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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만 목사 당당하게 가다5.18 묘역에 안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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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17  2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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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규만 목사 당당하게 가다
   
 

오규만 목사(1960.11.12-2015.10.15) 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경기공전(현 서울 산업대학)에 입학을 한다. 어려서부터 남가좌 교회에서 성장하고 봉사하였다. 오목사가 출석하던 교회의 전도사는 최도식 선교사 (현 스리랑카 한인교회 목사)였다. 최 목사로 부터 진보적 기독교교육을 받았다.

최 목사는 당시 장청(예장 청년회) 총무로 1979년 대전 문창교회의 장청 전국 청년대회를 당시 회장인 송진섭 선배(전 안산시장)을 모시고 장청 일을 했다. 오 목사는 자연스래 평양노회 청년회 활동을 하였고 시대의 아픔도 비겨가지 않았다. 마침 서울의 대학가는 광주 5.18 사태와 신군부의 시국사건으로 연일 데모가 일었고 오 목사도 그 데모로 인하여 구속이 된다(그 인연으로 광주 민주화 묘역에 안치) 그는 당시 평양노회 한성교회 청년들인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 전익상 목사(전 연금재단 사무국장) 임장철 집사(전 기독공보)등과 같이 활동을 하게 된다.

학교를 제적당한 오규만에게 최 전도사는 신학을 할 것을 권한다. 그래서 서울장신 28기로 입학을 한다. 입학하여 그는 신학공부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보다는 기독학생 청년운동에 더 열심을 낸다. 그리고 서울장신에서 만난 친구들을 규합하여 신학교에서의 운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오규만 목사로 인하여 서울 장신 28기에서 서울장신 최초의 이념써클이 시작된 것이다.
   
 

학내활동과 장청운동을 하고 있던 오규만에게 어느 날 수업시간에 날카로운 질문을 하던 학생을 눈여겨 보고 만난다. 27기 황남덕 목사다. 둘은 만나서 시대의 고민을 털어놓고 규합하여 오늘날 까지 동지로 함께 가게 된다. 학내에서는 당시 고려대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고 편입한 송 건이 있었는 데 자연히 의기투합하여 운동에 동력이 붙는 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아 농촌교회(대화교회, 이상진 목사)로 농활을 가면서 학내활동이 확산하였는데 예신희, 박은혜, 앙인숙등이 함께 하였다.

서울장신에서 신학 공부보다는 운동권으로 졸업을 하고 장신대 80기로 입학을 하게 된다. 이미 입학한 선배들이 만든 현대신학연구회에 활동을 하게 된다. 마침 장신대도 당시 민주화로 인한 학부 출신의 운동권 인자들과 의기투합하여 장신대 역사상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시절을 보낸다. 이미 세상을 뜬 고 최주상 목사나 안하원 목사 김영철 목사등 현신 80기들이 바로 오규만 목사의 동기들이다.

사실 지방신학교 출신들이 장신대에서 거치는 1년여 과정은 정말 여름 방학 지나면 끝이다. 그러나 그 동기들은 가장 끈끈하게 맺어준 것은 바로 현대신학연구회의 활동이다. 이미 76기(초대회장 이근복 목사)로 부터 시작하여 3년이 된 써클은 활기가 차고 넘쳤다. 당시 장신대 최초 이념써클로 오늘날 예장내의 진보적 사상과 신학을 갖고 목회를 하고 교수를 하는 이들의 거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일반 목회의 길을 가고 있는 오규만 목사는 2000년 이후 부산진 교회를 시작으로 일반교회 사역을 하지만 그의 출발과 목회정신은 갈릴리 예수와 민중사역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인생의 큰 전환점은 졸업후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부터이다.  산선이 더 이상 쎈타 중심의 선교 활동에 정치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자 남미의 작은 공동체 운동과 같은 노동자교회를 상정하였다. 이런 대안을 낸 사람은 인명진 목사였다. 이미 서울과 안양 대전과 대구에 선배들이 공단주변에 교회를 개척하여 야학을 통하야 노동자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오 목사와 80기 동기인 최주상과 안하원 정태효 김정은 79기 서덕석과 같이 훈련을 받게 된다. 당시 훈련간사는 나였는 데 노동 6개월과 이론 학습 그리고 현장탐방이었다. 특히 노동훈련은 아주 중요한데 노동자 처럼 일하고 먹고 그들의 정서를 배운다는 것이다. 우선은 취업을 하는 것부터 그리고 노동과정을 기록하고 평가하고 그들의 꿈과 희망 좌절을 알아가는 것이다.
   
