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越山) 조남기(趙南基)목사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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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越山) 조남기(趙南基)목사인권운동과 예목협 운동의 초기 지도자
유재무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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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6  15: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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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山 趙南基목사(청담교회 은퇴, 1921-1990)

   
 *고 조남기 목사 회갑연(1982년, 서울 YWCA) 좌로 오균현, 나, 박영주 목사, 김봉화 목사, 조 목사, 송유성 목사, 송진섭 전 안산시장

새 해

빗장을 활짝 열어 제치면 칠흑 같은 어둠도 새 바람 불어들고
질식사 직전 같은 공기가 바뀌면 신선한 새 아침 햇님을 봅니다
헬리혜성 화려한 먼지 뭉치마냥 열광인 듯 타오르는 탐욕의 욕망에서
무수히 음모가 흘러간 나날들 지난날 아픔들을 짓이긴 한(恨)의 해
찬 눈빛 눈물을 글썽거리며 씻은 듯 먹구름을 휩쓸어가며
새 바람 폭풍처럼 함성을 외치려고 두둥실 밝은 해가 떠오릅니다
새 바람 자유는 새해를 불지른 듯 어둠 속 어둠을 살라먹고
복수 같은 얼굴이 빛나면서 이글이글 새해가 타오릅니다
마지막 주(主)님의 재림 그 분노마냥 활활활 새 날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산 넘어 산속 등성을 치받으며 육중한 바다 물길 파도를 일으키며
거대한 대역의 장막을 불지르듯 파아란 하늘을
1987년 이 아침 날을 두둥실 새해가 떠오릅니다

고 조남기 목사는 장로회신학대의 전신인 이북 평양에 있던 평양신학교를 4회로 졸업을 하셨다고 들었다. 장신대 학장을 지내신 박창환 목사님과 입학 동기시라고 하신 적이 있다. 당시는 일제 말기로 제대로 된 신학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학기를 모두 마치지 못하고 그만 두어 끝까지 졸업을 한 학생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때 가르치던 선교사들도 철수하고 강의도 일본어로 하니 신학생들은 싫어하고 조 목사도 주로 문학에 심취하여 학창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리고 졸업후에도 목회를 하지 않으시고 미션 학교서 교편을 잡고 가르치다가 월남해 군포교회서 목회를 하던 중 한국전쟁이 나 정훈장로로 입대를 하시게 된다. 

이후 우리군에 이승만 박사에 의하여 미국식 군목제도가 생기자 전과하셔서 여러 군인교회들을 섬기며 중령으로 예편을 하셨다. 군 생활 중에 많은 일화가 있지만 이북서 인민군대에 강제입대 했다가 전쟁중 포로가 된 반공포로 고영근 상등병(후일 목민선교회 목사 활동)을 만난 일이다.  한국군에 재입대해 논산훈련소에 들어왔을 때 훈련소에 군목으로 계셨다고 한다.

그때의 다른 일화는 전두환 씨도 훈육 중대장으로 같이 복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 목사님은 제2 훈련소 군목 소령으로 상관이셨다고 한다. 그 연유로 80년 내란 예비음모 사건으로 구속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언도를 받고 아무도 그 행방을 모를 때, 당시 교계에서는 누군가가 정부에 독대를 하여 목숨만은 살려야 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있었다.

인권위원장으로 김대중 선생 구명

그래서 당시 NCCK 인권위원장이신 조 목사님이 나서시게 되었고 청와대에서 전두환 씨 면담을 신청하고 독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일화다. 조 목사님도 마음으로는 은근히 겁나셨다고 한다. 나는 새도 떨어 뜨리는 권세를 잡은 전두환 씨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시국도 시국인지라 떨리는 가슴으로 청와대에 들어갔고 그래도 기는 죽지 않으려고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 씨 앞에서 다리를 꼬기도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당시 전두환 씨는 처음에는 좀 거들먹 거리더니 나중에는 조 목사님에게 선배님, 선배님 하며 군에서는 한 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라고 너스레를 떨더니, 12.12사태에 대하여 "아, 내가 그때 앉아서 죽게 생겼는데 그냥 있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는 것이다. 12.12사태는 당시 최규화 대통령 대행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체포 허가를 내주지 않자 이상제 보안대 상사가 무력으로 자기의 직속 상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지른 일이다.

