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 목사 제10회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로 선정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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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 목사 제10회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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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10  09: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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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균 목사 제10회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로 선정
   
                   * 좌로부터 김종률 선생과 김병균 목사

본 교단의  목회자로 고 고영근 목사의 뒤를 잇는 독보적인 사회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 김병균 목사가 광주에서  '오월 어머니 상' 을 수상한다.   ‘님을 위한 행진곡’의 작곡가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과 공동수상자다. 광주광역시와 사단법인 오월어머니집은 4일 개인 부문 수상자로 두 사람을, 단체 부문은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선정했다.

김 목사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와 그 이후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투쟁, 5·18 정신의 전국화·세계화에 앞장섰으며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대변해왔다. 김 사무처장은 1980년 전남대 3학년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82년에는 소설가 황석영씨와 5월 항쟁을 기리는 음악극 <넋풀이>를 제작했다. 이 가운데 마지막 삽입곡인 ‘님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잡았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광주시 조례 제정, 일제 강제동원 현장답사, 미쓰비시 불매 캠페인, 역사교육 등 활동을 주도해 과거사와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시상식은 오는 10일 광주 양림동 오월어머니집에서 열린다.

김병균 목사는 고교졸업후 우체국 공무원생활을 하다가 뜻한바 있어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가서 지역의 장로의 인도로 성경연구를 하게 되면서 호신대와 장신대를 졸업한다. 그후 나주의 고막원교회에 부임하여 현재 까지 36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지금도 광주전남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김 목사가 시무하는 고막원 교회는 1943년 일제강점기 말년에 고금순 권사에 의해 설립된 역사 깊은 교회로 1894년 동학농민항쟁 당시, 이 지역에서 농민군과 관군들을 교회 앞에서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로 진입하려는 왜놈들을 막기 위해 10여 차례 대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김 목사는 86년부임한 이래 생명공동체, 유기농, 도농간직거래생명공동체운동, 수세거부운동과 통일호정차운동성취, 의보통합제운동 쟁취, 나주농민회와 연대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해 졌다.  교우들은 김 목사가 90년대 국보법, 집시법 위반 2회나 구속되었을 때도 석방운동에 압장섰고, 신앙은 보수신앙 행동은 진보참여적으로 알려졌다. 이 교회는 기도할 때마다 자주화, 민주화, 민족통일, 전쟁없는 한반도 화해펑화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김 목사의 목회사역은 일찍이 광주서중 시절부터 4.19 혁명을 통하여 의식이 깨였고 그후 고향의 사숙에서 당시 안병무 박사가 발행하는 "현존" 이라는 신학 잡지를 통하여 진보적 신학과 민중신학을 접하여서 예수님의 갈릴리 민초사역의 사명감 갖고 목회하면서 은퇴를 2년 앞두고 있다  김 목사는 호신대와 기장총회신학대학원을 거쳐서 현재 갈릴리신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수학중이다. 그 외 국본공동의장, 목정펑전국의장, 예장농목의장을 역임하고 광,전펑통사 상임의장, 나주시민단체협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가족사항으로는 1951년인 아내( 생후 6개월에 황해도 장연에서 신앙자유 찾아 남하한 가족의 자녀)가 평생 동지로 목양에 동역하고 있다. 장남은 한 고교 행정실(7급) 직원으로 근무하며 자부도 교육공무원으로 봉직하고 있다. 장녀는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스리랑카 견습선교사로 사역한후 새문안교회 아기학교 담임 교역자다.  차녀는 초등학교 교사로 경기도 남양주에서 근무하며 슬하에  1남 2녀와 손자들이 있다.

김 목사의 이런 사회선교에 대한 신념과 신앙의 정수는 보수신학에 기초한다.  한마디로 그의 생활신조는 역사의 예수의 길을 따르며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 펑화, 생명을 구현하는 목회자요 사회운동가다. 가히 목민 고영근 목사에 결줄 수 있는 거리와 현장의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열정과 특심으로 볼때 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한국민주화운동의 심장이며 5.18 광주의 정신의 상징에 목회자로써 이상을 받은 것은 우리교단의 자랑이며 긍지라고 여겨진다.  

   
                  * 목회자들과 세월호 문제 단식기도중

다음 글은 김병균 목사의 일생에 대해서 한 브로그에 소개된 글이다.

