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동목사 소천(1932. 12. 25 - 2007,12.10)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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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동목사 소천(1932. 12. 25 - 2007,12.10)청주산업선교회 총무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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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6  09: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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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동목사(1932. 12. 25 - 2007,12.10) 청주산업선교회 총무

정목사님은 1932년 충북 청원군 호죽리에서 나셔서 18세 까지는 고향에서 부모를 도와 농사와 나무하기등 전형적인 농촌의 청년으로 성장하셨다.  회심후 22세에 대한신학교에 입학을 하시고 50년 고향의 한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을 한다. 그리고 1952년 결혼하시고 1958년에는 다시 공부를 하시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을 하셨다. 곽선희목사(소망교회 원로목사)도 이북에서 내려와 정규학업을 하지 못하자 검정고시도 하고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단국대 영문과에 입학을 하신 적이 있었다. 

장목사가 대신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72년 영등포 산업선교회 총무이자 동기이신 조지송목사를 청주에 모시고 산업선교을 시작하였는데 그날 창립강연에서 크게 감명을 받고는 늦었지만 산업선교 훈련을 받기 위하여 현장노동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반목회를 한참 하시다가 산업선교를 하신 흔치 않은 분이다. 장신대는 조지송목사님과 동문수학을 하셨지만 두시날 산업선교를 하시려고 훈련을 받으셨다.

그때 장신대를 갓졸업한 인명진목사(68기)와 같이 노동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인명진목사는 원래 한신을 졸업하였고 장신대 졸업후 군목에 입대하도록 되여 있었다. 그런데 영등포지역의 한 공장에서 김진수라는 노동자가 회사 구사대에 의하여 도라이바로 찔려죽는 사진이 발생하였다. 마침 그 회사 사장이 당시 한철하목사의 형이였는데 산선총무인 조지송목사가 신학생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인목사는 신학생들을 조직하여(조성기등) 당시 동신교회 장로인 사장과 한철하교수를 직접 찾아가서 항의 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으로 해결을 보게 된다. 그런 연유로 인하여 인목사는 조목사의 눈에 뜨게 되였고 김진홍목사등과 함께 유신반대 운동을 한 이유로 군목입대가 좌절되자 산업선교에 지원하게 되였고 당시 무궁화유지 비누공장에서 일했다.

정목사님은 나이가 많아 공장취직이 안되어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노동훈련은 일자리를 찿고 취직를 하는 것 자체가 시작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여도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처럼 일자리를 찾는 것 자체가 훈련의 한 과정이였다.  하루종일 아니 몇날 몇일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공장과 도시의 뒤안길을 헤메이는 가장 노동자를 생각해보라 그 가정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수 없다.

그래서 산업선교는 노동자의 심정을 단순히 이해 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노동자를 돕고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 살아가고 노동자의 생활과 바램 그들의 좌절과 꿈을 이해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다. 나도 신학교 졸업후 산선훈련을 받았고 좀 늦은 나이로 일터를 찾기 쉽지 않아 동생의 주민등록으로 봉제공장 완성반에 겨우 취직을 할수가 있었다. 정목사님은 겨우 시내버스 앞자리에서 안내양 삥땅(돈 떼어먹는 것)못하게 계수기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때 노동훈련은 조지송목사님이 담당을 하셨다. 산업선교(URM) 를 원하는 모든 실무자는 WCC나 CCA등 세계 각국이 전통적으로 반드시 노동를 하도록 되여 있다. 막연한 노동자 사랑과 애정으로는 그 사역을 감당하기 어렵고 직접 노동훈련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정서와 감정과 분노와 절망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막연한 노동자 사랑과 겉멋이 아닌 실제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나면 이론학습(정치 경제)과 산선 지역탐방이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일지를 작성하도록 하고 1주일 단위로 평가와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후 1984년 조직적으로 다시 시작된 예장의 노동훈련은 영등포산선에서 조지송목사가 76기인 이근복 손은하목사를 시켰고 그후 영등포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예장의 많은 후배들이 1983년 조직되여 현재 "일하는 예수회" 로 활동하는 멤버들이 그 전통을 자랑스럽게 지켜왔지만 2000년 이후 그 맥이 끊겼다. 남들은 신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가고 외국유학 갔지만 노동자의 사람과 애환 그리고 그 수입으로 생활을 하므로써 노동자의 생활과 문화 정신세계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교 졸업생들 가운데 산업선교 실무자나 민중교회 지원자들이 없고 노동훈련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슬픈일이다.

