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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남대문 교회 밤에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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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17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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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교회 다시 보기( 남대문교회,1885)

서울 중구 퇴계로6
   
 
4대문 안에는 100년 이상이 된 교회 가운데 새문안교회(1887년)와 더불어 남대문교회(1885년)가 있다. 언제 부터인가 인근의 큰 빌딩 숲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70년대 이전만 해도 서울역인근에서 남산쪽에 우뚝 솟은 고딕양식의 석조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30년이상 시야에서 사라진 남대문교회가 밤의 주역으로 다시 태여났다.

지난 6월 17일(수) 오후 8시 어두운 하늘에 남대문교회가 조명으로 아름답게 드러났다. 서울시가 서울역 고가도로를 보행로로 바꾸고 ‘서울로 7017’의 야간 명소로 지정하였기 때문이다. 남대문(숭례문) 구 서울역사, 약현성당과 함께 시간의 축을 형성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삼은 것이다.

인근에는 전통적인 남대문 시장과 남산과 후암동과 서울 성곽으로 이어지는 명소들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 관광명소다. 따라서 이번에 LED투광의 공사는 서울시가 부담했고 전기료는 남대문교회가 부담하기로 하여 서울에서도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는 교회가 생겼다는 것은 의미있다.

이날 경관조명 점등식에서 남대문교회 손윤탁 목사는 “산업화 이후 도심 빌딩 속 섬처럼 묵묵히 자리하고 있던 남대문교회가 야간경관조명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며, “교회 외경이 밝아진 것처럼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남대문교회를 찾아 위로를 받고 삶의 소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남대문교회의 시작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조선의 첫 정주 선교사인 알렌 선교사 부부, 미북장로회 제1호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은 헤론 선교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턴 대부 (스크랜턴 선교사 어머니)이 알렌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함께 첫 공식주일예배 (first Stated Sunday service)를 드렸다. 훗날 이것이 제중원 교회가 되고 다시 세브란스 병원이다. 그러나 이렇게 남대문교회가 주장하는 첫 예배에 대한 추억이나 의미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자신들의 교회가 한국 최초의 교회라고 주장하는 교회들간에는 논쟁이 되겠지만 학술적으로는 큰 논쟁은 안되고 있다. 다만 지 교회가 자신들의 뿌리를 조사, 연구하여 부여하는 기록에 토를 달 필요는 없다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남대문교회는 자기 선조들의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 전통을 귀히 여기며 이어가는데 신앙적인 노력은 의미있는 일이다. 

남대문교회 홈페이지에는 “첫 공식주일예배는 이후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외교관 포크 등이 참석하는 정기적인 주일예배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고 하면서 “1885년 10월 11일, 루미스 목사의 설교와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가 집례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찬식이 행해졌고, 1886년 또 노춘경이라는 분이 해론의 집에서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국내 최초의 조선인에게 주는 세례식라고 믿고 있다.    

알렌과 남대문교회
상해가 선교지였던 알렌은 1884년 6월 미국에 선교지를 조선으로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하여 그해 9월 20일에 조선으로 온다. 마침 갑신정변으로 상처를 입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한 인연으로 1885년 서양식 의원을 제안하여 고종의 윤허를 받아 왕족의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제중원(광혜원)을 세우게 된다. 알렌은 미국의 초대 공사를 겸하고 있어서 언더우드와 아펜셀라가 입국할 때 비자를 내주기도 한다. 

그리고 1985년 4월 9일부터 시작된 제중원의료 활동으로 우리 민족을 향한 알렌의 헌신과 수고는 고종황제에게도 인정을 받아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의 벼슬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알렌은 미-일간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되어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미국 정부에 송환되었다.  

제중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지만 제중원 안에는 주일예배와 성찬식, 세례까지 베푸는 완전한 교회로써의 공동체가 있었다. 그 예배처의 이름도 제중원에서 생겼다 해서 제중원 교회, 구리개(한자말로 동현) 교회, 1901년에는 홍문동 교회와 합쳐지면서 중앙교회, 1904년 이후에는 남문밖 교회로 불리운다.

알렌 선교사의 일기를 살펴보면,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에 알렌 선교사 부부와 헤론 박사 부부, 스크랜튼의 어머니가 참석한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예배가 드려졌다. 그 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 외교관 포크도 이 예배에 참석했다. 1885년 10월 11일 주일, 루미스 목사의 설교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공동으로 성찬식을 집례한 한국교회 최초의 성찬식과 세례식도 제중원 교회에서 시작됐다.