당시 전두환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합동수사본부 부장과 중앙정보부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군 내부에서 이런 전두환의 야심을 알고 서종철 국방장관 등이 그를 동경사(동해안 경비사령부)로 전근를 시킬 계획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근을 가면 군복을 벗게 되고 그러고는 죽는 게 뻔하니 선수를 친 것이었다고 솔직한 말을 하더라고 하셨다.

그래서 조 목사님은 찾아온 목적을 말하며 김대중 선생이 살아있다면 면회를 할수 있게 해 달고 하자 "선배님이 이렇게 부탁하시니, 알았다" 고 하고는 특별 면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형언도를 받은 김대중 선생이 이제 사형 집행일만을 기다리며 남한산성 육군 형무소에 있었다는 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인해서 국내외의 양심단체와 정당, 온 세계가 김대중 선생 구명운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형무소에서 만난 김대중 씨는 이제 죽음을 앞둔 사형수로 두려움과 공포로 떨면서도 한편 반가워하며 "목사님,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이었다는 일화를 내게만 말하기도 하셨다. 그후 김대중 선생 석방운동이 결실을 맺어 미국 망명길을 오를 때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이희호 여사를 통하여 금일봉을 전달하시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정치와 기독교 그 간격

그후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 후보가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김대중 후보는 민주당 탈당하여 평민당(평화민주당)을 만들었다. 야권의 분열은 곧 패배라는 경고를 듣지 않고 두 지도자가 동시에 출마했다가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을 축으로한 평민당의 출발은 참으로 초라했다. 일부에서는 오직 대권에 눈이 먼 지도자의 사심이라고 비난하였고 이렇다 할 명분도 없었다.

그때 조 목사님은 그 평민당을 창당하는 행사에 초청을 받고 많은 이들이 만류하는 자리에 의리 하나로 참석하셨다. 사실 당시 재야 기독교 지도자들은 거의가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다. 박형규 목사, 오재식 선생, 인명진 목사, 김동완 목사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우리교단 조남기, 고영근, 금영균, 문장식, 차선각목사는 아니었다. 그 창당 행사에 조 목사님이 가시므로 김대중 선생은 재야와 기독교의 상징성을 그나마 확보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조 목사님을 단에 불러 나오시게 하고 감사를 전했지만 지금 와 보면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정치인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사는 것이다. 자기가 어려울 때는 간이라도 빼주지만 권력을 갖고 힘을 가졌을 때는 외면하는 것이다. 그때 단일화를 하지 못하고 양김이 둘이 출마하여 정권을 가져오지 못하자 그 비난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이 낙선했지만 조 목사님은 낙심하지 않고 '민평연'이라는 조직을 통하여 고영근 목사나 정상복 선생님과 같이 일편단심 김대중 선생을 돕는 재야의 어른으로 끝까지 의리를 보이셨다.

내가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 것은 김대중 정부 말기 문화관광부에서 고 조남기 목사에 대한 훈장 추서가 있었고 NCCK가 조 목사님을 추천하게 되어 내가 조목사님의 이력과 경력을 적어 올린 적이 있었는데 결국 받지 안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화운동을 한 기장측 故 서남동 목사,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안병무 박사, 이문영 교수 등은 모두 받았다. 

당시 문광부 장관은 기장의 김성재 목사였으며 기장의 김상근 목사는 제 2 건국위원장으로 성공회였지만 기장측과 가까운 이재정 신부는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박형규 목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내는 등 그 외 발 빠른 이들은 거의가 국가기관에 취업을 했거나 안돼도 사외 이사, 복지관 관장 등으로나마 자리들를 나누었다. 이게 기독교 운동 역사에서 예장의 비애다. 일들은 같이 고생을 하고도 결국 들러리 만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때 어려운 민주 인사들을 돕고 정권을 창출하는 데까지만 하고 기독교는 계속 재야로 남았어야 하는데 권력에 승차를 한 일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기독교는 재야 운동의 중도로 남아서 시민운동의 주역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선생도 어차피 정권을 창출했으니 도와달라는 이유로 승차를 한 것이다.

