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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과 김지선
장석숙 객원기자  |  naniwa200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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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7  09: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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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과 김지선

노회찬 의원은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했는 데 전도 유망한 그것도 국회의원이 그렇게 했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아쉬움, 안타까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생전에도 유명한 국회의원이었지만 그는 죽어서는 더 유명하고 기억되는 생을 산분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지난 9년전 정말 억울하고 분통 터지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한 사건과 오버랩되여 충격이 더하다.  전말은 현재 특검을 받는 드루킹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과 관련이 있는 데 지난 조사에서 무혐의되었다가 이번 특검에서 증거가 찾았다는 소식에 본인은 일단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바 있다.

그러나 특검 소환를 앞두고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4천만원이니 얼마 안되니 바틸까?  그러나 그의 양심과 진보의 가치를 져버릴 수 없어  결단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과 고민을 당에도 알리지 않고 혼자 안고 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진실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자살로 속죄를 한 것이다.

가장 정당다운 정의당의 원내 대표로 그의 위상과 의원윤리에 맞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런 이미지로 이제 특감 조사를 받게 될 것인데 언론에 보도가 나가기 시작하면 노의원 문제가 아니라 당은 그를 제명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실 그의 정치 이미지나 앞으로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면 좋지만 그 다음은 정의당과 진보운동 전체에 대한 도덕성과 까대기는 상상하건데 현 문재인 정권까지 영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치 않아도 지리멸멸한 자한당이 역전의 건수를 찾는 중인데 이것은 호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사람들은 노회찬은 지독한 사람이고 죽음까지도 정치적 선택을 했다고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장례는 생각보다 평온하고 고인의 선택에 대하여 충분한 공감과 이해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의 쇼와 정의당의 일부 태도, 자살이 아닌 타살주장은 실망이다. 

정치인이 언론에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는 늘 문제다. 그렇게 되면 자살자를 영웅시하는 풍토가 될 수도 있는 데 그런 조짐이 있다.  그것은 노회찬 의원이 원하는 것도 아니고 진보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정의당은 더도 덜도 말고 장례만 잘치루면 된다.

노의원은 유서에서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라며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당원들에게는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라고 남겼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자 거기에 자기의 존재감 이름을 올려놓는 행태다. 평소에는 별일 없던 사람들이 형이라는 등 같이 밥을 먹고 속이야기를 나눈 사이라는 등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그래서 정치인은 죽어서도 정치적으로 장례를 치루는 것이다.

김지선 동지 

나와 동년배로 지역은 달랐지만 한때 노동운동의 동지로의 김지선씨 이야기를 하고 싶다. 늦게 그의 이력이 공개되고 화제가 되고 조명이 되었지만 그는1979년경 화제가 된 인천의 동일방직의 해고 노동자다. 우리 또래들이 그렇듯이 그는 16세에 동일방직에 입사하고 조화순 목사가 있던 인천산업선교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인천 화수동의 인천산선은 감리교단의 조승혁 목사와 미국 죠지 오글 선교사가 세워서 사역을 하던 곳이다. 이후 조화순, 김동완, 박일성, 김정택 목사등이 총무를 지냈다. 고 김근태 선배나 하종강 선생등 인천지역 초기 노동운동가들의 배출대이며 근거지였다.

당시 인천에는 기장의 이국선 목사가 세운 산선도 있었고 기장은 동서울지역에도 산선이 있었지만 중단했다가 1984년경 성수역 인근에 다시 성수산선으로 재게해 임흥기, 이춘섭 목사가 총무를 지낸다. 현재는 성수교회로 남아 있다. 경인수원지역에는 경수산선을 감리교회의 안광수 목사가 산업선교를 했다.

한편 예장은 영등포 당산동에 영등포산선을 세워서 조지송, 인명진, 이근복, 손은하, 진방주, 박진석, 신승원, 진방주가 총무로 재직했다.구미의고애신 전도나 울산의 윤응호, 이권석 목사, 부산의 연구흠 목사나 신상길 목사도 산선을 했으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모두 문을 닫았고 달라진 환경에 따라 지역의 노동교회 형태로 변화를 겪으면서 산업선교의 맥을 이어갔다.

김지선 동지가 다닌 동일방직은 1978년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있었는 데 당시 회사에서 파업중인 노동자들에게 구사대가 똥물을 뿌린 사건이다. 이후 이들이 명동성당에 도피하여 농성을 하게 되고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회사는 폐업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후 김지선 동지는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살 연상인 노회찬을 만난 것이다.

