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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교수, 사후을 후진들에게 부탁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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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2.02  16: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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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지 철원으로 

지난 1월 31일 지인들과 철원의 국경선 평화학교을 방문한 이만열교수는 인근의 백마고지등 접경지 전투지역들을 돌아보면서 최근 남긴 글이 화제다. 이제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교수가 남북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억과 교육의 장으로 남북살육의 전쟁으로 가장 잔혹한 피흘림이 있었던 곳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은 것으로 보인다.

이교수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내년에 발간키로 계획하고 있는 『북한기독교역사사전』 제 15차 편집위원회도 모일 겸해서 이 곳을 방문했는 데 다시 한번 전쟁의 참상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초청한 이 단체 초대 대표 이일영박사(장로)와 정지석목사를 통하여 이 곳이 동족상잔의 갈등과 살육을 넘어 치유하고 용서와 화해, 나아가서는 평화체제를 다지기 위한 평화의 터전돠였다는 말을 듣는 다.

이런 감회를 안고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정지석 관장과 이일영 박사, 안중식 목사 그리고 실무를 맡은 분에게 이만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나는 한국의 남단(경상도)서 태어났는 데 한국전쟁의 고통을 너무 어린 나이에 체험하였노라고 하면서 이 인근이 한국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장터인 백마고지, 화살고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평소 자신의 생각했던 일단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내놓은 것이다.

“귀천(歸天)길이 멀지 않은 나는, 평소 이 몸이 한줌의 재가 되어, 적대의식과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곳에 뿌려졌으면 하는 기대다. 하찮은 한줌의 재가 화해와 평화의 작은 거름이라도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서 이는 내가 오래 동안 늘 생각해 온 것이라는 고백이다. 그러나 휴전선 지역 사정도 몰랐으나 이번에 보고 느낀 것은 여기 있는 분들이 나의 이런 뜻을 살펴서 내가 이 곳에 묻힐 수 있는 길이 없겠는 가? 하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혹시 이런 뜻을 가진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인데 그것도 알아보고 혹 그 뜻을 안다면 좋고, 혹 그 뜻이 다 모이지 않더라도 나의 한줌 재라도 내가 평생 추구한 평화의 거름으로 남고자 한다는 뜻을 밝힌다. 그러니 이 일을 하시는 이일영 박사와 정지석 교장께 자신이 죽은 후 이 곳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런 부탁을 하시면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와 문익환 목사의 ‘꿈을 비는 마음’을 추억하는 글을 페이스 북에 남기셨다. 이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가운데 이교수님께서는 이런 의미와 뜻이 많이 알려지고 함께 하는 이들이 나오기를 고대하는 마음이다.

   
                            * 왼쪽 부터 이일영박사, 이만열교수,안중식목사, 정지석 교장

국경선평화학교란

국경선 평화학교는 강원도 철원에 소재한 평화 단체로 정지석목사가 2011년 세운 곳이다. 여기서 ‘피스메이커(peacemaker)’를 양성하는 3년 과정의 ‘대안 대학’ 이 있다. 교육은 민통선 안 DMZ평화문화센터에서 하는 데 그동안 교수을 지낸 분으로는 김영삼정부 부총리겸 교육부 장관을 지낸 한완상박사와 국민의 정부 초대 인권대사 박경서 교수, 전 YMCA세계연맹 회장 고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고 길희성 전 서강대 교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등 교수등이다.

평화문화센터 교육을 수료한 이들은 국내외 청년 학생들로 앞으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한 일꾼들이다. 이런 구상을 한 정 목사는 영국 버밍엄대 우드브룩 대학원 평화학 박사 출신이다. 귀국후 2010년 새길교회 기독사회문화원 원장으로 있다가 미국 펜실베이니아 펜들힐 영성평화학교로 떠났다.

펜들힐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기독교 소수 종파 ‘퀘이커’의 영성센터다. 정 목사는 그곳에서 아침저녁으로 묵상기도를 했다. 그의 마음속에 자꾸만 ‘철원’ ‘국경선’ ‘평화’라는 말이 들어왔으며 귀국후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아무런 연고도 여건도 없이 홀홀단신으로 일단 거주지를 철원으로 옮겼다.

정목사는 이러한 자신의 뜻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매일 오후 3시 인근의 소이산에 올라 침묵기도를 하며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을 넘어 북녘 땅을 바라보며 묵상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뜻을 지인들에게 지금과 같은 구상을 말했지만 이해하기 보다는 만류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목사의 이런 꿈은 꿈이 아니라 좋은 협력자들을 만나면서 하나하나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특히 부인 전옥희 사모는 남편인 정목사를 지지하며 함께했다.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전문의 출신이지만 남편을 도와 맨땅에서 함께 평화학교를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사와 시민단체 실무자들을 위한 ‘평화교육가 양성 교육’, 대안고 졸업자와 탈북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DMZ 평화순례 학교’, 주민을 대상으로 한 ‘평화영어 교실’ 등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난 해 이런 교육의 효율성을 위하여 한 건물을 매입하고 리모델링을 하여 입주하게 된다. 이를 이루는 데 개인과 단체등 국내외 후원자들 약 3천여명이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는 고 풀무원 창시자 고 원경선 선생의 따님인 원혜덕 선생과 남편 김중권 평화농장 대표. 정연순 변호사등이 참여한다. 그리고 지난 해 5월 5일 착공식을 했다.