그래봐야 국회의원 장관 비서관이나 하고 권력의 주변에서 기생하였기에 오늘날 기독교 운동의 주력이 정권과 하나가 되는 바람에 여러가지 기독교운동의 주체성이 괴멸하게 된 것이고 시민운동이나  NCCK가 약화된 것이라고 본다.

조 목사님은 노년에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1992년 봄에 세상을 뜨셨는데 정년 은퇴한지 2년 후다. 장례식을 강남노회장으로 청담교회에서 당시 묘동교회 원로였던 박한용 목사의 집례로 치러졌다. 마지막을 투병을 기도원과 원자력 병원에서 하셨는 데 당시 태백에서 목회하던  나는 겨우 장례식에만 참석을 했다. 장례식에는 당시 민주당인사로는 이중재 의원만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조남기 목사님처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목사도 흔치 않다. 학창시절에는 일제에 저항하고 문학에 심취하여 문단에도 등단하여 자전적인 단편소설과 시를 많이 남기셨다. 평소에는 말 수가 없으시고 만나는 사람도 적고 행동 반경이 넓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개방적인 사고 폭은 누구보다 넓으셨다.

청담교회 전도사로 만난 사람들

내가 조 목사님을 가까이 모신 것은 1981년 청담교회의 전도사로 부임을 하고 부터다. 당시 먼저 출석하던 송유성 목사가 나를 소개하였다.  나는 청년회를 지도하면서 교회 구역예배와 여전도회등 전임 전도사 역할을 하였다.  당시 청담교회에는 서울대 해직 교수셨던 한완상 장로와 당대의 최고 인권변호사 홍성우 장로, 안재웅 총무(KSCF), 오균현 선배(양서협동조합), 송기원 선생(작가, 당시 복역 중)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기독학생들과 청년들이 많았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양심으로 독재정권을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지식인들이 모였다. 그 사람들은 우리는 말 못하니 시대의 양심인 목사라도 그런 설교를 하고 말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요즘 말로 강남좌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조 목사님이 인권위원회 활동을 통하여 당시 구속자와 억압자를 지원하고 돕는 것이 목사와 교회의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는 이와 다른 생각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이것이 갈등으로 작용을 하였지만 그들도 그것으 드러내놓고 조 목사님을 반대하지는 않은 훌륭한 어른들이었다.

그러나 처음 조 목사를 청담교회에 청빙한 이봉린 원로장로는 이것이 보기 싫어 주변의 임마누엘교회(신인현 목사)로 적을 옮겼다. 그리고 조 목사 소천 후 다시 돌아와 아직도 생존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당회원인 김정학 장로, 백순길 장로, 방순국 장로가 계셨는데 모두 감히 조 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나 설교에 대하여 말한마디 안하신 귀한 분들이다. 속으로는 많은 불만들이 있지만.....

조 목사님이 세상을 뜨시고 다음 해에 하도 아쉬워서 NCCK의 회보에 조 목사님을 추모하는 글을 썼었는데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조 목사님과의 개인적인 일화등은 앞으로 더 소개를 할 시간이 올지 모르겠는 데 이 글도 사실은 예장뉴스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기록한 것이다. 