             * 좌로 부터 과천교회 주현신 목사와 오 목사 동역자들이 중보기를 하고 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자신과 연고가 있던지 원하는 지역에서 노동자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오 목사는 수원에 한벗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개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야학을 하고 생활이 안되니 포장마차를 하고 생계를 이으며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사회민주화 인간다운 세상을 위하여 주어진 일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이미 선배들이 개척을 했기에 쉽게 결단을 할 수가 있었다. 더 이상 기성교회에 가서 교회성장 신화에 부속으로 유지 확대 재생산의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한국교회 나 아이어도 된다는 고백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영적자만에서 깨여 선한세력들과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대동단결의 정신으로 작은 예수 처럼 사역을 한 것이다. 그 동기들인 안하원은 부산으로 가서 새날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목회를 하고 있으며 고 최주상은 당시 안양에 박진석 목사가 개척한 버린돌교회(현 한무리교회)를 이어 목회를 하다가 6년전 암으로 소천했다. 정태효 목사는 유재무가 개척한 성수 삼일교회를 이어 지금 까지 목회하고 있으며 김정은 목사는 전남 영광에서 목회중이다. 서덕석도 성남으로 가 열린교회를 개척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7년 정권교체에는 실패했지만 노동자 대 투쟁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이 미약하나마 노동조합들이 조직되고 노동운동은 남성 기간산업으로 확산되어 민중교회의 형편으로 노동자들을 더 이상 지원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또 많은 운동이론으로 인하여 사상투쟁으로 인하여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민중교회들이 지역의 주민교회로 이전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에 오 목사도 새로운 사역을 위하여 마침 부산진 교회로 스위스에서 박성원 목사가 부임을 하면서 부목사로 안정된 사역을 하게 된다.

부산진교회는 호주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세운 처음 교회로써 부산의 가장 오래된 모교회로 걸출한 평신도 지도자 고 우창웅 장로와 같은 분들이 부산지역의 민주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동수 장로등을 통하여 지역운동을 이해하고 목회의 지평을 여는 기회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시 박성원 목사가 사임을 하고 후임으로 이종윤 목사(현재까지)가 부임을 하게 되었고 이내 오 목사는 사임을 하고 과천의 과천교회 부목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과천교회는 1번 국도 서울의 관문으로 정부청사가 있고 인근의 관악산과 더불어 가장 살기좋은 동네로 손꼽힌다. 이 곳에서 은퇴한 김찬종 목사를 보필하여 부총회장 선거에도 중요하게 참여를 하는 원치 않게 그의 목회행보도 교권을 향한 교계로도 그 행보를 넓혀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더 이상 부목사로 있는 것이 부담이 되어 안산지역에 분가교회로 개척을 나오게 된다.

그런데 개척사역에 너무 큰 의욕을 갖고 모 여 목사와 협력목회를 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였으나 이내 의견의 분열로 인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던차 마침 안산에서 이미 중견목회를 하던 장청 선배 허춘중 목사의 성빛교회가 인근 화성으로 이주를 하려고 교회건물을 내놓게 되었는데 그 건물에 은행대출을 안고 사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경험과 안목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던중 대장암진단을 받게 된다. 투병을 위하여 더 이상 목회를 지속할 수가 없어 허 목사의 소개로 부천의 한 대형교회가 교회를 다시 매입을 해주고 진료비를 지원하게 된다. 치료과정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한 오 목사는 그동안 그가 걸어왔던 민중신학의 짊을 벗고 자신의 연약함 때문인지 치유와 은사사역에 매진하게 된다.

그래서 한때 동지들로부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기복신앙에 기초를 둔 번영신학과 개인주의에 기초한 주관적 신앙으로 멀쩡한 교인 죄인만들기식의 은사집회를 한다는 이유로 오규만을 제명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오 목사는 사경을 헤메온 사람이니 지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두자고 두둔하였다, 신학적으로는 분명히 선을 그엇지만 끊을 수 없는 무언가 있엇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 목사는 나와 동지들을 영적으로는 배반한 것은 사실이다. 비록 질병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부산진교회나 과천교회 모두 대형교회였고 이내 안정된 생활로 그의 삶은 민중보다 상층을 지향하는 중산층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투병생활을 하던중 사모도 직장을 다니고 어렵게 지내다가 마침 과천교회로 동역자인 주현신 목사가 부임을 하게 된다. 그는 호주 멜버른에서 한인목회를 하다가 청빙을 받은 것이다. 그런 사정의 오 목사를 과천교회의 은사와 치유사역 사역자로 일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오 목사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고 섭리라는 신앙의 경지에서 교회전도와 축사사역을 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병마를 호전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여 여러 차례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된다.
   