깁병균 목사(나주 고막원 교회)

우리 민족은 해방 이후 70년이 지나도록 민족분단의 아픔과 대결이 지속되고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한 땅은 이승만 독재,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 속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수많은 양심범들이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위반으로 사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김대중 ▪ 노무현 정권이 선생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화와 평화통일, 민중세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명박 ▪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옛날 군부독재 시절로 회귀되고 있고,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청년들이 일자리를 못 구해 헤메고 있고, 서민경제는 더욱 살기가 팍팍해진 현실입니다. 꽃다운 우리 아이들이 생방송 중계 가운데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죽은 세월호 침몰사건도 ‘숨기려하는 자가 주범이다’는 확신은 있는데, 아직도 진상은 규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완전철수 이후 남북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있는데, 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앞당기려면 이 무능하고 미국에 예속적인 박근혜 정권을 속히 바꿔 정권교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4. 13 총선은 박근혜 정부의 독재와 교만을 국민이 심판한 것으로 알고, 기독교 목사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 ▪ 평화 ▪ 생명의 세상이 이루어 질 날이 가까웠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 어린 시절부터 유신독재 시절까지 저는 전남 강진에서 출생했습니다. 1960년 광주서중 2학년 재학 당시 4. 19혁명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날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산 앞바다에서 체류탄이 박힌 김주열 시체가 발견되자 정국은 극도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을 규탄하는 분위기로 돌아가고 있었지요. 저는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시위 대열을 따라다녔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독재는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이승만 독재와 3. 15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박정희 군부독재 시대를 지내면서 1970년대 초 강원도 속초우체국에서 국가행정직 5급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그만 두고, 고향 강진에 내려왔습니다. 일제 때 서울약전 학생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자유당 독재, 군부독재와 맞서 싸운 강진약국 황호신 장로님이 지도하는 영문다락방 성경공부에 참여했어요. 여기서 한국 민중신학의 개척자인 안병무 박사가 출판하는 ‘현존’이란 잡지를 보면서 민중을 주인으로 삼아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기독교 신앙적 역사의식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던 김영진(국회의원) 등 수많은 크리스챤 청년들, 민중들이 의식화 교육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70년 중후반부터 민주화 시국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 봄 호신대 재학 중에, 광주북동성당에서 열린 ‘함평고구마 사건을 해결’을 위한 농성장에서 서경원 전 의원을 비롯한 농민운동가들과 함께 투쟁하다가, 정문으로 나올 수가 없어서 북동 성당 뒷담을 넘어 기숙사로 돌아온 기억도 납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제 유신독재가 끝장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벅차고 기뻤습니다. 이제는 민주화가 되겠구나 생각했지요.
   
 

󰊲 80년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월 항쟁까지 1980년 5월 저는 호신대 3학년으로서 광주도청앞 분수대에서 열린 ‘민주화시국집회’에 날마다 나갔습니다. 그 때 학생들과 시민들이 ‘전두환이 물러가라’ ‘신현확이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어요. 그때 배후세력이 전두환 합수부장 일단인 것을 알았지요. 5월 16일(금)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학교수들이 전열에 서서 금남로 행진을 했는데, 이 대열에 함께 참여했지요. 저는 당시 장성군 진원면 양유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호신대에 다녔는데 주일을 지키려고 교회에 돌아왔지요. 5. 18이 주일이었어요. 월요일에 광주에 가려고 버스를 타려하니, ‘학생차림 청년들은 잡아간다’는 것입니다. 책가방을 아내에게 맡기고 광주로 나갔습니다. 계엄군이 이미 도로를 점거하고 앞에 총 자세로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었지요. 큰 길은 다 막혔고, 샛길로 해서 버스터미널을 지나 대인시장에 있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운암동 친구 집에서 자고 나왔지요. 광주역 앞 도로에는 수많은 자동차들이 불에 타고, 부숴진 채 널부러져 있었어요. 학교는 휴교령이 내렸고, 교회로 돌아가려고 터미널에 들어갔더니 계엄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살벌한 분위기로 무더기로 앉아있어요. 너무 무서웠습니다. 5월 21일 겨우 장성행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남편 시체라도 찾으러 간다’고 나오다가 길에서 저를 만났지요. 광주사태 1주기 추모예배를 구 YWCA소심당에서 드렸는데, 약 30명이 모였고, 경찰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조아라 장로님이 설교하셨어요. 설교라기보다는 우시면서 당시 고아출신으로 신협직원이었던 박용준의 이름을 불렀어요. ‘늙은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젊은 용준이 네가 죽었냐...’ 추모예배 후에 호신대생 10여명이 망월동 묘역에 갔었는데, 그 전에 정수만 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이 추모식이 끝난 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어요. 참 살벌한 세상이었지요......광주민중항쟁이 지난 후 3년간은 광주는 불꺼진 도시요, 침묵의 도시였어요, 이후로 저는 80년대 중반부터 5. 18이면 한빛교회에서 추모예배 드리고 나온 후, 도청으로 진격을 하는 대열에 참여했지요. ‘광주학살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해마다 5월이면 체류탄 맞아 가면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투쟁을 했습니다.

