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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힘 그리고 정의(love power and justice)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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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19  19: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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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힘 그리고 정의(love power and justice) 

사랑, 힘 그리고 정의(love power and justice)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1886년 8월 20일 독일에서 출생해 베를린, 할레, 브레슬라우대학에서공부하고 1911년에 신학전문직학위를 취득해 대학 교수 자격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4년간 군목으로 참전하면서 '터전의 흔들림' 으로 표현될 만한 사상적 변화를 겪었다.
   
 
그는 루터교회 목사이자, 주교가 되는 요한 오스카 틸리히 목사와 빌헬미나 마틸드 사이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으며, 열다섯 살 되던 해인 1901년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다양한 철학적 수학을 한 틸리히는 "철학자의 신학자이자 신학자의 철학자"라고 불렸다. 그는 신정통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철학적 사고의 기반은 키에르코르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틸리히는 신앙이 거룩함의 체험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하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확실성"을 불가피하게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지닐 때, 우리는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을 구현할 수 있다. 그래서 틸리히는 "신앙"이, 모험이 불러오는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나는 의심을 내적인 요소로 갖는 "궁극적 관심"이라고 말한다.

틸리히는, paleo-orthodoxy 운동에 참여한 듀크 대학교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와 윌리엄 헨리 윌리몬 교수가 1999년에 쓴, 《외국인 거주자》(영어: Resident Alience)[7] 라는 책에서, "최후의 위대한 19세기 신학자"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 일, 그리고 인격에 대해서 틸리히와 의견을 날카롭게 달리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틸리히의 혁신'은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에서 조금 나아갔을 따름이다.

1924년에 필립대학의 부교수,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으나 나치는 그가 유대인 학생들을 도운 것을 문제 삼아 교수직을 박탈했다. 그때 미국의 유니온신학교는 40대 중반인 틸리히를 불렀고 낯선 땅에서 영어를 익히면서 강의를 한다. 어설픈 영어와 독일 악센트임에도 학생들은 그의 강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의 강의와 신학적 고민은 '20세기 최대의 신학자'라는 칭호에 걸맞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유니온에서 퇴임한 후 그는 1955년부터 1962년까지 하버드대학의 특별교수로 신학부 박사과정 세미나를 인도하며 집필 활동을 했다. 이후에도 시카고대학로 초빙되었고 1965년 10월 11일 마지막 강의 후 10월 22일 숨을 거뒀다.

그는 신학뿐 아니라 철학과 문학과 역사에 정통했는 데 남긴 저서로는 『조직신학 1, 2, 3권』(Systematic Theology), 『그리스도교 사상사』(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 『믿음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 등 다수가 있다. 이 책을 번역하에 소개해 주신 분은 신학자들이 아니라 70년대 말 전북대 철학과 해직 교수가 되자 장신대를 오셔서 졸업하시고 새롬교회를 세우신 남정길 목사다

사랑만이 가장 위대한 힘이다.
틸리히는 이 책 '사랑, 힘, 그리고 정의'(LOVE POWER AND JUSTICE)에서 말하기를 힘(power)은 물리적인 힘(force)이나 강제력(compulsion)도 있지만 그 외에도 정의(옳음)가 더 강한 힘이며 그 보다 숭고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물리적(군대나 무력)이고 강제력(법과 경찰력)도 힘이지만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갖아야 하는 힘은 아니다.

사람들은 힘을 위하여 논리와 이념을 만들고 집단을 이루고, 유지시키고, 결합시키는데 목표를 위하여 정의를 표방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치만은 않다. 사회운동은 본질적으로 사랑이나 정의가 아닌 집단의 이익이나 수호인데 거기에는 분노와 공격적 감정을 섞는 다. 노동조합이나 시민운동은 기본적으로 생존권을 넘어 더 낳은 것에 대한 투쟁이어야 한다.

