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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경 박사 소천(1세대 여성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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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24  22: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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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경 박사 소천(1세대 여성신학자)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여성 신학자중 분인 박순경 박사(이화여대)가 지난 24일 별세했다. 향년 98세인 박순경 박사는 여성 신학자로는 드물게 평화 통일운동에 투신했다. 1989년 범민족대회 남북 실무회담 10인 대표(학계)로 참여했고, 이듬해 범민족대회 실무대표로 활동했으며 해산된 통합진보당 지도위원도 지냤다.

1923년 경기 여주 출생인 고인은 감리교신학대와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에모리대학를 거쳐 드류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66년 귀국해 1988년까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초기에는 박봉랑 박사와 함께 칼 바르트를 한국에 소개하는 서구 신학의 전달자 역할도 충실히 하셨지만 이후는 한국신학에 매진하셨다. 
   
 
1978년부터 제3세계 에큐메니컬 신학자협의회(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 EATWOT 한국 책임자였고 1980∼1985년까지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과 직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외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풍토가 가시지 않은 상황속에서 고 이우정 교수와 함께 1980년 한국여신학자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1980∼1982), 한국 여성 신학회 초대 회장(1982∼1988)을 지냈다.제자들로는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출신인 전 민주당 유승희 의원과 김판임교수(세종대)등 여성신학자들의 대모로 통한다.   
   
                                * 늦봄(문익환) 통일상을 김상근 목사로 부터 2009년 수상
이를 계기로 여성신학자들의 대모로 한국신학의 마지막 과제인 분단극복을 위한 통일운동과 통일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하나님 나라와 민족의 미래’(1984), ‘민족통일과 기독교’(1986),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1992), ‘통일신학의 여정’(1992), ‘통일신학의 미래’(1997) 등 통일신학에 관한 단행본을 저술 출판하였다.

2006년 10월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초청으로 평양에 체류하면서 평양신학원의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를 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한국 기독교의 반공반북에 대한 비판적 실천과 민족복음화를 몸소 실천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1988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으로 활동했고, 1991년 범민련 남측준비위원회 구성에도 앞장을 섰다.

범민련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1991년 박순경 교수도 범민련 남측준비위 결성에 참여했다는 이유와 함께 유명한 ‘도쿄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구속이 되었으나 100일만에 석방된다. 당시 한국 기독교의 철저한 반공반북에 맞서 민족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체사상과의 대화가 필요하며, 북의 수령론을 기독교의 우상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독재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대적 분열관계 속에서는 결코 민족통일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박순경 교수는 통일신학에서 민족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기독교의 포용력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그는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을 통일신학의 가르침을 통해 평생 실천하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노년에도 전3권으로 기획된 “삼위일체 하나님과 시간론”을 연구와 집필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4호실이며 발인은 26일 오전 7시이며 장지는 천안 공원묘원이고 통일사회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알려졌다.발인에 앞서  25일 오후 6시 빈소에서 후학들과 시민들이 모여 '추모의 밤' 행사가 있을 예정이다. 연락처/010-2253-4058
   
        * 늦봄 수상식 좌우에 신낙균, 김희선 전 민주당 의원과 뒷줄 최영실(성공회대) 이은선(감신대)교수, 고 성정희목사등이 있다.
                         늦봄 통일상을 수상 소감 

