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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송 목사 '바보의 행진을 마치다'서덕석 목사 조시 "바보들의 행진을 마치다"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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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24  21:5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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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송 목사 '바보의 행진을 마치다'

http://m.christian.nocutnews.co.kr/news/5095009?fbclid=IwAR06y7PkRQyuLTI2vB10rjQshvpVlGGy5eoSNd_8C3l0xkppTZVL0WNh-jU  (CBS노컷뉴스)

영등포산선의 기초를 놓으셨고  한국산업선교의 산증인 조지송 목사님이 별세하셨다. 생전에 일하시고 마지막까지 사랑하시던 노동자의 집 ‘영등포산업선교회‘ 의 장으로 1월 24일(목) 10시에 산선회관에서 고별예배를 드리고 파주 경묘공원(실향민동산)으로 발인하셨다.
   
                                                 * 장례식에서 설교하는 인명진 목사 
이날 예식은 진방주 목사(영등포선선 총무)의 인도로 기도에 조순형 전도사(청주산선)와 성경 막16;1-6 본문으로 인명진 목사(갈릴리교회 원로)가 ‘갈릴리로 달려간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어 박점순 권사(산선 노동자 대표)와 안재웅 목사(전 CCA총무)의 조사에 이어 조시(서덕석 목사 작) ‘바보들의 행진을 마치다’ 박경순 집사(성문밖교회)가 낭독했다. 이어 조 목사가 작사 작곡한 ‘자유 찾아 가는 길' 을 모두 제창한 후에 권호경 목사(전 NCCK 총무)의 축도로 예배가 끝났다.

'자유찾아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우리 모두 주님 따라 그 길로 나가자 사회정의 이룩하자 큰 소리 외치며 정의위한 우리주장 만방에 전하자'  
   
 
이어 파주 경묘 공원으로 발인하여 가족과 지인들 '일하는 예수회' 회원들과 하관예배(유재무 목사 집례)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영등포선선과 일하는 예수회는 장례를 주관했는 데 첫날 위로예배는 이근복 목사(전 총무)가 집례했고 둘째날 입관예배는 김규복 목사(빈들교회 은퇴)가 집례했다.
   
                                       * 파주 경묘공원(이북 5도 묘역)에서의 하관예식
조목사의 은퇴하신 이후 오랜동안 외부 활동을 접으셨지만 가시는 곳 마다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이번에도 고인의 마지막 길에 값을 길 없음에도 많은 분들이 조문과 사랑을 보여주셨다. 시무한 교회는 없었지만 사심없이 보여주신 조 목사의 큰 사랑을 기억했다. 오랜시절 함께한 산선 회원들과 해외에서 부터 오랜 지기였던 이삼열, 김용복, 이종구 박사등과 이해학 목사와 유동우 선생등이 조문하였다.
   
 
이외에도 원풍모방 전 지부장 방용석 전 국회의원과 원풍동지회 회장 황선금 씨, NCCK 전 총무 권호경, 김영주 목사, 우리교단 전 사무총장 조성기, 현 총장  변창배 목사, 류태선 목사,  교단의 부서 총무들,  정진우(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 박종렬, 김성복 목사(인권센타 이사장) 명노선 목사, 신철영 선생, 고애신, 조순형 전도사등이 조문하였고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과 서울시장 영등포구청의 조화와 근조기가 왔다.
   
         * 김용복 박사 부부와 박영해 장로, 고애신, 조순형 전도사와 함께한 조목사 부부

황주골의 꼬마 예수 조지송

조지송 목사는 황해도 황주에서 어려서부터 '황주골의 꼬마 예수' 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열심있는 신앙으로 월남하여 신학교에 입학하고 산업선교에 입문한 이후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URM(Urban Industirial Mission)의 국제적인 인사가 되었다. 총회 전도부 초대간사로 시작을 하여 영등포산선의 설립과 총무로 21년간 사역하셨다.

그리고 엄혹한 시절인 1980년대 신군부로부터 정치적 공격을 받아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한다’ 라는 구호를 만들어서 순수한 산업현장에서의 선교활동을 좌경시하고 탄압하였다. 그의 사역은 초기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이후에는 노조의 민주화와 소구룹활동으로 이어졌다.
   
