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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각 목사 회고록(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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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0  17: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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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선각 목사 회고록 

   
 

차선각 목사(1942-

목민 고영근 목사의 11주기를 맞아 제 1회로 선정된 목민 고영근 목사를 기념하고 유지를 기리는 첫 수상자로 차선각 목사가 선정되었다. 오는 12월 3일(금) 오후 4시에 열리는 11주기 추모행사에서 시상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상은 높은뜻 광성교회를 은퇴한 정성진 목사의 뜻으로 제정되었다. 이에 시상위원회(한국일 장신대 교수,정봉덕 장로(전 사회봉사부 총무) 유재무 목사(예장뉴스) 고성휘 박사) 에서 후보를 압축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차선각 목사는 현재 고대안산병원 원목을 끝으로 정년 은퇴하시고 안산제일교회에 출석중으로 지병인 당뇨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한국전쟁후 월남해 부산에 정착해 부산고등학교를 거쳐 수산대서 SCM(기독학생운동) 에 투신 한 이래 평생을 진보적 기독교운동에 투신해왔다. 유신정권 시절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가 와해된 KSCF 중앙 총무대행을 맡기도 했었다.

부산지역에서 김광일, 최성묵 목사 송기인 신부등과 같이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하시다가 1983년 장신대에 입학해 77기로 졸업하셨다. 향린교회를 출석하다가 신학생 시절 현대교회서 당시 이화여대 해직 교수셨던 서광선 목사를 도와 교역자로 협력하셨다. 졸업후 NCCK 훈련원의 부장으로 88년 평화통일선언의 실무를 감당했고 그후 기독교서회(CLS) 총무 국장을 거쳐 기독교교육협회 총무를 지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농업기반 공사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후 안산 YMCA 이사장을 거쳐 2010-12년에는 전국 YMCA전국 연맹 이사장도 지냈다. 딸만 셋을 두었는 데 장녀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나와 중국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와 한신대등에서 종교학 강사를 하고 있다.

   
 

2012년에 소속된 강남노회에서 법적으로는 70세 정년으로 은퇴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 재직하고 있는 안산 고대병원의 후임 원목을 정하지 못하여 아직은 병원에 가서 같이 사역하는 교역자들과 원목일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나의 인생 마지막 사역이 되는 원목생활은 지금 까지 18년을 시무했으니 이 병원선교는 내게 있어서 아주 마지막 사역이 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현장인 셈이다. 그동안 오래기간 나와 동역하고 있는 000목사와 000전도사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다. 병원에서의 나의 사역은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내가 이 고대 안산 병원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참으로 우연이였다. 당시 산본에 살고 있던 내게 신학교 동기로 동생 같은 손신철 목사 가 당시 소망교회의 부목사로 있었는데 다급하게 고대 안산병원의 원목 자리가 공석이니 가실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반가웠지만 그때 나는 주변의 권유로 부산 YMCA의 총무로 지원을 해서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하더라도 3개월 밖에는 안되는 처지였다.

그러나 목사가 부름이 있는 데 외면 할 수가 없어서 그 기간동안 만이라도 사역하겠노라고 생각하고 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당시 3개월 정도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의 원목사역은 나의 전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길고도 아름다운 사역이 될 줄이야?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의 인생에 끝을 이렇게 아름답게 수놓게 해주고 지금 까지 도와주고 후원해준 손신철 목사에게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인생으로는 후배지만 나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도록 해준 사람이며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사람중 하나이다.

그리고 최근에 참으로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랑을 받은 일도 있다. 신학교 후배이자 부산에서 같이 활동한 경력이 있는 김형기 목사는 새문안교회 출신으로 서울사대 영어과를 나와 경주제일교회에서 목회를 한바 있고 지금도 경주의 팔복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는 학생시철 민청학련에 연류되여 구속되였다가 석방후 내가 있는 부산의 한 직장으로 내려와서 지내게 된다. 이후 내가 있는 부산의 인권변호사 김광일 변호사의 사무실에 소개를 하고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바 있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그도 서울로 올라와서 장신대를 졸업하고 내가 고 조남기 목사에게 소개도 하여 목회도 하게 한 가까운 후배이다. 그런 그가 얼마전 민청학련 사건이 무죄가 되고 민주화운동보상을 받으면서 기부를 하게 되어 있는데 내게 거금을 기부한 것은 의외다. 민주화운동 보상으로 돈을 받았다는 동료들과 후배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것을 직접 기부한 사람은 김형기 목사가 유일하다.