제중원이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냐?는 미국 UCLA의 옥성득 교수가 문제를 제기한 것 글에 대하여 남대문교회 장로이며 서울치대 교수를 지낸 신재익 교수가 반론을 2015년 9월에 뉴죠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0228  (뉴스엔죠이)

"당대의 상황과 맥락 속에서 제중원 신앙 공동체는 존재해야 할 필요 충분조건이 있었다. 선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제중원은 선교사가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병원이었다. 제중원이 있었기에 알렌과 헤론이 제중원에서 의사로 근무할 수 있었고, 의사 스크랜튼이 의료선교사가 될 수 있었고, 언더우드가 약국에서 근무하며 제중원 의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으며, 스크랜튼의 어머니가 서울에 와 이화학당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아펜젤러가 선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미국 공사 포크가 있었다. 이러한 성격에서 제중원은 선교를 위한 신앙 공동체였다."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는 노춘경
최초의 세례식은 1886년 4월 25일 아펜젤러의 집례와 언더우드의 보좌로 스크랜턴의 딸과 아펜젤러의 딸이 유아세례를, 일본인 하야가와가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한국인 세례는 1886년 7월 18일 한국인 노춘경이 헤론의 딸 사라 앤의 유아세례와 함께 언더우드가 집례하고 아펜젤러가 보좌하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다. 남대문교회는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이 제중원 교회에서 시작됐다.

후일 남대문 교회는 세브란스 교회로서 세브란스 병원과 연희전문학교와 연계된 에비슨 선교사의 ‘트라이앵글선교전략’에 따라 ‘교회-병원-학교’라는 삼각 선교 전략의 한 축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선교사들뿐 아니라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인 서상륜, 함태영, 김익두 같은 이들이 조사와 목사로 시무했으며, 3.1독립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집사, 보건후생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용설 장로, 해방 후에는 김 구 선생과 같은 이들이 출석했다.

특히 6.25 전후 이북 피난 성도들이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를 약속의 장소로 삼을 정도였다.  해방 후 천주교인을 포함한 50만 명 내외의 성도를 가진 한국교회를 향해 ‘300만 구령운동’(대상은 다르지만 실제적으로 최초의 ‘삼백만 성도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을 전개함으로써 민족 복음화를 위해 크게 기여한 교회가 남대문 교회이다. 

알렌의 공헌
알렌은 추방후 오하이오주의 톨레도 지역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으며, 1932년 12월 11일에 소천하였다. 이후 남대문교회는 그의 고향 교회를 방문 교류하고 있다. 이처럼 제중원은 비록 외형적으로는 병원이었지만 공식 선교가 허락되지 않았던 조선선교의 초기에 주일예배와 성찬식 및 세례식이 베풀어지는 완전한 신앙공동체인 제중원교회였다.

따라서 아직 독노회도 없었고 선교가 허락되지 않아 선교사들이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의료를 통한 민간인 접촉은 그야 말로 하나님 은혜였던 것이다. 남대문교회의 역사에는 이런 비사들이 숨겨져 있다. 교회사적으로나 공식적으로 현지인 중심의 얘배공동체가 아니고 현지인 목사도 나오기 이전이지만 남대문교회가 기억하는 첫 예배는 비록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시작했지만 이 땅에서 드려진 첫 예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아직 한글에 익숙치 않고 그 예배에 한국인들이 참석했다는 증거는 없기에 선교사들의 모국어인 영어로 된 성경과 찬송가를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예배의 모든 행위는 영어로 진행했을 것이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남대문교회의 출발이나 초기 신도들이 모두 제중원에서 사역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제중원교회라는 이름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공동체를 세운 헤론이라는 사람은 스코틀랜드 회중교회 목사 아들로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평신도로 그리고 의료선교사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 계기로 1885년 10월, 미국북장로회선교회가 결성하였고(회장: 알렌, 회계: 언더우드, 서기: 헤론), 1887년 2월 7일, 대한성서공회 전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였다(헤론-창립위원)

헤론은 스코틀랜드 출신 회중교회 목사 아들로 1883년 미국 테네시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 기독교 선교잡지를 보던 중 ‘이수정이 조선에 선교사가 부임하기를 열망한다’고 쓴 편지를 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드린다.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회 제1호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을 때 그의 나이 29세였고 언더우드보다 한해 뒤인 1885년 6월 20일 제물포로 입국했다.