그날 열린 착공식에는 국내외서 많은 참가자들이 왔으며 강연과 퍼포먼스등 행사를 갖았다. 부지는 1983㎡(600평)에 건물 3개동으로 ‘희망의 집’, 평화순례자 공간인 ‘지혜와 비전, DMZ순례자의 집’, 으로 명명하고 그외 식당과 숙소 회의실등이 있다. 이런 시설을 갖추므로 이제 본격적인 평화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만열교수(1938- )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해 한국사 교수로 비판적 지성을 대표하는 숙명여대 해직을 당하고  재야 사학자로 계속 연구를 쉬지 않고 명실상부한 기독교 역사 학자로 자리매김을 한다.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지만 재야 기독교 역사학자로의 성과와 업적은 신학대학들이나 강단 학자들이 엄두로 못낼 일을 이뤘다.

바로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를 만들고 이를 통하여 월례 세미나를 지금도 이어 가고 있으며 미국 장로교단의 자료실을 방문하여 사비를 드려 방대한 초기 선교역사 영문자료들을 국내로 가져온다.

이그러나 모두가 영문으로 된 자료로 활용에 어려움이 있던 차에 현 UCLA 종신 교수가 된 옥성득이 서울대 재학시절 번역을 맡겼고 이 계기를 통하여 옥교수도 신학에 입문케 하여 장신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한편 이만열 교수는 초등 6년에 한국전쟁을 맞아 인민군 치하을 겪으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영문도 모르게 죽어가는 것을 보게 되면서 전쟁의 참상을 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이미 고교시절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우선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한 후 역사전반에 대하여 두루공부하면서 특히 목사가 되기 위한 종교사와 원어(히브리어, 그리스어)을 공부한다. 재학중 군복무를 마쳤는 데 군복무시절 그에게 한국사을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하지 못한 자괴감으로 복학후 한국사에 집중한다

박사과정에서 그는 단채 신재호의 강렬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만난 다. 그리고 훗날 그는 자신이 국사학 연구자가 되는 데 두 사람을 들었는 데 거시적 역사관을 깨우쳐 줬던 김철준(1923∼1989)과 역사 연구의 미시적 방법을 가르쳐 줬던 한우근(1915∼1999)교수을 들었다.

유신 정권과 군부에 반대하다가 숙명여대서 해직고 이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한국기독교 100년사 집필을 위한 자료조사 기회를 얻어 이 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1982년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신학전공자들의 독무대였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일반 역사학자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한국기독교사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다.

지금도 지난 1990년에 설립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장단기 역사정리와 발굴에 힘쓰고 있으며 특히 신진학자들의 등용문으로 유명한다. 그리하여 교파 신학대학에서는 감히 꿈도 못꾸는 전 세계에 있는 한국기독교사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했으며 정리중이다.

이교수는 장로교중에도 일제하 신사참배을 반대하며 감옥에 간 선조들을 두고 있는 고려파 계통으로 신앙의 순수성과 생활의 절제를 강조하는 신앙의 소유자다 그러나 고려파가 한 때 자신들의 의로움으로 타인을 정죄하는 것과는 달리 신앙의 보수성을 따랐다.

하지만 이교수는 열린 보수로 ‘남북나눔운동’과 통일운동에 대하여는 진보적인 이들 못지 않은 활동을 해왔다. 그런의미에서 후학들은 이만열을 실천적 진보주의자로 보지만 아직도 미완의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남은 비극적 경험을 앞으로 맞을 자신의 죽음으로 까지 승화시키자는 노력으로 보인다.

학력
마산고등학교, 서울대 국사학, 석박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학석사
경력
1997년: 한국국가기록연구재단 이사
1998년 ~ 2003년:숙명여자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 한국사학과 교수
1999년 ~ 2001년: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이사장
2003년 6월 ~ 2006년 8월:제8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2003년 6월:한국사학회 회장
2005년 4월:문화재청 국보지정분과 문화재위원
노근리평화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
2018년 8월 ~ 2022년 8월: 학교법인 상지학원 이사장(교육이사)
상훈
1992년:단재상
2003년:황조근정훈장
2004년:제15회 상허대상
2008년:독립기념관 학술상, 용재 석좌교수상
2022년 제 5회 알렌기념상
저서
《우리 역사 5천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년. ISBN 9788987180533
《역사의 중심은 나다》. 현암사. 2007년. ISBN 9788932314556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2014년. ISBN 9788942369300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 두레시대 1991년

* 같은 고신파 소속의 손봉호 교수와 대담한 한 전기물에 두 분의 인생관과 신앙관 철학이 잘 나타나 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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