또 생각나는 것은 작년에 세상을 뜨신 김소영 목사와 오재식 선생이다. 김소영 목사는 부산에서 장신대 학장으로 계실 때 부터 인연이 되어 NCCK총무로 계실 때 훈련원에서 모셨고 원장으로는 오재식 선생을 모셨지만 기독학생운동의 선배다. 두분은 내 인생의 선배이자 멘토로 먼져 떠나 보내는 마음이 남보다 더 우울하였다. 그리고 이제 내 인생도 종착역으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나는 오랜 당뇨로 인하여 몇 번의 수술과 투병이 있었지만 모두 떨고 일어나서 아직은 내 손으로 운전하고 하고 가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은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식이요법과 약물요법으로 건강을 유지 하고는 있지만 점점 약하제는 것은 거부할 수 없다. 본래 건강하고 낙천적인 체질로 낙심없는 세월을 살았지만 지금 까지 이 만큼 베풀어 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할 뿐이다.

   
 

나의 가족들

또한 잘 자라준 세 딸과 나의 처에게 무엇보다도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막내가 아직은 미혼으로 있어서 생각 같아서는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을 보았으면 여한이 없을 것인데 하는 마음도 가져본다. 나는 그동안 한번도 나의 과거나 일에 대하여 문자화 하거나 남에게 얘기한바 없지만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작은 기록이라도 남기자는 후배들의 말에 막상 허락을 하기는 했지만 나의 그져 부끄럽고 후회가 많은 인생이다.

천성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하여 많은 이들과 교류하고 지냈지만 되돌아보면 감사하고 사랑스러웠던 사람들도 생각이 나지만 내게 손해를 끼치고 배신을 한 사람들도 생각이 난다. 그러나 그들도 모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배역들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 다. 훌륭하고 감동적인 드라마에는 주인공도 있지난 조연이나 보조적인 역할도 필요하다. 특히 선인과 악인의 역할이 조화롭게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극의 긴장을 더해주고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선책하게 하는 교훈적인 효과를 주는 것 같다. 나의 드라마에 나의 이웃으로 등장을 했건 걸림돌로 등장을 했건 이제는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담아서 감사와 용서 화해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다.

출생과 월남

1942년 평북 철산군 덕암리 내암동 275번지에서 부친 차형립 모친 이인관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는 조용한 농촌으로 기억된다. 부모님들고 모두 농사를 짓는 평범하고 착한 농부들이였으며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태여 난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내게 장차 앞으로 일어날 내 조국의 앞길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방향으로 갔던 것이다. 분단으로 인한 질곡의 역사가 지금 까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조국에서 동시대에 태여난 내 나이 세대들과 같이 우리는 그 고통을 비겨 갈수는 없었다. 년령적으로는 일제의 아픔과 고난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후 6.25와 군사독재 민주화 투쟁과 시민사회운동에서 적어도 나의 삶의 여정에는 이 식민통치와 민족의 분단은 숙명처럼 다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분단과 분단시대의 냉전체제와 분단사고는 나의 학생시절과 성장과정 성인이 된 지금 까지도 나와 이 민족을 애워싸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까지 고스란히 그 잔재 속에서 아직도 온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는 당시 이북의 공산정권이 세워지기 전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토지몰수 사건과 같은 사회주의적인 조치로 인한 이북의 정치에 개인적으로 저항하다가 옥살이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석방된후 먼져 이북으로 내려가셨는데 아마도 그런 정신과 생각으로는 평안한 생활을 하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을 하신 것 같다. 그래서 1946년에 홀로 개성으로 월남하신후 후일 돈을 주고 우리 가족들도 모두 길잡이를 시켜서 월남하게 하셨는데 그때 내 나이가 6세였다.