통일맞이 기념사업회가 1996년부터 통일상을 수여해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제14회 통일상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오신 동지들이 많이 계신데, 이렇게 나이 들어 일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수상한다는 것을 송구스러워 합니다. 또 노무현 대통령께서 불의한 죽음의 세력들의 압력아래서 그렇게도 애통하게 서거하셨고, 또 통일운동의 강철 강희남 목사님이 이명박 정부를 꾸짖고 목숨을 끊으심에 우리의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고, 6.15-10.4 선언 등으로 상징되듯이 남북교류와 화해 무드를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다시금 남북이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적대관계로 치닫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축하받는 것 자체가 송구스럽지만, 오히려 이럴 때 일수록 통일에 대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신 통일맞이 기념사업회 심사위원 여러분, 시상식을 준비하시느라 수고하신 여러분, 통일맞이 기념사업을 이끌어 오신 여러분, 또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게 제자 김애영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신청서류를 제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몇몇 단체가 주관하는 상에 나를 적극 추천하신 분과 단체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상복이 없어서 과연 내가 그러한 상을 받을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들어 주저하였으나, 상과 함께 수여하는 상금을 받으면 내가 관심을 기우리고 있는 몇몇 단체와 사업들을 도울 수 있다는 주변의 권고로 세 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민주당 신낙균 의원이 두 번이나 나를 삼성 비추미 상에 추천했으나 두 번 모두 미끄러졌습니다. 처음에는 삼성이 수여한다는데 대한 거부감 때문에 신청에 있어서 마지못해 성의 없이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두 번째는 비추미의 학술부문이므로 신낙균의원의 추천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면서 김애영이 논문처럼 정말 성의껏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는데, 여전히 안되었습니다. 나는 사실 “비추미”라는 명칭자체도 마음에 안 들고, 더욱이 악명 높은 삼성공화국의 상을 내가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좀 돕고 싶어 하는 신낙균 의원의 성의도 고마웠고, 무엇보다도 김애영과 제가 사실 상금이라는 돈독이 올라서, 삼성 돈 좀 얻어 보자고, 상금을 받으면 이 단체 저 단체 또 북측을 위하여 쓰려고 계산하다가 김치국 부터 마시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잊어버리고 지내자 하였는데, 그래도 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탈락되고 나니 오히려 내 체면이 섰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YWCA의 여성대상을 위하여 여신학자협의회와 신낙균 의원이 저를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삼성 비추미 상을 위해 서류를 모두 만들어 놨으니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을 믿고 신청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몇 달이 지났습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은 나의 신청서는 아예 심사위원회에 상정도 되지 않은 채 서류심사에서 탈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YWCA의 여성상도 나에게 합당한 것이 아닌데, 몇몇 단체들에게 도움이 좀 될까 해서 신청을 묵인했고, 특히 한국여신학자협의회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좋아하던 김애영 때문에 혹시나 했어요. 나는 상복이 없어서 이미 받은 것도 박탈당하는 일을 당하였습니다.

1988년 이화여대 정년퇴임식 때 노태우 정부로 부터 “대한민국 석류장”을 받았는데, 2006년 행정자치부에 의해 통일운동에 관여한 일로 발생한 나의 국가보안법위반 전과 때문에 저 석류장마저도 박탈되었습니다. 노태우 정부의 수여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그 석류장을 시시하게 여겼으나 그렇게 박탈당하니까 분통이 터지더라구요. 그래서 권오헌 선생과 심재환, 김승교 변호사님들을 만나 협의하고 통일운동권의 여론이라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소송을 걸기로 생각하였는데 그것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포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주어졌던 상까지도 박탈되니, 나는 정말 상복이 없구나 생각하다가 “아니 나는 상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구요? 상들이 나를 힐끗 힐끗 바라 보다가 지나갔으니 내게 복이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 박탈된 상에 대해서는 분통이 터졌지만, 이 늦봄 통일상은 그 분통을 시원하게 날려 보냈습니다. 통일운동에 대한 아주 확실한 인장(stamp)으로서 늦봄 통일상을 받겠습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은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1980년대의 통일운동의 거목입니다. 시위행렬 선봉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외치는 소리는 청년학생들과 민중의 함성과 어울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듯했고, 거리에 쏟아져 나온 국민 대중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는 특히 1980년대의 통일운동 현장에서 청년 학생들이 목숨을 던져 통일을 외치며 죽어가는, 기막힌 광경을 막아 보려고, 1989년 3월에 철옹성 분단의 벽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가 김일성 주석과의 뜨거운 포옹으로 온 겨레의 흥분과 감격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남한과 미국과 일본의 반공•반북 수구냉전 세력들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늦봄은 드디어 우리의 비극적인 분단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출옥하여 “통일은 다 됐어!” 완료형 동사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런데 왜 통일이 아직도 안됐을 뿐 아니라 더욱 남북 관계, 조•미 관계는 더욱 더 꼬여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남한의 반공•반북 수구냉전 세력들이 미국의 수구 냉전 세력들과 결탁하여 분단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단 세력들과의 힘겨운 투쟁이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늦봄은 특히 한국기독교의 반공• 반북이라는 고질적인 이데올로기를 끝장 낸 목사님이고 신학자로서 한국기독교 역사의 신기원을 창출했고, 한국교회의 개혁의 물꼬를 극적으로 터놓았습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통일운동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늦봄 통일상은 한국 교회가 반공•반북 분단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미래의 민족사회와 국가 건설에로 통일대열 선봉에 서라는 외침의 표식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통일의 선봉에 선다면, 세계 교회로 하여금 북조선을 인정하게 하고 세계 사회를 개혁하게 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신앙의 능력은 불의한 세상을 변혁하는 능력입니다. 