 내가 정목사님을 처음 만난것은 1979년 Y.H 상사의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사건으로 영등포산선에서 장청 서울지구가 항의 농성을 할 때다. 그때 청주서 올라오셔서 예배인도를 하셨는데 어눌한 충청도 사투리에 걸죽한 입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 격려차 방문한 금영균 윤두호목사의 언행도 예사롭지 않았다. 두 분의 선동으로 "여기서 이럴께 아니라 총회 본부로 가서 농성을 하라" 고 하셔서 한 20여명이 총회 총무실을 밀고 들어가니 故성갑식목사님이 전라도 말투로 깜짝놀라 "웨디서들 왔서" 자초지정을 말하니 " 잘왔서" 여그들 않어 잉 애들 많이 쓰네" 하며 속으로는 반갑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안그런척하는 여유가 있는 분들이였다.

결국 그 Y.H 사건으로 인명진목사와 서경석목사는 감옥을 갔고 기장의 故황주석목사는 이 사건의 배후를 조정하다가 위원장인 최순영과 결혼을 하기도 했다( 최순영은 전 민노당 국회의원) 그때 정목사의 설교는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예수가 부자와 권력자의 친구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서민의 친구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그들의 친구가 되여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지금 예수를 따르고 지 있다고..........잠바 차림의 소탈한 복장에 목사라고 보여지지 않는 모습이였지만 노동자목사였다. 나는 그때 이런 목사도 있구나 하며 나도 목사가 되면 저런 목사가 되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대로 정목사님은 청주 인근에서 단독 목회를 하시다가 농민들의 참상과 사회적 현실을 보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산업선교를 하시게 되였고 그래서 처음 청주산업선교회는 예장을 기반으로 해서 시작을 하셨지만 충북노회의 장로들과 기업주들의 미움을 받아 제명을 당하시고 노선이 맞는 기장으로 가셨지만 거기서도 견디지 못하고 탈퇴하여 만년에는 교단 소속없이 자유롭게 마음 껏 일하셨다.

 나도 신학교 졸업후 조지송목사와 인명진목사에게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지방으로 가려고 당시 젊은 실무자 없이 일하시는 모습이 안스러워 청주산업선교회에서 도우며 배우고 일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 그후 영등포 산선 실무자가 되였던 청주출신 故유구영(부인은 현재 새민족교회 장로가 되였다고 한다) 이가 청주에서 도와드리며 일했다. 지금은 처제이신 조순영전도사가 오랜동안 동역하시고 후임으로 일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정목사네는 온 가족이 모두 산업선교를 하시는 것으로 유명한데 장남 故정법영이 아버지를 돕다가 의문사 하는등 사모님과 온 가족이 실무자가 되여서 일하셨다. 청주시청의 환경미화원 권익 투쟁으로 부터 유신부터 전두환 노태우정권 김영삼정권까지 청주지역의 크고 작은 반정부집회와 투쟁에 빠지지 않으셨다.

한때 노동자 사랑의 마음이 지나쳐 젊은 사람들 꾐에 정당에 가입하셔서 청주시장까지 출마를 하셨지만 본심은 아니였다고 본다. 그일로 마음의 실의와 가까운 이들의 비난에 마음 아파하시기도 하였고 그래서 산선일하는 후배들과도 소원해졌다. 우리는 그때 목사들의 정당가입을 비판했는데 고영근목사님도 김대중씨선거운동을 위하여 평민당에 입당하신일이 있었다.

후일에 말씀하시기를 돕기는 해야 겠는데 선거법은 정당인만 하게 되여 있어서 할 수없이 가입하여 운동하다가 바로 탈당을 하였는데 결국은 이용만 당하신 꼴로 후회하셨다. 조남기목사도 가입은 하지 않았지만 민평연을 만들어서 외곽에서 김대중씨를 도왔는데 집권후 결국 기장측목사와 인사들은 예우를 받았지만 우리 선배들은 찬밥신세가 되였다. 정당인이란 철저하게 자기이해의 관철을 위하여 선한세력이라고 추켜세우지만 권력을 잡으면 외면하는 이다. 그것을 모르고 지금도 정당의 주변에서 기웃대는 한심한 이들이 있다. 