이후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김지선 동지가  당시 현장에 취업차 들어온 학출들과 관계를 갖으면서 연결이 된 것이다. 당시 나도 그렇고  현장 노동자들과 학출들이 결혼을 하는 케이스가 나오는 중이었다. 그렇게 노회찬은 김지선 동지에게 프로포즈를 하게 되고 몇 번의 거절을 겨쳐서 결혼식을 한다.

당시 김지선 동지나 당시 우리들은  노동운동의 길이 워낙 힘들었기에 연애나 결혼을 사치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은 그만 두는 것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길을 간다는 동지가 아니면 결혼은 사실 힘든 것이었다. 1988년 가족만으로 혼인을 했는 데 노회찬이 33세, 김지선씨가 35세였다고 한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변신

비슷한 또래의 동지들이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을 거쳐서 변화된 정치환경에 참여를 한 케이스는 여럿있다.  원풍노조 위원장 정선순은 지역 탁아소와 환경운동을 거쳐서 구로지역의 구의원을 지냈고 콘트럴데이타 노조위원장인 한명희씨도 그후에 결혼도 하고 민주당의 구의원과 지난 번 서울시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바 있다. . 

김지선 동지는 결혼 10개월 만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노 대표가 붙잡히면서 2년 6개월 동안 투옥 생활을 하고 김씨는 여성의 전화에서 일을 하고 책 대여점을 운영하며 홀로 살림을 꾸렸다고 하니 일반 사람들이 맛보는 신혼생활의 즐거움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리고 노회찬이 출감한 이후에도 경제적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선후보의 캠프와 비서관을 지내면서 민노당은 지역과 전국구 의원 10명을 내서 진보의 의회정치 진입과 전국정당화의 가능성을 열렀다. 그러나 민노동의 분열로 통진당으로 다시 통진당의 분열로 정의당으로 가는 동안 진보는 분열했지만 노회찬은 울산에서 기사회생한 것이다.

2004년 17대 국회에 입성하기 전까지 노 대표는 딱 한 번 80만원을 집으로 가져온 적이 있을 뿐 대부분 많아야 50만원 정도를 살림에 보탰다고 한다. 아파트단지 내 재활용품을 모아놓은 곳에서 주워온 옷으로 의복 문제를 해결했을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다.

그후 노회찬이 노원에서 국회의원이 되고도 당의 지침대로 월급 180만원(당시 민주노동당은 소속 정당 국회의원의 월급을 노동자 평균 임금인 180만원으로 한정했다)을 가져오자 김지선씨는 그 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를 시작했고 중고교 검정고시를 거쳐 2004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서 복수전공하여 2008년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노회찬과 부인 김지선 동지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고 한다. 노혼이기도 했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엇고 신혼 초 투옥 생활로 임신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입양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까다로운 조건도 그렇고 경제적인 상태로 심사에서 거절 당했다고 한다.

노회찬 의원 뒤를 잇기를 

김근태 의원도 세상을 뜨자 부인인 인재근 씨가 지역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남편들의 지역구에서 부인들이 출마하여 금배찌를 달고 활발한 활동을 한 경우가 없지 않다. 내 생각에는 김지선 동지도 앞으로 노회찬의 뒤를 이어서  노의원의 정신과 의미를 이어가는 것이 어떤지 생각해봤다. 그런 준비와 정신이 충분히 된 분이다.

과거 부천에서 1878년 YH 파업중 신민당사에서 죽은 김경숙양 사건으로 유명한 노조위원장 최순영도 부천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지금은 경기도 이재명 도지사의 인수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앞으로 정치적 재기를 기대해본다.  최 의원의 남편은 고 황주석 목사(기장) 사회운동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좀 이른 이야기 지만 김지선씨가 노동자 출신 여성 국회의원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고인이 된 노회찬 의원은 비록 사후지만 꽃길을 간 것이다. 어느 누가 과연  자살을 하고도 그런 애도와 칭송 존경을 받겠는 가? 그것은 평소에 정직하고 깨끗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고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민중들을 위한 정치를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정당의 장을 국회장으로 승격을 하고 전국민적인 애도속에서 슬픔지만 아름다운 길을 간 것으로 된 것이다. 다만 어떻게 그의 정신을 당이나 운동권이 이어가느냐가 숙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의원 사후에 정의당의 입당과 후원이 늘고 있다는 보도나 이찬진 대표(아래한글 개발자)가 제주도에 거주하는 데 정의당에 입당을 한다는 소식도 외연을 넓히고 진보정치를 건설하는 데 좋은 징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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