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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냐, 주화냐? 역사의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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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3.11  15: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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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김상원과 최명길

지금부터 360여 년 전 병자년에 '인조반정'을 통해 등극한 인조는 친명모화(親明慕華) 세력에 조정을 받아서 신흥 청나라가 오랑캐라는 이유로 적국으로 만드는 서툰 외교정책으로 민족 만대의 치욕을 겪는다. 청의 태종은 직접 13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강화도를 거쳐 한양까지 점령했다. 강화도에는 왕자와 비빈 등 왕족이 피난해 있었다.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을 갈 계획이었지만 청군의 선발대가 워낙 재빨리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처를 옮긴다. 강화도를 포위하여 진을 치고 있는 청군은 왕족을 볼모로 잡고 있었다. 정부군은 힘겨운 항전을 하였지만 적은 이중삼중으로 성을 포위해 지원군이나 물자도 끊겨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하들은 갑론을박하면서 자기들 살궁리만 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충신들간에는 당시 정국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갖고 논쟁과 상황은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남을 만안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기록과 영화로도 남겨져 후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는 대목으로 다시 회상해 보는 것이 유익하므로 소개한다. 

   
 

명분이냐 실리냐.

선택은 늘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많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지를 놓고 갈등과 반목을 한다.  명분을 따르자니 손해가 막심하고, 실리를 따르자니 면이 서질 않는다. 어떤 선택도 반드시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 당시도 “명분과 의리의 김상헌이냐 현실과 변통의 최명길이냐” 로 축약되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나라가 멸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명분대로 싸우다 산화할 것인지 실리를 쫓아 치욕스럽지만 후일을 도모할 것인지 논쟁을 벌리던 이들을 보자 

김상헌과 최명길, 두 사람은 각각 척화파와 주화파의 핵심 인물로 김상헌은 결사항전, 최명길은 항복을 주장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은 같았다. 다만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하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던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예의가 무너지면 나라가 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겼고, 명분을 좇되 현실에 따라 변통하는 유연성을 중시하던 최명길은 일단 나라를 보존하고 나서야 명분과 의리도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여겼다.

“우리에겐 대항할 힘이 없소. 이대로 화친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된단 말이오. 명분과 의리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망하고서야 무슨 명분과 의리가 있단 말이오? 백성들을 생각해 보시오.” 최명길은 청나라 진영에 가면서 보았던 백성들의 고통과 죽음을 떠올렸다.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을 한다는 것은 삼강과 예의를 다 무너뜨리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부모의 나라였고, 왜란 당시에는 우리를 도와준 나라요. 어찌 우리가 오랑캐에게 황제라 부르고 신하가 될 수 있겠소?”

김상헌은 나이 67세,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었지만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조정 대신들이 둘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갈등하던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간 왕실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항복을 결심한다. 그러나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 초안을 찢어버린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항복 문서를 찢어버리는 뜻을 모르지 않았으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항전과 항복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아는 대로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이마저도 최명길의 노력으로 두 손을 뒤로 묶어 결박한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지는 1순위 항복 의식 대신 2순위 항복 의식을 치른 것이었다. 이로써 나라를 지킬 수 있었지만, 오히려 최명길은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들어야 했다. 사실 위기를 맞아 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준 건 최명길이었는데도 말이다. 청군이 들이닥칠 때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가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을 벌어준 이도 최명길이고, 항복 현장까지 끝까지 함께한 이도 최명길이었다.

반면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있던 그 순간, 김상헌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학가산 아래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상헌도 반대파의 비난을 받았고, 인조조차 “김상헌이 평소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같이 죽겠다고 말했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먼저 나를 버렸다”라며 두고두고 원망했다. 이에 대해 김상헌의 묘지명에는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도 따라 죽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간언해야 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바르게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다”라고 적혀있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그 치욕에 가담하지 않고 물러나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주장이다.

이런 논란에도 김상헌이 오랫동안 추앙을 받은 까닭은, 평소 그가 보인 대쪽 같이 곧은 성품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의 강직한 성품을 인정할 만큼 김상헌은 평소 업무를 처리하는 태도에서도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모두 이이와 성혼의 학문을 공부한 서인 계열의 선비로, 백사 이항복에게 같이 학문을 배워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국난이 일어나 첨예하게 대립하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뜻을 같이하던 사이였다. 비록 서로의 신념은 달랐지만,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당하고 일관된 자세를 보였다.

