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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애(三愛) 배민수 목사 세미나 열려총회 농어촌부선교활성화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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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02  18: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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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애(三愛) 배민수 목사 세미나 열려

총회농어촌부선교활성화세미나

우리교단 총회 농어촌부를 설립하고 총무를 지내신 삼애 배민수 목사의 정신을 기억하고 잇는 세미나가 지난 5월 2일 총회 100주년에서 열렸다. 이 모임의 1부는 총회 농어촌부 부장 천정명 목사의 인도로 부총회장 김태영 목사가 설교했다.

   
* 농어촌부 부장 천정명 목사

세미나는 총회 농어촌부 서기 서성구 목사의 사회로 1강은 변창배 목사가 2강은 최재건 목사(전 연세대 교수)가 ‘배민수 목사의 항일운동및 그 유산의 기증과 유지의 계승’ 에 대하여 3강은 황해국 목사의 ‘배민수 목사의 삼애사상과 사회적 성숙성 연구’ 에 대하여 발표했다.

   
* 총회 사무총장 변창배 목사

제 1강 변창배 목사의 발표 요약

변창배 사무총장은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IMC)의 한국농촌사정 조사보고와 배민수 목사의 농촌운동’ 이는 제목으로 발표했는 데 우리교단 농어촌부가 설립된 1928년 전후의 사정을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으로 1984년에 출간된 ‘대한예수교장로회100년사’ 와 2003년에 발간한 '교단 창립 90년사' 그리고 지난 2015년 총회 창립 100년을 맞아 출판된 ‘통합총회 100년사‘ 를 근거로 교단의 농촌선교와 활동에 대하여 소개했다.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IMC)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로 참석한 이들은 감리교의 신흥우, 김활란, 양주삼과 장로교의 정인과 목사였다. 그 외 재한 선교사 노블과 마펫선교사가 자문위원으로 참석한다. 1925년 이 회의를 준비하던 죤 모토(미국 감리교) 는 조선의 교회들로 가입하게 하고 대표들을 초청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교회가 세계교회의 일원으로 에큐메니칼의 정신에 따라 참여한 첫 번째 회의를 통하여 세계교회와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아직 농촌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사정에 대하여 미국의 농촌 사회학자 브르너의 보고서와 신흥우의 YMCA가 농촌사업을 통한 농민생활 향상에 힘을 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배민수 목사는 평양신학교(1930)와 미국 시카코의 매코믹신학교(1931-1933)를 졸업하고 들어와 농어촌부 총무가 되었다. 미국에서의 지원과 당시 부장 정인과 목사등과 의기 투합하여 농촌부를 세워 활동을 하지만 당시 총회 분위기나 일제의 감시와 교단내 고질적인 파벌과 보수성으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은 이런 여러 가지 요인(배목사의 농촌부 사업이 반일이라는 일제와 총회 내 알력)과 노회들의 농촌부 펮비 헌의로 농촌부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이후 배민수 목사는 다시 도미하여 이승만이 프린스턴 유학중 세운 한인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다시 귀국하게 된다.

   
*  최재건 목사(전 연세대 교수)

제 2강 최재건 목사 강의 요약 

최재건 목사는 미국장로교(PC-USA) 목사로 안수받고 은퇴하신 분인데 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원 교수를 지냈다. 연대에서 배민수 목사(1896-1968)에 대하여 연구하고 학위를 받은 신 분이다. 당시 연대 방기중교수의 지도로 연구를 하게 되었는 데 배민수 목사의 유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완성도를 높힌 분이다. 

최목사의 발표는 주로 배목사의 항일운동과 그가 만년에 남긴 재산을 연세대학교에 기하게 된 동기와 이후의 계승에 대하여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배목사는 청주 출신으로 그의 부친 배창근이 독립운동과정에서 일경을 살해한 것을 계기로 온 가족이 탄압을 받게 된다.

가세가 기우러 청주에서 청남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한다. 거기서 평생동지들을 만나게 되고 후에는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노덕술과 무명지에 혈서를 써서 항일운동의 결기를 다진다. 그는 만주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무장투쟁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1915년 숭실동문인 노덕순, 장일환, 서광조, 강석봉, 백세빈, 노선경(노백린 장군의 아들)등 30여명과 ‘조선국민회 조선지부’ 을 설립한다. 1917년에 검거되여 징역 1년을 살게 된다. 그후 당시 독립운동 내부의 노선(무투와 외부세력 지원론등)을 벗어나 장기투쟁을 계획하면서 숭실전문에 들어간다.

이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덴마트식 농촌교육을 기대하면서 순회강연과 교육을 실시한다. 그후로도 배 목사는 한국교회와 농촌개발을 위하여 전생애를 바친다. 그의 미국 매코믹 동문인 키틀러 목사등의 도움으로 많은 기금을 모금하였고 농촌발전을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예장총회가 남북 주도권 문제로 전남노회가 새로운 총회를 설립을 정도로 대립하였고 총회에 낸 기금이 흥사단 자금이라는 오해와 거액을 내 총회 부서를 만든 것에 대한 김인서 목사등의 비판이 일었다. 결국은 남성정교회(대구제1교회)1937년 총회에서 정인과, 배민수 목사에 대한 치리요구와 총회 원로들의 동의로 농촌부를 폐지된다.