청주에서 미원가는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금관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경치좋은 "옥화대" 라는 곳이있다. 영등포산선회원중에 이곳으로 시집온 회원이 있는 곳으로 조지송목사님이 방문하셨다가 동네가 마음에 들으신 것 같다. 그런데 그 회원은 일찍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984년 조지송목사님은 영등포를 완전히 떠나서 이곳에 집을 짓고 사셨는데 그 집은 이삼열 강문규등 기독교쪽 어른들이 출자해서 공동으로 노후를 보낼까 해서 지였다고 한다. 집을 지을때 정진동목사님이 거의 매일오셔서 일하셨다. 청주출신으로 무극의 목도에서 공민학교를 운영하시다가 반정부 투사가 되신 이관복선생도 자주 오셨다.

 조목사님은 그 집 이름을 "하나의 집" 이라고 하시고 노동자들과 가까운이에게 장소를 개방하시고 농사를 짓고 사셨다. 영등포출신인 내 처가 제일존경하는 분이 인목사와 조목사님인데 한해에 한번씩은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자고 오거나 밥도 먹고 오곤 하였다.

 조목사님이 말하는 정목사는 무언가 두서가 없고 짜임새는 없지만 하시는 일을 언제나 바르고 옳은 일을 하신다고 하셨다. 사역은 방법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오늘날 나를 포함하여 말도 좋고 기술과 포장은 좋치만 내용이 부실한 것을 느낀다. 일도 안될 것 같은 일, 빛도 안되고 득도 안되는 일도 정목사님은 하셨다. 온갖 굿은 일을 도맡아 하셨다.

몰론 교단이라는 제도를 탈피하셔서 자유로운 면도 있어서 그렇지만 형식과 제도에 메이지 않고 일하신 예수꾼이셨다. 예장 영등포의 조지송목사 인명진목사 기감 인천의 조화순목사 조승혁목사 김동완목사등이 일찍 현역에서 모두 은퇴를 일찍했지만 롱런을 하신 유일한 분이다. 정확한 생활비 없이 교회에 손을 벌리지 않고 독일의 EZE등 외원을 받아서 일하시며 노동교회를 통하여 한시대 노동자 농민 빈민사랑을 실천하신 어른이다.

 몇년전 와병으로 몸져 누우시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셔서 광주 5.19 민주열사 묘역에 안치 되셨다. 예수회 후배들이 장례식에 추모식에 개인적으로 참여를 하고 도왔지만 아쉬울 뿐이다.  이제 산업선교의 1세대중 감리교의 故김동완목사에 이여 세상을 뜨셨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민중적인 삶으로 시작하여 민중적인 삶으로 마무리하신 목사님의 유지앞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오직 ‘낮은 곳’에 임한 민중의 목자   민주·노동·빈민운동 ‘대부’ 정진동 목사 별세
뇌졸중 3년투병, ‘민주사회장’ 거행 5·18묘역 안장

2007년 12월 12일 (수) 10:08:17 권혁상 기자 jakal40@hanmail.net

“험한 시대, 역사의 비극을 끌어안고 서 아픔이 있는 자리라면 그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서 앞장서던 바로 그 발” 한 평생 세상보다 ‘낮은 곳’을 찾아 기도해 온 거리의 목회자, 정진동 목사(75)가 지난 10일 청주 성모병원에서 영면했다. 입원중인 정 목사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문안했던 김태종 목사는 먼길 떠나는 ‘바로 그 발’을 정성스럽게 만져보았다. 김 목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숨 나눠 쉴 수 있었던 것을 평생 자랑으로 간직하며 살겠다’는 고별인사를 그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3년에 걸친 오랜 투병을 접고 홀홀히 떠나갔다. 70~80년대 충북 민주화운동의 ‘큰 어른’, 노동자·도시빈민을 위한 투쟁의 ‘선봉장’이었던 대꼬챙이 목사. 문민정부 출범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세상에서도 외롭게 순수 재야의 길을 고집했던 원로. 자신이 직접 세상 바꾸어 보겠다며 청주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던 낭만적 사회운동가.

치열했던 고인의 삶은 지난 2005년 1월 느닷없이 찾아온 뇌졸중으로 ‘원치않는’ 휴식에 들었다. 자택에서 쓰러져 충북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깨어난 고인은 첫 마디로 “나에게 아직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고 되뇌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꿈꿔온 평등세상과 통일시대는 저 세상으로 가져갈 업이 되고 말았다. 고 정진동 목사의 살아온 이력을 정리하며 그의 꿈과 땀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고 정진동 목사는 1932년 12월 26일 청원군 호죽리 동래 정씨 집안의 6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마저 변변치 않은 가난한 집안에서 가마니, 짚신, 나무짐을 팔아가며 생계를 도와야했다. 후에 고등성경학교, 대한신학(현 대신신학), 단국대 문과대, 장로회 신학대학 등을 졸업했지만 모두 제 나이를 훌쩍 넘어서 다녔다.

