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1892.6.18~ 1944.3.13)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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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1892.6.18~ 1944.3.13)여전도회전국연합회서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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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1  20: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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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1892.6.18~ 1944.3.13)
   
 

김마리아(金瑪利亞) 선생의 뜻을 기리는 사업으로 우리교단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공모하여 시상하는 제 3회 시상을 위한 공모 광고가 나왔다. 10년마다 시상되는 이 상은 교단과 교파를 가리지 않는 초교파적으로 60세 이상의 여성이며 교육자로 이상의 목적에 부합하는 분중에게 시상하는 데 자세한 것은 http.www.pckw.co.kr를 참조하기 바란다.      
   
 
김마리아 선생은 재미 항일 여성운동 단체 '근화회' 조직하면서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 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하여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하여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선생의 집안은 만석꾼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선생의 아버지 김윤방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뒤 송천리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분이다. 그러나 김마리아 선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10대 시절 모두 사망하여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는 풍파를 겪게 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결의형제를 맺고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필순(金弼淳)은 선생의 셋째 삼촌이고, 김규식 선생의 부인이자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순애는 선생의 셋째 고모였다. 자연스레 민족정신을 갖고 있던 애국지사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선생역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되어 갔다.

이 시기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그 해 11월 11일 종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당시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계획이었고, 여기에 선생과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선생과 황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2•8독립선언 당일에는 동경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하였다. 나아가 황애덕과 같이 등단하여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성토 규탄하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일제와 투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선생은 이같은 독립운동이 동경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하여야 조국 광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전 여성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기로 결심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때 황해도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방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고 있었는데 3.1운동 소식을 들은 선생은 지속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 후 만세시위와 관련하여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경무총감부에서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뒤 보안법 위반 혐위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다.

6개월의 시간동안 선생은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8월 4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고문으로 상한 신체는 평생동안 후유증을 남기게 됩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더욱 강인해진 독립의지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며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강구하였는데 선생과 주요 애국지사들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화회) 를 조직, 확대하였고 서울, 대구를 비롯하여 부산, 전주, 진주, 평양, 원산 등 남,북한 15개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2,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체적 방략으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 수합 활동을 벌여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실적을 올렸습니다. 그러던 중 조직원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28일 선생을 비롯한 임원진 등 52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북도 경찰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으나 수감기간도중 선생은 일제의 고문에 몸이 너무 상해서 병보석으로 1920년 5월 22일 출감하게 되었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된다.

이광수의 〈누이야〉라는 시는 김마리아 선생 귀국을 기념하는 작품이며,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고문을 하던 당시 일본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38년을 전후하여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등 한국 기독교 주요 교파들의 신사참배 강요에 협력하여 기독교인들이 대거 변절하던 시기에도 김마리아 선생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끝까지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1943년 집에서 갑자기 졸도 하였으며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 3월 13일 병원에서 순국하셨다.

김마리아 추모사업회는 그가 나온 정신학교 동문회에서 주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여고에는 김마리아의 뜻을 기리는 기념관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은 정신학교가 김마리아 여사에 관한 장자로 보인다. 얼마전 까지는 양녀가 있었으나 소천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이화여대에서는 김마리아 추모 기념음악회를 2016년에 열었고 기념사업회는 7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다음과 같이 연바 있다. 한편 김마리가 소속한 교회와 기관인 120년의 역사를 갖은 전국여전도회는 김마리아 상을 10년마다 시상하는 데 올해로 제 3회를 시상자를 공모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후보는 교파나 교단에 국한하지 않고 있다. 
   
