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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주민교회 50년과 이해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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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3.01  19:5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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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남 주민교회 50주년 기념  

   
 

성남 주민교회가 창립 50년을 맞아 큰 행사를 치뤘다. 회고와 전망의 축제 "3.1절 104돌, 주민교회 세움 50돌 시민한마당" 이 3.1일 오후 2시 교회 옆 성남 아트리움(구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행사는 준비 위원장 최병주 장로의 환영사와 오지숙집사의 사회로 내빈소개와 어린이들로 부터 교인, 홍순관 선생등 노래와 출판기념, 설립자 이해학목사의 소회, 주민교회 새 헌장과 선교과제 선언을 이훈삼목사가 했다(하단 전문)

이날 참석자로는 경기도 염태영 부지사와 성남 지역 국회의원 김태년, 김병욱, 사위 이인영의원과 성남시 의원들과 단체장 교회가 속한 기장 경기노회 임원들과 기장 목회자 이원희, 오용식, 이춘섭, 김해성, 김성훈목사와 성남지역 서덕석목사, 예장 김혜숙, 이진형, 유재무목사등이 참석했다. 역사 책자에는 NCCK 이홍정목사와 기장 총무 김창주 목사 축하 글이 실렸다.  

   
                                           * 방기순 초청가수와 주민교회 남성 중창단

주민교회가 기장교단이나 지역에서의 영향력이나 역사적 평가, 위상도 크지만 한국기독교회 역사속에서 민중교회 태동의 마중물이 된 교회라는 것도 큰 의미다. 한국 고유의 토착신학인 민중신학의 태동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통하여 영구집권하려는 것에 대한 지식인들(학생,야당, 교수, 언론인, 종교인)이 저항으로 형성된다. 이들의 해직과 구속으로 한신대 안병무 서남동교수를 필두로 예장 서광선, 김용복박사등이 길거리 신학자가 된다.

기장은 해직된 교수와 학교에서 제적된 학생들로 구제할 목적으로 선교교육원을 개설하여 총회적으로 인재들을 포용한다. 그렇게 해서 많은 학생들이 기장교단의 목회자들이 되는 데 이광일, 권진관, 이원희목사등이 준목고시를 거쳐 기장목사가 된다. 그러나 당시 학생운동인자들로는 민주화 운동을 교회로 가지고 온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73년에 이미 지역에서 민중교회로 자리매김을 한 주민교회를 보면서 진로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사명과 생존을 함께 해결하게 된 것이다.  그후 한국민중교회연합(기장 예장 기감)이 조직 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였다. 예장에서는 1983년에 성수삼일교회와 대전 빈들, 대구 달구벌,안양 버린돌이 세워지지만 그 이전에 기장은 신명, 사랑, 동월교회가 세워졌다.   

   
                                                           * 현 교회 전경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 성남시 

지금은 인구 백만에 육박하여 용인으로 이어지는 수서자동차 전용도로와 분당, 판교가 있는 경기도 유수의 대도시로 수십만의 중산층이 사는 ‘준강남’ 도시다. 하지만 탄생과정은 다른 도시들과 비교하여 아주 어려운 곳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부터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시작했고, 그 결과 서울로 엄청난 농촌 인구가 모여들지만 그들을 수용할 주택도 기반시설도 없었기에 대부분 판자촌을 송정도 뚝섬등 뚝방에 무허가를 지어 살았다.

이들은 상하수도가 없는 퍼세식의 공동화장실에 어린이들은 방치되었고 어른들은 공장으로 도시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할때다. 김진홍목사도 송정 뚝방에서 빈민선교를 시작한다. 팽창하던 서울의 인구와 공장을 분산 수용하기 위해 서울 도심에서 동남쪽 20㎞ 지점에 위치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훗날 성남시 수정구 · 중원구가 될 350만여 평의 땅에 6년에 걸쳐 신흥 위성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평지인 지금의 분당구 일대에는 1980년대 후반에서 가서 신도시가 들어섰지만 대부분이 산지와 언덕인 수정구 · 중원구 일대가 20년이나 먼저 개발되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보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유는 허탈할 정도로 간단한데, 산지가 더 쌌기 때문이다. 또한 경부고속도로변과 떨어진 계곡에 빈민들을 몰아넣어 눈에 띄지 않게 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1968년부터 일차적으로 35만 평 규모의 단지가 ‘조성’되었고, 1969년부터 대다수가 청계천 등 사대문 안, 영등포와 용산 등지의 무허가 판자촌에서 강제철거 된 2만 1,372가구 10만 1,325명을 이주시켰다. 1971년 8월까지 2만 5,267세대 12만 4,356명에게 토지 분양과 일터를 약속하고 이주시켰다. 하지만 그 인구의 대부분이 참가한 거대한 민중봉기 즉 광주대단지 투쟁이 일어난다. 하지만 성남시는 5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8.10성남민권운동' 이라고 공식명칭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가 약속했던 기반시설은 20%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서울시의 일방적 행정은 여전했으며 부동산 투기 바람까지 불었다. 1971년 8월 10일 오전 11시 경, 약속된 서울시장 면담이 불발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성남출장소를 점거하고 급기야 서울진출까지 시도하면서 성남대로는 완전히 전쟁터로 변했다. 소위 성남대단지 사건이 난 것이다. 한진 파견 노동자들의 칼빌딩 점거농성과 맞물려 정부로써는 큰 난제를 만났다. 