인권운동은 김윤식 목사 때문에 

조 목사님이 NCCK에 참여하셔서 인권운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1970년대 초 서울동노회, 수유동교회에 시무 하셨다. 당시 총회 서기를 대행하던 예전읍교회  김윤식 목사가 종암교회로 청빙을 받았을 때 당회장을 맡으신 것이 인연이 되셨다. 그후 김윤식 목사가 NCCK에 인권위원으로 평소 대쪽 같은 이미지의 조남기 목사님을 기억하고 추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NCCK의 인권위원으로 시작해서 위원장으로 앞장서서 많은 수고를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 목사님은 이 일을 즐거워 하시고 기쁨으로 하신 것만은 사실이다. 아마 1976년부터 1986까지 한 10년은 하신 것 같은데 그 10 년은 한국사회의 가장 어둡고 힘들고 두려운 시대였다. 학생들의 구속과 군사독재의 발악으로 인한 공안정국은 반대자를 모두 빨깽이로 몰아 죽이는 시대였다. 그 어려운 시대에 그래도 조 목사님이 그 자리에 계셨으니 뭐라 말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NCCK의 활동과 그 위상을 세계교회에 알리고 인권과 양심수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 당시 실무자들이 잘 도와주셨는데 이경배 국장(훗날 마사회 회장), 윤수경 선생(사회복지 공동모금회)을 이어 김동완 목사가 사무국장을 맡았고 그 외 강구철 선생, 류태선 목사, 임광빈 목사 등이 실무자를 지냈다.

조 목사님은 이 일로 목회에 어려움과 지장을 받으신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감당하는 끈기와 고집이 있으셨다. 그전에도 봉천제일교회나 서울시 넝마주의들을 위한 야학과 목회를 거쳐 수유동교회에서 중견목회도 하셨지만 아마 청담교회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극적이었다고 보인다.

청담교회 역사

청담교회의 창립배경은 이렇다. 당시 강남에는 가장 오래된 교회로 신사동교회(기장)가 유일했다. 그리고 강남과의 왕래는 한강대교와 천호대교 외에는 다리가 없을 때였다. 다른 곳은 다 배로 왕래했다. 내가 중학생 때에 한남대교가 준공 되었고 영동대교는 군에서 제대한 78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청담동에서 걸어서 신사동교회로 출석 중인 방사라 권사가 너무 멀어서 그의 청담동 자택에서 가족들을 중심으로 모이다가 청담교회로 분립 되었다.

그후 역삼동교회도(류순하목사) 세워졌다. 지금도 방사라 권사인 방순국 방순천장로나 방조일등 그 후손들이 청담교회에서 출석하고 있다. 조 목사님이 청담교회에 부임을 하게 된 연유는 6.25 동란에 피난을 가시다가 뚝섬나루 건너 청담동 봉바위 옆에 있는 이 교회를 들르게 되었는데 이봉린 장로에게 전쟁 소식을 전해 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전쟁 후 청빙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기독교 장로회 쪽에서는 인권운동을 하면 대우도 받고 유명해지기도 하지만 당시 예장은 사정이 달랐다. 목회를 하면서 시국의 어려움에 대처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예장에서는 아마 최초의 운동권 목사라는 칭호가 어울릴 것이다. 당시 수도권은 서울노회, 경기노회, 서울남노회, 서울동노회가 전부였는데 서울남노회 파송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 위원도 하셨다.

동남노회 활동 

일화 중 하나는 소망교회 출신으로 유명한 이진우 검사가 장로가 되기 위하여 서울동남노회에서 고시를 치르는데 마침 조 목사님이 정치부장이셨다. 당시 이진우는 검사 시절 인명진 목사의 설교 내용을 트집 잡아 기소했었는데(미가서) 성서를 기소한 유일하고 무식한 교인 검사였다. 조 목사는 그를 장로고시 면접에서 떨어 뜨렸다. 사람들은 그런 조 목사의 기백에 놀랐다. 곽선희 목사도 반발하였지만 결국은 추상같은 조 목사의 의지대로 한 회기 지나고 고시부장을 조 목사가 그만 두고서야 이진우 씨는 장로가 되었다.

이렇게 옛 어른들은 문제의 사안을 반대는 하지만 끝까지 못하게 하시지는 않았다. 자신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지만 그 교회의 사정과 선택을 존중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포용성을 가지고 문제를 넓게 보는 안목들이 있으셨다. 그러나 그후 이진우 장로는 민정당으로 고향 포항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권세를 누렸지만 자기 담임목사인 곽선희 목사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가 일찌기 세상을 뜬다.

