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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현의 마지막 강의 1구약의 농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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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8  21: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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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의 농사 이야기 

   
 

이 강의는 박동현교수가 2008년 3월 한국기독교 생명농업 포럼 제 2차 총회에서 행한 것입니다.

박동현교수(장신대 구약학)

존경하는 여러분,
이런 소중한 모임에서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 매우 반갑고 기쁩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그동안 읽어 온 구약성서에 나오는 몇 가지 농사 이야기를 함께 찾아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뜻을 지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농사 자체보다는 주로 농사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 ‘땅을 갈’ 아담 (창 2장 5, 7, 15절)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27절과는 달리 창세기 2장 5절과 7절에서는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특별한 동기를 알려줍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5절을 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아다마>)을 갈 (<아밧>)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들의 초목과 밭의 채소입니다. 한 마디로 땅의 식물입니다. 땅에는 식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땅에 식물이 있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비를 내리셔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을 갈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는 것만으로는 땅에 식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을 갈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 <아밧>은 ‘일하다’, ‘섬기다’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일, 섬기는 일의 첫째는 땅을 가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아다마>)의 흙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사람이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이 경우에 ‘땅’과 ‘사람’은 히브리말로 같은 뿌리에서 왔습니다. 둘 다 ‘붉다’를 뜻하는 낱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다마>는 사람이 농사지을 수 있는 붉은 땅을 가리키고, 그 <아다마>의 겉에 있는 흙으로 만든 <아담>도 붉은 빛을 띱니다.
아무튼 창세기 2장 5절과 7절, 두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땅의 식물 때문에 땅의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논밭을 갈아 농작물을 심어 가꾸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농사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농사지을 존재로, 땅을 갈 존재로 만드셨다는 말이지요. 사람은 농사꾼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농사꾼은 땅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어울리게 2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면서 그가 그 동산을 ‘갈고’(<아밧>) 지키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에덴 동산은 땅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첫 사람 아담은 농사꾼으로 에덴 동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은 농사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농사꾼의 후손이지요.