이에 박정권은 내무부장관과 서울특별시장, 경기도지사를 파견하여 9월 13일, 성남 출장소가 시급으로 승격되고 구호물자 지급, 공장건설, 주택건립, 도로 건설 등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973년 7월 1일에는 성남시로 정식 승격되었다. 물론 서울이 싸놓은 똥, 또는 서울의 사생아라는 격한 표현은 성남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도 한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로 시작한 교회 

박정희 군사정권의 가장 큰 반대자중 하나는 진보 기독교인 기독교장로회였다. 한신대는 작은 신학대학이지만 교수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해직과 구속율은 가장 높았다. 그런 토양에서 교육받은 이해학목사나 동년배들은 선배들을 따라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1971년 9월 1일,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한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민중을 위한 지식인들의 조직의 원류였다.

훗날 풀뿌리 민주주의로 불리우는 모든 힘은 바닥의 민중들 주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었던 이들은 민중들의 요구와 잠재적 힘을 조직화한 것이다. 이런 이론적 기초는 당시 연세대에 고 노정현교수(새문안교회 장로)을 소장으로 하여 문을 열었는 데 지도자는 미국장로교단에서 파송받은  죠지 화이트 목사였다.

그는 이미 미국 시카코에서 주민조직으로 크게 활동하는 솔 알렌스키의 주민 조직론을 전수받은 분으로 산업화 도시화 후발주자인 한국이 필연적으로 이런 단계로 나아갈 것을 예측하고 준비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한신대 출신 고 허병섭, 박창빈, 이해학목사등이 훈련을 받은 것이다(예장은 김진홍, 박창빈목사) 

이 위원회는 70년 7-8월에 광주대단지에 기장 한신출신 권호경 전도사를 파견하여 72년 5월 주민교회의 구루터기가 되는 처소를 연다. 매주 월요일 모인다고 하여 월요교회라고도 하는 주민교회 전신이다. 그리고 훗날 이해학 전도사가 성남시 수진동 26-84에서 이점례 등 교인 12명을 모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역교회이지만 그 이상 성남 주민운동의 메카가 된 것이다.

   
  * 한신대 후배들 졸업식에 왼쪽 부터 김광훈,이해학목사,노창식,이춘섭,정상시는 모두 민중교회 목회자가 된다. 

어떤 기록을 보면 당시 주민교회는 성남시에 있지만 마치 명동성당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같은 역할을 한 곳이었다라고도 말한다. 빈민운동과 노동운동 외에도 의료활동, 직업상담, 야간학교, 신용협동조합 설립을 하였기 때문이다. 주민교회와 관련이 있는 정치인으로서는 청년회장 출신인 이상락 전의원과 이해학목사의 사위 이인영의원이 있고, 김태년 의원이 주민교회 집사이다. 그리고 이재명 대표는 시민운동가 시절부터 주민교회와 교감을 갖고 지역운동을 함께 해 온 관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민교회는 하나의 지역교회 공동체라고만 볼 수 없는 엄청난 영향력을 갖은 교회가 된다. 그러나 그런 정치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다. 1984년 4월에는 이상락, 이태영의 주도로 ‘성남인력센터’를 개소해 훗날 복정동 인력시장을 거쳐 전국 조직인 ‘건설산업노동조합’의 모태가 되었으며, 1985년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 창립(회장 이상락 집사), 1986년 성남지역 노점상연합회 창립(회장 임용제) 등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민교 후배들과 이해학 목사 

모든 교회들이 교인만을  늘리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그런 인위적 산물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서 호의호식하는 길에 몰입할 때에 주민교회는 하늘이 아닌 밑으로 내려간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번에 참석한 누군가 현재 교인 숫자를 물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100여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1당 백의 정신으로 무장된 기드온의 용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앞으로 300명 정도를 바라본다는 희망도 갖는 다.    