 

일반 목회는 형편이 좋아 사택도 제공받고 자가용도 주지만 이네 기우러진 건강은 회복되지를 않았다. 올해 초부터 급격하게 나빠진 몸은 급기야 여름을 지나면서 강단에 서지 못하게 되고 지낸 9월 초에는 마직 강단에 서게 된다. 오랜 선배 허 목사와 나는 지난 9월말에 집으로 오목사를 문병을 갔다. 우리를 보자 이런 저런 말을 막힘없이 하는 것으로 봐서 아직 때는 아닐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벌써부터 마음의 정리를 한 그는 장지와 절차등 모든 것을 유언처럼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집으로 와서 이 좋은 가을 날에 아파트 침상에 있는 그가 너무 안타까워서 백방으로 1달만이라도 공기좋고 산수좋은 곳에서 보내다가 가면 원이 없게 없겠다는 생각으로 태안과 강원도를 알아보고 있었다. 거동을 할 수 가 없어서 가족이 동반되야 하는 데 그럴 형편도 안되었고 경비도 문제었다. 내가 1달만 같이 있을 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소천 소식을 들었다. 나와의 인연은 참으로 길고 벅차다. 태백에서 일본에서 의정부에서 우리가 사역하던 곳은 어김없이 가족들과 찾아와 우정을 나눴으며 언제나 대접하고 배푸는 동지었다.

여기 오 목사의 동생이 장례를 마치고 와서 쓴 페이스 북의 글을 인용함으로 이 글의 끝을 맺는 다.

“빈민목회로 시작하여, 기도 전도 치유사역으로 삶을 마치고 가장 완벽하고 안전한 하늘아버지 품에안긴 둘째형님. 인생마지막엔 가족 회복에 집중한 형님. 아쉬움 가득하지만, '열심히 살아야할 이유'을 갖게한 시간!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삶의 질을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9페이지에 걸친 유언, 장례식장과 절차.. 장례식에 편육이 아닌 따뜻하고 질좋은 수육을 대접해야하고, 임종 10일전 입원하면서 심폐소생술/기도삽입시술 등 일체의 생명연장 의료행위를 못하게 조치 취하고 당당히 죽음을 맞이한 형님.

내 초등학교 운동회/졸업식에 부모를 대신해 와준 형님, 초등생시절 덕수상고와 대구고의 고교야구를 동대문구장에서 보게해준 형님. 그리고 유일한 대안인 하나님을 알게해 준 형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어제 밤 오 목사의 소천소식에 곳곳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오랜 동지들과 해후했다. 그리고 일하는 예수회가 주관하는 위로예배도 집례했다. 정말 그런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처음 그의 영정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돌았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난 울고 있었다. 사모와 부모님 자녀들과 인사를 하고 예배를 드렸다. 계 6:13-17의 말씀을 읽고 "눈물을 씻어주신다" 라는 제목으로 생전의 그를 추억했다.

그는 죽음을 준비했었고 두려움이 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는 우리를 배반했는 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중을 잊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면 되었다 양들을 위했 건 가족을 위했 건, 자신을 위했 건, 눈물을 흘렸다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우리 일하는 예수회 동지들이 벌써 5명이 소천을 했다. 광주의 고 이경노 목사, 최주상 목사, 현제식 목사, 성정희 목사에 이어 오규만 목사다.  그중 이경노 목사만 사고사이고 4명은 질병사이다. 사실 나도 3년전 암진단으로 경황이 없을때 오 목사가 지극정성으로 고언을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오목사의 긴병을 수발하느라고 애쓴 이정숙 사모와 자녀들 가족들에게 감사했다.  

마지막 까지 그에게 사역의 기회를 주고 돌보고 사랑을 배풀어준 과천교회 당회와 주현신 목사에게 그리고 교우들과 신실한 동역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호상인 변창배 목사, 오랜 동지 정병준 목사, 윤신영 목사 특히 영적 멘토요 동지로 함께한 장청 동지들의 우정이 뜨겁다. 멀리 스위스에서 한걸음에 날아온 금주섭 목사와 그날 밤에 그리고 17일 광주 망월동에 다녀온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오규만 목사 약력

경기공전 재학중 평양노회 청년연합회 활동
1980년 5.18 민주항쟁 학생 시위로 제적
1982년 청년운동 선배 최도식 목사 권유로 서울장신대학교 입학
1986년 장신대 입학하여 현대신학연구회 활동(80기 졸업)
1987년 현신동지인 서덕석, 최주상, 안하원, 정태효, 김정은과 총회 선업선교 실무자 훈련(1년 마침)
1988년 수원 한벗교회 개척하여 도시빈민을 위한 목회를 시작.
1993년 부산진교회(담임목사 박성원) 부목사로 부임
2000년 과천교회 부목사로 이임
2004년 과천교회에서 안산으로 분가교회 개척 목회중 암진단으로 투병위해 교회 사임
2006년 과천교회 주현신 목사 부임하고 협력목사로 사역
2008년 재발로 요양
2012년 과천교회 부목사(치유 전도담당)
2015년 10월 14일(수) 오전 11시 소천
2015년 10월 17일 광주 망월동 민주화열사 묘지에 안장
가족사항/ 사모 이정숙과 은결(26세) 은수(22세)

광주에서의 장례사진

   
 

   
   * 묘역으로 운구하는 호남의 장청 동우회 선배들 박형대,김영위, 김병균, 장헌권 목사

   
                                                                                                 * 축도하는 김병균 목사

   
                                                            * 추모사를 하는 정태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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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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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섭
(119.XXX.XXX.4)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2015-10-17 22:40:43)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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