존재의 힘은 집단의 정신에 좌우된다고 말할 수 있다. 틸리히는 복음이 증거하는 힘과 사랑의 존재론적 관계성에 기초해서 세상적으로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 기독교의 우월성은 차별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실현하지 못하는 한, 기독교의 복음은 제대로 전파될 수 없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은 제도권 정치와 재야 시민운동과의 결합에서 나온 다. 지금의 시민운동은 정권교체기에는 정치권과 밀월을 했지만 그 정권을 지키는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대중들의 불평과 불만을 해소 하기 위하여 이익을 주고 감동을 주어야 한다. 이번에 노동자들의 사랑받는 진보정치인 노회찬은 죽어서도 산 것인데 그는 평생을 추구하는 정직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부정한 것에 대한 자기응징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국민은 감동하는 것이다. 정의당은 슬픔속에서도 당원 가입과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정당은 정치투쟁이나 의원활동만으로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의 힘이다. 성경도 사랑의 빚외는 지지 말라고 했고 햇빛 정책도 그 기초는 동족애이고 인류애다. 세반운동도 목표는 분명해야 하지만 감동을 주어야 한다. 

보수나 진보도 여전히 세속적 힘을 숭상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스스로 많은 힘(숫자)과 능력(재력)을 갖았다고 자처하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이 시대와 사회, 공교회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힘인가? 에는 의문이다. 그들이 갖았다고 자부하는 그것들은 과거의 역사속에서 불교든 유교든 시대로부터 버림받았는 데 스스로의 타락 때문이다. 우리가 힘있는 종교가 되었다면 다음은 우리의 차례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너나할 것 없이 성장한 교회와 성장하고 싶은 교회만 있다는 소리가 있다. 못커진 것이지 커지고 싶지 않은 교회는 없다. 모든 교회나 목회자들의 꿈과 희망은 커지는 것이다.  ‘책임적 존재’가 아닌 세속적 가치인 사람과 돈을 위해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들에 대응하는 다른 힘을 갖아야 한다. 말씀의 토대위에서의 사랑의 힘, 생명을 살리는 힘이어야지 이기기 위한 힘, 굴복시키기 위한 힘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힘은 두 가지다. 합법적인 것(법과 제도로 주어진 권한이나 결제권)과 비합법이지만 제도권과 주류에 변화을 추동할 수 있다면 그것도 힘이다. 미국 시카코대학 범죄학과 출신이지만 일자리가 없어 할 수 없아 조교자리로 밥을 먹기 위해 할 수 없이 대학원까지 들어간 그는 빈털털이로 도시 노숙자을 바닥을 맛보면서 개인의 요구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유일한 합법적인 도구는  '조직' 이라는 것으로 보고 주민조직운동으로 많은 신화를 만들어 낸다.

미국의 대통령 오마바도 로스쿨을 출업한후 알렌스키 스쿨에서 훈련받은 주민운동가 출신이다. 알렌스키의 후예들은 주민조직(COMMUNITY ORGANAZION) 을 통하여 기업과 국가로부터 가난한 이들이 많은 것을 얻어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방문하고 빈민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 우리도  그런 힘의 파워를 우리는 지난 박근혜 정권 말기에 만들었고 보았고 이뤄냈다.

우리는 여기에 다소 감성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고 정상적인 국가 시스탬이 아닌 비선과 탈법에 의존하는 국가권력의 사유화와 남용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민초의 힘을 다시 확인 한 것이다 그런 힘은 제도의 힘이 불의하고 약하거나 불신을 받을 때 발휘된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명성교회 세습을 반대하는 운동과 연관지어서 한번 생각해보자

출발은 헌법이 금한 것을 위반한 교회가 있다(세습) 그것을 응징 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위법의 문제는 그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서 공감은 떨어진다. 그러나 일단은 법치와 공교회성 확립이라는 스로건에는 말빨이 먹힌다. 그러나 준법 논리로만으로는 주매뉴가 안된다.  오히려 세습을 발상하게 하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현상만 이야기 하는 것은 감정으로 흐를 수 있다. 책임론에 있어서도 원인 제공자도 문제지만 이를 합법화 해준 시스탬과 사람들이 문제다. 

예을 들어 세습을 발상하는 하는 구조인 위임목사(은퇴까지) 와 원로(20년 시무후 죽을 때 까지) 를 없에야 한다.  세습운동에 앞장서는 분들은 교단의 구조적 개혁을 위하여 자신의 위임목사직 포기와 원로 포기와 65세 정년을 선언을 하고 나서야 한다.  자신을 던지는 살신성인의 개혁이 정말 힘있는 것이고 구체적인 것이고 역사에 남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 다.  비대위와 장신대 교수들, 신학학생들, 젊은 목회자들만 앞세우는 중이다.   