1987년 저는 광주전남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 초대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4월 중순 경에 광주에서 천주교 사제들이 처음으로 시국문제를 놓고 ‘단식기도회’를 했어요. 이어서 우리 목정평에서는 문동환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예배를 드린 후, 광주 YWCA에서 젊은 목회자들 30여명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회’에 들어갔지요. 13일간의 단식이었습니다. 외신기자들까지 취재하러 방문했고, 외국에까지 알려져서 그 파급력이 컸었지요.

광주에서 5. 18날 망월묘역에서 ‘직선제개헌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결성이 됩니다. 저는 목정평 회장으로서 공동의장으로 참여했지요. 이 ‘국본’을 중심으로 해서 ‘6월 항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교단을 초월한 기독교 성도들 수천명이 성도들이 모여서 금남로에서 ‘직선제 쟁취를 위한 시국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투쟁을 하다가 후배목사들과 함께 동부경찰서에 연행되어 갔지요. 거기서도 당당하게 ‘군부독재 물러가라’고 외쳤지요. 우리 목정평 젊은 목회자들이 학생들, 민가협, 유가협 어머니들과 일심동체가 되어 열심히 싸웠습니다. 광주시내에는 체류탄 연기가 가실 날이 없었지요. 광주에서만이 아니라 서울 명동성당에까지도 가서 싸웠지요. 결국 6. 29선언이 나왔고, 이후에 노동자들의 대투쟁으로 이어져 나가게 되었지요. 결국 민중들의 대투쟁은 양김이 갈라지므로 노태우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죽쒀서 개를 준 셈이었지요’ 민주세력의 분열로 안타까운 일이벌어진 것이지요.

󰊳 1990년대 인권선교활동과 분신정국 이후 두 차례 구속사건 1987년 12월에 나주에서 수세거부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고막원교회와 영동교회 윤구현 목사는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여 농민운동에 동참하였지요. 결국 농민들의 투쟁으로 단보당 벼 23.5kg을 냈던 지긋지긋한 수세가 철폐되었지요. 이후 KBS시청료 거부운동, 1992년에는 유기농 농사를 직접 짓고, 도농직거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농산물직거래운동을 했으며, 지역 교통난해결을 위해 ‘통일호 정차’운동도 실현하고, ‘의료보험 통합제 추진’을 위해 13년간 싸우다가 개인적인 피해도 많이 보고, 공직에 있는 자식들에게도 부담을 안겨주었지요.

1990년에 제가 속한 교단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남노회 인권위원회 실무자에서부터 인권위원장까지 20년 가까이 인권선교운동을 지속적으로 맡아서 하면서, 장기수선생 돌보기, 양심수면회, 민가협, 유가협 협력지원하면서 전국 교도소에 안가본데가 없이 면회를 다녔습니다. 해마다 인권회보를 발행하여 인권신학, 설교, 인권소식과 함께 인권운동실천 보고를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인간사랑과 정의, 평화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신앙의 실천차원이었습니다.

저희 전남노회에서 재정을 뒷받침해주었고, 또한 개교회에서 후원도 받아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고막원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와 협력과 지역사회의 신뢰와 격려가 있었기에 제가 활동할 수 있었지요.

