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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가 우리에게 남긴 것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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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14  2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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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가 우리에게 남긴 것   

전염병은 오래전에도 있었고 가깝게는 년전 메르스 사태도 겪었다.  원인으로는 인구팽창과 소비극대화로 인한 생산과잉으로 인간들의 탐욕에 인한 피조물과 생태계의 파괴였다. 문제는 예전 보다 내성이 강해졌기에 신종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의학과 과학에서의 연구와 조사는 따로 두고 라도 우리 기독교와 관련하여 특히 우리교단과 관련하여 제기된 문제들을 무엇인가? 

우선 전반적으로는 인간의 무능 혹은 연약함에 대하여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가시적으로 누려왔고 보여준 여러 가지 번영과 성과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무엇이 중헌디“ 라는 영화속의 어린 어중생의 한 대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았을까? 그렇다면 다행일 것이다.  

이런 문제는 우리만의 것도 아니다, 국가는 국가대로 새롭게 제기된 문제로 우왕좌왕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차츰 정리가 되가고 자리들은 잡아갈 것으로 보여 다행이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이는 이미 예고한 상업적 식단으로 인한 육류소비 증가와 인스탄트에 익숙해진 소비에 맞추기 위한 대량사육과 가공, 장기보존과 이동을 위한 냉동과 방부제 사용으로 인한 배달 네트웍의 발달은 건강한 먹거리의 파괴와 자연회생력 순환농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과 소비주의 결과 
지칠줄 모르고 자본의 자기증식에 매진해온  자본가들의 탐욕이 불러온 전지구적인 결과물이 이제는 인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되여 강제로 활동을 멈추게 했다. 인구가 밀집된 인도같은 경우는 차량과 공장의 가동중단으로  산업 증식을 멈추자  하늘은 맑아지고 공기는 좋아졌다고도 한다. 상품생산과 자본의 노동이 자유로웠던 세계시장의 통합이 중단된 것이다. 급속한 세계화 추세가 일순간 정지한 것이다.

이 팬데믹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 종교인들은 이것을 어떤 섭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성경의 말씀대로 피조물의 애타는 탄식을 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지속해온 너희들의 삶의 패턴을 버려라. 그 패턴의 핵심은 욕망의 극대화와 그 충족의 극대화라는 메시지다.  사람들의 균형 잡힌 충족이 아니라 소수에게로만 집중되는 차별적인 욕구충족의 극대화로  지구에게 보내는 절규로 보인다.

당장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파멸이라고 이미 로마클럽과 어린 소녀 그레타 둔베리는 외치고 있다. 지구는 인간에게 이렇게 해서라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멈춰서서 이후의 세계를 바라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더 진화한 바이러스를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체워지지 않는 욕망을 막지 않고 서는 더 이상 지구가 온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팬더믹 위기가 지난 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답은 명확하다. 이 위기를 겪으면서 그렇게 자신했던 국가간의 공조와 협력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국제질서와 협력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항공이동과 비자허가도 강화될 것이다. 이동간의 검역과 비용은 전적으로 자국부담이기에 전체적으로 인간과 자본, 문화의 이동은 축소될 것이다.  

내셔날리즘의 강화
여행과 관련된 사업은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인간의 욕구충족 극대화와 무한한 자본축적을 위한 경제제도의 틀을 바꿔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윤리적 소비와 공정무역이 큰 힘을 받을 것이다.  과거 실업률이나 경제성장 침체로 인한 일시적인 경기하락과는 다른 변동을 예고한다.  그러나 나뿐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국가의 역할이 커질 것인데 정보 통제와  이동제한등을 강화할 것이다.

특히 산업화와 정보와 AI의 기반이 부족한 가난한 국가일 수록 국가통제가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큰 쟁점이었던 보편적 복지로의 국가지원과 기본소득이나 보조의 논의는 자연스러워졌다.  과거 IMF시절에는 기업채무에 대한 공적자급 투입이 이제는 특정 소수에게로 집중되는 이 잔인한 부의 메커니즘으로 부터 착취당한 국민이 주인공이다.  그럴 수록 대안에너지, 대안농업, 저에너지 활동, 적정생산과 적정소비, 경쟁을 넘어선 상호부조가 전면 등장한다.

19세기 이래 사회이론가들이 주장했던 덜먹고 덜 소비하고 함께 사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팬더믹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고 이런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19가 그동안 인간 문명 앞에 가려져 있던 자연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주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와 항공기는 멈추고 공장과 가게가 문을 닫고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자제하면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지구환경 복원 실험이 강제로 진행되는 셈이다. 각국의 이동제한 조처로 전 세계 35억 인구가 강제적, 자발적 격리 상태에 있다.