   
 

청나라에서 다시 만나 화해하는 두 대신

둘은 1640년 겨울, 다시 청나라 심양 감옥에서 만났다. 최명길이 명나라와 은밀히 내통하며 물자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청나라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김상헌 또한 계속해서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다 김상헌을 잡아 보내라는 청나라의 요구로 심양으로 끌려갔다. 둘은 여기서 결국 서로의 가치관이 달랐을 뿐, 나라를 위하는 우국충정은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오랜 의심을 거두고 화해한 두 사람이 나눈 명분과 실리에 대한 문답은 함께 옥에 갇혀 있던 이경여를 통해 조선까지 전해져 뭇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만약 변통이 없다면 정치의 희망은 없다”라고 주장하던 최명길과, 매사에 철저히 명분을 고수하며 예가 아니면 따르지 않았던 김상헌. 이 둘의 대립과 논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분은 없으나 실리는 클 때, 혹은 명분은 있으나 실리는 작을 때 누구나 한 번쯤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정답이라 할 순 없지만, 결국 원칙을 따르되 일정 부분 변통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칙을 지키되 때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한다면, 지나친 원칙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인조의 투항에 앞서 남한산성에서는 여러 날을 두고 화·전 두 세력 사이에 국가의 명운을 건 일대 논쟁이 거칠게 전개되었다. 1636년 12월 6일, 남한산성에서는 화의교섭을 둘러싸고 장시간에 걸쳐 어전회의가 계속되었다. 이 회의석상에서 소현세자는 "자신의 희생으로 국난이 타개될 수 있다면, 불모가 되어 청군 진영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성봉, 우의정 이성구, 호조판서 김신국, 이조판서 최명길 등이 세자의 용단에 찬동하여 국왕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예조판서 김상헌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서 "그대들은 명색이 나라의 중신들로서 어찌 세자 저하로 하여금 적진에 불모로 들어가는 치욕을 자청하도록 하는가! 내 맹세코 그대들을 죽여 없애서 그대들과 이 세상을 함께하지 않겠노라." 라고 호통쳤다.

김상헌의 이 같은 강경 발언으로 다시 열띤 논쟁이 벌어지자 인조는 "지금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모두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니, 서로 배척하지 말고 뜻을 한 데로 모으기 바란다"라고 김상헌을 만류하였다. ​논쟁은 다음 날에도 이어져 종실인 의창군 이광과 동양위 신익성 등이 세자를 볼모로 보내자는 주장을 통렬히 배척하면서 주화론자들의 목을 벨 것을 주청하였다. 이와 같은 척화 강경론자들의 거센 화의 반대로 여론은 척화론 쪽으로 기울고, 조정에서는 화의교섭의 중단을 청국 측에 통고했다. ​

   
 

왕의 치욕으로 건진 나라

이에 따라 청국 측은 세자 대신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다소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거절하고 장기 항전의 방침을 굳히고 있던 중, 12월 30일 청태종이 직접 주력부대를 이끌고 삼전도에 도착,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청태종의 남한산성 포위는 조정의 여론을 척화론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성 안의 군신 상하가 최후의 일전으로 순국의 길을 택하자는 강경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장령 이후원은 "군왕은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신하는 군왕을 위해 죽을 뿐이니, 여기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끝까지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장렬한 최후의 결전을 인조에게 상주하였다.

이에 따라 왕명으로 최명길 등이 회군하는 청국 황제를 국왕이 성상(城上)에서 전송하는 예를 취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국서를 쓰고 있을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그 국서를 갈기갈기 찢어 내팽개친 다음 최명길에게 "그대의 선친은 도덕과 의리로 명망이 높은 분이셨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서슴없이 군부를 욕되게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주워 모아 풀로 붙이면서 "대감의 나라를 위하는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이다. 대감이 또 다시 국서를 찢으면 다시 붙이겠다"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청국 측은 다시 인조의 출성(出城) 항복과 척화파의 압송을 요구하면서 국서의 접수와 회답을 거부하였다. 다시 조정에서는 이조참판 정온 등이 '칭신'하는 국서를 쓴 최명길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고, 청국 측은 인조의 출성항복과 척화파 압송 이외의 어떠한 화의 조건도 거부한다는 최후 통첩을 산성으로 보내왔다. ​마침내 인조는 청태종에게 항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김상헌 등이 청군 진영에 압송되어 갈 것을 자원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

인조는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척화파의 오달제, 윤집 등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국으로 압송되고 나중에 김상헌도 끌려갔다. 주전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주화론을 전개했던 최명길은 후일 다른 사건으로 역시 청국에 끌려가 같은 감옥에서 김상헌과 만나 서로의 애국심을 이해하면서 오해를 풀었다. ​최명길은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이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할 때,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였다. 이를 두고 후세사가는 "결지자(結紙者)도 충(忠)이요 열지자(裂紙者)도 충"이라 썼다.

참고
“명분과 의리의 김상헌이냐 현실과 변통의 최명길이냐“, 김용희 저 ,양창규 그림, 도서출판 마들
영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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