2. ‘땅을 가는 이’ 가인 (창 4:1-7)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맏아들 가인을 가리켜 창세기 4장 2절에서는 ‘농사하는 자’라 합니다. 그 히브리 표현을 직역하면, ‘땅(<아다마>)을 가는(<아밧>) 이’입니다. 가인의 직업이 농업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가인은 농사꾼, 요즘 말로 농업인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가인은 창세기 2장 5절에서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는 사람 <아담>의 후예로서 모범적인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
따라서 최초의 농사꾼이 아담이었다면, 가인은 대를 이어 농삿일을 하게 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업을 물려받았으니 요즘 말로 한다면 농업 후계자라 할 만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농사꾼 가인이 양치기 아우 아벨을 죽이는 바람에 농사꾼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인이 아벨의 형이라는 점을 두고 보면, 첫 사람 부부에게서 난 첫 사람이 하고 살 일이 농사였다는 점을 지나쳐 볼 수 없습니다. 목축도 중요하지만 농사가 그보다 앞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여기서 말씀드리고 지나갈 것은 아벨을 두고서 양을 치는 자라고 하지만 4장 20절에서 가인의 후손 가운데 야발을 두고서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므로, 아벨을 곧바로 목축업의 시조라 하기는 힘들겠다는 점입니다. 결국 아담, 하와, 가인, 아벨은 비록 에덴에서는 쫓겨났으나 여전히 땅을 갈며 살던 가족이었고 그 일을 맏아들인 가인이 이어받아 하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어버이와 형과 함께 살면서 짐승을 쳤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 양치는 일은 독립된 직업 활동이라기보다는 농사를 짓는 가정의 부업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사막이 많은 중동 지역에서도 농사가 목축보다 우대받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잠시 수천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이른바 잘 산다는 나라에서는 목축업이 농업보다 더 대우받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고기를 먹고 살아야 기름진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는 흐름이 드세기 때문이지요. 몇 해 전부터 미국에서 나는 소고기를 수입하는 문제를 두고 우리 사회가 시끄러운데, 이 또한 그런 흐름과 관계없지 아니합니다.
창세기 4장 3절에서는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 히브리 문장을 직역하여 말한다면, 가인은 ‘땅(<아다마>)의 열매 가운데서 얼마를’ 하나님께 예물로 가져 온 것입니다. 농산물을 바친다고 하면 오늘 우리는 얼른 추수감사절을 떠올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짓는 사람은 비록 자신이 피땀 흘려 가꾼 식물에서 난 열매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그 열매를 얻을 수 없는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매 가운데서 얼마를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농사짓는 자체가 의로움을 보장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곧 농사꾼이라고 해서 무조건 의로운 존재, 곧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존재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를 두고 볼 때 아우를 쳐 죽인 것 자체는 결코 잘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흔히 농업을 생명 산업이라고 할 때 농업은 목숨을 살리고 북돋우는 산업임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농사일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해치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까 참 궁금합니다. 창세기 4장 4-6절에서는 그저 하나님이 아벨과 아벨이 바친 예물은 받으시면서 가인과 가인이 바친 예물은 ‘받지’ 아니하셔서 가인이 몹시 화가 나서 낯을 떨구었다고 합니다. 개역성서에서 ‘받다’로 옮긴 히브리 표현은 본디 ‘...에게 눈길을 두다’, ‘...을 보다’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이 가져온 예물에는 눈길을 두시면서 가인과 가인이 가져온 예물에는 눈길을 두시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왜 그리하셨을까요?
신약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이를 두고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다는 식이지요. 그렇지만 이는 히브리서를 쓴 사람의 새로운 해석으로 창세기 4장 자체의 흐름에서 찾아낼 수 있는 풀이는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예물은 피 없는 곡물보다는 피 있는 동물이라는 점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는 특히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을 떠올리게 하는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까닭이 짐승을 먹이는 데 있지 않고 땅을 가는 데 두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꼭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닙니다.
또 어떤 학자는 창세기 4장 4절 히브리어 본문에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 곧 맏이를 드렸지만 가인은 그저 땅의 열매 가운데 얼마를 드렸다고 하므로, 가인은 성의 없이 그저 형식을 따라 바쳤을 뿐이고,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그의 예물에 눈길을 주시지 않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면 굳이 처음부터 가인을 그렇게 나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은 지난날 가인이 저지른 잘못을 따져 그를 벌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좋게 처신한다면 그리 화낼 것도 낯을 떨굴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누구의 예물에게 눈길을 두시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그것을 두고서 화를 내거나 낯을 떨굴 것이 아니라 그저 좋게 처신하고 살아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잠시 여기서 저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가인처럼 농사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땅을 갈아 거두어 들여 하나님께 바치는 열매에 하나님이 전혀 눈길을 두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농사꾼들과 농산물에 눈길을 두신다면, 이렇게 농사꾼들이 천대받고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가인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예물에 눈길조차 주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고 낯을 떨구는 농사꾼 가인에게, 당신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끝까지 좋게 처신할 것을 요청하신 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은 것을 두고 화내고 낙심만 하다가는 처신을 그르치고 형제를 죽이는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마침내는 더는 땅을 갈 수 없게 땅에서 쫓겨나게 되면 목숨조차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어진다는 것이지요.
가인의 처지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 농사꾼들을 가인의 자리에 놓고 보면, 이해하기 힘든 현실 가운데서 화가 나고 낯을 떨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분노에 사로잡혀 생명을 해하지 말고 끝까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좋은 일 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인과 가인의 예물에 눈길을 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가인을 내치신 것도 아니고 가인을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련과 시험 때문에 가인이 잘못될까봐, 또 가인의 잘못으로 삶의 공동체가 깨질까봐 염려가 되어, 사랑 많은 어버이가 아직 철이 덜 든 자식을 달래면서 부드러운 말로 경고하듯이,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네게 네가 가져온 예물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 그렇게 낯을 떨구고 있느냐? 내가 너를 저버린 것도 아닌데 ... 혹시라도 이 너의 분노와 낙심이 너를 집어 삼켜 네가 죄의 손아귀에 들어갈까 두렵구나. 죄란 놈은 늘 그렇게 사람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지. 그렇더라도 너는 거기에 걸려들어서는 안 되는 거야. 그 유혹을 뿌리쳐야 하는 거야. 너는 계속 잘 처신해야 해! 생명을 살리는 일, 삶을 기름지게 하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가야지! 네가 계속 그렇게 잘 처신한다면 내가 네 예물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 속상해 할 필요가 없어. 낯을 떨굴 필요도 없지. 그전처럼 낯을 들고 당당히 지낼 수 있는 거야.” 구약성서에서 ‘선’으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본디 삶의 기름지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리하여 적어도 가인이 살인 장면이 나오는 8절에 이르기 전의 창세기 4장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라 땅을 가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제 맘대로 본문을 이해한 것인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인의 이야기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더는 땅을 갈 수 없게 된 가인은 창세기 4장 16-22절에서 다른 곳으로 가서 도시를 건설하였고, 그의 후손 가운데서 본격적인 목축업과 음악가와 대장장이의 시조가 나왔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구약성서에서 ‘성읍’ 곧 ‘도시’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 <이르>가 바로 이 곳 17절에 처음 나옵니다. 그러니까 잘 처신하여 너를 삼키려는 죄의 손아귀에 빠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이 있었는데도 자신의 분노와 낙심을 이기지 못하여 아우를 해치고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사람 가인이 건설한 것이 도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도시 건설은 생명을 가꾸고 살리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 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곧 땅을 갈 사람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 땅 가는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사람들이 잘 살아보겠다고 땅 가는 일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게 만드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흥미롭게도 구약성서에서 두 번째로 ‘성읍’(<이르>)이라는 낱말이 나온 곳이 창세기 10장 12절인데, 여기서도 노아에게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레센이라는 큰 성읍을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도시 건설이 농사짓는 것만큼 좋지 않다는 점은 바벨탑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서 세상 곳곳으로 흩어진 노아의 후손들은 “성읍(<이르>)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면서 성읍과 탑을 건설합니다. 탑은 사람이 건설하는 성읍을 멀리서도 알아차리게 하는 상징물입니다. 성읍(<이르>)이라는 말이 구약성서에서 세 번째로 여기에 쓰입니다.

