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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뉴스 관서지방 탐방기(5)재일대한기독교회 약사(1993-1969)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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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05  21: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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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장 뉴스 관서지방 탐방기(5)

유재무 목사(전 일본선교사, 예장뉴스)

글 싣는 순서
1) 예장뉴스 간사이 여행
2) 關西(관사이) 지방 그리고 한인교회
3) KCC(Korea Christian center) 역사와 선교적인 비젼
4) 京都(쿄토) 동지사 대학과 쿄토 동산교회
5)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생성과 역사 그리고 과제
6) 한국교회의 일본선교와 선교사
7) 일본인과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1882년 제 4차 수신사(修信使)의 비공식수행원으로서 내일(來日)한 이수정(李樹廷)이 크리스챤 농학자 津田仙을 만나, 다음해 1883년 4월에 세례를 받고 조선인 유학생이 중심이된 조선인교회를 개설하여 신앙공동체의 형성에 힘썼다. 또 성경번역 및 아메리카에서 H.G Underwood(北長老敎), H.G.Appenceller(北監理敎) 두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동경에서의 조선인교회는 1886년 5월에 이수정이 귀국함으로 중단되지만, 단기간이기는 했으나 그가 뿌린 씨앗은 그후 모국교회의 형성으로 연결되고, 또 일본의 지도적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는 재일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20년이 지나 1906년에는 늘어나는 유학생의 지도를 위해서 동경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설립되어 성경연구와 예배가 행해지고, 그 결과 동경교회가 설립되었다.
   
1882년 9월 제 4차 修信使 박영효 김옥균일행과 비공식수행원으로 渡日하여 3년 9개월간 체류. 당시 일본의 저명한 농학자요 기독자인 津田仙(쯔다센)에게 한문성서를 받음 그의 안내로 築地敎會에 출석 기독교에 감명을 받고 G.W.Knox(北 장로교 선교사)에게 1883년 4월 29일그의 나이 40세에 세례를 받음

이 사진은 1883년 (明治 16年) 日本의 全國基督敎徒大親睦會幹部 모임인데 초기 일본의 개신교의 지도자들이 거의 참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쯔다센과 우찌무라간죠,  니이지마 죠, 아오야마 신학원을 세운 (靑山) 이 앞줄에 있다.  

-第三回全国基督信徒大会 - 内村鑑三写真帳Ⅰ

五列→ 聖書販売人某 南小柿洲吾(みながきしゅうご) 熊野雄七  吉岡弘毅 三浦徹 浅川広湖
四列→上原方立 
和田秀豊  押川方義 金森通倫 植村正久 小崎弘道 服部綾雄 長坂毅 伊藤藤吉
三列→ 小出市之助 
稲垣信 横井時雄 宮川経輝 青山準次郎 井深梶之助 加藤勇次郎 大儀見元一郎
二列→ 森田太平 
平岩愃保 牧岡鉄弥 辻籌夫 内村鑑三 新島襄  木村熊二  寺沢久吉 石原保太郎    

前列→ 千松美作 奥野昌綱  松山高吉  津田仙   李樹庭 湯浅治郎  栗村左衛八 海老名弾正 


조선예수교장로회와 조선감리회에 의한 선교(1908-1925)

1908년 평양에서 내일(來日)해 있었던 정익노(鄭益魯) 장로, 그리고 김정식(金貞植) YMCA총무 및 유학생이 모여, YMCA와는 따로 교회를 설립(동경교회)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 장로교회에 목사 파견을 요청한 것이 오늘날의 재일선교의 시작이다.