이 때문인지 고인은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유난히 많은 정을 베풀었다. 50년대 고향 시골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헌신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돈이 없어 배우는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진천군 덕산면에도 염광학원을 지어 정규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당시 토끼풀을 뜯어오는 것이 수업료였다는 것.

마침내 72년 고인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목사로 취임해 기층 민중을 위한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전도부 안에 산업전도위원회에서 활동하다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지원으로 청주 도시산업선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평생의 동지로 지내왔다.

고인은 도시 기층민중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거리의 넝마주이로 나서기도 했다. 부산 출신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차성수 비서관의 청주 경험담 가운데 정 목사와의 인연이 흥미롭다. 지난 75년 고려대 재학중이던 차비서관은 빈민운동 차원에서 청주에 파견돼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정 목사의 주선으로 함께 넝마줍기에 나서기도 했다는 것.

군사독재정권하에 억압받고 짓눌린 노동자·빈민들의 발길이 청주도시산업선교회로 몰려들자 경찰·정보기관의 감시 눈길도 집중됐다. 유신말기인 78년에는 신흥제분 퇴직금 투쟁, 조광피혁 부당인사, 소작인 의문사 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때 청주지역 재야 종교계 인사 20여명과 피해 당사자들이 대대적인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당시 고인의 장남인 정법영군(당시 19세)도 직접 유인물을 작성하며 단식투쟁을 도왔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내적갈등을 겪던 정군은 같은 해 7월 청주시내 모병원 응급실에 약물복용 증상으로 숨졌다.

민주화 제단에 바친 막내아들, 누가 병원으로 후송했는지 어떤 약물을 어디서 복용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은채 19세의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생전에 고인은 충청리뷰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비를 욕하는 학교 선생님밑에서 공부할 수 없다고 자퇴하고, 신학공부하면서 민중운동을 열심히 도와주었어. 그러던 애가 어느날 누군가에 이끌려 술을 취해서 집에 들어왔어, 그러고 얼마뒤에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왔서 가보니 이미 혼수상태였지. 그 상태에서 혼자 몸으로 병원을 찾아왔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내가 좀 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죽은 자식은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거지” 결국 정 군의 죽음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의문사’로 판명받았다.

또 막내 아들 정세영씨도 청주 민정당사 점거로 인해 집회시위법으로 구속수감되기도 했다. 또한 와병중인 정 목사를 대신해 교회를 이끌고 있는 조순영 전도사는 처제로 온 가족이 엄혹한 시절에 탄압과 고통을 함께 해야만 했다.

고인은 정춘수 동상 철거 사건, 청주대 재단비리 의혹사건, 산남동 택지개발지구 보상민원 등 800여건이 넘는 지역현안과 노동·인권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88년 임금협상에서 월급제를 도급제로 바꾸는데 합의한 노조 지도부와 사업주에 반대한 11개 택시사업장의 총파업투쟁은 지역 노동운동의 이정표로 남아있다. 수많은 민원과 집회과정에서 고인은 30여 차례의 연행과 옥고를 치렀고 고인의‘ 민중신학’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제명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에게 쓴소리할 수 있어야’ 70~80년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는 진보적 민중운동을 이끌던 민주인사들의 강연장이었다. 김관석, 인명진, 박형규, 문동환, 문익환, 조남기, 김진홍, 고영근 목사 등이 방문했고 함석헌, 계훈제, 백기완, 안병무, 한완상 교수 등도 고인의 민주화운동에 원군이 됐다. 고인은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해 처벌받기도 했다. 이같은 공적에 따라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돼 민주열사들과 함께 5·18묘역에 묻히게 됐다.

고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생전의 일화가 있다. 지난 97년 재야의 비판적 지지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기독교 관계자들의 축하모임이 열렸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김대통령 찬양일색의 발언을 이어가자 정목사는 그 자리를 뿌리치고 나왔다. “종교는 중립에 서야지 누구 편을 들 수는 없다. 그래야 나중에 대통령이 실수를 할 때 쓴소리를 할 수 있다”고 일갈했다는 것.