그래서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들과 같이 수색에 도차하여 살았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는 아버지 친구가 과수원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것은 덕은 초등학교에 3년에 편입을 하였다. 그곳에서 살다가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4 후퇴때 경기도 아산 송악면 동화리로 이주하여 송남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부산에서의 학업과 정착

그때 작은 아버지도 월남을 하셨는데 기억되기는 한국군에 입대하셨다가 부상을 당하시고 제대후 부산에 거주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중학교에 갈 무렵 부산의 작은 아버지 댁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산 대신중학교를 6회로 졸업을 하고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3회로 졸업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모든 가족들도 부산으로 이주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부산은 나의 인생에 반을 보내는 도시가 된다.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내 인생의 결정적인 방향을 정하게 되는 인생의 멘토들을 모두 부산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산은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나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북은 출생지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는 그래도 잘했던 것 같다. 당시 경남에서는 명문인 부산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것도 그렇고 졸업반인 1959년에는 서울대학을 목표로 삼고 공부한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해 사라호라는 전대미문의 큰 태풍으로 인하여 부산은 물론 인근의 남해일대뿐 아니라 나라전체가 큰 피해를 입는 천재지변이 일어 났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이 전파되여 공부를 지속할 여력이 안되였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국립대학인 수산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마 서울대학에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더라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수산대학으로의 입학이 나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생물공부에 취지가 있어서 수산생물학과에 들어갔다. 당시 동기로는 오창학 목사(신촌교회 원로)가 있었다. 그리고 채규웅 목사와 채규철 선생도 수산대학 동기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는 수산대학에서 SCM(Student Christian Movement) 운동에 참가를 하게 된다.

이미 부산에는 손명걸 목사가 지도자로 내가 다녔던 성동교회의 이직형 선생(후일 장로) 과 같은 분들이 계셨다. 그리고 원성희 선교사와 해먼드라는 캐나다 선교사들로 부터도 지도를 받았는데 해먼드(함명도) 선교사는 나에게 처음으로 신학의 꿈을 키워 주신 분이다. 졸업후 캐나다로 유학을 주선하겠다는 약조를 하기도 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인 SCM 활동

그러나 나의 수산대학에서의 SCM 활동은 단순히 회원으로써의 참가가 아니라 전국적인 지도력으로 성장해갔기에 그 약속은 나의 사정으로 이루워 지지 못했다. 나는 당시 기독학생 활동을 통하여 의식화가 되였다. 민족과 통일 그리고 개발과 기독교 청년 산업화 근대화 인간화에 대하여 체계적인 학습을 하였고 부산지역뿐 아니라 전국 연맹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당시 한국에는 기독학생 운동으로는 YMCA YWCA SCM이 있었다. Y는 1855년 “ 세계 YMCA 파리선언” 이라는 것을 발표한다. 이 선언문이 훗날 WCC의 골격이 되었다고 한다. Y 운동과 인자들은 기독교에큐메니칼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며 WCC의 위대한 지도자 죤 모토도 기독 학생 청년운동을 함께한 이들과 훗날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한 것이다.

이렇게 Y운동은 유럽에서 시작하여 미국에서 꽃을 피우고 세계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Y 가 세계로 확장되게 되는 연유는 미국 Y의 영향력이였는데 각 나라의 협동총무를 미국이 파송하였던 것이다. 강문규 선생(한국 Y운동의 산증인)은 Y학생부 간사로 시작하여 당시 한국기독학생운동의 살아있는 전설이였다.

당시 대학 Y는 연세대 YW는 이화여대 SCM은 서울대가 중심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대는 김성수 선생이 다소 보수적 지도자로 후일 강원용 목사가 있었다. 반면 Y는 김천배 선생과 강문규 선생이 지도자로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를 공략하기 위하여 농과대학의 허문도를 끌어드려 교두보를 형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학생 청년운동의 이러한 구도속에서 나는 SCM 운동에 매진했는데 여름과 겨울에 모이는 전국대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를 하였다. 당시 강사로는 강원용 목사(기장 경동교회) 와 문동환 박사(한신대) 김용준 교수(고대 교수, 동원교회 장로) 였고 당시 이 대회에는 경북대의 손인웅(덕수교회 원로목사) 와 한남대의 주연도(여수성광교회 원로목사) 정장복(전 한일장신대 총장) 김호일(서소문교회 원로목사) 도 참석을 해서 만나고 함께 하게 된다. 게 된다.