3. ‘땅의 사람’ 노아 (창 9:20)

가인 다음으로 구약성서에서 농사를 지은 사람으로 명백하게 언급된 사람은 노아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노아 일가가 방주에서 나온 뒤에 창세기 9장 20절에서는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 히브리 본문을 직역하면 “노아, 땅(<아다마>)의 사람이 시작하여 포도원을 가꾸었다”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인 이후 노아에 이르기까지 농사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는 홍수가 끝난 뒤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 드렸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곧 8장 22절에서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홍수 이전에도 씨를 뿌리고 식물을 가꾸어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은 늘 있어왔던 것이고, 홍수로 중단되었던 농사가 다시 이어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를 가리켜 ‘땅의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이는 홍수가 나기 이전에 노아가 농사꾼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따르면 노아가 가인의 직계 후손은 아니고 가인의 아우로 늦게 태어난 셋의 후손이지만, 쫓겨나기 이전의 가인이 ‘땅을 가는 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는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홍수가 끝난 뒤에 노아가 할 일도 다른 것이 아니라 농사였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포도를 가꾸게 된 점이 새롭습니다. 그 점에서 노아를 포도 농사의 시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농사지어 가꿀 수 있는 식물로 창세기 2장 5절에서 ‘초목’, ‘채소’, 16절에서 ‘각종 나무’라고만 하던 것을 9장 20절에서는 ‘포도원’이라는 한 종류에 한정하여 말합니다. 포도원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 <케렘>도 구약성서에서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이는 한편으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중동 지방의 삶과 종교에서 포도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암시합니다. 나중에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세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우화에서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버리고 나무들의 왕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삿 9:13). 다른 한편으로 노아 때에 이르러 농사가 아주 구체성을 띠게 됨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유감스러운 것은 ‘땅의 사람’ 노아가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는 이 말이 그 열매에서 만든 술을 마시고 노아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두고 그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불행을 겪게 되는 일로 끝났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노아의 포도농사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농사 이야기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렇지만 ‘땅의 사람’ 노아가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를 가볍게 볼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 새로운 언약의 말씀을 들은 노아가 시작한 일이 무엇보다도 그 전부터 해오던 농사를 한층 더 발전시킨 일이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4. 씨 뿌려 백 배 거두어들인 이삭 (창 26:12-14)