알렌과 헤론은 의료선교사
먼져와 있던 알렌은 미북장로교 선교사 1호인 헤론 부부를 환영하는 만찬과 함께 한국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훗날 헤론의 일기와 헤론 부부가 행한 선교마인드와 사역을 보면 그는 의료선교사이면서 평신도 목회자임일 알 수 있다고 한다. “아직은 공공연하게 우리의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복음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현지어로 말할 준비가 될 때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것을 들을 준비가 될 것입니다.”고 쓴다.

알렌을 이어 제2대 제중원장이 된 그는 5년 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의료선교사역에 헌신했다. 1885년 10월 26일에 보낸 그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1890년 7월, 선교사 가족들의 남한산성 휴가일정도 반납하고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을 버려둘 수 없어 환자 치료중 이질에 감염되었고, 7월 26일 34세의 나이로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순직하는 데 그의 무덤은 양화진에 있다.

훗날 장신대 학장을 지낸 마포삼열 선교사는 "헤론은 신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이상적인 의료선교사”라고 했으며 기포드 선교사는 "한국 성교서회의 창설은 헤론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라고 말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현대 의술로 조선 민중의 질병과 상처를 치유한다.

이후 1887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교회를 설립한다. 그러나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순교할 때까지 제중원과 예배 공동체를 섬겼다. 그의 1888년 일기에 “우리 사역은 아주 빠르게 진척되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매주일 성경공부반을 시작했습니다. 8~20명의 여성들이 모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사대문 안에서 사대문 밖으로’ - 남문밖교회
제중원은 1893년 에비슨 선교사 입국하여 제4대 제중원 원장으로 사역하면서 정상화되었다. 1894년 9월 26일 정부로부터 독립한 완전한 선교기관이 되었다. 1904년 남문밖에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은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전문화된 의료선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1910년 병원 건물에서 독립한 남문밖교회는 선교사, 병원직원, 환자와 보호자, 선교사가 세운 학교 학생,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예배처소가 된다. 당시 ‘중앙교회’라고도 불렸는데 이에 대하여 교회사학자들중 일부는 남대문교회 역사를 이때로 보는 것으로 보인다.

조직교회가 된 남대문교회
교회와 세브란스 병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함께 “교회-병원-학교”로 ‘트라이앵글선교전략’의 한 축이었다. 이로써 남대문교회에는 민족의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는 계기가 된다. 드라마 제중원으로 잘 알려진 백정의 아들로 최초의 공인 의사가 된 박서양과 김필순 등 세브란스 의학교 학생들이 그것이다.

또 3.1운동의 주역인 함태영 조사, 이갑성 집사, 이용설 장로,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 등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출석하였다. 또 서상륜, 김익두, 김치선과 같은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들의 사역지였으며 중공군 포로를 위해 섬기다 순교한 순직자 맹의순 선생님도 남대문교회를 섬겼다.

광복 후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 성도들의 집결지 및 민족복음화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기도 하였으며, 보육원과 유치원, 대한신학교와 월드비전의 창설에 기여 하는 등 교계와 사회를 위한 책임을 감당하는데도 그 역할을 감당하였다.
   
 
   
 
초기 교회 지도자(선교사,조사)
김필순은 제중원 평신도 지도자로 1899년부터 제중원에서 에비슨 선교사를 도와 1900년부터 통역과 조수로 사역했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망명한다. 1906년 최초 한국 해부학 교과서『해부학』 번역했고 1908년 제중원의학교 졸업한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7인 중 제2호이며 1919년 일제에 의해 순교

서상륜은 1901년 6월 병원 전도자로 부임(1883년 한국 최초인 소래교회 설립자중 한 사람) 이후 1887년 새문안교회 설립에 동참하였다가 병원 예배 및 기도회 인도, 병원전도사 역할을 한다.

한국인 지도자
박정찬 초대 목사(1912년-1917), 1910년 평양신학교 3회 졸업생, 청주읍교회 담임목사로 1912년 에비슨 장로와 * 유흥렬 장로와 당회을 조직한다. 함태영(1918년-1919년) 3.1운동 투옥, 연동교회 장로, 평양신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담임교역자

* 유흥열 장로는 이후 일본에 유학하고 목사가 되어 용인교회등에서 목회를 한다. 그의 장남 유재헌 목사는 경신학교와 피어슨학원을 나와 부흥사로 철원 대한수도원과 임마누엘수도원(세검정)을 세웠다. 한국전쟁중 납북 순교자하였다. 장녀는 대구서문교회 이성헌 목사의 사모였고 장남 유종건 목사(육사교회) 차남 유광웅 교수는 아시아연합신학원 교수에서 은퇴하였다. 막내는 유정심 사모다.

