-07-23 14:19:14)
기본
(112.XXX.XXX.162)
교회법의 기본도 모르시는 것 같네요. 항존직이란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라는 의미에서 항존직이지, 항존직이 곧 종신직은 아닙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는 임기제를 채택하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들도 목사만은 임기제를 적용하지 않는 건 직무의 특성 때문입니다. 임기를 두고 신임 투표를 하게 되면 목사가 하나님보다는 성도들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2022-07-23 14:17:56)
양쪽으로
(201.XXX.XXX.135)
교인들의 행패도 문제입니다. 장로 안시켜준다고 목사 반대하며, 교회 열심히 옮겨다니죠.목회자의 부르심은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위임제도 폐지 찬성에 는 목회자의 권력 남용 방지도 있겠지만 교인들의 물욕주의. 번영신학도 문제입니다.제도 바뀌기 전에 본인이 진실한교인으로 한번 살아 보세요, 말썽지기 자녀 내칠수 없듯이 부족한 목사님 쫒아낼수도 없죠.위임폐지도 세속주의의 모습일뿐입니다.
(2016-09-03 00:00:42)
양쪽으로
(201.XXX.XXX.135)
신임제의 문제는 교인들이 합세하여 아무 잘못도 없는 목사를 쫒아 낼수 잇다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나라는 의입니다. 목회는 부모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못난 부모 밑에도 똑똑한 자녀가 나오듯이 부족한 목회자 밑에도 기독교 인재가 양성 될수 있습니다. 신임제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양적, 번영 신학의 토대에서 나온것입니다. 나이가 드신 목사님. 장애자 목사님 받아들일수 있나요? 목회는 사랑이 운성입니다.
(2016-09-02 23:43:30)
박군태목사
(121.XXX.XXX.140)
교회세습
제왕적 목회등이 모두 위임제도에서 비롯되었죠.

(2015-12-27 16:00:18)
개미골
(121.XXX.XXX.214)
한국교회 위임목사란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고 2/3가 반대해도 본인이 원치 않으면 70세까지 있는것
청빙때 2/3찬성으로 청빙였다면 2/3가 반대하면 떠나는 것이 법의 형평성에도 위배된다.

(2015-12-24 21:11:06)
활시위
(1.XXX.XXX.113)
정확한 지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위임목사제도를 악용하여 철밥통을 만들지요
개혁의 첫번째 관건이지요~
심지어 자기의 교회 부임일자를 억지를 써가며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르는 20년 정년에 꿰어 맞추기를 하는 목사도 있지요(원로를 꿈꾸며?)
편집인의 분투를 지원합니다.

(2015-12-21 07:11:21)
다윗
(121.XXX.XXX.91)
유독 한국만 괴력을 방휘하는 위임제도.
역사상 유례없는 가장 반성경적 위임제도,
위임을 마치 거룩한 신의 뜻인양 성삼위의 이름으로 거행하고,
위임목사도 더 큰 교회있으면 떠나 두세번위임받고
떠나기싫으면 간통횡령세습하고도 버티고 수십억씩 퇴직금받아챙기는 제도
위임제도철폐가 한국교회 개혁의 시작입니다.

(2015-12-16 04:47:33)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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