나는 늦봄과는 다른 길을 걸어오다가 그분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에 대한 나의 각성은 1945년 시작되었어요. 분단 상황에서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던 해방정국에서 나는 “민족과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만나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필연이다!”라는 당시 내가 설명할 수 없었던 주제가 환상처럼 떠올랐습니다. 그 주제의 배경을 더듬어 보자면, 1942년 18-19세 때 내가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현재 연세대 간호대학 전신)에 입학한 직후, 나는 항일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같은 반에 김옥선이라는, 두 살 위 신의주 출신의 친구가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의 두 오빠들이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민족독립 운동가들이었습니다. 작은 오빠는 대련 감옥에서 이미 옥사했고, 경성제대 학생인 큰 오빠는 폐결핵으로 신의주 집에서 요양 중이었고, 친구는 큰 오빠 때문에 집에 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큰 오빠를 연모하는 정성으로 영양제 물약 토닉 항아리를 들고 주소도 모른 채, 밤 기차에 좌석도 없이 바닥에 앉아 17, 8 시간을 밤새도록 달려 이튼 날 저녁 때 신의주 역에 내려, 다짜고짜 김옥선네 집을 물어 찾아냈습니다. 내가 그 오빠를 위로하는 시를 써 읽어주기도 했어요. 잘 썼다고 해서 나는 시인이나 된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1943년 봄 김옥선과 나는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뵈러 갔는데, 그 바쁘신 어른이 우리 애숭이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나는 얼어붙어서 도대체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수 십년 동안 기억하지 못하다가 근래에 퍼득 기억났어요. “일본은 곧 항복할 것”이라는, 당시 일급비밀을 말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1945년 8.15 해방직후 나의 친구는 신의주로 갔으며, 그 후 오늘까지 우리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서, 북의 안경호 선생께, “언젠가는 내가 직접 신의주로 가서 그 친구를 찾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안경호 선생이 묵묵히 듣기만 했습니다. 살아있든 어쨌든 찾아가고 싶은데, 이제는 나 자신의 거동이 문제입니다. 그 친구를 통해서 항일 민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무신론에 맞서서 대응한답시고 “세상 어디에나 귀신들이 득시글거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고 말했으니, 그때에도 내가 말하는 꼴이 참 형편없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들이 몇 일 후 다시 찾아와서 인형극단을 만들어 인형극을 하자고 했는데, 나는 부끄러워 그런 것은 못한다고 말하니, 사람은 숨어서 말하고 말하는 사람은 무대에서 안 보이니까 부끄러울 것 하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말도 못한다고 고집하니, 그들이 포기한 것 같은데, 아마도 항일 투쟁 인형극을 통하여 의식도 고취시키면서 돈도 벌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곧 8.15 해방을 맞이하면서 내 친구도 그들도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민족독립과 공신주의를 부등켜 안고 있던 그들에게 나는 그대로 동의하지 못했고 거기에 기독교를 부가해서, 민족통일-기독교-공산주의는 만나야 하고, 그것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환상적 주제를 품게 되었다고 추정됩니다. 나는 당시에 그 주제가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와 정면으로 대립한 다는 사실도, 또한 민족과 공산주의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갈등을 일으켰는지도 전혀 모르고, 설명할 수 조차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를 품고 왔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것은 바로 통일신학의 주제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1946년 봄 감리교 신학교 (당시 3년제 전문대)에 학력이 모자라 2년제 전수과에 입학했는데, 어떤 정당 측 여론 조사 시에 몽양계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가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병아리 같은 초년생이 “하나님의 거룩한 동산에 마귀가 틈타 들어왔다”는 소동에 휘말려 거의 쫒겨 날 뻔했습니다. 