결혼과 아내

나는 1970년에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처는 서울대학교 음악과를 졸업하고 명성여고 음악교사로 재직중이였다. 고향이 김해인데 주민등록을 하러 부산에 왔는데 마침 내가 나가던 성동교회의 반주자를 구하는 형편이였다. 당시 처는 서울의 모 교회에서 반주자로 봉사를 하고 있는데 부산에 반주자로 간다고 하니 반대하면서 결혼이라면 모르지만 이라고 해서 당시 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처가는 장인이 먼져 세상을 뜨시고 장모와 처제만 있는 집안이였다. 그리고 불교재단이 명성학교 재직을 못마땅해 하신 장모께서 부산의 미션 스쿨인 이사벨 여중의 교사가 되어 사임을 하고 부산에 오게 되는 것이였다. 그러나 내가 민주화 운동으로 구속도 되고 조사를 받게 되자 학교에서 눈총도 받고 당시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사임을 하고 취미삼아 피아노 레슨을 시적한 것이 우리 가정의 자녀교육을 뒷바라지 하게 한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평생 돈을 벌기는 했지만 한번도 집에 갖다가 준적이 없는 무정한 사람이다. 사람 좋아하는 나는 언제나 친구들과 어려운 이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못하는 천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다.

나의 처 모친인 장모는 안씨 집안으로 주기철 목사의 첫 부인이신 안사모의 동생이 오빠가 되신다. 그러니 주광조 장로(주기철 목사 아들)이 외삼촌이시니 외숙모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장인이 세상을 일찍 뜨시고 딸들을 키우셨는데 경남여고를 나와 서울대에 들어 갔으니 본인도 그렇치만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이 대단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의 조용한 성격과 가정적인 품성은 나로 하여금 밖에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다. 특히 NCCK에서의 활동은 더욱 그렇게 되었다. 예장의 목회자 운동과 사회선교에 일반목회자로써는 한계가 있으니 선배들과 동료들을 따라서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선배인 금영균 목사와 윤두호 목사 김덕재 목사의 말이라면 그때는 아침 부터 나가고 늦게 까지 해야 했던 처지이다. 그리고 따르는 후배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의 귀가는 거의 12시였는데 지금으로는 엄두도 못내는 일이다.

 Y 전국대회와 동료들

당시 전국대회와 지도자 훈련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만 강원용 목사의 강의였다. 강 목사의 카리스마와 달변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박경서 박사도 그렇고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많은 학생들은 서울대학에 자주 강사로 오던 강 목사의 강연에 매력을 느끼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들을 하고 있다. 특히 본훼퍼 목사에 대한 사회구원과 신학은 나와 동시대의 젊은 크리스찬들로 하여금 신앙적으로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하고 넓은 신학적인 지평을 열게 하였으며 성장하게 하였다.

나는 잠시만 다니려고 했던 수산대에서는 기독학생활동에 빠져 4년을 졸업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카나다 유학의 권유도 뒤로 하고 기독학생 운동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여 부산지역의 학생간사가 되어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성동교회에는 유형심 목사라는 분이 담임목사로 계셨는데 장신대 박창환 목사와는 중학교 동창에 당시 동경신학대학에 유학을 하신 분으로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분으로 기억된다. 또 기독학생운동의 1년 선배인 이직형 선생은 훗날 KSCF 연맹 간사와 NCCK 인권위 사무국장을 지냈는데 같은 교회를 다닌 것도 내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 인생의 중요한 맨토인 최성묵 목사이다. 그 분을 나와 이직형 선생이 부산 YMCA의 총무를 모시기 위하여 운동과 지원을 했으나 처음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부산의 미문화원에서 일했는데 후일 부미방 방화의 주인공들이 그가 지도한 학생들이였던 것이다. 최성묵 목사는 훗날 부산 중부교회의 목사가 되는 데 부산민주화 운동의 기독교계의 대부이다.