조남기 목사님은 그만큼 여유롭지만 대쪽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목회에서는 너그럽지는 않은 분이었다. 한 마디로 옛날 분이기는 하지만 당회원인 장로들과 얼렁설렁하는 목회는 아니었다. 아마 요즘도  그런 목회를 했다가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특별히 뭐 잘못하고 독재를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절도 있는 목회를 하시다가 보니 개인적으로 따뜻한 면이 좀 없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사건과 사람을 정확히 보시고 정의와 의리로 타협 없는 성격은 타고 나신 것 같았다. 바른 목회의 전형을 사회적으로 실천하시지는 못했지만 목회와 구역 운영의 자율성과 교회핼정의 투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 같다. 

조 목사님은 한국 기독교의 대표로 일본에 방문해서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강연을 하시고 소개도 하셨다. 그리고 직접 쓰신 "인권문제화 과정" 이라는 책자는 당대에 회귀한 인권문제에 대하여 귀한 자료다. 일본어에도 하시고 일본어 설교책과 주석을 보시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명설교는 그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조 목사님의 설교는 참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파토스가 있었다. 1980년 다음 해 KSCF와 EYC가 연합으로 연동교회당에서 연 "부활과 4.19" 라는 강연회에서의 설교는 성경을 인용하면서도 역사적인 독재자의 종말과 비극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고 시원하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고도 구속을 면한 것은 인권위원장이셨기 때문이다. 그때 이 사건으로 김철기 총무와 은우근 교수(성균관대생)가 동대문경찰서에 잡혀가 매을 맞고 고생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주일 설교도 언제나 반정부적이고 의식화와 선동적인 설교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성경의 본문을 그토록 시대에 맞게 해석하시고 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같은 설교을 하신 것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배짱과 예화, 해석을 하실까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진짜 거룩한 배짱이 있는 분이셨다. 설교 한편으로 모든 말을 하시는 분이다. 요즘 농담이나 우스개 소리나 하고 애매한 교인들 보고 큰 소리나 치는 설교가들이 많은 데 참 한심한 일이다.

단편 수필집과 시집을 몇 권, 강연집과 인권 문제 등의 책을 내셨지만 설교집은 한 권도 내지 않았다. 내가 목사님께 설교집 좀 내시라고 권했더니 부끄럽다고 하시면서 설교는 독창적으로 하기가 어렵다고 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얼굴이 붉어지셨다. 이렇게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엄격하시면서도 겸손하시고 부끄러워 하시는 어른이셨다.

요즘 말도 되지도 않는 설교나 남의 것을 베껴서 설교집이라고 내지를 않나 그것도 한두 권도 아니고 시리즈로 내는 데 참 망신까지 시리즈로 당하는 줄도 모르는 분들이 많다. 조 목사님은 '아마 돈 벌이가 되니 내는 것 같다'고 하시기도 했다. 나는 1983년 초에 청담교회에서 조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하여 내 처와  같이 출석을 했는데 예배 후에는 말을 시원시원하게 하는 새 신부가 재미있어서 항상 곁에 두고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만년에는 직장암으로 고생하시면서 평소에는 관심 없으시던 기도원에 가셔서 안수 기도도 받으시는 등 치유를 간절히 바라셨다. 주일 설교와 수요일 설교를 빼고는 거의가 종로 5가 주변에서 회의와 구속자 돌아보는 일을 하셨다. 그때 조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직접 인도하지 않으셔서 우리들이 돌아가면서 했는데 그것도 당시는 파격적인 목회였다. 그러고도 목회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를 알 수 있다.

지도자는 누구나 공칠삼과가 있다.   