교회와 목사는 노회가 관할
그럼 왜 교회와 목사에 관한 책임이 있는 해 노회에서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 그게 문제인데 명성은 원하는 것을  했다지만 절차와 최소한의 법을 지켰는 변명이다.  위임만 해도 노회의 허락을 받았고 거기서 위임식도 해줬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절차대로 하자면 그것을 용인한 노회를 책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회가 비정상이 된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런 비정상을 바로잡자고 나온 것이 동남노회 장상화를 위한 비대위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과 힘만으로는 정상화을 이루지 못한 것이 문제다. 자기 노회의 판도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상회로 가져가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헌의부장(부노회장)으로의 업무처리는 면죄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결과로 노회장이 못된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원상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동남노회가 비대위원들에게 가한 재판의 결과 때문이다. 거기다가 노회는 임원회는 구성이 안되 사고직전이다.  최초의 원인은 제공자는 명성교회이고 그 다음은 비대위의 책임이다.  노회를 정상화하고도 얼마든지 헌법준수를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비판이다.

개혁이나 정상화를 할 수단이나 방법이 없이 주장만 한다면 허망한 것이다. 따라서 힘의 균형에 있어서 동남노회 비대위는 노회원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식물노회의 책임은 비대위에게도 일정 부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세반운동의 구호는 김삼환, 김하나 목사에게 물러나 달라는 사정을 하는 꼴이다.

재판관이 판결에 임하고 사임한 것은 큰 문제
그런데다가 지난 8월 7일의 재판에서 노회가 허락한 위임목사 허락은 문제가 없다는 판단인데 정확히 말하면 문제가 없다고 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재판으로 손해를 입은 자들이 판결에 불복할 수 있고 재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판결에 참여한 재판관들이 사표를 내고 재판정에서 나와 밖에서 떠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한다면 우리 총회의 질서는 서지 않을 것이다.

재판은 선이나 악이 아니다. 그러니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자들이 억울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심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판결의 결과를 정치쟁점화한다는 소리다.  언론은 연일 죄없는 총회와 교단 기독교를 비판하는 데  명성교회야 그런 말들어 싸지만 기독교전반에 대한 비판론으로 욕을 당하는 중이다. 재판관들이 재판과정상의 문제가 있다면 모르나 판결에 임하고 졌다고 하여 자기들의 의사를 공포하는 방식으로 다른 국원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은 윤리성에서 문제다.

아마도 가을 총회가 얼마 안남았으니 총대들에게 이런 사연을 알려서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 세반운동의 본심일 것인데 그것은 총대들을 선동하고 할 일을 가르치려는 태도다. 총회의 총대 구성은 다 알다시피 간단한 분들이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해서 듣는 분들이 아니다. 그동안 총대들을 향하여 이해자들의 요구와 시위가 있었지만 그것이 반영된 적이 없다.

총회는 총회의 논리와 방식으로 가는 것이다. 없는 것을 있게 할 수도 있는 것을 없게 할 수도 없다. 한 교회의 문제 한 노회의 문제가 총회의 걸림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중심리와 여론몰이로 총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논리는 위험한 것이다. 이해당사자들이 법과 원칙에 의거하여 재심이든 뭐든 요구하면 될 것이다.

세습반대와 비판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
사회적 분위기와 법으로 금한 세습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역사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을 묵인하고 말안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그러면 얼마만큼 어떻게 할 것인가? 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비판자의 위치에서 비판자로 남아야 한다. 판단자로 원상회복까지 하려고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수가 있다. 지금이 그런 형편이다.

명성교회의 갑질에 대하여 응징하고 똑 바로 잡겠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이는 세습을 용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의 교회 문제이기도 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이다. 잘못한 사람들이 있고 그 불법에 협력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 그것을 다루고 책임을 묻는 사람이나 조직들이 있으니 거기다가 맡기는 것이지 직접 심판은 안된다.

