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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골 이야기(기획)REFO 500(1517-2017)
REFO 500, 1년을 앞두고우리부터 개혁하자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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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23  22: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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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 500, 1년을 앞두고 

   
 

중세 독일의 대표적인 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교회개혁 500년(1517-2017년)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개혁 이야기로 풍성하다. 좋은 일이다. 유명 방송국이 기념 주화를 만들어서 팔기도 한다. 여유가 되는 분들은 독일이나 유럽 개혁의 자취를 직접 방문도 하고 감동들을 한다. 그렇다고 뭐 나아지는 것이 무언지는 알길 없다. 가보나 안 가보나 한 가지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독일 관광청의 장사 속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개혁과 관련된 단어의 사전적 의미들을 보면 개혁(Reformatiom)은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 고침”이고 혁명(Revolution)은 “기존의 사회 체제를 변혁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던 계층을 대신하여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권력 교체의 형식”, 혁신(innovation)은 “낡은 기술, 설비, 방법 따위를 버리고 새롭고 선진적인 기술과 공정을 도입하여 기술적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것”, 개선(improve)은 “부족하거나 잘못된 것을 고치어 나아지게 함”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개혁은 “고치자는 것” 이다. 얼마 만큼 어떻게 고치자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인 체제나 틀을 바꾸자는 것은 아니다. 루터의 개혁도 처음에 자신이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당 정문에다 구교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토론 논제 95개를 내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교회라는 질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잘못된 것을 바꾸려고 하였다.

당시 구 교회는 이를 받아드리기 보다 오히려 루터를 파문하는 등 보복을 하자 그때부터는 살려고 저항을 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간 것이 개혁운동이 아니었나 한다. 루터가 개혁가로서 명성도 얻고 제후들의 지지를 받을 무렵 개혁의 봉화가 농촌까지 전달되자 문제는 달라졌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착취하는 영주들과 주교들을 동일시하여 교회만의 개혁이 아니라 사회제도까지의 개혁을 요구한다.

그러나 농민들의 이런 기본적인 요구에 밀리다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세속 권력은 교회와 개혁가들을 부추켜서 그들을 탄압한다. 루터도 당시 개혁가로서 독일 제후들과 영주들에게 받은 이미지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뮌쭤와 그의 추종자들을 학살하는 명분을 제공한다. 어느 시대나 약간의 개혁은 용납하지만 근본적인 틀을 바꾸는 개혁은 어떤 명분으로도 불온시하고 제거된다.

정치적으로도 개혁이란 제한된 틀에서 하는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지금 개혁을 논하는 사람의 인식과 수준마다 그 내용이 다른 데 이와 같이 제도나 기구를 고치는 개혁에서부터 근원적인 것까지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기에 자신의 자리나 인식의 협소한 생각으로 개혁의 과제나 내용을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초기 개혁가들만 가톨릭교회의 제도나 관행에 대해서만 저항한 것은 아니다. 당시 발흥했던 민족주의와 과학의 진보, 인문주의(지성의 발전)의 지성을 가러막고 있는 것도 구교회였다. 그렇기에 개혁가들의 신학이나 태도, 결과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제 교회개혁 500년을 맞이하는 개혁 그룹들은 당시 개혁가들의 저항정신과 결과를 기억하자는 과거형 기념 행사보다는 진일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개혁가들의 구호인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총”이라는 도식에 머물러 있다면 500년 쳇바퀴를 도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개혁은 개혁자들의 삶의 자취와 현장, 상징들을 돌아보고 오는 감상적 개혁에서 시작하여 근원적인 패러다임의 전환까지 지금의 교회 개혁 담론들을 확장해야 한다.

따라서 이 글은 교회개혁이라는 다소 포괄적인 담론에 대한 문제의 제기이며 다양한 개혁론의 논의를 위한 제안이다.

1. 교회개혁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개혁(REFORMATION) 은 토대나 구조는 그대로 두고 외형이나 겉만 고쳐보자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교회가 사용하는 예전이나 설교, 상회 제도와 문화에 대한 변화를 주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실 제도권에서 신분적으로 안정된 목회자들이 열심히 하면 좋을 일이다. 그러나 토대까지 흔드는 근본적인 개혁의 주장이 유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당시 기성 종교(유대교)의 타락과 불법을 인정치 않았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저지르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적인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일부 대형교회와 교권주의자들이 목자의 도리를 벗어나 상석을 좋아하고 명예와 자리를 추구하며 물질에 집착하고 잘난척하고 제 자랑질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을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지 과격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나 전자와 같이 교회에서 안정적인 목회를 하는 분들은 이런 주장을 하기는 사실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남들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조직과 질서가 받아드릴 수 있는 한 개혁을 추구하면 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만큼만 한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지 자신의 의식과 교회질서 등을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반대하거나 공격해서는 안 된다. 정치나 교계나 항상 이런 중립지대의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을 통하여 개혁이 방어되고 지연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가 속한 현장과 위치에 부합하는 개혁을 해 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이다. 