송창근, 함태영 조사, 1920년 이재형 담임목사 부임시점에 동역한다. 1905년 서울 피어선성경학교 졸업, 독립운동가 유포로 옥고를 치루고 이후 조선신학교, 서울성남교회 설립한다. 한국인 2대, 3대 담임목사와 담임조사 공동 사역한다.

제2대 이재형(1920-1923)승동교회 장로, 1918년 평양신학교 졸업, 경기도 양평지역 네 교회에서 목회, 김창덕(1921-1922) 이재형 목사 사임 후 담임조사로 사역후 3.1운동 주도로 투옥,1920년 4월 29일 평양감옥에서 출옥했다.

제3대 김익두(1922-1927) 유명 부흥사로 기장의 창립자 김재준목사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회심케 한분이다. 192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총회장, 신사참배 반대, 공산당에 의해 순교했다.

한국인 담임목사 시기
제4대 오순형(1928-1933) 영등포교회 담임목사, 백범 김구 선생에게 기독교에 대한 영향을 줌 교회대지에 대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단법인과 합의문 작성했다.

제5대 김영주(1933-1943) 전도사로 부임하여 안수받은 학생 시절 오사카에 있는 교포교회인 북구교회 전도사, 조선신학원 설립,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부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순교한다.

제6대 김치선(1944-1952) 캐나다 영재영 선교사 양아들, 3.1운동 참여, 고베중앙신학교 졸업, 1935년 달라스신학교 신학박사, 동경신주꾸중앙교회 목회, 한국의 예레미야, 새벽기도회, 300만 구령운동, 1948년 8월 인근에서 천막에서 대한신학교 설립한다. 여기서 오늘날 장로교 대신교단이 출현하게 된다.

제7,9대 배명준(1949-1953)목사는 김치선 목사와 동사한다(1953년 위임식에 한경직 목사가 설교하고 함태영 목사가 축도한다) 양평 고읍교회 담임목사, 6.25 전쟁 후 교회재건, 석조건물 예배당 건축, 1964년 제83회 경기노회장, 197년 한국교회협의회(KNCC) 회장, 1979년 12월 9일 남대문교회 첫 원로목사로 추대된다.

김선경 전도사(1945-1975) 김치선 목사와 배명준목사와 동역,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목사에게 세례 중국 청도 한인교회 전도사,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간사 (1928~1931년 해체 시), 30년간 사역 후 정년 퇴임하여 원로 전도사 추대(최초)된다. 1998년부터 후손들이 기금을 출연하여 한국교회 여교역자에게 ‘김선경 기념상’ 수여하고 있다.

제8대 김태묵(1954년-1957) 배명준 목사와 동사, 1948년 이승만 대통령 요청으로 하와이 한인교회 재건, 1951년 워싱턴 한인교회 창립, 남대문 옆 공원 터에 예배당 건축 시도한 바 있다.

제10대 김규병(1979-1984) 포항 북부교회 담임목사, 1979년 6월 3일 『남대문교회사』 출판(창립일을 1887년 11월 21일로 조정) 서울강남교회 믿음교회로 개척, 분립 후 15년간 목회 후 은퇴했다.

제11대 임영수(1984-1988) 서울 평강교회 담임목사, 1985년 6월 9일 임시당회에서 교회창립일 재제정 부결 1987년 11월 15일 창립 100주년 기념예배, 기념총람 발간했다.

제12대 조유택 목사(2000년 원로 추대) 故 조석훈 목사 4남(6.25때 황해도에서 목회 중 순교, 제161회기 서울노회장, 대광고, 연세대 영문과, 장신대, 아세아연합신학원 목회학 박사

   
 
제13대 손윤탁 목사(2010-현재)
효목중앙교회, 중곡동교회 담임목사 역임, 장신대 신학박사, 영남대 철학박사, 한국선교교육재단 이사장, 구약성경의 산책 등 10여 권의 저서 출판, 우즈벡선교 20주년 기념예배 및 목사안수식, 알렌선교사 입국 130주년 기념예배(2014. 9. 21), 첫공식주일예배 130주년 기념예식(2015. 6. 21) 에비슨 선교사 60주기 추모예배(2016. 09. 18), 순교자 맹의순 일기 『십자가의 길』 출판(2017. 07월 23), 알렌기념상 제정(2018.9. 16), 고 맹의순 선생 순직자 지정예식(2019. 02. 10)                               
   
                                                                          * 남대문교회 손윤탁 위임 목사
   
                                                                       * 남대문교회 장로회 헌신예배 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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