1958년 내가 미국 뉴욕시에 있는 Union 신학교에서의 세계교회들의 지도급 인사들과 더불어 에큐메니컬 연구프로그램의 일원( 후에 문익환 목사님도 그 프로에 초청된 적이 있었는데) 으로 공부하고 있었을 때 쓴 학기논문(term paper)에서 “한국교회의 반공•반북은 오류다”라고 결론지었는데, John Bennet 같은 저명한 교수를 비롯한 두 세 교수들이 내 글을 최고 점수로 평가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대소동을 떨었을 것인데, 어떻게 미국교수들이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당시에는 아직도 미국에서 상당히 활기 있게 긍정적으로 논의되었던 사회주의적 신학조류의 영향권의 여운, 내가 Union 신학교에 있을 시기에는 퇴색했지만, 아직도 그 조류의 여운을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교수들이 내 글을 그렇게 평가할 수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어쨌든 그들은 한국교회처럼 경색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나는 매우 놀랬으며, 시대의 변화의 조짐이라고 생각하고 그때까지 마음에 품고 있던 민족통일-기독교-사회주의라는 저 주제를 재포착 했습니다. 1974년-76년 이념문제 연구를 위하여 유럽에서 1년 반을 연구교수로 지냈으며, 그때에 Karl Barth, 그의 후계자들의 맑스주의적 신학과 맑스주의 문서들을 주섬 주섬 읽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Karl Barth의 하나님론과 그리스도론을 철저하게 배웠으며, 유럽에서 그이 깊은 사회주의적 관심과 활동을 재발견했습니다. 1975년 서 Berlin에 있는 동아시아 선교회 주최, Deutsch-Koreanische Tagung (독일-코레아 세미나)에서의 “한국민족과 교회의 문제들”이라는 나의 주제 강연이 한국교회의 반공•반북 문제와 민족통일의 과제를 위주 한 것으로, 한국교회의 반공•반북 문제를 비판한 첫 강연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 신학자들과 노년층 여성들이 의외로 나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도 한국교회는 완강하게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에 고착되어 있는지 개탄했습니다. 통일신학의 주제는 1945년에 태동했으며, 통일신학은 저 강연에서 시작되었으며, 1980년대 5.18 광주민중항쟁에 이어진 통일운동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정신없이 전개된 것입니다. 그래도 통일신학이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허전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늦봄께서 감옥에서 읽고 신학과 맑스주의의 종합을 시도하느냐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한, 오늘의 우리의 민주화-통일운동에 직결된 가까운 혹은 먼 과거 역사의 영령들의 현재와 미래의 의미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봅시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민주화-통일운동 과정에서 장렬하게 죽어 가신 영령들, 분단 상황에서 죽임을 당하신 여운형-김구선생님들과 분단독재 세력들에 의해서 죽어간 많은 여러 영령들, 폭압적인 일제 식민지하 투쟁에서 죽어 가신 선열들--이 분들이 모두 오늘의 민주화-통일운동의 역사적 추동력으로 살아계십니다. 어떻게 살아 게십니까? 예컨대 늦봄이 분단의 멍에 아래서 숨을 멈춰 버리셨으나, 또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와 검찰과 수구언론들에 의해 그렇게도 비통하게 죽으셨으나, 우리의 투쟁의 추동력으로, 우리와 더불어 통일된, 정의롭고, 공평한 미래의 민족 사회와 국가건설을 위한 추동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 모든 영령들의 역사적 행진을 위한 추동력을 상실하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 때문인데 우리는 그분들의 역사의 동력을 포착하고 되살려 내야하며, 그것이 역사의 책임을 지고 살아내는 일입니다. 정의롭고 평등한 그래서 세계를 향하여 아름다운 나라라고 자랑할 수 있는 민족사회와 통일국가 실현이라는 미래의 목표에로 행진하는 것이 진보가 아니겠습니까?