사람 발길이 끊긴 곳에서 땅과 물, 하늘의 동물들이 한껏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한국보다 훨씬 강력한 봉쇄와 사회적 거리두기에 들어간 서구권과 중국, 인도 등에서 그 효과가 더욱 뚜렷하다. 영국의 항공정보제공업체 OAG에 따르면 3월 말 기준으로 전 세계 정기 항공편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줄었다. 유럽에선 감소폭이 90%나 된다. 전 세계 항공사의 하루 운항 편수는 2월 약 20만편에서 3월말 6만여편으로 감소했다. 국내선보다 국제선 감소폭이 훨씬 더 크다. 한국에서도 국제선 탑승자 수는 95%나 급감했다. 국적 항공사 여객기 10대 중 9대는 지상에 묶여 있다. 덕분에 하늘의 새들은 안전해졌다

포스트 '코로나19' 생각할 것
’코로나19‘ 에 대한 피해로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직도 확진 환자가 줄지 않고 있는 가운데 치료와 검진 모두 준비가 안된 상태다. 인명피해만도 피해지만 이런 상태가 정상화되는 데 드는 시간과 사회적 비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회적 현상과 달라짐에 대해서는 필요한 이들의 연구와 조사가 될 것이니 생략하고 우리 교회로 국한해서 드려다 보자 예배의 형식이 달라지고 다양화되면서 교인만이 아니라 목회자들도 혼란을 겪고 있다.

현재의 어려움은 알지만 이 일로 우리의 기형화된 체질을 개선하는 데는 누구도 말못한다. 욕을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한 논의를 해야 해법이 나온다. 내가 개인적으로 목회을 안하거나 끝말에 무책임하게 한다고 할 수 있지만 언론인으로 공론화를 하자는 의미다.

다행히도 우리총회가 오는 7월 중에 신학자, 목회자, 비기독교인 저널리스트, 학자 등을 초청해 코로나 이후 예배와 교회의 정체성, 신앙적인 삶이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 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인의 삶, 신학적인 대 공황이나 말세적인 상황 속에서의 교회의 위치, 이단과의 대응 등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열 예정이라고 하는 데 기대를 건다.
   
 
예배 논란은 비 본질
지금 교회 예배를 어떻게 하느 냐? 하는 것은 지엽적이다. 그것은 이런 현상이 완화되면 다시 열심히 모이고 드리면 되는 문제다. 불필요하게 정부와 대결 말고 우리 갈길이나 가면 된다.  다만 이번에 직격탄을 맞은 비자립교회와 임대교회 빚이 있는 교회들 문제는 한마디로 심각하다. 대형교회나 일부 교단이나 노회가 몇 개월 동안 지원하는 것은 고맙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교단더러 책임을 지라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러나 교단이 지금 드러난 교회들의 문제를 여전히 과거처럼 개인문제라고 외면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상회란 금전적인 도움만을 주는 곳이 아니다. 원래 장로교회는 노회들의 연합이고 노회는 교회의 허락과 설립, 목사의 안수나 청빙을 할 때는 사역지나 생활대책이 없는 곳은 청빙할 수 없다는 법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재로 이행되느냐는 외면한다.  몇개의 대형교회가 지원을 한다고 해도 몇개월이다. 이것으로는 환자에게 링거정도일 뿐이다. 언제 까지 그렇게 연명치료를 할 것인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무엇이 중헌디?  
모이는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 예측되고 원한 상황이 아니니 우선 이 현상과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상고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당장 설교를 어떻게 할까 부터 생각한 것 같다. 이는 불교의 동안거와 하안거와 같은 깊은 침묵과 성찰의 훈련이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도 피정이나 리트릿 같은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자기 사역과 하나님과 깊은 내면의 대화의 시간을 갖는 데 비하여 개신교만 계속해서 무언가를 전달하고 모으고 사육하는 방식의 목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를 통하여 교인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영상이나 홈피가 없는 작은 교회의 경우 탈고한 설교 원고를 카록이나 문자로 보내고 질문을 하고 개별적 통화나 문제을 하는 등 예전에 없던 소통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를 경험한 분들도 있다. 대형교회들이야 문제가 덜하지만 이외의 교회에서는 목회의 방식을 바꾸워 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가정예배의 회복과 활성화도 성과다. 그동안 주일 날 자녀는 교사와 성가대로 나가고 어머니는 주방봉사나 성가대 아버지는 당회나 부서회의로 뿔뿔히 흩혀저 저녁에 파김치가 되어 말도 없이 각자의 방으로 갔다. 그러나 가족들이 성경을 읽고 질문하고 대화를 나누는 가정 제단이 정착화 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로는 도시의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는 교회들이다. 시골이나 농촌의 건물이 있고 랜트비가 없는 교회는 숫자는 작지만 고정비용이 없기에 버틴다.   그러나 도심의 상가 임대 교회는 월 고정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버티었지만 지금은 최악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은행부채라도 있는 곳이라면 더 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다. 어설픈 자립화 대책으로의 생활비 지원으로는 스스로 그냥 두기도 쉽지 않다.  