1991년 4월 전남대학생 박승희는 ‘노태우 정권퇴진, 미국반대’를 외치다가 순결하고 아까운 청춘이 분신하였습니다. 이어서 ‘공안통치종식, 수서비리해결’을 외치면서 정상순 열사가 분신했는데 제가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았지요. 그 후로 고등학생 김철수, 김정순 열사 등의 분신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 장례식을 전교조, 민가협, 유가협, 목정평, 국본, 농민회, 목정평, 불교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치렀지요. 강경대 열사 장례식도 광주에서 문익환 목사님까지 오셔서 망월동에서 장례를 치뤘지요. 제가 하관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문목사님이 축도하셨지요. 1991년 4월 30일부터 1991년 5월 25일까지 전남대 병원 후문 앞, 금남로 광주은행 ․ 한국은행 사거리, 도청 앞 광장, YMCA 앞 등에서 분신정국의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집시법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되어, 광주 분신정국관련 집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오종렬 선생, 김정길 의장, 김병균 목사에게 물어서 기소했습니다. 불구속으로 약 2년 이상 재판을 받고서 저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지요.
   
 

* 그 후 1995년에 11월 29일 소위 ‘범민련 29인 구속사건’에 포함되어 광주에서는 김양무, 임재복, 고애순 선생과 함께 보안수사대에 의해 구속되었습니다. 혐의사실인즉

- 김병균 목사가 93년에 범민련 실행위원으로서 연세대에서 열린 ‘제 17차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의장단, 실행위원 연석회의’에 참석하므로 반국가 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는 범민련 남측본부 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

- 1994년 6월 10일 광주시 북구 유동 소재 YWCA 강당에서 개최된 ‘범민련 남측본부 광주․전남연합 창립준비회원 총회에서 범민련 남측본부 광주․전남 창립준비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 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을 찬양 ▪ 고무 ▪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할 목적으로 범민련 광주․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워원회를 조직하였다는 것,

- 1994년 6월 11일 광주공원에서 ’6월항쟁 정신계승과 쌀개방 국회비준 반대 결의대회‘를 주도하면서 ’미국이 이북에 핵사찰을 빌미로 해서 전쟁분위기를 고양시키려 한다‘는 등의 연설을 하므로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을 찬양 ▪ 고무 ▪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였으며, 김 목사의 연설에 고무된 남총련 소속학생 500여명이 광주시내로 진출하여 도로를 행진하면서 이를 제지하는 경찰관의 정당한 시위진압업무를 방해하며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협하는 집회 및 시위에 참여했다는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특수공무방해치상, 국가보안법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구속기간은 6개월이었지요. 겨울에 들어갔다가 여름에 나왔습니다.

* 1997년에, 류재을 장례식 경찰폭력진압 항의관련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어 6개월간 구속되었습니다. 1997년 5월 18일 오후 6시경 전남도청 앞 광장에 가서 ‘5․18 민중항쟁 17주년 기념대회 및 5․18 정신계승 범국민대회’ 연단에서 광주시민들에게, ‘지난 3월 20일 조선대생 류재을 군이 한보비리 진상규명 및 김현철 대선자금 공개요구 시위과정에서 현 폭력정권에 의해서 사망했습니다. 류재을군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생들에게 폭력경찰이 직격탄을 쏘아서 400여명이 다쳤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조대병원에서 피흘리고 있습니다. 경찰은 병력을 철수하라! 시민들은 도청 앞을 떠나지 말고 사수하라!’고 호소하였던 바, 이 사실에 분노한 시민들은 5․18 기념대회 행사장에서 일어나 조선대 류재을 군 장례식장으로 행진하다가 노동청 진행하므로 ’5․18 민중항쟁 17주년 기념대회 및 5․18 정신계승 범국민대회‘가 해산되었는데, 조선대생 류재을 군 장례관련 및 시위를 할 것을 선전․선동했다는 혐의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죄’로 검찰에 구속기소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벌금형 300만원을 선고받은 바가 있습니다.

본인은 학생들이 조대병원 응급실에서 피흘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고, 경찰들의 무모한 피해를 온 몸으로 막아보기 위해서 학생들에게 싸움중단을 호소했으며, 경찰에게도 폭력진압 중단을 호소했습니다. 목사의 양심으로 생명존중과 민족사랑의 발로로서 한총련 학생들과 경찰간의 폭력공방전 중단을 호소하는 중재에 나섰다가, 오히려 집회를 방해하고 폭력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참에는 여름에 들어갔다 겨울에 나왔지요.