1909년 10월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의 한석진(韓錫晋) 목사가 약 3개월간 체재하며 교회의 임원체재를 정비하고, 전도장노에게 후사를 맡기게 되었다. 191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와 감리회에 의한 선교합의가 이루어져, 장·감예수교연합에 의한 선교가 실시되게 되어 교회 이름은 “동경연합예수교회”로, 파견목사의 임기는 서로 2년교대로 하기로 하고 1913년 주공삼(朱孔三) 목사가 취임하였다. 한일합병이전의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은 유학생이었다. 그러나 1910년 합병후, 재일조선인의 구성은 크게 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등에 의해 토지를 빼았긴 농민의 유민화(流民化)와 제1차세계대전후의 일본경제의 활황(活況)과 때를 맞추어 일본자본주의는 일본인노동자보다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제할 수 있는 식민지노동력으로서 조선인의 일본본토에의 이주를 요구하였다.

그 이후 조선인노동자는 간사이(關西)지방을 비롯하여 아이치(愛知), 큐슈(九州), 혹카이도(北海島) 등의 일본노동시장의 저변층에 유입(流入)되어 정주하기 시작하였다. 재일조선인 인구는 1920년에는 3만에 지나지 않았으나, 1930년에는 30만명으로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서 동포전도도 유학생으로 부터 노동자에로, 도쿄(東京)지역에서 츄부(中部), 혹카이도(北海島)에로 전국적으로 넓혀지기 시작했다. 1917년무렵부터는 요쿄하마(橫浜), 고오베(神戶)에, 1920년대 초기에는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에도 교회가 형성되었다. 간사이(關西)지방에 김이곤(金二坤) 목사가 파견된 것은 1922년이었다. 그때까지는 고오베(神戸)신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신학생이 전도를 담당하고 있었다. 1925년에는 나고야(名古屋)에서 전도자의 파견요청이 있어서 오사카(大阪)로 부터 김필도(金弼道) 신학생이 파견되었다. 이 시기, 1919년 2·8독립선언식을 거행함에 따른 경찰의 탄압, 1923년 9월의 칸토(關東)대지진에 의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착실하게 전파되었다.
   
1908년 정익노장로, 김정식 YMCA총무, 10여명의 학생이 예배후 모여, YMCA와는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는데 의견이 일치, 동경교회설립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카나다 장로교회에 의한 선교(1926-1938)

1926년에 큐슈(九州)지방에 오택관(吳澤寬) 목사가 연합공의회로 부터 파견되었다. 1927년에는 카나다 장로교회가 재일선교에 가담하기를 결정하여 L.L. Young선교사 등이 적극적으로 전도활동을 행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카나다 장로교회의 재일선교의 참가와 재정적인 도움은 커서, 조선인목사·전도자의 숫적인 증가로 연결되어 교회성장을 가져 왔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교회의 수와 교회원의 수는 두배가까이 되어서 45 교회가 존립하고, 신도수도 2,300명이 되었다. “도쿄(東京)를 비롯하여 나고야(名古屋), 큐슈(九州), 혹카이도(北海島)까지 전도자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하는 말처럼, 노동자로서 일본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포에게 적극적으로 전도하였다. 나라를 빼았기며 농지를 잃고서 생활의 양식을 찾아 일본에 온 동포노동자는, 일본에서도 경시받으며 어쩔 수 없이 임금차별등의 생활을 겪지만, 교회는 마음의 안심을 누리는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임과 동시에 고향소식이나 민족의 아픔을 서로 나누는 신앙의 공동체이었다. 또 교회는 재일동포에게 있어서 필요한 일본어나 조선어, 그리고 역사를 가르치기 위한 야학교(夜學校)와 유치원의 개설에 힘써 1933년에는 야학교(夜學校) 24 개소, 유치원이 9 개소가 되어 동포사회의 교육사업에 봉사하였다.