창세기 11장 27-31절에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아들 아브람 부부와 손자 롯을 데리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한 까닭이 무엇인지 창세기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자리 잡은 갈대아 우르는 기름진 땅으로 농사지으며 살기에 좋은 곳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뭄이 닥쳤을까요? 아니면 부족간에 갈등이 심해 더는 거기 살 수 없었던 것일까요?
창세기의 흐름을 따라 보면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가 북서부 메소포타미아의 성읍 하란에서 세상을 떠난 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들어옵니다. 창세기에 적힌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한 곳에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짐승 떼를 거느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가뭄을 피해 이집트에까지 내려가 나그네로 살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와 주로 목축을 하며 산 듯합니다.
창세기 26장 첫머리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가뭄이 닥치자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던 그랄로 이주합니다. 그랄에서 이삭이 한 일과 그 결과를 26장 12-14절에서 묘사하는데, 맨 먼저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였다고 합니다. 그 히브리어 문장을 직역하면, “그리고 이삭이 그 땅에서 씨를 뿌렸다.”가 됩니다. 글의 흐름으로 볼 때 여기서 씨를 뿌린다 함은 농사지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구약 여러 곳에서 씨 뿌린다는 것이 그런 뜻으로 쓰입니다(창 47:23; 출 23:10, 16; 레 19:19; 25:3, 4, 11, 20, 22; 26:16; 신 11:10; 22:9; 삿 6:3 등).
또 여기 나오는 땅은 앞서 나온 <아다마>가 아니라 <에레츠>입니다. 이 경우 <에레츠>는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뜻하는 <아다마>와는 달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실제로는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그랄 땅을 가리킵니다. 아무튼 그 땅에서 이삭이 한 일은 씨를 뿌린 일입니다. 놀랍게도 창세기에서 ‘씨 뿌리다’는 동사의 주어로 나오는 첫 사람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삭 이전에는 그 누구도 씨 뿌리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앞서 알아본 대로 이미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들 가인이 땅을 가는 사람들이었고 노아 또한 ‘땅의 사람’이었으므로 그들로 땅에 씨를 뿌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씨 뿌리다’는 동사의 주어로 이삭이 맨 처음 나온다는 것은 매우 뜻 깊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가뭄을 피해 이집트로 가서 더부살이를 했지만,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땅에 씨를 뿌리고 일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농사지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창세기 26장 12절에서 씨 뿌리는 것은 농사 전체를 대표하는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개역성경에서도 이를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였다고 옮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이 한 절 자체만 두고 보면 가뭄을 피해 기름지기는 하나 낯선 땅에 살러 들어온 이삭은 그 땅에서 자신이 농사도 지을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한 셈이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렸을 뿐만 아니라 그 해에 백배를 얻었습니다. ‘백 배’라는 말만 두고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자라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셨습니다. 그 비유에서는 씨가 떨어진 땅이 좋아서 놀라운 수확이 있었다면, 여기서는 땅에 씨를 뿌려 가꾼 사람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놀라운 수확을 그저 이삭이 농사를 잘 한 결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26장 2-3절에서 하나님이 이삭에게 흉년을 피해 이집트로 가지 말고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시는 땅 곧 블레셋 땅 그랄에 머물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삭이 낯선 땅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농사지어 백배나 얻은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씀은 13절 끝부분에도 나옵니다.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뒤이어 나오는 14-15절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신 덕택에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하나님 덕분에 농업과 목축업 둘 다에 크게 성공하여 아주 부유하게 되어 토박이들이 그를 시새움할 정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나라 안팎에서 농업을 천시하고 상공업, 금융업, 서비스업을 통해 돈 버는 흐름이 드센 이즈음에 농사지어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농사꾼을 부유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더 가난하게 만드는 수가 적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이삭이 씨를 뿌려 큰 부자가 되었다는 창세기 26장을 읽을 때, 농사꾼이 일한 만큼 대접받는 세상이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을 품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천재지변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남의 땅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도 함께 씨를 뿌리고 가꾸며 삶의 터전을 일구며 토박이와 마찬가지로 인정받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이런 세상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이 바라시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5.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는 기드온 (삿 6:11)

