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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고 난후에 ...= 딸이 본 시대의 예언자 고영근 목사 =
고성휘  |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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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27  00: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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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긴조9호로 구속되고 난 후에 우리 집은 살기 참 힘들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쪼들렸지만 무엇보다 내 삶이 우리 집에서는 열외였기에... 

아버지야 워낙 바쁘셨지만 엄마까지 바빠지셨으니...

 그래서 난 내 살 길을 마련하고자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중2. 새벽에 직장인에게 피아노 방문교습을 해 주는 일이었다. 

이후로 난 참 여유있게. 혼자 럭셔리하게 살았다.

그 이후로 돈버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고나 할까....

 대학시절에도 당근 아르바이트를 악착같이 했다.

역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다. ㅎㅎ

 대학졸업 후에 20만원이란 월급을 받았다.

이번엔 좀 찔렸다.

 그래서 십일조 2만원. 아버지 용돈 2만원 봉투를 마련했다.

 아버지께서 나머지 봉투 하나는 뭐냐고 물으셨다.

 아버지께 드리는 용돈이예요

 아버지는 봉투를

너무나 한참

한~~~참 뚫어져라

보셨다.

 난 속으로 너무 적어서 그러시나? 싶었다.

 그래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

저도 알고 보면 남는거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아무 말씀 없으셨다.

그리곤 한참 뒤에

고..맙..다.

 나중에 안 일이었다.

아버지가 평생 처음 받아본

용돈이란 걸....

 아버지 속도 모르고 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답다.

 아버지 연구소에

헌신하기로 마음 먹고

그 때 짜잔하게 드렸던

용돈을 갚아본다.

 자꾸

아버지께 철없는 말을 내뱉었던 일들이

뇌리에 스쳐 갈 때마다

오히려

빙긋이 웃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소명의식 그 너머에 빛나는 창의성이, 창의성 너머에 감수성이....1>

 목사 고영근의 창의성은 자타공인 수준이다.

창의적인 군생활,

목회활동에서부터 전국교역자수련회,

전국 주보 모으기 운동(1960년대 말 정보의 부재 속에 모두 각자의 목회만으로도 어려웠을 당시...)을 통한 정보교류운동,

목회자료 전시회,

긴조 구속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부흥회와

각종 성명서,

시국사건 모임,

한국목민선교회 활동 등 이루 다 셀 수 없는 일들을 끊임없이 계획, 활동하였다.

1990년대에는 비전향 장기수의 후원운동으로 광림교회, 목민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과의 상호연결고리를 만들었으며

(이 때 보내온 많은 분들의 빛나는 편지들은 추후에 인쇄활자로 만나보게 될 것이다.)

이 외에도 새로운 일을 만드시는 건 도맡아 하셨다.

참 특이한 탤런트이다.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1950년대 기도문에서는 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역사적 소명의식을 읽을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명의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분의 투철한 신앙이 선교사역 50년의 탄탄한 근거가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것을 기초로 그의 삶의 모습은 당연히 예언자로서의 삶이라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특이하지 않은가?

소명의식과 창의성이 통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다시 말하면 그는 선교사역 50여 년 동안 정해진 틀 속에서 존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많은 활동들 속에서 어떤 일정한 틀이 형성되면 어김없이 그는 그 틀 속에서 과감히 나왔다. 오히려 거부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이 무슨 자신감인가?

 

나는 여기서 그의 롤 모델이었던 사도바울의 삶을 생각해 본다. 더 공부해야 알 일이지만 그의 삶이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게 된다. 그의 긴조 구속직후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사도행전 설교자료집 집필이다. 사도바울의 생애를 깊이 묵상했던 그...

 다시 이야기를 뛰어넘어...

정형화 된 틀 속에 갇혀있지 않고 끊임없이 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창의적인 선교활동에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소명의식 그 너머에 존재하는 특이한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뛰어 넘어.... >

 목사 고영근은 평북 의주 출신이다.

예부터...

수도 한양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서북지방에 대한 정치적 차별적 대우 때문에...

봉건적 권위주의, 유교적 질서에 비교적 자유로왔던 지리적 특성이 말해주듯,

그에게는 민주적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전에도 언급하였듯이 남녀평등에 대한 실천적 모습은 지금 50을 바라보는 , 결혼한 지 20년차인 나에게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다가오곤 한다.

 문패를 부부가 똑같이 달았던 모습이나, 집 명의를 아내의 이름으로 변경했던 일은 참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런데,...

푸후훗. 재미있는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아내에게 평생 말을 놓아본 적 없다.

그것은 부부싸움(?)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존댓말을 쓰면서 어찌 말다툼이 되겠는가?

옆에서 “이기기는 다 틀렸다”했다.

역시나....

때마다 지..신..다.

워낙 고생을 많이 시켜서 할 말이 없으시단다.

끙.

어떤 땐 집안에서 제일 어린 나에게까지

존댓말을 쓰시기도 했다.

띵~~~민망했다.

존중이라 하신다.

이러니 아버지를 보면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다.

그래서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다.

 가사노동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 냉장고 청소며..

(이건 울 남편도 하는데 제발 안했으면 한다.

안 해도 좋으니까 제발 일이나 저지르지 말았으면...)

깻잎 김치 담기. 아카시아 꽃 튀김

(향을 좋아하는 그의 독특한 특성이다. )

설거지, 국 끓이기...

 

자신의 방은 자신이 청소하기가 생활화되어 있었는데...

그 대표주자가 그이다.

청소, 정리, 정돈 아주 수준급이다.

그 덕분에 나는 그가 남기신 자료를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난 그의 성향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을 한다...

그의 정형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어진 틀 속에 갇혀 있지 않는

그의 빛나는 품성이

그의 사후에도

나를 내내

사로잡는다.

 훌륭한 품성을 가지셨다.

목사 고영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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