재일본조선기독교회의 시기(1934-1940)

1934년 2월, 재일본조선기독교회대회가 창랍되었다. 이에 의해 신조와 헌법을 제정하여 4 개의 중회(中會), 1 개의 지방회를 이끄는 조직교회가 되어, 목사와 장로의 안수가 집행되게 되었다. 1940년, 신도총수가 4,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1936년에 일본기독교연맹에 가맹할 때, “조선기독교회”로 개칭하였다. 조선기독교회의 시기는 6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재일조선교회의 조직적인 자치가 꾀해지며, 고유하게 영위되기 시작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중국침략(15년 전쟁) 하에서, 종교단체법이 공포됨에 따라 1938년 제3회 대회에서 같은 계통의 장로파인 일본기독교회와의 “협조” 또는 “합동”을 결의하였다. 일본기독교회와의 교섭 가운데 제시된 조건은, 일본기독교회의 “신조”에 대한 복종, 포교에 있어서 “일본어 사용”, “교역자 재시험”등 이었다. 1939년, 종교단체법의 공포에 따라 “협조”의 길은 없어지고, 1940년 1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일본기독교회로 부터 제시된 조건에 의한 “합동”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흡수합병은 “재일” 조선교회에게 있어서 굴욕적이며 고뇌 가운데의 결단이었다. “재일”조선기독교회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교파로서 해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기독교회, 일본기독교단의 시기(1940-1945)

1940년 2월 부터, 일본기독교회에 가입신청 및 교사·교사보(補)의 가입신청이 중회(中會)별로 이루어 졌다. 62 교회·전도소의 가입이 수리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카나다 장로교회의 선교사 일행이 귀국하였다. 나아가 일본이 국가권력의 종교에 대한 통제를 본격화하여, 1941년 6월 일본기독교단 설립시에는 일본기독교회로서 제1부에 가입시켜졌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해 가는 중, “재일”조선인교회에 대해서는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관헌의 감시와 탄압, 창씨개명(創氏改名)이나 일본어사용, 황민화(皇民化)정책은 점점 심해졌다. 1941년부터는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등에 의한 교회지도자의 연행, 구속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아카시(明石)교회, 쿄오토(京都)남부교회, 후시미(伏見)교회등이 교회폐쇠라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12월에는 태평양전쟁돌입에 따른 “비상조치”로서 경찰의 특별고등과(特別高等課)는 재일조선인의 일제검거를 시작하여 124명을 체포·연행하였다. 그 중에는 아이치켄(愛知縣) 11명, 오사카(大阪) 3명, 효고(兵庫) 4명의 그리스도인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일본인목사가 재일조선교회의 주관자가 되어, 예배도 일본어로 행하도록 강요당하였다. 1945년 2월에는 교회수 48, 신도수 3,088명, 정교사 25명중 현주자(現住者) 12명으로, 보교사(補敎師) 44명중 현주자 9명으로 감소했다.

재일대한 기독교회기(期)(1945-)

하나님은 그 섭리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조선민족과 교회를 해방하셨다. 해방된 조국으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국할 생각으로 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해방후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의 창립

일본에 남은 교직자 및 신도들은 1945년 10월 30일, 오사카(大阪)교회에서 재일조선그리스도교연합회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준비위원회를 거쳐 같은 해 11월 25일에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가 쿄토(京都)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참가교회 21, 출석자 47명(그중 목사 3명)이었다. 교회를 초월한 연합회의 창립, 규칙의 제정, 일본기독교단으로 부터의 탈퇴, 교회의 통폐합이 결의되었다. 다음 해 9월의 정기총회에 참가한 교회는 10교회, 대의원 37명, 세례교인은 불과 230명으로 감소하였다. 전후의 재일대한기독교회는 그러한 현실에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제 3회정기총회에서 연합회를 총회로 개칭하고 헌법과 신조를 제정하여 다음 해 제 4회정기총회에서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로 개칭하였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시동

1949년 2월, 카나다장로교회가 재차 재일한국인선교에 가담하게 되어, L.L. Young 일행이 내일(來日)하면서 선교비의 지원이 재개되었다. 1950년 12월 칸사이(關西)지방회, 1951년 4월 칸토(關東)지방회, 6월 세이난(西南)지방회, 1963년 10월 츄부(中部)지방회, 1985년 세이부(西部)지방회가 조직됨과 함께 부인전도회(1949) 및 청년연합회도 이 시기에 재조직되어, 총회는 선교활동의 기동적인 태세를 마련하였다. 1951년 7월에는 “기독신보”(基督申報:복음신문의 전신)를 발행하여 문서전도에 기여하게 되었다.