                        * 방용석 원풍 지부장, 노동자들과 함께한 조지송, 인명진 목사
영등포 인근의 방림방적 한국 모방, 원풍모방 해태와 롯데, 남영나이론, 대일화학, 콘트롤 데이터등 유수한 회사들과 관계하면 70년대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매카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산선은 전교조와 기독교농민회, 기독노동자연맹, 기독청년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이 출범하는 구루터기가 되기도 하였다.

조지송 목사는 교파나 교단의 목사라는 틀을 벗어나서 본훼퍼의 고백 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을 보여주신 분이다. 53세에 청주 옥화대로 귀농하셨는 데 당시도 영등포노회와 산선위원회는 사직이 아닌 휴식으로 처리하고 산선에 복귀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 생전에 고 오재식 원장과 김용복 박사와 함께 하신 조 목사 
그러나 만약에 조 목사가 건강을 회복한 후에 산선에 복직를 기다렸거나  휴직을 하고도  영등포산선 주변에서 과거의 공적을 잊지 못하고 얼쩡거렸다면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려고 했다면 그는 우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 목사의 첫 제자는 인명진 목사다. 현재 조 목사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으냐와는 별개로 산업선교에서의 역할은 분명한 자취로 남아 있다. 조 목사가 노동자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을 실천한 분이라면 인목사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선동화로 열정의 불을 당긴 분이다. 오늘의 영등포산선뿐 만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선교를 세계속의 URM으로 만든 분이다. 

그리고 조지송이라는 거대한 사람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명진 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두분의 성격이나 태도는 정반대지만 이것이 합쳐져서 오늘의 영등포산선의 신화를 이뤘다. 두분의 삶을 통하여 후배들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면 될 것이다. 조목사에게서는 노동자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인목사의 열정만은 배우고 나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조 목사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지지만 더 많이 연구되고 회자 될 분이다. 그렇다고 많은 말씀을 하신 분도 책을 낸 분도 아니다. 그러나 조목사는 말없는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시다. 직접 지도와 가르침을 받지 않은 후배들 까지도 조 목사를 아는 분들이 깍듯하게 모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우러러 나온 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 목사는 한번도 남의 이야기 특히 험담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

언제나 조용하시면서도 다정다감한 분으로 그 분과 대화를 해본 분이라면 인격과 지식의 깊이 그리고 문제를 꾀뚫는 혜안을 보게 된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시와 노래, 컴퓨터 그래픽도 하시는 등 한 시대를 예술로 표현하기시도 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제 부터 시작이라고 보여진다.
   
                               * 박길순 사모님과 함께한 여성노동자들과 실무자들

다음은 태국의 고승 '아짠짜' 라는 선사가 한 말인데 조지송 목사가 가신 길과 흡사하여 소개한다.  
‘IF WANT PEACE OF MIND'(만약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If let go a little, you will have a little peace(조금 놓으면 조금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if let go a lot, you will have a lot peace(많이 놓으면 많은 평안을 얻을 것이다)
if let go completely, you will have completely you struggl with the world will come to end(완전히 놓아 버리면 완전한 평안과 자유를 얻을 것이고 당신은 이 세상과의 싸움을 끝낼 것이다)

조 목사는 우리에게 노동자 사랑을 가르쳐 주고 바보처럼 가셨지만 자기의 생을 투쟁을 이런 식으로 하신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다. 남들은 잘되고 힘되고 돈되는 길들로 갔지만 그리고 그것을 유지확대 확장시키기 위하여 배신하고 적을 만들고 남을 모함하고 올무를 놓고  죽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잘되는 일을 포기하므로  ‘바보’ 와 같은 인생을 산 것이다. 

그 바보들의 행진에 우리들이 함께 하기를 바랬기에 그는 우리들의 스승이었고 그가 포기하고 양보하고 버린 것이 오히려 그의 인생을 빛나게 해준 것이다. 그것을 보고 알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지혜를 배우기를 원했고 바보의 지혜를 통하여 자신들을 돌아보기 원했는 지 모른다. 짧았지만 굻은 삶의 자취를 보여주신 조지송 목사의 가는 길에 배웅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조 목사님이 기록해 두신 영문 회상(추억)

조지송 목사의 영문 회상 번역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북 전쟁이 일어난 그 해 12월 5일, 나는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 길을 떠나면서 “3, 4일만 피해 있다가 돌아오겠다” 고 어머니와 약속했지만,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1955년 5월 7일,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두 자녀들도 각각 결혼하여 아들 하나씩을 낳았다. 그러니까 사위와 며느리를 합해서 8명의 가족이 된 셈이다. 손자 하나는 서울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다.