배민수 목사는 청주에서 청년 이승만의 연설에 감동된 이해 미국에서의 해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전국 금융조합연합회장 자리를 주지만 적응하지 못한다. 자유당 창당 때는 중앙위원 15인중 1인으로 위촉을 하지만 정치에도 큰 관심을 갖지 못한다.

그의 목표는 오직 농촌지도자 육성이었다. 그후 대전의 기독교연합봉사회를 만들고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운다. 그러나 이사회가 고령을 이유로 퇴진을 요구하여 분규가 난다. 1963년 가족들과 고양군 일산리에 현재의 삼애농장으로 이주하여 마지막 삼애농민학원을 세운다.

그의 정신은 덴마크의 그룬투비와 같은 하나님을 사랑하자, 사람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 였다. 그것이 삼애정신으로 하나님 농촌 노동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1968년 그는 소천한다. 영락교회에서 숭실대학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부친과 함께 1993년 건국훈장과 애국장에 추서된다.

그리고 57,223평의 고양시 삼애농장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한다. 숭실출신이지만 농대가 없었고 연대는 농업개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교파이라는 협소한 틀과 교권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초연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사모 최순옥의 주장으로 보면 삼애정신을 가장 잘 실천할 것으로 연대를 정한 것이다. 기증조건도 있다. 6개항인데 1. 삼애정신 실천, 2. 기념도서관(유품과 자료), 3. 고등공민학교 교사 증축, 4. 초교파의 농촌교회 설립, 5. 배 목사 부부의 묘소 관리,6. 삼애농업기술학원을 연대 농업개발원 부속 실습장으로 할 것등이었다.

그러나 산업구조의 개편과 농촌사회의 변모는 그의 유지를 액면 그대로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연대는 이 토지를 매각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가족과 기념사업회가 연대에 이를 실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우리총회와 협의를 하도록 협정서를 만든다. 그렇게 되어 우리총회 농어촌부 총무 박노원 목사가 개입하여 매각을 하지 못하고 현재 까지 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기념사업회는 연합신학원에 농촌관련 학생들의 장학금을 주는 사업과 학술세미나는 1993년 이후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곳의 부동산 가치가 높아지면서 작년에 이곳에 아파트건립 얘기가 나오면서 우리 총회는 가족들의 유지를 받들어서 배민수 목사의 정신계승을 위한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 것이다.

다행히 103회기 농어촌부에서 총회에 헌의 하여 위원회를 만들어서 연세대학교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우리교단 역사에 배민수 목사와 같은 분들이 계셨다는 것을 알리고 그의 정신을 기념하고 기리는 사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 황해국 목사(세광교회)

3강 황해국 목사의 강연요약

황해국 목사는 배민수 목사 기념사업으로 개설된 연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배민수 목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첫 수혜자다. 그는 맥 아담스의 이야기심리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배민수 연구를 하였다. 삼애사상을 학문적으로 구체화하고 정리한 것은 그 의미가 크다.

황 목사가 이 논문을 위하여 결론적으로 도출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적 성숙성에 대한 연구다. 이는 임마누엘 라티의 사회구조적 코드로 분석한 해방신학적 목회 돌봄과 연관 짓는 다. 인간의 경험은 어떤 사건과 상황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통하여 신학적 분석을 거쳐서 순환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목사는 식민지하 도탄에 빠진 조선 백성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농촌개조를 하나님 사람이라는 신앙으로 승화시킨 분이다. 당시 전 인구 80%가 농민들로 미래사회를 예측할 수 없었던 지도자들은 거의가 농촌사회가 유일한 사회구성체로 본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농촌운동을 통한 민족운동의 고취를 위하여 그 자신이 직접 노동을 통한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그 자신이 직접 농촌사업의 실천자로 살았고 그의 유지까지도 오직 농민 사람을 실천하였기에 황 목사는 그를 사회치료적 목회자라고 보는 이유다.

황목사는 배민수 목사의 전기를 이런 분석적 도구를 통하여 심리적접근을 통한 사회적 성숙에 대하여 민족과 농민사랑을 신앙적 행동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 것이다. 사회적 성숙은 이기적 삶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참여하는 방법을 구한 것이다. 이를 통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성숙함을 강조한 것이다.

끝으로 편안하고 쉬운 길을 버리고 작은 길을 걸어간 것은 예수의 삶을 실천한 것이다. 따라서 배목사가 꿈꾸고 실현을 기대한 성숙한 사회를 향한 기독교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와 민족을 향한 치료와 목회적 돌봄은 지역교회 목회만큼 귀하고 필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배민수 목사의 스피릿을 실현하기 위한 연세대학교나 우리교단이 기억해야 할 과제들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1. 삼애정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계승할 준비가 되었는 가?
2. 그의 기부로 얻어진 자산은 그의 정신으로 활용되고 있는 가?
3. 그가 가슴속에 품었던 삼애를 어떤 모습으로 다음세대에 가르치고 있으며 사회치료적인 목회와 돌봄을 실천하고 있는 가? 동시에 오늘날의 농촌(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는 무엇인가?
4. 그가 가슴속에 품었던 하나님 사랑과 국가 사랑을 보고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그 사랑을 실현할 것인가?

5. 그가 주창한 노동사랑은 정당하게 일하는 성실성을 말하는 데 우리는 어떤 노동을 가르쳐야 하는 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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