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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서광선 명예 교수 별세(193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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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28  11: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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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대 서광선 명예 교수 별세(1931-2022)

   
 

서광선 박사가 2월 26일 92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생전에 민주화와 기독교 사회운동 및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했고 한국신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3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나시고 한국전쟁중 월남하시여 해군장교로도 복무하셨다. 이후 어려운 가운데서 카나다를 거쳐 미국에 일리노이주립대학교에서 철학을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마지막으로 벤더빌트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96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64-96)로 재직했고, 군부 정권 시절 해직(1980~1984)당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98년까지 세계YMCA 회장을 역임했다. 이 밖에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 세계교회협의회(WCC) 신학교육위원회 실행위원, 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 대학원·드류대학교 신학대학원 초빙교수, 홍콩중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YMCA 전국연맹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등을 지낸다.

   
 

기독교 언론 ‘베리타스’ 회장과 논설주간, 한신대 이장식 교수가 설립한 혜암신학연구소가 발행하는 「신학과교회」 초대 편집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종교와 인간'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반성' '한국기독교의 새 인식' '한국기독교 정치신학의 전개' '대동강건너 요단강 넘어" 라는 자전적 간증 일대기가 있다.

80년대 서교수님이 이화여대서 해직당하시자 장신대서 청목후 우리교단에서 안수도 받고 압구정동 현대교회(83-87)서 목회도 하였다 그때 차선각 목사도 뒤늦게 공부마치셨는 데 마침 복직하시자 동사목회하셨다. 성품이 부드러우시지만 강직한 분이고 미국서 공부 중 만난 김활란 박사 비서를 지낸 부인과 인연으로 이화여대에 오시게 된 동기라고 들었다.

미국 유니온서 공부할 때 마틴 루터킹 목사의 인권운동에 대해 큰 감동을게 받으시고 뉴욕에 방문한 박형규 목사와의 만남으로 한국 민주화운동과 에규메니칼신학에 발을 디딘 것으로 소개하시기도 했다. 혈혈단신 월남후 1950년대 북한에서 공산당에 부친이 순교를 당한 것에 대한 감정적 반공주의자에서 이후 깊은 신학적 성찰을 통하여 화해와 용서, 통합의 신학에 이른 것이다.

   
 

크라식 키타 연주자였던 아들이 몇해 전 먼져 세상을 떠나서 많이 아파하셨다. 그러나 무병장수 하셨고 보는 이들마다 언제나 화사한 미소로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신 것은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다. 몇일 안남은 20대 대선에 대해서도 기독교 원로 학자로 분명한 입장을 보이셨는 데 좋은 소식은 못보고 가신 것은 섭섭하다. 민주화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첫 세대들이 한분 두분 떠나시니 안타깝다는 게 후진들의 마음이다.

빈소는 설치하지 않으며 장례예식은 가족들이 출석한 이화여대 인근 봉원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진행되며 장지는 봉원교회 묘역이다.

   
 

다음은 202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한반도 희년 세계교회 기도운동 자료집에 실렸던 서광선 목사님과의 인터뷰 요약 글 "용서의 순간, 은혜의 순간"을 인용 소개한다.

용서의 순간, 은혜의 순간(서광선,David Suh)박사

서광선 박사는 남한과 북한이 분단 국가가 되기 전, 중국과의 북쪽 접경 지역인 강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목회자가 된 서박사의 아버지는 일제의 침략에 거침없이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일제 말,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서박사의 아버지는 “너는 제국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면서 서박사를 일본 중학교에 진학하게 했다. 일본 학생들로 가득했던 교실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서박사는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까지 이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일본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모두가 슬퍼하는 가운데 서박사는 애써 기쁨을 숨겼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와 함께 독립의 기쁨을 만끽했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난 후, 서박사와 그의 가족은 고향인 강계로 돌아갔다. 1948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진 후 그의 아버지는 공산당 정권을 공공연하게 비판했다. 당시 공산당 정권에 협력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조직되었고, 그의 아버지도 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면서 조그련의 적대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노골적인 언행은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고자 서박사의 가족은 더 남쪽인 평양으로 이동했다. 일본이 항복하고 미국과 소련이 남북에 진주한 뒤 5년 후, 1950년 6월에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박사의 아버지는 실종되었다. 당시 19살이 되었던 서박사는 아버지의 소재와 안녕을 염려하는 동시에 군대에 징집되는 것을 걱정해야 했고, 그와 그의 동생은 집 마루 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잠시 마루에서 나온 사이 징집기관에 붙들려갔지만 낯선 이의 도움으로 전장에서 죽을 뻔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1950년 8월, 마루 속이 답답해서 맑은 공기를 마시러 나온 사이 그는 군에 붙잡혔다. 트럭을 타고 신체검사장에 끌려가 군의관을 만나기 위한 줄에 섰는데, 놀랍게도 군의관이 “너 어디 아프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서박사는 당시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설명하며,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네, 아픕니다.’라고 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픈 데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군의관이 ‘아니, 너 아프다.’ 하면서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 의사는 난생처음 본 사람이고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군의관이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쉬운 답을 찾자면, 하나님이 도우신 걸까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서박사는 신체검사 줄을 떠나 걸어 나왔고 같이 붙잡혀온 남동생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동생은 “형, 어디로 가는 거야? 저쪽으로 가야 돼. 우리, 전쟁에 끌려가게 되겠지.”라고 이야기했고, 서박사가 동생에게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보여주자 동생은 “그래, 형은 군대 가면 안 되지. 내가 대신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동생을 보지 못했다. 서박사는 이 일을 통해 “왜 내가 여기에 있을까? 왜 나를 살리려고 이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까?”라고 자문하게 되었다. 서박사는 이 질문을 평생의 질문으로 삼아 겸손히 생각하고 긴 세월 기도하고 있다.