한편 김정광 목사는 부산의 동광교회의 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나는 그때 교회를 이전하게 된다. 이 교회는 훗날 김 강목사와 이응삼 목사 허성환 목사가 부목사를 거치게 된다. 나는 예장에 뿌리는 갖고 있었지만 교파를 가리지 않았고 특히 신학적으로 기독교 장로회쪽에 가깝다는 것을 솔찍히 인정한다. 그렇기에 나의 학생시절도 그렇고 NCCK나 연합기관의 모든 활동과정에서도 교단을 초월하여 허물없이 사람들을 사귀고 지내왔다.

부산에서는 이미 김광일 변호사(전 국회의원) 와 최성묵 목사(기장 동광교회) 송기인 신부, 오수영 신부 윤00목사(감리교, 긴급조치 조사중 사망)와 교류가 깊었다. 김광일 변호사는 우리들의 물주였고 부산민주화운동의 맏형이였다. 나는 이렇게 학생청년 운동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이를 거스릴 수 는 없었는데 평소의 신학이나 신앙관에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부산에는 노경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김대중 선생의 부산지역의 비서실장쯤 되였다. 당시 김영삼 씨의 정치적인 고향인 경상도에서 특히 부산에서 김대중 선생을 위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 우리로써는 정말 대단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이 뜻이 통하여 시민사회운동을 함께 하게 되는 데 훗날 서울에 가서는 이 친구를 통하여 동교동과도 연결을 갖게 되었고 대선 캠프에도 참가를 종용 받았다.

그러나 당시 NCCK 총무셨던 김관석 목사께서 내게 정치보다는 신학을 하라는 권유에 못이겨 장신대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87년 양김의 분열로 인하여 교계와 시민세력이 갈라질 때 나는 단일화(김영상 대통령) 보다는 비판적 지지(김대중 선생)의 입장에서 조남기 목사와 금영균 목사 고영근 목사와 외로운 자리에 서있었던 적도 있다.

   
 

KSCF 연맹의 총무대행

나에게도 큰 시련은 있었다. 1972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전멸을 할때 서울(중앙)의 SCM의 간사들과 같이 구속이 되었는데 나만 홀로 90일정도 있다가 석방이 되였다. 그래서 와해된 연맹의 책임자로 75년부터 약 8개월간 서울에 머물러 재건을 하게 되였다. 그때 직원으로는 회계인 정명기 목사의 사모이자 목사인 강명순(전 국회의원)과 성해룡 목사 고 황주석군등이 있었다. 당시 학생기독교운동의 지도는 손명걸 목사가 했으며 훗날 YMCA YWCA 의 대학부와 같이 SCM이 통합을 하여 KSCF가 되고는 오재식 선생이 초대총무를 하고 신인현 목사도 후임 총무를 일하게 된다.

1972년에는 영남지역(부산 대구) 고등부 간사로 재직을 하면서 당시 고등학생이던 정연원 목사(오사카 교회)와 김병호 목사(동경 조후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모두 잘 교육받고 성장하여 지금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지난 2013년 4월에 오사카를 방문하여 정연원 목사도 만나고 오사카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한편 나는 1975년부터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먼져는 자동차 카바 상사를 하게 되었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당시 획기적으로 개발된 독일에서 개발된 홈 사우나를 판매하는 일이였는데 역시 실패했다. 물론 이때도 돈을 벌기는 하였지만 부산지역에 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일부터 해서 사실상 운동원 뒷돈을 댓던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아버지의 소천과 어머님의 헌신

내 부친은 먼져도 소개한 바와 같이 이북에서는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월남을 하시 경우로 공산주의 사상에 대하여는 아주 반대를 하셨다. 한때 서울에 머룰며 서북청년단에서 활동을 하시기도 하였다. 이 단체에 대하여는 그 평가가 아직은 엇길리는 데 보통은 이북에서 월남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당시 좌익 철결과 애국애족을 바탕으로한 반공청년단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닌 우익단체로 본다.