2. 교회개혁,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멕시코 장신대 교수인 홍인식 박사는 2014년 한국 방문시 '예장뉴스' 독자들과 나눈 교회개혁에 대한 토론에서 개혁의 문제를 제도나 문화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도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날 교회가 아무 의미 없이 사용하고 있는 신학 용어나 교리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다. 천국과 지옥, 죄와 벌, 초월이나 영혼의 구원 등과 같은 전통적 신학의 언어에 대하여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쉬프트(인식체계의 대전환, paradigm shift)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굉장히 중요한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교회 개혁은 제도나 관행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잘못된 이론 토대를 제공하는 허구 논리와 거짓 이론을 벗겨내야 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마약과 같은 신앙과 신학적 용어에 대하여 근본적인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모든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문제들도 제기하고 도전해 나가야 한다. 이런 것은 하루 아침에 고쳐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영국의 노예 해방자 W. 월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8.24 ~ 1833.7.29)의 집념과 노력을 보면 그가 20대에 시작한 노예무역의 관행에 대하여 회개하고 노예폐지운동을 시작하지만 결국 완전한 것을 보지는 못하고 죽었다. 오늘날 개혁의 구호가 단순히 내 교회나 교파만를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단의 구조나 관행, 신학교의 문화와 풍토와 대형교회들의 잘못된 관행들, 유명무실한 당회와 독점된 재정관리, 당회장의 수직적 지위 등 우리사회가 이룩한 민주적인 원리로도 받아드릴 수 없는 일은 모두가 개혁의 대상이다.

3. 개혁, 얼마만큼 할 것인가?

또 개혁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현장(교회나 조직)을 개혁하는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개혁에서 항상 자신을 제외 하거나 빼고 남에게 주문하는 개혁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이상적인 구호라도 열매가 있을 수 없다. 이제 말한만큼은 자신이 일하는 자리에서부터 개혁을 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이루고 잘못된 대형주의 교회를 유지시켜 주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행을 끊어 내야 한다. 교회라면 교회내의 전통적인 위계질서나 소통 등 민주성과 대중성을 의식적으로 확보해 가야 한다. 나하고 상관없는 대상이나 일에 대한 표어식 개혁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자신의 교회, 자신의 현장에서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 11월에 출범한 PCK의 “교회개혁 예장 목회자 연대”는 바로 그런 개혁의 아젠다들을 제대로 설정한 모임이다. 그 동안의 개혁 논의들은 모두 자기만 빼고 남을 비판하는 논평식 개혁에 머물렀다. 남에 대한 지적질 역할에서 앞으로는 자신으로부터의 변화를 도모하자는 것이다. 이제 제 2기 조직을 정비하고 새롭게 시작을 하는 데 큰 기대를 걸어 보려고 한다.

개혁은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은 위험한 것이다. 개혁은 개혁을 하려는 이들의 철학과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비판자도 생기고 억압자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개혁가의 신앙과 역할과 사명은 귀한 것이다. 개혁이 금방 받아 드려지고 주목을 받는다면 모두가 개혁자들이 될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을 때 모두가 머뭇머뭇거릴 때 앞장서서 불투명한 미래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바로 개혁자의 운명이며 사명이다.

4. 개혁의 '피로증후군'

따라서 개혁은 사실 피곤하고 힘든 일이다. PCK 정영택 총회장은 2015년 6월 21일 새문안교회에서 행한 고 강신명 목사 30주기 추모예배 설교에서 “지도자가 되는 순간부터 개혁의 대상이 된다. 나도 개혁을 좋아한 사람이지만 총회장 되고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정 총회장의 말은 정직한 고백이다. 역대 어느 지도자 어느 총회장으로부터도 듣지 못한 말이다. 정 총회장은 과연 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누구든지 영향을 주는 자리에 있다면 그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것을 인식하는 자가 바로 개혁자다.

개혁은 바로 내가 대상이며 주체이기 때문이다. 높아질수록 힘이 생길수록 그런 말듣는 것을 당연시 해야 한다. 즉 명예와 함께 공공적 사명은 반비례하고 노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싫으면 조용히 살면 된다. 또 모든 것이 개혁이면 아무것도 개혁이 아니듯이 개혁에도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너무 개혁, 개혁하면 개혁의 대상은 오히려 반 개혁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이 이룩한 자리와 역할을 즐기고 안주하고 싶은 본성이 있다. 그래서 왕조시대에도 왕에게 아침 저녁으로 개혁을 하자고 채근하던 신하를 결국 다른 신하들을 부추켜서 죽이는 일도 있었다. 아무 일이나 누구에게나 개혁을 들이대기보다는 개혁에 대한 공감대 형성을 위해 개혁의 긍정적인 면이나 성과를 보여주면서 해야지 날이면 날마다 만나는 사람보고 개혁 타령만 해서는 안 된다.

5. 건강한 기독교들인이 교회를 떠난다. 

한국의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지난 6월 29일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신앙인이지만 지금은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담자가 이렇게 묻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지요? 그렇다고 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知性)적인 고민을 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거든요.”