미국이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그의 가족은 드디어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강 강가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는 전갈을 듣고 아버지를 찾게 되었다. 다른 네 명의 목사들과 한 밧줄로 묶여서 총살당한 아버지의 시신에는 총알 자국과 핏자국이 가득했고, 서박사는 아버지 시신을 안고 분노하며 강한 복수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 후 서박사는 남으로 떠나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해군에 입대했다. 입대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그는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미국 해군에서 만난 친구의 조언으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미국 학교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서박사의 친구는 저녁을 함께 먹으며 다음 계획을 물었고, 서박사는 한국 해군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친구는 “아니, 너는 해군 타입이 아니야. 학자 타입이야.”라고 말했고, 친구의 도움으로 서박사는 몬타나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들어갔다.

서박사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62년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본회퍼의 옥중서한들을 읽고, 워싱턴에서 시민권 운동을 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듣고, 신학생 친구들이 시민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자신의 원수에 대한 태도와 복수에 대한 열망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하며 자신을 신학적으로 시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원수를 갚는 것과 용서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인권,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반공·친미주의의 이름으로 독재에 반대하는 노동자, 학생, 그리스도인 지식인들을 탄압했다. 서박사는 “‘아버지는 공산 정권에 저항하여 싸웠고, 인권과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북에서 순교하셨는데, 여기에는 소위 민주적 독재자가 있다 공산주의 독재자나 자본주의 독재자나 무슨 차이가 있나?’ 생각하며 모든 독재에 저항한 아버지를 따르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그때 서박사는 NCCK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게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기에 이르렀으며, 1980년 이화여대에서 해직 당한 뒤 지역의 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정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서박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에 대한 참여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계기로 1991년 서박사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모임에 NCCK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오랜 원수인 조그련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북측 대표단의 수장은 서박사와 같은 나이로, 아버지의 원수인 조그련 설립자의 아들이었다. 서박사와 조그련 대표는 둘 다 캐나다 교회와 정부 지도자들, 그리고 WCC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강연을 맡았다. 서박사는 당시 만남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날 밤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남쪽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해서 여기에 와서 평화를 말해야 합니다. 어떡합니까? 원수의 아들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런데 다음날 아침 모임이 시작하기 직전에, 그 남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서박사님, 제가 하는 강연을 통역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통역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통역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감시하러 온 사람이라며 저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제가 통역을 도와주면 국가보안법에 위반되어서 체포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잠시만, 우리 대표들과 의논 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한국에서 함께 온 친한 대표들과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아주 가까운 친구들이 돌아앉으면서 ‘그건 서박사가 알아서 해야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아무 도움도 안 되더군요!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복수냐 용서냐 그때 한 목소리를 떠올렸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도와주기로 결심했고 강연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그의 강연이 끝나고 남쪽을 대표하여 내 강연을 발표했습니다. 북에 있는 적을 도왔으니 법에 걸리겠구나 싶었지만,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은혜의 순간, 원수를 사랑하게 하는 기회의 순간 같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자유롭게 북에 대해,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2004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300명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며 이 이야기를 나눴고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조선 민족이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는 평화와 통일에 대해 자유롭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와 자매로 하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요안 사우카 총무대행)에서 故 서광선 목사님의 부음을 듣고 유가족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장만희 회장, 이홍정 총무)에 애도의 서신과 사진을 보내왔다. 

 

WCC는 애도의 서신에서 고인이 한국의 대표적 1세대 민중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데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아울러 NCCK의 88선언(‘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의 초안 작성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기여한 공로와 NCCK의 평화를 위한 여정에 중대한 역할을 하신 것에도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Condolence letter Rev. Prof. Dr David Kwang-sun Suh

Dear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It is with great sadness that we have received the news of the demise of Rev. Prof. Dr David Kwang-sun Suh. On behalf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I express my deep sorrow and prayers in support of both his bereaved family and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We give thanks to his great efforts to promote the rights of the poor, oppressed, and marginaliz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s of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minjung theologians. As one of the drafters of the NCCK’s 88 Declaration, we also deeply appreciate his contribution to peace and reunific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We thank God for the life and witness of Rev. Prof. Dr David Kwang-sun Suh as he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peace process of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NCCK).
May our common Lord Jesus Christ, the Lord of life and resurrection, give rest to his faithful and beloved servant Rev. Prof. Dr David Kwang-sun Suh.
May God also grant us grace, that in pain we may find comfort, in sorrow hope, in death resurrection.
Yours in Christ,

                         Rev. Prof. Dr Ioan Sauca Acting General Secretary

故 서광선 목사 애도의 편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 여러분,
서광선 목사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매우 슬픕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대표해서 깊은 애도를 표하며 슬픔을 당한 유가족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고인이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민중신학자 중 한 분으로서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 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88선언 초안 작성자 중 한 분으로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기여한 고인의 공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평화를 위한 여정에 중대한 역할을 한 고인의 삶과 증언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생명과 부활의 주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실하고 사랑하는 종인 서광선 목사님에게 안식을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셔서 고통 속에 위안을, 슬픔 속에 희망을,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2022년 3월 2일  요안 사우카 세계교회협의회 총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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