그러나 국가의 강한 비호를 받은 관변단체로 때로는 목적을 위하여 테러도 서슴치 않은 것으로 보도된 바도 있다. 이 서북청년단은 특히 기독교 계통의 사람들이 많기도 하였는데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 박사가 국내기반이 없는 것을 기화로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를 옹호하고 기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부친의 생각에 자신은 공산정권이 싫어서 살자고 월남을 했는데 자식 놈이 용공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당신이 하시던 가게 주변과 집에 진치고 미행하는 바람에 마음에 큰 상심이 계셨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을 얻었는데 아마 울화병으로 보여진다. 자식과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그 세대들 감상적인 반공주의에 물든체 83세로 세상을 뜨시게 된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런 부친의 처지를 육신적으로는 애처로웠지만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는 결코 따를 수가 없었기에 가족적으로만 보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 불효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친은 내가 서울로 올때 모시고 왔고 같이 살았는데 2000년대에 대전의 동생 집에서 세상을 뜨셨다. 모친은 감천교회의 권사로도 임직받아 시무를 하셨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는 특별히 반대를 하거나 찬성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세월을 하신 것은 사실이다. 나의 이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대접하는 성품은 아마도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다. 지금 생각하면 13세에 너무 일찍 차씨 집안에 혼인해 오셔서 갖은 고생을 다하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수발하신 사랑과 희생을 한시도 잊어 본적이 없다.

부산에서 서울로 

부산에서 이런 저런 경험을 하자 나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을 위하여 40세가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NCCK 총무였던 김관석 목사의 임기가 끝나고 후임 총무가 오면 NCCK에 가서 일한다는 묵계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예장의 김소영 목사가 총회 교육부 총무를 끝내고 선임이 되였다. 그래서 나도 예장 사람으로 교단안배에 따라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친구인 노경규를 따라서 동교동에 인사도 가고 김경재 전의원도 있어서 같이 어울리기도 했지만 정치에 몸을 담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장신대에 입학을 하게 되는 데 1982년이였다. 이 때는 신군부 전두환군사정권이 집권을 하였지만 전국의 민주화세력은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던 시기였다. 재야새력들도 이제 임기 5년을 기다리자니 운동의 장기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자리를 갖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왔다. 그리고 학생운동을 한 세대들이 취업도 안되고 특히 기독학생 청년 운동을 하던 이들이 대거 신학교로 입학을 하게 된다. 그 시기가 바로 1982년부터 시작이였다.

입학을 하니 기독학생 운동을 하던 서경석, 전응휘, 김00, 강우경, 조선대 해직교수인 임영천 장청 출신의 임동규, 김은일, 김일재, 허춘중등이 있었다. 그래서 김영락, 윤창현, 임대식, 이정수, 허성환등 젊은 구룹은 현대신학연구회로 우리 시니어들은 송정홍(송진섭 안산시장의 형)과 임동규, 김은일등은 목회연구회를 만들어서 써클활동을 하였다.

77기로 장신대 늦깍이 입학

그때 나는 서울에서 향린교회를 다녔다. 어디 설교를 들을 만한 데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건방지기 짝이 없지만 한참 운동을 하고 지적으로 왕성할때니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는 현대교회의 전도사로 부임을 했다. 원래 이 교회는 신상길 목사가 당시 지식인 중산층의 거주지인 현대 APT안에 세운 인텔리교회였다.

신목사는 부산에서도 인연이 있고 URM을 하던 분으로 의식이 있는 분이였다. 그러나 사임을 하게 되어 서울대학의 해직교수가 된 한완상 박사와 여성신학자인 최만자 선생이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구성원들도 일반교회 처럼 고리타분하지 않고 모두 깨여 있는 분들이다. 김판술장로나 조창현 교수(한양대) 정희경 현대고등학교 교장(전 국회의원)의 남편 남양 알로에 회장등이 교인이었다.