* 이러한 고난은 이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길이었고, 목사로서 감옥에 갇혀있는 양심수학생들과 장기수 선생님들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우리 민족의 민주화와 인권, 평화통일을 하여, 한 알의 밀알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 2000년대 페트리엇 미사일 반대투쟁 및 평통사 운동, 세월호 진상규명, 사드배치 반대 등 운동까지
인권과 평화의 도시요, 민주의 성지라 불리우는 광주에 미군 페트리어트 미사일 부대가 2004년 11월 중순까지 총 460명의 본대원이 들어왔습니다. 6. 15 남북공동선언 이후 평화통일을 바라보면서 남북교류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때, 광주공항에 미국 MD(미사일방어전략) 체제에 편승한 페트리어트 기지가 들어온다는 것은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패트리엇 미사일 배치를 그냥 좌시한다면 광주가 소음공해, 기지촌 환락가 조성, 미국의 대중국 군사전략기지화, 광주와 한반도 전 지역을 전쟁의 위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불을 보듯 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광주공항 페트리어트 미사일 배치와 주한미군부대가 주둔하려는 이유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활로를 찾고 군사패권전략을 관철시키려는 MD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입니다. 미국은 MD 체제 구축이 방어용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언제 공격용으로 전환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고조시킬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MD 체제를 내세운 팍스 아메리카나’는 필연코 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평화는 화해와 사랑으로 오는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광주전남 112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한반도와 광주공항에 페트리어트 미사일 배치를 온 몸을 바쳐 다해 반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광주전남 시민단체, 재야, 평화통일세력이 힘을 합해 2004년부터 3년동안 송정리 공항 앞에서 금요일마다 집회를 꾸준히 가졌습니다. 김목사는 국정원, 광산경찰서 정보과, 전경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3년이란 세월을 마이크를 잡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인권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으로 마이크를 잡고 외쳤습니다. 2005년 5월에는 전국에서 모인 평화통일세력들이 집회 후에 송정리 공항 브로크 담장을 무너뜨려버렸어요. 여기에 대한 책임을 광주시민단체와 특히 김병균 목사에게 물어서 법무부가 ‘김병균 목사의 선동연설에 의해서 담장을 무너뜨렸다’고 손해배상 3,700만원을 물어내라는 것이었다. 이에 정채웅 민주변호사의 도움으로 항소하여 결국 고등법원에서 기소유예를 받아내어 지리한 법정싸움을 마무리했지요. 결국 페트리엇 미사일은 경상북도로 이전해 갔던 것이다.

이어서 최근에는 사드가 과연 남한에 들어와야 하는가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제)란 말이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한국이 배치하려는 사드체계를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이유는 사드미사일 자체보다는 사드미사일과 함께 운용되는 고성능 레이더인 ‘X밴더 레이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답이지요. 왜냐하면 X밴더 레이더는 탐지거리가 무려 2,000km에 이를 정도로, 북한지역은 물론 중국의 북경, 상해등 전략적요충지인 동부지역의 군사정보를 정확하게 탐지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남한의 최대수출국입니다. 남한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잡힌 외교를 해야 합니다. 사드배치야말로 한반도에 군사적, 경제적 긴장을 더해주는 애물단지라고 김병균 목사는 반대에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이번 4. 13 총선에서 분출된 민심을 무섭게 받아들이고, 북과의 대화의 물꼬를 터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풀어가야 함에도, 한미일 삼각동맹 구축과 대북 군사연습으로 북한을 고립시키므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은 이제 말기에 들어섰습니다.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위한 대화가 시작되야 합니다. 대북강경 정책은 모든 면에서 한반도 안위와 경제에도 서로 불리하지요. 먼저 남북간에 대화의 물길을 터서 정전협정 체제를 끝장내는 것입니다. 보십시요! 쿠바와 미국간에도 오랜 대결의 벽을 헐었지 않는가요? 한반도 평화통일 세력들은 한미 양국 정부에 북한과 대화를 열기 위한 6자 회담과 남북대화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는 사드배치를 취소하고 남북대화를 통한 6. 15와 10. 4 선언을 실행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정신으로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면서 김병균 목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정의, 평화, 인권, 생명, 나눔, 섬김의 세계를 위해 역사의 숨질 때까지 한반도 역사의 한 복판에 서서 이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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