고 정진동 목사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1주일에 1장씩 시국관련 글을 쓰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고인은 주변의 지인과 지역 언론사에 자신의 글을 보내주었고 이 글은 6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발간된 책의 제목 <끌 수 없는 정의에 불꽃>처럼 고인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밤 하늘의 별로 남아 새롭게 이 땅을 비춰줄 것이다.

생전의 언론 인터뷰 가운데 고인이 독백처럼 던진 한마디가 가슴을 찌른다. “지금 하는 일도 자기희생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솔직히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어.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이 3∼4명만 돼도 좋을텐데…”
   
 

한국 NCC에 보낸 WCC 총무인 샘 코비아의 조전   14 December 2007

Dear Mrs. Cho Jung Suk,

I was deeply saddened to hear of the recent passing of your husband, the Reverend Chung Jin Dong. Although I am unable to be with you during this difficult time, my thoughts and prayers are with you and your family. Rev. Chung was an individual who exemplified our Lord’s teaching to be the Salt and Light of the earth. His tireless efforts on behalf of the weak and marginalized in Korea have rightly earned him the title of “Friend of the Minjung.” Rev. Chung was a truly inspirational leader with a vision for the future who empowered the people around him to challenge and change their present. I well remember the way in which he expressed in powerful and emphatic ways the pain and suffering of the Korean minjung as he stood with them in their struggle against the oppressive systems of injustice, becoming a voice for the voiceless and a spokesperson for the abused.

I am sure that you and your family will miss his presence with you, particularly during this time of year. I know that your faith and trust in our Immanuel God will be a source of strength and comfort in your time of grief and loss. I pray that you will be able to draw further strength and comfort from the knowledge that Rev. Chung’s life of self-sacrifice provided the fruits of life and liberty to countless individuals who now join you in solidarity during your time of grief.

The Korean church, and indeed the world Christian community, will deeply miss his inspirational leadership and empowering presence as we continue to journey with the people of Korea toward the realization of a reconciled and unified Korea in which all live under the banners of peace and justice. In this time of sorrow and mourning I wish to reassure our friends in Korea that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stands alongside them in unswerving solidarity and commitment in their continued efforts to promote justice, peace and reconcili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May the Lord who is Life comfort you.

 샘코비아의조사.txt 

Rev. Dr. Samel Kobia
General Secretary
World Council of Churches

                                       고 정진동목사님을추모하며…  정의의 칼날

정진동 목사님을 처음 뵈온 때는 내가 백범 김 구 선생 암살범 안 두희를 정의봉으로 처단하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중, 김 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첫 삼일절 특사로 청주 교도소 밖에서 박 의사를 기다리면서부터였다. 키가 헌출하신 정 목사님은 사모님인 듯한 인자한 여성분(조 순영 전도사였음)과 나란이 서서 박 의사의 석방을 고대하고 계시다가 박 의사가 석방되어 나오자 서로 마주하며 자신을 청주에 있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정 진동 목사라고 소개하여 알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어느 재야 모임, 아마도 박 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운동을 하던 중 행사가 끝나고 뒷풀이 장소에서 윤 봉길 의사의 조카되는 전 고대교수 윤 용씨와 함께 하면서 부터가 아닌가 싶다. 역사정의실천연대라고 간판으로 민족반역자 처벌과 매국노의 땅찾기 반대를 위한 모임에서 의기투합한 것이다.

당시 나중에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가신 조 문기 선생(부민관 폭탄의거 주역, 독립운동가), 광화문 할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이 관복 선생 등 몇몇의 동지들과 더불어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하면 목사님은 단 몇 명이 모이는 집회에도 더위를 마다않고 청주에서 고속버스 편으로 오셔서 집회에 참가하시고는 열변을 토하시곤 하던 모습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지금도 장악하고 있다.

정 목사님은 목사라고 말하기 보다는 젊은 열혈동지였다. 당시 나이도 60대였으나 한번도 뒷짐지고 훈수나 두는 그런류의 목사가 아니고 피가 끓는 열혈동지였다. 도시산업선교회의 목사로서 그는 월 40만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문자 그대로 진짜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사시다가 쓰러지기 전까지 거리에서 부당하고 부정한 관권과 자본가에 추상 같은 호령을 내렸고 그 때마다 그가 투쟁하던 싸움은 성공을 거두곤 했다.

