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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장신사랑기도회 설교문 (김인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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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9  22: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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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

/ 요한복음 15:12-14 / 장신사랑기도회 2019-04-29

4월 29일(월) 오후 5시에 신학대학원 78기 동기회와 함께 드리는 "제61차 장신사랑기도회" 에서 행한 설교다. 장신 사랑기도회는 한국교회와 신학교를 위한 장신대 기도 모임이다. 

   
 

/ 김인주 목사(제주 봉성교회) 

열흘 전, 노근리 학살현장을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피난행렬을 미군이 공격하였다. 기찻길 위에서 비행기의 사격으로 많이 사망하였다. 남은 사람들은 철로 아래 굴다리로 피신하고 납작 엎드렸는데, 사흘 동 안 총격에 시달렸다. 참혹했던 순간에, 만삭의 임산부가 아이를 낳았다. 엄마는 젖을 물리기 위해 몸을 잠시 일으키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아이가 울부짖을 때마다 총탄이 날아드니, 사람들이 소리쳤다. '어떻게 좀 해 봐요' 아빠는 소리를 잠재우기 위하여, 아이를 죽여야만 했다. 자식이 살 수 있다고 보장이 된다면, 자식 대신 아버지가 목숨을 내놓았을 것이다.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말이다. 굴 밖으로 나가자, 아빠가 먼저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사랑은 희생을 수반한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시간이 아깝지 않다. 그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온통 관심이 집중된다. 선물을 주고 돈을 써도, 늘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녀 간에, 금실 좋은 부부와 연인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진한 우정으로 뭉쳐진 관계에서도 나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려 했던 사례들이 미담으로 칭송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의무로 지켜진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빵은 육의 양식이지만, 남에게 나눠주는 빵은 영의 양식이라는 베르자예프의 지적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산상수훈에서는 주님께서 전혀 다른 질문을 하신다.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그게 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한다.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이방인들도 이같이 한다. 그리고 사랑의 범위를 더 넓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어떤가? 개역성경에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공동번역에서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옮겨졌다.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내가 대신 먼저 희생해도 좋은 사람 등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원문에서는 필론이 아니고, 필로온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본문은 전혀 흔들림이 없고, 외국어 번역에서도 늘 복수형으로 표현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5년 전에 박창환 학장님께서 제주도에 오셔서 여러날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신학교 입학하기 5년 전, 목회자의 꿈을 키우던 시절 교수님께 성서 번역과 해석에 대해 질문하는 서신을 보냈다.
초보적인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세 페이지나 되는 자상한 답장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푸근한 성품이 나에게는 신학교 시절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단수나 복수나 큰 차이 있나요?”

우리말에서 복수형을 억지로 표현하면 어색하고, 지저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는 분명히 복수로 읽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먼저 희생하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랑의 실천자가 된다. 공동의 목표 혹은 공공의 이상을 나누며 함께 나아가는 길에, 어려운 장애물이 생기고 돌파해야 한다면, 그때 먼저 나서는 사람은 분명,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먼저 지려하는 것이다.

나라와 겨레, 교회의 아픔와 어려움을 알기에 이를 먼저 살피는 것은 우리의 신학적 과제가 된다. 이것이 곧 장신대의 위상과 방향에 부합하는 중심에 선 신학, 공공신학, 온신학이 아닌가?

단수로 표현되는 친구는 과거지향적이며, 확장된 나에 불과하고, 의리를 지키는 우직함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복수형으로 다가오는 친구들은, 미래를 지향하며, 공동체의 목표를 향한 헌신, 즉 대의라는 측면에서의 희생과 헌신을 말한다.

당시 다른 길, 다른 신학교를 택하지 않고, 예장통합 혹은 장신대를 고수한 것은 우리 교단이 갖고 있는 잠재력,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은 이미 퇴색하였나? 실제로, 장신대와 예장통합은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고, 기대를 그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

40년 가깝게 지나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들의 꿈, 소명, 일생의 계획 -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소망이 있다. 이를 다시 살리고 새기며, 남은 생의 과제를 분명히 하는 복된 날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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