그런 전통적인 것으로 목회와 목회자를 평가하고, 교인을 끌어 모으는 목회와 성공주의 신화와 교인들을 들들 볶아서 돈이나 내게 하는 기복주의를 단연히 거부하신 분이다. 목회 사역의 시대적인 특성과 사회적인 요구를 몸으로 보여주며 정도를 걸으신 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이 모든 것을 인내하며 참아주고 이해하신 청담교회 교인들도 참 대단 분들이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목사님을 만난 것은 아마도 불행이였는지도 모든다. 강남구라는 하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은 그 동네에 전통적인 기반을 갖고 교회를 오랜 기간 자키고 섬겨온 토착교인들이 절반이상이었다. 장로들 구성도 80년 이후에야 홍성우장로가 충원되었지 이봉린, 김정학, 백순길, 임은영, 장로 모두 청담동 토박이들이다. 그러나 택지가 들어서면서 서울법대 고 강구진교수 행제들(아들이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기자) 신영교 우명미집사(배우 신애라 부친) 홍변이나 오균현 권병길등 진보 기독교 인사들과의 조화에 문제는 있었다.

여기서 조목사님이 좀더 포용적인 목회로 모두를 끌어 않고 가셨으면 하여 말씀을 드렸다가 사단이 난 것이다. 이후 오래된 분들의 인내가 있었기에 봉합이 되여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목회자들이 잘 살펴서 목회해야 하는 점이다. 지금도 의식이 앞서는 일부 목회자들이 교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설교에 담는 것은 주의해야 하는 데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앙공동체지 정치 결사체나 반정부 진원지가 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목회자는 바른 것을 전하고 가르칠 뿐이지 못알아듣고 안따라 온다고 하여  애 탈일도 그들을 주눅들게 할일이 아니다. 모두가 주님이 맡겨 주신 양떼로 알고 기도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서 목양을 하면서 긴 시간 호흡으로 섬기는 것이 참 목사상일 것이다.  

조목사님과 이별 그리고 해후

불행한 것은 내가 청담교회를 나오게 된 일이 1983년 결혼 후 목사님과 불화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우리를 잘 받아 주셨고 이해해 주셨지만 이러한 목회방식에 대해 교회와 당회원의 불만을 다루는데 있어서 너무 강하시고 엄격하신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어서 조언을 한다고 한 것에 대하여 대노하셨고 항명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만 교회를 사임하고 나왔다.

지금 같으면 더 잘 보필할 수가 있었을 것인데 하는 후회의 마음이 크기만 하다. 그후 적적하셨던지 1998년경 다시 나를 부르셔서 목사님과 해후하게 되었고 생전의 마지막 책인 "기독교와 인권" 의 원고정리와 교정을 봐서 출판을 도와 드린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 "충신보다는 간신이 더 좋다" 라는 말이 생각이 난다.

1994년도 인가 목사님 소천 후에 사모님이 아들 조은철목사가 있는 미국으로 이주를 하실 때 상계동에 사시면서 마지막 짐 정리를 하다가 조 목사님의 책을 누굴 줄까 생각하다 내가 생각 나서 연락을 하셨다. 그래서 옛날 보시던 책을 가져왔는데 그 중에서 친필 설교노트가 한 권 남아 있었다. 노년에 손이 떨려서 펜으로 한문과 한글을 쓰셨는데 마치 개미가 잉크에 빠졌다가 걸어간 것 같은 글씨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평소 원고를 정리했던 나는 잘 알아본다.

나보다 한살위인  아들(조은철)은 염광여고 영어 교사를 하다가 아버지 덕에 다른 일들을 할 수가 없어서 도미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LA지역에서 침례교 목사가 되여 목회를 한다고 들었다. 연로하신 한동현 사모님도 지금은 미국에서 그 아들과 같이 생존해 계시고 외동 따님이 계셨는데 일찍 세상을 뜨고 외손녀가 결혼을 하여 청담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조목사님 추모집 