이런 역사의 한획을 긋는 행사가 바로 이번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이며 주민교회 50년사의 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 너 있었는 가 그때에" 라는 부제의 이 책자는 362쪽으로 정무용박사(한신대  교수) 가 대표 집필한 전체 50년 기념사업위(위원장:최병주장로)와 편찬위(위원장:윤석인장로)가 지난 2021년 부터 여러번의 교인 토론회를 통하여 "주민 세움 50돌 새신앙 고백과 선교과제 선언" 까지 만들어 낸다. 

   
                                   * 기념책자 헌장과 축하 케이 커팅을 하는 이해학, 이훈삼목사와 교우들 

​주민교회와 이해학목사

이인영의 의원(전 통일부 장관)의 장인이기도 한 이해학 목사는 이제 주민교회 원로다. 1945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순복음신학을 거쳐 한신대를 졸업한 이해학목사도 한시대 격변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민주통합시민행동공동대표,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 및 이사 등을 역임하며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선봉에 서왔다. 후임 이훈삼 목사 역시 기장 교단의 한신대 출신이며,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사역했다.

이해학 목사는 2012년 은퇴하고 후임으로 김진목사가 부임하지만 1년도 못되 사임하고 2013년 이훈삼목사가 3대로를 부임하여 이번 창립 50주년을 준비한다. 이 목사는 수원에서 목회했으며 이후 NCCK에서 사역한 바 있다. 이미 완벽한 원고 설교와 내용에 맞는 다양한 기독교 명화를 소개하여 들리는 설교에서 보이는 설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립자 이해학목사의 세대가 그렇듯이 절대적인 지도력과 영향력은 은퇴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후임 김진목사도 오래 사역하지 못했지만 현 이훈삼목사는 부임하여 10년째가 된다. 4년 전 기장 총무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당시는 현장목회 경험과 기관 사역을 통하여 느낀 바를 총회적으로 실현해보기 위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민교회 목회자로 자리매김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젠 시대도 변했고 과거 한 시대를 안고 투쟁하고 몰입한 이해학목사와 같은 인물은 더 이상 없다고 보는 게 좋다. 이미 주민교회의 구성원도 그렇고 그 옛날 가난한 시절의 주민교회라고 보는 사람들도 없는 것과 같다. 주민교회 출신 지도자들도 그렇고 현재 교회가 위치한 도심의 한복판 환경을 보나 교회가 설립한 기관이나 파송된 실무자들 교인들의 정치의식이나 삶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주민교회는 1973년 3.1절에 교회를 창립한 매년 창립 기념일에 지방의 교회로는 드물게 문익환, 박형규, 한승헌, 함석헌, 김근태와 같은 저명인사들을 초청하여 지역강연회를 한다. 1976년 주민교회에서 강연을 마친 문익환 목사가 이해학 목사에게 민주구국선언문을 자신이 작성했다면서 명동성당에서 김대중, 함석헌, 윤보선, 안병무, 김지하, 문동환 등 10명이 낭독할 것이라며 건네주었다.

이해학목사는 당시 교회 청년회장인 김금용(현 남원교회 목사)과 함께 문익환이 작성한 선언문을 뿌리려다 들통나 유신 정권에서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어 3년여 옥살이를 한다. 당시 구속된 자들은 선언문을 작성한 문익환 외에 낭독한 김대중, 함석헌 등 10명 외에도 선언문을 뿌리려다 실패한 이해학 등이 구속되는데 이를 계기로 이해학은 문익환과 감방 민주화 동기가 된다.

이후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다가 감옥에 가자 이해학은 그를 대신해서 범민련 통일위원장을 맡았다. 1990년 8.15행사에서는 제1차 집행위원장을 맡아 북한이 초청한 베를린으로 가서 북한 주요 인사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을 만나고 오다가 국보법으로 다시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한다.

이해학목사가 두 번째 출소한 뒤인 1979년 주민교회는 교인 47명이 1,000원씩 모아 4만 7,000원으로 주민협동신용조합을 설립한다. 그 주민신협이 현재는 조합원 1만 4,000명에 총자산 4천억에 이르는 큰 신협이 됐다. 초창기 신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주민교회는 2층에 사무실을 마련해 사채 갚기 운동, 월세를 전세로 전환하는 운동, 내 집 마련하기 운동 등을 펼치면서 신협 거래를 활성화시켰다고 한다. 주민교회는 그 후 1989년 10년 만에 신협에 이은 주민 생협도 출범시켰다.

   
                                         * 주민교회가 지역에 세웠거나 운영하는 기관들 

모든 일에는 공칠삼과가 있다.  