목회자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이 집단으로 한 두번도 아니고 1년 내내 공정재판 요구로 재판국을 압박하는 행동으로 인하여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덩달아 언론들도 교회들을 불온시 하고 아나운서의 멘트를 설교보다 낳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교단이 생산해 내는 뉴스로 인하여 교인의 이탈은 물론 교회분란을 통하여 이웃들은 이삭줍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보니 비판을 넘어 비난, 이제는 모욕을 하는 중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총대들에게 이 일의 결과를 맡아서 뭘 해달라는 것은 격에 맞지도 않고 잘못하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총회에는 세습문제로 헌의한 노회들이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분명히 안건으로 다뤄질 것이고 아직은 기회가 없지 않다.  그런데 이 문제를 밖으로 돌려서 외부인들의 판단을 받는 다?  이번에 재판국 보고도 나오게 되어 있으니 거론은 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총대급 목회자들과 장로들 가운데 이건과 관련하여 침묵하는 다수가 있다. 그 분들이 생각이 없고 할말이 없고 두려워 말안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반운동이 현재의 구도를 70년대 경직된 사고로 선과 악이라는 도식으로 정의감에 빠져 총회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양세다.

세반운동에 젊은 목회자들이나 부목사급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경륜있는 선배들도 없지 않다. 총회에서 일한 분들도 있음에도 대학생들 모양 한 놈 잡고 패자는 식으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건 개혁도 진보도 아니다. 그만하면 된 것이지 언제부터 그렇게 자기들이 헌법을 준수하고 모범적인 생을 살았는지 묻고 싶다. 지금 명성교회가 무슨 액션이나 대말대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재판국에 어떤 압력을 주었다는 증거도 나온 바 없는 데 말이다.

말없는 다수의 생각도 중요하다. 
다만 재판국의 이런 판결에는 명성교회의 로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감성적 공격으로는 세반운동을 그르칠 수가 있다. 거기다가 세습반대 운동의 집결을 위하여 다시 서명도 시작했는데 이미 지난 번에 한 3천명 이상을 모아 힘을 보여줬다. 더 많이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까? 안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인가?   세습반대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명분에서 대세는 판가름난 것이다.

오는 9월 3일을 세반운동의 열기를 모으고 전력을 다하자는 것인데 결국은 이 집회로 인하여 총회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은 총회를 너무 모르는 소치고  집안만 시끄러워 지고 망신만 자초하는 일이다. 이런 대회의 요지는 더 망신 안당하려면 명성교회 알아서 위임목사 취소하고 김 부자는 물러가라는 것 아닌가? 그것은 탄원이나 사정도 아니고 엄포도 아닌 아무런 강제력도 없는 일이다.

왜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방식이 아닌 쌈하는 식의 세습반대운동으로 가는 지 모르겠다. 총대들은 이미 이 문제는 개 교회의 문제이고 동남노회의 문제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다. 총회장이나 총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동남노회를 정상화 시켜서 거기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많다.

문제는 동남노회의 한축인 비대위가 노회로부터 회생이 불가능한 치리를 받은 것이 화근이다. 권징의 최고형인 출교와 면직을 받았는 데 이는 사실상 사형선고다. 그들에게 이제 처음의 운동 목표인 명성세습을 막는 게 아니라 자기들 목숨줄이 달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이번 가을 총회에서 이 문제를 이슈화하여 두쪽이 날정도로 판이 커지지 않으면 자기들만 죽는 다는 절박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한 교회와 노회의 문제가 총회와 교단을 포로로 잡아서는 안된다. '

총대를 압박하고 선동하는 것은 예의 아냐
총회는 목사 750명 장로 750명으로 구성된다. 총대들의 성향은 중년 남성에 중대형교회의 목회자와 장로들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쥬니어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개인적으로는 모두 커지고 싶고 나서고 싶고 안정화와 교권화를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다. 장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들을 갖을 지도 변수다. 이 분들을 놓고 지금 세습반대 운동세력들이 하는 일은 총회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이미 재판결과에 대해서도 교수들 조차도 감정에 휩싸여 '신사참배' 에 비유하는 등 논리적 비약이 너무 심했다는 비판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옥성득 교수는 평양노회에 목사 사임서를 냈다고 한다. 일반대 교수이니 목사라는 자리가 필요도 없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쇼에 불과하다.  이 분이 진짜 이번 재판을 '빌라도의 재판' 으로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자리인 교수 사표를 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신학대학의 교수들도 이런 차원에서 논리적 비약과 역사인식의 부재를 보여주는 큰 실수하고 있다. 장신대 교수들은 사실 그동안 세교모로 큰일 한 것은 사실이다. 거기 자기 이름을 내는 것 이상 더 강한 메시지는 없다. 더 하려면 교수자리 내놓고 하면 모를 까?  쉬늉만 하는 중이라는 비판이다. 그런 식의 논리로는 총대들 애들 취급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재판이 잘못되었으면 규정에 의하여 재론하던지 재심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남노회 정상화를 통한 해법 남아
오는 28일에 열리는 서울 동남노회가 임원을 개선하여 사고노회를 면하느냐도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총회는 우선 헌의안 중심으로 다뤄지기에 이 재판국 보고를 받는 과정에서 이견은 있을 수 있으나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판결이 난 사건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총회라고 해서 바로 뒤짚을 수는 없다.