1963년 11월 21일, 1954년, 신학교에 입학했었지만 경제 사정으로 휴학을 했다가 몇 년 후에 복학했기 때문에 7년이 지난 1961년에야 졸업했으며, 63년 11월 21일에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산업전도 (Industrial Evangelism) 목사가 되었다.

1961년, 8월, 나는 신학교 3학년 시절에 산업선교(UIM) 일을 시작했으며, 시작과 동시에 강원도 석탄이나 철광 등 여러 공장에서 노동체험을 했고 산업사회와 경제, 그리고 노동문제에 대하여 연구하는 과정을 3년간 이수했다.

1964년 2월 14일은 영등포 산업선교(Yong Dong Po UIM) 취임예배를 드린 날이다. 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며 그들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땀과 눈물로 일했다. 지금에 와서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면 노동자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온 수많은 날들이 벅찬 감격이며 보람이다. 이 산업선교 운동에 참여했던 국내외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1985년 3월 25일, 나는 영등포를 떠나 충청도 옥화리(Ok Wha Ri) 농촌으로 이사 갔다. 나는 소규모 농사일을 하며 농민들과 이웃 해 살면서 땀 흘려 일하며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살고 있는 농민들의 숭고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2009년 6월26일, 나는 서울 근방인 성남시 판교(Pankyo) 신 도시로 이사 했다. 현대식 첨단 기술로 건축한 아파트라서 일상생활에 불편은 없지만 가까운 이웃이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그러나 TV도 보고 음악도 감상하고 가까이 사는 자식들도 만나고 멀리 사는 자식과 전화대화도 나누고 옛 친구들과 만나 지난날을 회상하며 살련다.

                     “ 바보들의 행진을 마치다 ”

 서덕석목사(시인 / 일하는예수회 회원)  

노동자를 공돌이, 공순이로 부르며 공장 기계의 부속쯤으로만 여기던 60~70년대 척박한 초기 산업현장에서노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려면 그들과 함께 노동의 고단함과 고통과 기쁨을 똑같이 겪으며 울고 웃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조지송 목사는 온 몸으로 깨달았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을 위한다는 얄팍한 우월의식과 종교적 온정주의를 던져 버리고 노동자와 함께 하는 밑바닥으로부터 복음 전도의 주춧돌을 놓기 시작하였으니 거기서부터 산업선교가 시작되었다  

성서를 가르치기 전에 기도와 예배를 드리기 전에 노동자가 스스로 존중받아야 할 인간임을 깨닫고 노동의 권리에 눈뜨는 것이 곧 복음이며  ‘노동조합이 곧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그는 확신하였다 

노동법이 있는 줄도 모르던 공단 노동자들이  산업선교회에서 교육받아 하나 둘 소모임을 만들어 유신의 탄압과 폭압을 이겨내며 조합원은 팽개치고 은근슬쩍 사장편을 들기에 바쁘던 어용노조들을 몰아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이렇게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노동운동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와 노동인권을 지켜내기 위해 교회가 내밀은 따뜻한 손길 이었다   허름한 잠바차림을 한 오빠 같고 형님 같은 조지송 목사가 기다리고 있는 그곳은 노동자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우물가요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이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소비자협동조합과 신협, 주택조합으로 대안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배워갔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정당한 투쟁을 불온 시 하던 독재정권은 산업선교를 눈의 가시처럼 여겨 도시산업선교가 들어오면 기업이 ‘도산’하고  산업선교 목사들을 빨갱이라고 매도했지만 진리에 눈 뜬 노동자들은 싸움을 멈출 줄을 몰랐다.

해고당하고 투옥되며 마침내 불온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만  탄압은 오히려 단발마가 되어 독제정권에게 되돌아갔다  노동자들과 함께 한 산업선교를 “바보들의 행진”이라고 부른 조지송목사는 십자가를 내걸지 않고도 복음을 전하였으며 성경말씀을 입에 달고 살지 않았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예수의 삶과 사랑을 증거 하였다

“바보들의 행진”을 마친 그를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따뜻하게 품에 안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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