오늘날 목사의 설교에서 예수님이 교회를 만들고 지키고 교단의 교리를 가르친 게 아님에도 인위적으로 그것을 강조한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의 인생관ㆍ가치관이 되어야 하는 데 내 교회을 위해 축소되고 개인화된 신자만을 찍어내려는 것에 대하여 지성인들은 불편해 한다. 오늘날 교회가 어느 한 교회의 유지와 확대, 재생산에 몰두하는 것을 깨어있는 평신도들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목회는 아니고 비즈니스다.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것도 바울이 보여준 것도 아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지도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말도 하시지 않았다. 교파 교회는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제도나 질서인데 그것을 유지하거나 지키는 것이 신앙이 아님에도 지금은 한 교회의 부흥이나 건축, 목회자의 야망에 숙주가 되라고 하고 신자들에게 천국과 축복을 대가로 무한대의 시간과 물질과 시간을 요구한다. 이것은 사실 사기극이다.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지 한 번 물어보자. 특정 교회당을 짓는 일이나 터전과 재산을 넓히는 일에 돈을 내고 성직자에게 잘 보이고 교회의 자산이나 외연을 넓히고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목표가 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교회는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온 생명을 살리는 일이 먼저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6. 전투적 무신론에서 생존적 무신론

최근 서구에서는 무신론 신앙인이라는 말이 있다. 무신론자를 위한 교회가 세워지고 신학교에 무신론 담당 채플린을 두고 있다. 그들의 무신론에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들의 무신론은 현대 교회가 제멋대로 각색하고 만들어 낸 신들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단이라고 하는 것들도 기존의 종교나 정통이 타락하고 제 길로 가지 않을 때 출현했다. 이제 어느 한 교회 교단이 가르치는 신학과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한 번 따져봐야 한다. 내 신앙의 잣대나 경험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서구 우월주의와 번영 신학, 외형적 성장을 조장하는 신학, 특정 민족과 국가의 전쟁을 합리화하는 논리, 소비와 개발을 축복하는 신, 물질 우위와 세계화와 맘몬을 긍정하는 신은 모두가 한 시대의 기득권층이 만들어 낸 신이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개혁은 더 이상 이런 신을 가르치고 신도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신앙적 행위로 신의 노여움을 풀거나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하는 짓을 그만 두어야 한다. 이원론과 초월적 신인식과 교리 장사를 끝장내야 한다. 일찍이 슐라이에르마허(F. D. E. Schleiermacher, 1768~1834)도 당대의 교회가 거짓으로 만들어낸 신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했다” 라고 비판한 바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우화나 신화로 갈릴리 예수를 왜곡하고 또 예수가 만나고  선포하신 복음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저들은 참 좋으신 예수, 만병통치자 예수, 요술쟁이 예수, 무당 예수를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에서도 신학교에서도 어느 누구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모두가 목회현장에서 자기 교회를 키우고 신도를 늘리고 이름을 날리고 유명해지기 위하여 만들어낸 자기의 비지니스 논리다.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초청하는 우리 교단의 한 부흥사가 개발했다는 “동역 헌금”이라는 헌금이 있다. 이 돈은 교회 재정부에 들어가지 않고 전액 목회자에게 주는 돈이란다. 평소에 고생하고 수고하는 목회자를 대접하자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르치는 자도 받아 드리는 것이 우리 교단의 현실이다.
   
     * 예수가 지금 오신다면 모건스탠리, 골드만 삭스같은 금용재벌가들을 그냥 두시진 않을 것이다.

결론

중세 천주교 타락의 정점이었던 “교황무오설” 에 대항하기 위하여 개혁가들이 차마 신성시하는 교황을 직접 언급할 수가 없자 만든 구호가 “만인 사제설”과 “오직 말씀”이다. 그런데 지금 이 “오직 말씀”은 어떤 자리에서 누구에게 독점 되었나? 오늘날 개신교 성직자들이 바로 그 말씀의 권위와 해석권을 독점한 것 아닌가? 

교황의 성경해석권을 개신교가 대신 차지한 것이다. 문제는 제대로 공부하고 자격을 갖추고 검증받은 바 없는 이들이 모두 제 멋에 겨워 자기 강단에서 인기 영합의 만담이나 무용담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오늘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제 개혁은 교회가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가 죽고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살려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제자리에 계시게 해야 한다. 개혁이란 다시 말하면 REFORM이 아닌가? 재정립 아닌가?  

예수를 미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룩하고 차지한 교권의 자리와 명예, 예수보다 커져버린 욕망과 이권,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버젓이 앉힌 우상들, 재물들을 타파해야 한다. 우리가 하루종일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를 돌아보자 과연 예수의 말을 하고 예수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오늘 방송에서 한 목회자의 설교를 들었다. 같은 목사가 듣기에도 너무 은혜롭고 옳은 말씀을 강약에 맞춰서 하고 있었다. 목사가 들어도 귀한 말씀이었다. 그러니 성도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 교회의 성도들이 복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은혜롭고 귀한 말씀을 전하는 그 목회자의 삶은 어떨까? 그가 자신의 삶과 생애에 걸맞는 설교를 한 것일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이제 말로하는 시대는 지났다. 더 이상 말을 듣고 감동을 받는 시대가 아니다.  이제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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