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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역사 속의 기독당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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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01  19: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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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역사 속의 기독당

 [글 싣는 순서]

 1. 유럽에서의 기독교 정당
 2. 우리역사 속의 기독당
 3. 기독교 정당의 출현
 4. 대중정당이 되기 위하여  

기독교 정당의 역사 

잘 알려졌다시피 ‘기독교’ 라는 이름의 정당은 해방 정국하인 1945년 9월 18일 신의주에서 장로교 윤하영, 이유필, 한경직 목사 등이 주축이 돼 조직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이하 기민당)이 그 효시다. 그러나 얼마 후 비기독교 인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기독교’를 빼고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한다.

이들이 정당을 만든 이유는 현대국가로 이행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한후 정부가 구성되기 이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제단체 등록을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한경직 목사등 북한사회의 기독교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큰 조직이지만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구소런이 공산주의 국가로 공산당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골욕지책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시 강령도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목표로 사회민주주의 권력수립과 기독교적 역사관에 의한 점진적인 사회개량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민당의 세력 확산을 우려한 소련정권과 공산당은 11월 1일 신의주 인근 용암포에서 열린 지구당 조직대회를 방해한다.

이 ‘용암포 사건’ 에 조응하는 반공주의 시위가 확산돼 11월 23일 신의주의 6개 중학교와 부근 학생 5천여 명이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보안부, 평안북도 공산당 본부, 신의주 보안서를 습격하고 공산당은 이들을 강제 진압하고 당도 해산시켰다는 것이다.

또 1945년 11월 조만식 장로와 이윤영 목사의 주도 아래 ‘조선민주당’이 결성된다(학자들에 따라 조선 민주당을 기독교 정당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조만식 등은 창당 후 소련군정 및 김일성과 담판을 벌이려 했으나 이듬해 1월 공산당에 체포됐다.

그후 정당활동의 한계를 느낀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월남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정당 창당 움직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년여를 준비한 끝에 1947년 11월 김화식 목사, 고환규 장로 등은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김 목사를 포함한 4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투옥시키고 정당활동을 금한다. 그후로도 기독교회는 공산당의 탄압에 저항하며 1946년 당시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던 장대현교회에서의 3.1절 기념예배등에서 노골적으로 저항한다.

북한에서의 기독교 정당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기로 하고 교회를 선거 장소로 이용하며 북한 교회의 반응을 시험한다. 이에 북한 교회 5도 연합노회는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구분한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의 여하한 경우에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현직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 확보한다 등 5개 항을 결의하며 반대했다.

이후 북한 공산당은 교계 지도자 체포 등 교회 탄압에 착수했고 그해 11월 28일 당의 외곽에 ‘기독교 연맹’을 결성해 김일성의 외삼춘 강양욱을 내세우고 김익두, 박상순 목사 등을 포섭해 김일성 지지, 남한 비판 등의 결의문을 체택하며 5도 연합노회에 대항하도록 하고 분열을 획책한다.

남한은 상대적 자유로 정당엔 무관심

한편 남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북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에 기독교회를 보호할 필요는 없었다, 일제하에서 옥고를 치르며 항거했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정치결사체 보다는 교회 재건과 쇄신에 관심을 두었다. 반면 자유·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로 고생했던 이들로부터 신앙의 주체성과 순수성에 관한한 비판을 받자 우리도 교회를 지키느라고 고생했다고 버티며 교권을 내놓치 않차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교회는 이승만을 비롯한 기독교인이 대거 참여하여 반공을 내건 자유당 정부를 지지하게 된다. 1948년 해방 후 교회는 이렇게 정치권력에 순응하거나 무관심했다고 보지만 이후 정권에 기생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1960년 3.15부정선거 이후 국민적 저항이 큰 상황에서도 보수 교회 지도자들은 자유당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는 기념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신앙지키려는 몸부림

해방 이후 이처럼 북한에서 기독교 정당 창당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에 대해 기독교 역사가들은 북한에 소련군정이 들어서자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공산정권에 대항하고 교회의 자주권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공산화가 급속히 진행된 이유도 북한의 독립운동가나 애국지사들은 모두 정치의 중앙무대로 월남한다. 그 결과 공산당에 맞설만한 정치적인 단체도 지도자도 부재하여 었다는 점, 그 결과 철저히 지역에 기반을 둔 많은 교회들은 스스로 생존하고 보호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공산당의 집권을 막고 대항하기 위하여 사회단체를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면에서 해방 후 자유당 정부와 밀착된 남한 교회의 정치 참여방식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혹독하다. 미국은 아시아의 반공벨트의 중심을 세우기 원했던 미국의 충실한 지도자가 필요했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독립국가 설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친일파들은 고위관리와 국회, 정당등에 다른 종교인이 비하여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보수 교회 목회자들은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정치권력의 합법화에 협력했다. 진보적 교회들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등을 통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독재화에 저항했다. 반면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우며 종교의 정치 중립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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