개인 결단 개척은 그만해야

앞으로라도 교회 설립은 노회의 필요와 판단에 의한 규모 있게 가야 한다. 개인적 결단으로 생긴 교회을 허입하고 관리하는 것은 그만해야 한다. 겉으로는 자립화을 위한 지원과 노력들을 하지만 여전히 탁상행정에 머문다. 문제를 알지만 누구도 입을 열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고 수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재 많은 노회에는 개인이 자력으로 개척한 교회들이 교회로써의 기능을 하는 지 점검도 안되고 있다. 안들 탓할 수도 없기에 애써 모르는 척 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개중에는 다른 임지를 찾거나 자립화로 최소한의 생존권은 보장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견딘다. 그런 와중에 코로나19 사태를 만나 모이는 예배가 어렵게 되고 재정문제가 심각해진다. 이것이 회복된다는 기미도 없어 보인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이야 말로 노회가 나설 때라고 본다. 노회 실사가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지시나 명령으로 접근말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전 노회장등 신망있는 선배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실제적인 상담을 하도록 한다.

이 상담에 응한 분들에 한해서는 노회가 자구책을 마련해줘야 한다. 방식은 임지 이동, 합병, 사임을 구분해서 적절한 예우를 해주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합병은 과거처럼 2-3개를 하나로가 아니라 현재 공간을 예배중심과 봉사나 지역사회 마을목회 사역으로 편재하는 것이다. 도심의 임대교회는 이대로 개인에게 맡겨둬서는 안된다. 한번은 확실하고 냉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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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못하면 외부 힘으로
옛말에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줄 뿐만 아니라 대안을 마련해줘야 한다. 개척을 대형교회의 지원이나 자비로 능력이 돼서 하는 분도 있지만 대게는 다른 사역지를 찾을 수 없기에 점포를 내는 맘으로 하는 게 대다수다.

그러다 보니 멘도도 없고 존심도 상하고 사정을 말하기도 부끄러우니 개척후 버티다가 야밤도주를 하고 이중직을 하는 분도 있고 이름만 걸고 개점폐쇄한 곳도 있다. 도시의 개척교회는 자가건물을 갖은 농어촌교회와는 또 다른 사정인데 거기는 교인이 없다고 해도 살집과 월세는 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 개월 얼마씩 도움을 주는 것도 귀하지만 교단이나 노회적으로는 실태조사와 아울러 자구책을 내야 한다. 자원해서 어려우니 상회가 개입을 하라는 것이다. 이런 소리가 야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소리다. 이제 사명으로가 아니라 생존으로 하는 목회는 다시 한번 돌아보야 한다.

신학교의 난립으로 대책없이 경쟁자들이 나오고 있으며 학교운영도 쉽지 않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절벽을 생각해야 한다. 과거 몇천만원으로 가능한 개척이 억대가 드니 개척도 이제는 불가능한 시대다. 기성교회 교인도 감소추세다. 그런데도 성직 지망자를 학교나 교직원들을 위하여 받고 배출한다면 이것은 불법을 하라는 얘기다.

제도 변화와 지도는 필수 
위임목사 제도의 폐지로 동사 목사 도입을 과거 위임목사 중심의 목회를 다원화해야 한다. 위임목사만 부목사를 둘 수 있는 제도도 정비해야 한다. 교회에 시무하는 목사는 동사목사로 하고 임기제를 도입한다. 목회자 세계에서만은 차별을 없에도 평등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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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재 사역지에서의 고민과 비전을 공유하고 원하면 교환이나 가능한 곳과의 연합 혹은 합병을 주선한다. 사임을 원하면 기본 예우를 해줘야 한다. 노회는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고 회원을 적정선으로 유지해야 한다.

사모까지 상담에 부르고 응하는 분에 대해서는 지금 사역을 내놓고 지속할 수 있는 지 정리하고 싶은 지 그 방안은 합병이냐? 이임이냐? 사역지 교체냐? 지속이냐? 각종 대안을 내놓게 하고 절충선을 놓고 도와줘여 한다 이임자는 전별금을, 사역 교환자는 자리를 알아보는 등 다양한 방식의 목회적 도움을 실제적으로 줘야 한다.

개척은 노회가 주관해야
어느 곳이 교회가 필요한지와 누구를 파송할지를 노회가 주도권을 갖고 설립 운영 지도 감독을 해야 한다. 현행처럼 누구나 개척해서 되면 하나님 은혜고 안되면 개인 능력으로 치부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러려면 중 대형교회가 부교역자 자리를 늘리고 부목사로 은퇴를 하는 것도 권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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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거쳐서 살아남은 교회 혹은 체질을 개선한 교회에 한해서는 자립화를 위한 일정기간 대폭지원을 하여 자립화를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사 3년 기간을 연장할 때에 상담과 심사를 자원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회에 권위와 존경을 받는 선배들이 밀도 있는 동행과 상담으로 도와야 한다.
생계형 목회는 그만해야 
그동안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이면에는 나벌어 나먹기식의 개척교회가 대안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구절벽과 시대의 변화는 과거와 같은 작은 교회나 가족형 목회에 만족지 않고 대형화에 쏠림현상이 왔다.