선교 50주년 : “우리의 살 길은 예수”(1958-1968)

1958년 “선교 50주년” 기념식전이 도쿄(東京)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후 10년마다 표어를 내세워 10개년 선교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총회는 해방후, 전도와 교회의 재건·창립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이 시기는 목사·전도자·신도가 교회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신도들을 한사람 한사람 심방하여 교회의 재건과 개척전도를 행함으로서 오늘 날의 총회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총회는 1952년 “세계장로교회연맹”을 비롯하여 “일본기독교협의회”(JNCC)(1956년), “세계개혁파교회연맹”(WARC)(1958년), “세계교회협의회”(WCC)(1962년 준회원가맹신청승인),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1964년)에 가맹하게 되어, 선교를 에큐메니컬적으로 협조·수행하려는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선교 60주년 :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 세상으로”(1968-1978)

총회는 전후의 발자취 가운데, 동포사회의 고뇌로 부터 눈을 돌려 왔던 사실을 뒤돌아 보며 선교의 기본적인 자세를 복음신앙의 귀결로 삼아, “그리스도인은 그 살고 있는 사회에 변혁을 가져와야 할 책임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함을 확인하고 선교정책의 전환을 꽤하였다. 1969년 “출입국관리법안”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1970년 “재일한국기독교회관”(KCC) 을 설립함으로 동포의 인권획득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978년 “선교기본정책”의 채택, 1974년에는 “재일한국인 문제연구소”(RAIK)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총회는 세계 15개국으로 부터 대표 80명을 초청하여 제 1회 “소수자문제와 선교전략”회의를 개최하여 마이널리티의 인권획득운동의 세계적인 연대를 호소하였다. 1969년에는 본국의 각교단에서 단기적인 선교사를 파견받아 개척전도에 커다란 성과를 올리었다. 1973년 “일북미선교협력회”(JNAC)에 가맹한 것은 북미교회와 에큐메니칼적인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선교과제 특히 마이널리티문제에 대한 사명을 담당하는 파트너로서의 관계가 부여되는 것이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속의 PCK 파송 선교사들 (파송순)
   
                                   2007년 홋가이도 도야코에서 열렸던 PCK선교사 수련회

PCK는 교단 설립의 모체인 YMCA와 동경교회의 설립에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왔으며 역대 총회장도 몇분이나 지냈다. 

일본 선교사 명단

①정연원(동경 중앙교회, 현 오사카 교회(전 총회장)  ②모휘대 (쯔쿠바 교회, 현 일본 독립교회)
③김병호 (동경 조후교회)  ④조중래 (쭈쿠바교회, 현 후나바시 교회)  ⑤정인화 (히타치교회)  ⑥임태호 (동경중앙교회) ⑦전병옥 (쭈쿠바교회, 현 나고야 미나미교회) ⑧김인과 (기후교회)  ⑨강장식 (시나가와 교회) ⑩박미애 (홋가이도 대학) ⑪이중재 (고베 니시노미아교회)  ⑫이혜숙 ⑬이원중 (동지사 대학원, 쿄토 동산교회) ⑭김윤희  ⑮송남현 ⑯최장수 ⑰임선형(동경제일교회)  ⑱엄기봉(견습) ⑲조성은(견습) 그외 나리타의 전형구 목사(일본교단) 

은퇴자  이병구 목사(이마후쿠교회) 경혜중(사나가와교회)  박무수(하마마츠교회)  고 박경화(니시노미야 성광교회)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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