 
김마리아서거 70주년 기념 학술토론회

1. 일시 : 2014.7.10(목). 오후 2시
2. 장소 :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2층)
3. 주최 : 국회의원 황인자
4. 주관 : 사단법인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5. 후원 : 국가보훈처
광복회, 3.1여성동지회,황해도민회, 광산김씨대종회, 정신여자중고등학교총동문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여전도회전국연합회, 새역사 여성미래
6. 발표 및 토론
기조발제 : 박용옥 선신여대 명예교수
지정토론 : 김성민(국가보훈처 전문관)
서광일(한신대 명예교수)
양현혜(이화여대 기독학부 교수)
윤정란(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
정병무(가천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
좌장 : 정현주(역사 여성 미래 상임대표)

김마리아의 약력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서 세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99년 8살때 소래학교에 남장을 하고 입학하였고, 1903년에 소래학교를 졸업하였다.  1906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서우학회 발기인인 작은아버지 김윤오와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작은 숙부 김필순을 알게되었다. 1906년 6월에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가 보름후 연동여자중학교로 편입하였다. 1910년에 정신여학교[주1]를 졸업하였다.

1910년 6월에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2년 가을부터 1년간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서 유학하고, 1913년에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915년에 동경여자학원의 본과로 유학하였다. 1916년 3월에 본과를 졸업하고 동경여자학원 고등과로 들어가서 1919년 3월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동경여자학원을 다니면서 나혜석과 만나고,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주 2]에서 황에스터, 나혜석과 같이 활동하였다. 1919년에 동경에서 2.8독립선언[주 3]에 참가하였다. 총회주최자와 선언서에 서명한 10명과 기타 10명이 출판법 위반 죄목으로 체포되어 동경 지방재판소에 송치되는 가운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이 한명도 없었음을 체감하였다.

김마리아는 3월 졸업을 앞두고 국내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하기 위해 2월 17일에 귀국하여, 1919년 3월 5일에 서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3월 6일에 체포되었다.

총독부의 경무총감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메스토이병에 걸렸다.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서대문감옥소로 이송되어 수감되었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8월 4일의 면소판결에서 병환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 후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19일에 통합된 애국부인회를 정비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19년 11월 28일에 애국부인회 회원들과 함께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1920년 6월 7일에 애국부인회 관련 제1회 공판이 열렸고, 6월 29일에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언도에 불복하고 공소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7월 1일에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2차례 수술을 받은 뒤 반신불수증[주 4]에 시달렸다.  부자유스런 몸을 이끌고 12월 16일의 제1심 공판 법정에 참여하였으나 1심과 동일한 판결이 나왔다. 1921년 1월 22일에 상고하여 5월 13일에 동일한 판결이 나왔다. 재차 언도에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김마리아만이 병환을 이유로 5월에 보석 석방되었고, 애국부인회의 다른 회원들은 6월 20일의 최종 판결에서 1심과 동일한 결과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치료하다가 1921년 6월 29일에 요양을 이유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성북동의 농가로 옮겨갔다가 곧바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한국 여자 유학생들을 집결하여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여성 지도자 양성을 위해 남경의 금릉대학에 등록하였다.

1923년 5월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 주 파크빌의 파크 대학에서 문학사를 연수하고, 시카고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연수하였다. 컬럼비아 대학의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획득한 후 뉴욕 신학대학에서 3년간 종교교육학을 연수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였으나 일제로부터 주거제한령을 받아 서울에 돌아가지 못하고, 함경남도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3번에 걸쳐 위턱뼈를 수술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4년 3월 13일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업적
1917년 10월 17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의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친목회 기관지로 여자계[주 5]를 발행하였다.
1919년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3월 5일에 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10월 19일에 애국부인회를 정비하고 회장직을 맡았다.
1922년 2월 18일에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김구와 함께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의기구에서 당선된 최초 여성이다.

1923년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대표로 개막 연설을 하였다.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28년 2월 12일에 황에스터와 더불어 뉴욕 한인교회당에서 근화회를 발족시켰다.
   
 

각주설명

1. 1909년에 연동여자중학교는 정신여학교로 개명하였다.
2. 나중에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로 개칭한다.
3. 동경유학생들이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학우회총회를 열면서 400명의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 낭독한 사건.
4. 한쪽 손과 다리가 굳어지면서 몸 절반이 부자유스럽게 되는 것.
5. 숭의여학교 출신여자유학생들이 1917년 봄에 창간호를 내었으나 이후 자금사정으로 뜸해진 것을 친목회가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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