1990년대 국내에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늘어나자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는 산자교회(김해성 목사)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센터를 운영한다. . 이 후 이 조직은 2000년에 김해성 목사를 중심으로 지구촌 사랑나눔 법인을 설립해 서울로 주요 조직이 이동하고, 주민교회는 외국인 성남센터로 남는다. 주민교회는 성남이주민센터를 운영하다가 2013년부터는 성남시가 설립한 성남시외국인주민복지지원센터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2010년엔 주민교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지하 2층 지상 12층의 복합 건물을 지었다. 이 사업을 주관하기 위해 교회 외부에 '태평동락커뮤티'란 법인을 설립했다. 지하는 예배당과 찻집, 3층은 식당과 마을기업, 4층부터는 원룸 60세대와 정주형 12세대에 15~21평 규모로 분양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면서 기장교단 후배 민중사역자들이 많이 나온다. 부목사를 지낸 이춘섭, 김해성, 임승철, 조창환, 서대석, 조인영, 박상필, 김금용, 이화랑 목사가 있다. 그러나 이해학목사에 비할 일은 아니지만 이들에 대한 평가는 기대만큼은 아닌 것으로 들린다. 그중에는 은혜롭지 못한 처신으로 교단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옥에 티다. 설립한 여러 복지기관도 그렇고 운영과 관련하여 잡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 말로만 민중교회지 재벌급 교회라는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우려와 기대를 담아 지난 50년을 결산하는 사역의 책임을 맡은 이훈삼목사의 고민은 무거울 것으로 보인다. 한 교단의 교회사를 넘어 지역사로 전설이 된 주민교회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고민 떄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날 이훈삼목사는 교인들이 토론하고 준비한 선언문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 1. 생명선교, 2. 평화선교, 3. 사회정의 선교, 4. 협동조합선교, 에 모든 것을 압축한 것인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민교회 세움 50돌의 신앙고백과 새 선교과제 선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으로 돌아가셨다가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 교회가 역사 안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때로 넘어지고 때로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세상과 호흡하고 공감하면서 이 시대와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뜻을 전달해왔습니다. 50년 전, 서울시의 모진 철거 정책으로 광주군 외곽(현 성남) 지역으로 내몰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 세상을 만들기 위해 위로하며 격려하고 싸우면서 반세기를 뚜벅뚜벅 걸어왔습니다. 힘겨운 날들이었지만 우리의 기도와 행동은 사람들과 역사를 새롭게 하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그렇게 5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군부독재를 물리쳤고 민주적 정권교체가 자연스러운 정치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탄핵하기도 했습니다. 갈릴리 성남도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분당‧판교에 이어 위례 신도시까지 생겼습니다. 무계획 신도시의 상징이었던 구시가지도 속속 재개발되고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빈민들의 도시에서 부유한 일류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당면한 기후변화와 생태계 절멸의 위기 속에서도 신냉전의 무모한 전쟁놀음에 빠져들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기후위기와 사회적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심각한 정치갈등과 세대 갈등, 인구절벽 등 암울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미래 50년의 성남·국가·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전망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교회의 복음은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깊이 숙려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1년 전 교회 세움 50돌 준비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모든 교인이 새로운 선교과제 찾기에 함께 나섰습니다. 소수의 전문가가 심사숙고하여 새 선교과제를 제안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조금 번거롭더라도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매달 과제별 전문가의 발제를 듣고 각 신도회끼리 모여 토론하고 그 내용을 다시 종합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훨씬 더 깊은 열매를 맺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과정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면서 네 가지 선교 주제를 설정했습니다.

첫째, 생명선교-파멸해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생명선교에 집중한다. 특히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선순환의 생태계 복원을 위해 생명 살림의 제도와 생활 습관을 정착시킨다.
둘째, 평화선교-신냉전의 요동치는 세계정세 속에서 모든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계와 지역사회의 평화 활동에 동참한다.
셋째, 사회정의선교-불평등한 차별과 혐오를 극복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며 사회정의 실현에 앞장선다.
넷째, 협동조합선교-신용협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의 창립과 운영과정에서 경험한 대로 지역사회와 공동체, 인간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서로 협력하는 협동조합 운동을 널리 확산한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선교를 온전히 추진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교회 내적인 능력을 갖추고 끊임없이 교육‧훈련해야 합니다. 내부동력을 갖추지 못한 선언은 공허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어린이‧청소년‧청년 등 다음 세대가 앞 세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발전시키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한다.
둘째, 우리가 원하는 선교에 필요한 교회의 적정규모를 신도 300명으로 정하고 새 신자 전도와 신앙교육에 힘쓴다.
셋째, 세대 갈등과 단절이 깊어지는 현실에서 교회 안의 여러 세대가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도록 노력한다.
주민교회가 걸어온 50년은 순간마다 지점마다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감사 가득한 마음으로 50주년을 맞이하며 설레는 희망과 기대로 새로운 50년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실한 제자 공동체가 되고 싶습니다.

                                           2023년 3월 1일

                  주민교회 세움 50돌 맞아 주민교우 모두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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