개척교회의 신화는 설립자의 영웅담으로 포장되고 여기에 신앙과 신학이 덧입혀져 너는 왜 안되로 비숫한 처지의 동역자들을 대상화 시켰다. 안되는 것은 너무 많은 교회숫자와 민낮이 드러난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한몫을 한다. 그러나 이제 성공신화는 종언을 고한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성장론이 아닌 진짜 섬기는 목회로 꾸준히 노력하여 최소한의 자립화을 이룬 곳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따라서 연고지나 특수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틈새는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갈곳이 없어 개인적인 결단으로 무조건 개척하는 것은 이제 막아야 한다.
개척전도 훈련자만 파송해야
최소한 총회 국내선교부의 개척전도 훈련을 받았거나 모 교회가 지역을 정하고 일정기간 지원한다는 보장을 한다면 예외로 하고 목사 개인이 자비로 돈을 드리거나 대출로 하여 교인들에게 나중에 상환하도록 하는 식의 세속적인 방식의 개척은 더 이상 지향되야 한다.

지금 교회가 없는 것이 없고 교파별로도 포화상태로 결국은 교인쟁탈전이 되기에 경쟁적 전도와 양도둑질등 상질서가 무너져 버렸다. 이런 식으로 가면 다 어려울 수가 있다. 따라서 노회의 지도아해 합병과 통합등 사역의 다양화로 지도하고 유도해야 한다.

세계 역사상 목회자 개인이 사역과 생존이 뒤엉켜 도심(인구밀집)에서 건물에 세을 얻어 교회를 세우는 제도는 한국적 현실이다. 이제는 이것도 포화상태로 기존의 교회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더 이상 개인차원의 개척은 막아야 한다.

신학교의 변화
신학교는 사역지가 불투명한 현실을 직시하고 더 이상 학생들과 부모들의 주머니에 의존하는 교육을 그쳐야 한다. 목회 현장을 도외시한 이론중심이나 서구신학 이식을 하는 사변적 가르침을 중단하고 실제적이고 가능한 과목과 학제로 변화해야 한다.

신학대학교를 5개 권역의 허브로 경상도는 부산장신과 영남신학교(경산) 전라도는 호신과 한일장신 중부는 대전신학대학이 수도권은 서울장신대로 하여금 신학교육 중심에서 대회산하 소속 된 노회의 중심이 된다. 독일이나 호주의 주교회와 같은 형식으로 평신도 교육과 대회제도의 분권화에 중심이 것이다.

교권화하는 장신대 학부는 폐지하고 대학원 중심의 대학으로 역사와 수준에 걸맞게 세계적인 신학전문 대학원으로 석,박사중심으로 가야 한다. 한마디로 군살을 빼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며 학교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학부와 신대원은 모두 4개의 지방 신학교가 커버하는 것이다.

해외 선교지도 예외 아니다.
그동안 보내는 선교와 숫자, 개종전도와 기시적인 수치로 평가하는 선교마인드가 변화해야 한다. 비거주 선교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야 한다. 선교사 가정이 정주하게 되면 비자와 현지 생활과 차량유지와 자녀들 교육비로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해봐야 한다.

적어도 시니어(10년이상) 들에 대한 현지 사역평가는 현지 교회와 동역자들과의 협력사역과 이양준비와 관련한 것으로 봐야 한다. 언제나 상주하고 관리하고 나눠주는 방식에서 현지인에게 대폭양도 하고 본국에서 이를 컨트롤하고 년중 1-2회 방문으로 사역을 충족할 수 있는 지도 검토해야 한다. 거주비용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 것인지를 논의해야 한다.

지금은 SNS의 발달과 재정관리의 투명화로 회의와 송금 공유방등으로 얼마든지 원격적으로 선교사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이고 문제다. 따라서 이제 선교지와 사역은 시작부터 서서히 현지 사역자들에게 이양을 위한 프로세스인지가 평가기준이 되야 한다.

더 이상 선교사 개인의 사역충족을 위하여 건물을 짓고 대학을 세우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 현지 선교사들의 협력과 나눔 동역이 전제 되지 않은 투자는 의미없다. 그런 것은 이미 서구 선교사들의 반성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WCC 한 국제모임에서 한 인도인은 서구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더 이상 돈이나 교파신학의 교리전수가 아닌 진정으로 이 땅과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갖은 친구들을 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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