조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이 어떤 식으로든 후진들에게 이어가야 하지 않겠느냐? 는 교단의 여러 선배 어른들의 바람이 있었다. 내가 그 책임이 있는 데 기회가 안 되었다. 그분의 삶이 재 조명돼야 다른 분들도 반열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장의 인권운동 목회자 운동과 예장의 시대정신이 조남기 목사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6년인가 내가 일본 선교사로 있으면서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함순영, 임채돈, 김미숙 등 당시 청년 활동을 하던 친구들과 만나서 해후를 나눴다. 이후 후임으로 시무하는 강병만 목사의 초청을 받아 참으로 오랜 만에 청담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다. 그때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고 김정학 장로의 부인인 박정윤 권사와 고 백순길 장로의 아들 백보현 장로, 이봉만 장로 등 그때 청년들이 결혼들을 해서 만났다.

그외 많은 분들이 내 얼굴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제 보고 만난 것처럼 반갑게 얘기들을 하니 당시 시무하던 강병만 목사님이 "내가 이 교회 온지가 지금 20년이 넘은 목사인데, 유목사가 은퇴 목사같은 기분이 든다"고 하셔서 좀 민망한 마음도 있었다.

강 목사님은 청주 대농교회에서 오셔서 한 때 총회적으로는 서기도 지냈고 기독교 방송 이사 등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청담교회의 교세는 정체되었고 내분에 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프다. 강 목사님은 감사하게도 조 목사님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게 되면 후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 자리를 만들지는 못하고 있다. 앞으로 예장의 어른들을 모아서 시제형식(?)의 추모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구상 뿐이다.

조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초대 NCCK 인권위원장, 예장 인권위위원장, 영등포산업선교회 위원, 초대 예목협 회장, 사회선교협의회 회장, 초대 총회 노동상담소 소장도 역임하셨는 데 모두가 사양하고 힘든 일들을 손수 맡으시고 뒷돈도 많이 대 주셨다. 보톻은 이름도 나고 수입도 좋은 자리를 선호하는 데 조목사님은 좀 독특하게 어려운 자리를 맡고도 돈도 내는 특이한 분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고 구속된 양심수와 학생 노동자들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공간을 열어주시고 그늘이 되어 주셨다. 그 어른의 정신과 자취가 아쉽다. 

   
    *좌로 부터 조남기,박형규,김형태,강문규,오재식,이우정,권호경,이문영, 앉은이 안재웅, 김용복

월산(越山) 조남기(趙南基)목사의 약력

1921년 12.10일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매곡리 조은구,박구하씨을 부모로 3남 3녀중 2남으로 출생
1946년 평양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 전신) 졸업후 학교 교사
1946년 한동현씨(한열길,김인호씨의 8녀)와 결혼 황주읍 교회, 경기도 군포교회시무
1950년 6.25 전쟁에 군목입대 하여 중령 예편후 봉천제일교회,수유동교회시무
1976년 서울 청담교회 시무(90년 은퇴시까지)
1976년-8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장
1977년-79년 한국기독학생 총연맹 이사장
1979년 한미 국제인권문제 협의회 뉴욕회의 한국대표 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 이사
1981년 재일 한국인 법적지위에 관한 한일교회 경도심포지움 한국대표
1981년 한국 인권위에 수여하는 스웨덴 자유교회 푸르쉬르칸 엘페르치 평화상 수상
1984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회장
1987년 평화 민주당 창당 기독교계로 동참
1990년 범 민족 평화문화 협의회 회장(김대중씨 후원조직), NCCK 해외 동포문제 인권 위원장
       예장 목회자 협의회 초대 회장, 기독노동자 연맹 이사장
1990년 청담교회 정년 은퇴
1992년 3월 2일 소천(경기 포천군 소흘읍 묘지 안장), 가족 한동현 사모와 장남 조은철(미국 LA에서 목회)
         외손녀 양영신(32세) 청담교회 출석, E-mail/ yys0416@gmail.com

저서(시집)/ 氷上에서서, 散禱集, 復活,
평론집/ 신앙고백문학, 기독교세계문학
인권도서/ 인권문제화 과정, 역사와 인권

2003년 NCC 인권위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민주화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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