내가 갈 때 이화여대에서 해직된 사광선 박사가 장신대에서 청목을 하고 안수를 받고 청빙을 받았지만 설교만 하고 목회행정은 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동역을 하게 된 것이다. 서 박사와도 인연은 참으로 깊다. 당시 기독자 교수협의회가 있었는데 KSCF 간사가 그 모임의 간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었다.

그리고 2012년 서광선 박사가 세계 YMCA 회장을 역임할 때 나는 한국 YMCA연맹 전국 이사장을 하게 되는 인연이 있어서 참으로 사람의 앞날은 알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후임자 안재웅 이사장을 선인할 때 나도 기쁘게 오랜지기 안목사가 되기를 백방으로 도왔는 데 당시 서광선 박사에게 부탁을 하기도 하여 이사장이 되게 하는 일에도 일조를 하였다.

이렇게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하고 세계기독학생연맹 아시아 총무와 CCA총무를 지낸 안재웅 박사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실해 이사로 권한 것으로 시작하여 지역 이사장을 거치지 않고 전국 이사장을 지냈다. 모두 비상한 시국에 되어진 일이다. 그가 기독학생 간사 시절의 학생들이 Y에 들어와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는 것과 국제기구인 Y가 국제기구에서 활동한 그의 좋은 경력과 평판이 크게 평가를 받은 것이다. 

현대교회 시절

그렇게 되어서 나는 현대교회에서 3년 동안은 유급전도사로 서광선 목사를 모시고 교역자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목사가 되여서도 선교목사로 9년동안을 출석을 하면서 교인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오늘 까지 사귀는 현대교회의 가족이 되였던 것이다. 서광선 목사 사임이후 현대교회는 교역자들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교회다. 다시 한완상 박사가 오셔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고 조성기 목사가 인천제일교회에서 사임을 한후 부임을 하다가 포항북부교회에 갔다. 그후 조동천 목사가 왔다가 신촌교회로 이임을 하게 된다. 

평신도들이 수준이 높고 일반교회 같지 않는 점도 그렇치만 의식이 있다는 목회자들도 개 교회의 목회와 교인들의 욕구들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데에 부족했다는 것을 느낀다. 그후 좋은 분이 왔다고 했지만 다시 분립되고 아르헨티나에서 자라고 공부한 홍인식 목사라는 분이 왔지만 또 얼마 있지 못하고 사임을 했다고 한다. 나는 당시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의무적인 전임 교역 2년이라는 조항으로 인하여 부득히 사임을 하고 당시 NCCK 훈련원의 간사로 기관목사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NCCK 훈련원

당시 총무는 김소영 목사였는데 이 분은 영신 출신에 캐나다와 미국에서 에배학을 공부하고 박사가 되셔서 영신과 부산장신 학장도 지내신 분이다. 또 부산의 KSCF 시절 지도교수로도 함께 한 분이다. 과거 김관석 총무 시절 만큼은 아니여도 김소영 목사 나름대로 NCCK를 이끌어 갈때다. 무엇보다 WCC을 그만두고 귀국한 오재식 선생을 NCCK에 훈련원이라는 기구를 만들어서 운영을 할때에 나를 간사로 채용한 것이다. 그 연유로 해서 1988년 한반도 평화통일 선언문과 행사에 오 원장의 실무자로 참가한 것이 내게도 귀한 경험이였고 역사의 주연은 아니였지만 조연으로 함께 한 것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거기서 3년을 근무하고 마친후 기독교서회의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김소영 총무가 임기가 끝나고 서회의 사장으로 부임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무국장까지 지내고 나도 독자적인 일을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당시 기독교교육협회의 총무에 도전하여 부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나의 일생에 부산에서의 사업실패와 같은 고충을 안겨주었다.

교육과 출판에 대한 재미는 있었지만 만성적인 적자로 인하여 어음을 발행해야 했고 씀씀이는 많아져서 도져히 그 재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더 파산이 나기 전에 나는 사임을 해야 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감리교의 엄문용장로가 부임을 하여 회생을 한후 지금 까지 총무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나의 독자적인 생존의 길은 거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후 안산의 고대병원 원목으로 부임을 하여 지난 2018년 은퇴를 하고 안산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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