진보는 개혁 혁명과 불가분적입니다. 늦봄이 평양에서, “ 민주화에서 민중이 부활하고 통일은 민족이 사는 길” 이라고 말씀하셨듯이, 국민대중의 추모행렬에서 또 우리의 노무현 대통령 재발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와 구별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궁극적 영원한 미래 시간, 역사의 미래 시간의 원천인 그의 미래 시간, 역사에 매 순간에 도래하는 그 시간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적 부활이 가능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시간이 우리의 역사적 부활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미래가 실재하며 역사에 도래하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과거 영령들이 역사적 현재에로 부활하여 살아있는 우리와 함께 궁극적 미래에로 행진합니다.

지난 번 한신대 신학대학원 수유리 캠퍼스에서의 늦봄 시비 제막식 축사에서 내가 “신선(神仙)문익환 목사의 영상”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영상은 1989년 평양에서의 김일성 주석과 그의 감격스러운 포옹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것입니다. 또한 그 영상은 1993년 한양대학교에서 거행된 8.15 범민족대회 전야제 때 청년학생들이랑 참가자들과 어울려 덩실 덩실 춤을 추는 늦봄의 모습에서 떠오른 영상입니다. 연구하지는 못했으나, 신선 사상은 고조선에서 단군님들이 모두 신선이 되었다고 말해지는데서 포착된 것입니다. 역사 드라마 연개소문에도 신선 사상이 곁들여져 있어요. 신선 사상이 역사적 과정에서 많이 퇴락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내가 “신선”이라는 형상에 관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적 부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고대 희랍 사상에서 부터 이어진 관념론적인, 물질세계와 연결되는 몸의 차원을 가지지 않는 추상적 영혼불멸 사상과 달리, “신선”은 몸의 차원을 보유하고 승화된 신령한 존재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령들이라고 일컬을 때에 이들은 물질 차원의 몸이 결여된 형상입니다.

그런데 불의하고 불평등한 물질 경제 구조와 정치적 탄압아래서 죽어가신 선열들, 열사들, 민중들의 부활은 그러한 물질•정치 세계구조의 변혁을 외치는 즉, 몸의 차원을 지닌 분들이기 때문에, 그냥 영령들이라고 일컬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선” 이라는 형상은 몸의 차원을 간직한 신령한 존재 형상인 것 같아요. 또 이 개념에서 잃어버린 고조선이 되살아나는 것 같구요. 늦봄, 노무현 대통령, 불타 죽임을 당한 용산 참사의 가여운 민초들, 화물연대의 박종태 열사, 죽임을 단한 모든 영령들이 역사의 현대와 미래에로 되살아난다는 것은 그 분들이 영령들이라고 일컬어지기 보다는 살아계신 신선이라고 일컬어져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고대의 신선사상은 세계의 물질•정치 구조의 변혁의 차원에서 또 신학에 의하여 재구성되어야 하지만 “신선”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더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성서적 신앙이 바로 역사의 죄악과 죽음의 세력들 아래서 죽임을 당하신 우리 민족사의 선열들, 열사들, 민초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무수한 역사적 희생자들의 역사적 현재와 미래에로의 부활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초 박순경 (原草 朴淳敬) 약력

  • 1923년 7월14일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  세브란스간호학교 입학
    1948 서울 감리교 신학교 졸업
    1951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B.A.
    1958 미국 Emory 대 신학부 졸업 B.D.
    1966 미국 Drew대 대학원 졸업(조직신학) Ph.D.
    1966 ~ 88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조직신학. 역사신학 교수
    1988 ~ 91목원대 대학원 초빙교수
    1978 ~ 현재 제3세계 에큐메니칼 신학자협의회(EATWOT=Ecumenical Association of Third World Theologians) 한국 책임자, 신학위 위원, Concilium 신학지 자문위원, Voice 신학지 편집위원 역임, 현재 EATWOT 한국위 고문
    1980 ~ 85세계교회협의회 (W.C.C.) 신앙과 직제 위원회 위원
    1980 ~ 86아시아 교회협의회(C.C.A.) 신학위원회 위원
    1980 ~ 82한국여신학자협의회 초대회장
    1982 ~ 88한국여성신학회 초대회장
    1989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범민족대회 남북 실무회담 10인 대표(학계 대표)로 참여
    1990범민족대회 실무대표 4인 중 1인
    1990 ~ 93범민족대회 대표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준비위 부위원장
    1991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 준비위 조직 및 부위원장 직, 재일본 대한 기독교단 주최 통일 세미나에서의 주제 강연으로 인하여 국가보안법으로 구속(106일만에 집행유예로 석방)
    1994 ~ 99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상임공동의장
    2000 ~ 2007통일연대 명예 대표
    2000 ~ 2014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고문
    2005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2005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고문
    2007 ~ 한국진보연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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