노동자가 직장에서 쫒겨나 갈 곳이 없으면 충북지역에선 정 목사님은 따뜻하게 그들을 맞이하여 그들과 함께 거리에서 투쟁하였다. 농민이 빚더미, 종자값, 비료대 등으로 삶의 희망을 상실한 채 농약을 마시고 줄지어 자살하는 곳에 그는 유일한 희망의 등불로서 그들의 애환을 들어주고 그들과 함께 부당한 관권과 싸웠다.도시서민이 재개발로 삶의 둥지를 상실하여 돈도 배경도 없는 그들의 고통은 바로 그의 고통이 되었고 하루도 편히 잠자고 배불리 먹고 살지 못했다. 그도 가난하였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찾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는 언제나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사람이었으나 언제나 겸손하고 민중의 고통이 있는 곳에 그가 있었고 가난하고 힘들었으나 결코 불의와는 타협이 없었고 이러한 50년의 세월 동안 그가 함께 한 노동운동가, 재야인사, 가난한 그의 이웃에게 그는 진정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의 말투는 다소 투박한 편이었으나 그의 가슴은 따뜻했고 만나는 이들은 그로부터 그 사랑을 느끼고 이것이 숱한 운동가, 재야, 숱한 민중들을 감동시켰고 나도 그 감동 속에서 그를 지금 추모하고 있다.

 나는 그만큼 진실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그가 가진 것은 정의와 사랑, 결코 변질되지 않은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흔히 목사하면 높은 교회당 건물과 좋은 옷을 세련되게 입고 고급 세단에 몸을 싣고 세련된 말솜씨로 억대나 몇 천만원의 월급을 받는 그런 목사를 연상시킬지 모른다. 그에게 이건 엄청난 착각이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그가 어느 공장의 노동자, 아니면 농사꾼 쯤으로 보일 정도로 허룸한 잠바를 걸치고 일주일이 지나도 그 옷이요 한달이 지나도 그 옷을 입고 그는 거리의 뙤약볕을 직격탄으로 맞으면서 앞장서서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는 투사였지만 그는 약자에게 언제나 잔잔한 미소로 그 민중의 친구로 손색이 없고 막걸리 잔을 마주한 동지였다.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그 큰 아들 정 법영 군을 의문사로 잃었으나 그의 민주화 염원은 한결 같았다.  어제 청주 의료원 제7호실에서 난 눈에 익은 듯한 분이 나의 영안소 분행을 앞서서 마치고 유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 대통령 후보 정 동영씨였다.노 무현 대통령, 각 정당 대표, 통일부 장관, 재야 단체, 민주노총, 통일운동 단체, 민중운동권의 단체를 총망라한 화환이 즐비한 것을 보면 김 대중, 노 무현 정권을 이어오는 민주적인 정부에서 그의 엣 동지들이 여, 야로 나뉘어 장관이 되고 높은 관직에 나갔어도 그는 요지부동, 그 자리를 지킨 민중의 영원한 벗으로서 민중의 고통과 함께 한 성자였다.

 맨 처음 넝마주이가 되어 선교를 시작한 그는 다른 목사들처럼 입만 벌리면 믿으라고 신앙을 강요하고 조금 지나면 헌금하라고 하는 다른 여느 목사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정부는 뒤늦게 그에게 대한민국 모란장의 서훈을 추서했다. 난 뭐니 뭐니 해도 청주의 친일파 정 춘수 동상 철거에 앞장선 그의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정 춘수는 그와 같은 목사였고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혈연,지연 등 연 고를 물리치고 그는 정 춘수 동상을 철거하고 그 대가로 법정에 서야 했다. 800 여건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그는 30 여차레 투옥, 감금, 감시를 견디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는 물러나지 아니 하였다. 그가 훌륭한 것은 그의 투쟁경력만이 아니라 그의 따뜻한 인간애와 끊임없는 자기 반성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 그의 일기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자신을 채찍질한 삶의 태도에서 그의 변함없는 민중의 벗으로서의 모습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그는 망월동 묘지로 했고 난 내 부모가 유명을 달리할 때도 그토록 흐르지 않는 눈물을 흐느껴가며 흘려야 했다.  그의 삶을 아는 대로 되돌아 보면서 그를 추모하고자 약 일주일간 우리 카페의 대문을 그의 영정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회원 여러분 많은 이해를 바랍니다. 

                                                             20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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