이번 103회 총회에서는 총대 2/3가 가결하면 재심도 할 수 있다. 차분하게 여기서 재심을 신청하고 다시 법정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우리 헌법에 누구도 재판을 받지 않고는 회원권을 제한할 수 없다. 총회장이나 임원회가 검사가 되거나 판사가 되어 누구도 치리할 수 없는 데 반드시 기소되야 하고 판결로만 치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대학생들 처럼 교단마크에 근조를 달고 욕질을 하고 재판국원 신상을 공개하고 얼굴에 선을 그셔대는 식의 화풀이는 자제 시켜야 할 것이다. 이건 비판이 아니라 자학이고 파멸이다.

재판국원의 탄핵이라는 것도 일부 국원들이 사표소동이 없었다면 모르나 그들이 이미 나서서 정치적 행위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총회 일은 누구도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국원의 판결은 부정행위가 아닌 이상 귀책사유를 당하지 않고 면책된다는 것이 있기에 문제는 있을 지 몰라도 그들을 처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판결과에 대한 명성교회 입장 발표
이글이 완성되고 나서 20일(월) 국민일보에 이번 재판과 관련하여 명성교회에서 내놓는 공식입장이 입수되었다. 내용은 흠잡을 때가 없으나 진짜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는 걱정이다. 현재의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 같고  어떻게든 견디고 버티면 되지 않을 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면 온갖 망신만 다 당하고 모욕과 수모를 견디다가 못해서 결국은 교단을 나가는 수순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아무도 명성교회에 존재에 대하여 김삼환 목사에 대한 성장신화에 새벽기도의 기적에 대하여 조롱을 받는 중이다.  그러나 자기내만 망신만 당하면 되는 데 언론들은 한국교회와 우리교단에 애굿은 교단과  총회장을 압박한다.  이러니 우리교단은 분열되고 신학대학교와 학생들로 부터 무시를 당하는 등 교단의 분열상로 인한 유무형의 손해는 말로 이루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총회의 저력과 능력을 믿고 싶다. 김동호 목사식의 해법 "명성만 안 쫒아내면 총회와 노회에 저항하라" 은 아니라고 본다. 

세반운동이 불법적이거나 상식이하의 행동을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판과 연관되여 있는 분들이 재판국에 참여한 분의 교회로 찾아가서 재판결과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하는 등 교회내분을 조장한 것으로 보인다.  '명성 8적' 이라고 썼는 데 아마 '을사 5적' 을 빗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재판국원에게도 십자가 밟기를 하고 있다. 어떤 판결을 냈는 지를 밝히라는 주문이다. 이런 영상을 잘하는 일이라고 홍보을 하는 데 이런 것 아니어도 비난거리는 충분하다.

tps://www.youtube.com/watch?v=ekWgoqqHl7k&feature=youtu.be (영상자료)  집회및 시위의 자유는 있으나 주일 날 남의 교회에 가서 이렇게 하는 것은 결례다. 더 문제는 이 교회의 태도다.  실내로 들어와서 피켓팅을 하라고 했다고 하는 데  그것은 잘못이다. 교회가 이런 문제를 처리하려고 한다면 외부인을 물리고 정상적으로 당회나 회의를 열어서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니면 교회 내분으로 진화가 되는 것이다.   

세반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분 가운데 평생 우리 총회와 관련하여 일도하고 명예도 얻은 분이 이번 세습이나  재판과 관련하여 내논 개인발언에 공공연하게 표기하여 놀라는 분들이 많다. 차마 이곳에 옮기고 싶지는 않치만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면에서 세습반대운동은 귀한 것이지만 분노와 감정을 기초로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자기들 의견이 아니면 적이고 악이고 하는 발상도 적폐중의 하나이다. 언론의 자유, 개인의 자유는 어떤 시대 환경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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