이처럼 이삭은 낯선 땅에서도 농사지어 잘 살게 된 사람이었지만 그를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쫓겨납니다. 그 뒤로 이삭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또 야곱의 아들들도 땅을 갈기보다는 짐승을 먹이며 살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나중에 요셉의 초청을 받아 이집트로 이주한 요셉의 형들에게 이집트 임금이 그들의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이 자기들은 선조 때부터 목자라고 답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창 47:3).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앞서 4장 2절에서 아벨을 두고 ‘양 치는 자’라고 하던 표현이 여기에 그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이집트 사람들은 씨를 뿌리는 사람들 곧 농사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이집트에도 가뭄이 닥쳤을 때 요셉이 이집트 백성에게서 땅을 사면서 그들에게 씨앗을 주며 땅에 씨를 뿌리라고 한 데서 드러납니다(창 47:23). 그러니까 히브리어 표현만 두고 본다면, 이집트 사람들은 그랄 땅에서 ‘씨를 뿌려’ 백배나 거두어들인 이삭과 ‘땅의 사람’이었던 노아와 ‘땅을 가는 이’였던 가인을 거쳐 ‘땅을 갈’ 존재로 창조된 아담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의 참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들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빠져 나와 사십 년의 광야 길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발을 붙이고 농사지으며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뜻을 저버리고 못된 짓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섬깁니다(삿 2:11-13, 17, 19; 3:7, 12; 4:1; 6:1, 25-26 등). 오랫동안 거친 들길을 거쳐 기름진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들의 눈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이나 아스다롯 같은 신들이야말로 농사가 잘 되게 해 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그들의 하나님 창조주 야훼를 저버리자 하나님은 그들을 이웃 나라들의 손에 넘겨 고생하게 하십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나서기 전 이스라엘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사사기 6장 첫머리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못된 짓을 하자 하나님이 그들은 일곱 해 동안 미디안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힘써 농사지어 놓으면 미디안 사람들이 다른 이웃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 망가뜨려 이스라엘 가운데 먹을 것이 남아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6장 3절에서도 이스라엘이 ‘씨를 뿌리면’이라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농사짓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는 창세기 26장 12절에서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렸다 함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심히 농사짓지만 미디안 사람들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이 메뚜기 떼처럼 많이 쳐들어와 그 농사를 다 망가뜨려 놓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지난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의 곡물을 마구 빼앗아간 역사를 생각나게 합니다. 제 땅에서 생산한 양식을 스스로 먹지 못하여 굶주리게 된 사람들의 억울함과 괴로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먼저 한 예언자를 그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을 꾸짖은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낼 일꾼으로 기드온을 뽑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뽑으신 기드온도 처음에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사사기 6장 11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갔을 때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때라면 마땅히 타작마당에서 타작해야 할 밀을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눈에 띄면 정성 다해 농사지어 거두어들인 곡식을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에 맞서 싸워 내 곡식을 지킬 힘도 용기도 기드온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참으로 약한 농사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놀랍게도 이처럼 약하기 약한 농사꾼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삿 6:12). 마침내 기드온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미디안과 싸워 그들을 물리칩니다.
오늘 우리는 기드온을 그저 믿음의 용사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드온은 본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겁 많은 농사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들어 이스라엘을 괴로움에서 건져내는 일꾼으로 부리신 사실에 비추어 보면, 오늘 이른바 식량 주권이 크게 위협받는 나라들에서도 하나님은 약한 농사꾼을 뽑아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을 살려내시고자 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긴 있었지만 한 때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켜주었던 사사 삼손의 어머니도 농사짓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삼손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고한 천사가, 삼손의 어머니가 밭에 앉았을 때에 다시 그에게 나타났다고 한 데서 알 수 있습니다(삿 13:9).

6. 소를 앞세워 밭을 갈던 엘리사 (왕상 19:19)

지금으로부터 이천 팔백 수십 여 년 전 엘리야의 뒤를 이어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던 엘리사도 본디는 농사꾼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19절에서는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 엘리사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그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하는데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 정도면 엘리사 집안이 농사짓고 있던 땅의 넓이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사가 소 스물네 마리를 부릴 정도로 농사에 능숙했고 농사를 열정적으로 하던 젊은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엘리사의 능력과 기질은 엘리야가 하늘에 올릴 때까지 끈질기게 스승을 따르며 스승에게 있었던 영감의 갑절을 요구한 데서도 알아차릴 수 있고(왕하 2:9),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 가운데서 가장 기적을 많이 일으킨 예언자가 엘리사라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엘리사가 병들어 세상을 떠날 즈음에 그를 찾아 온 이스라엘 임금 요아스는 엘리야를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라고까지 불렀습니다(왕하 13:14).
오늘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건강한 몸과 뜨거운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며 나라와 세계를 지킬 하나님의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7. 포도밭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나봇 (왕상 21장)

북왕국 임금 아합 때 이스르엘 골짜기에 살던 농부 나봇은 아합의 왕궁 가까이에 좋은 포도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이 포도밭을 아합은 자신의 채소밭을 삼으려고 나봇에게 더 좋은 땅을 주거나 값을 낫게 돈으로 쳐줄 터이니 그 포도밭을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이를 거절합니다. 왜냐 하면 그 포도밭은 조상이 남겨준 유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봇이 이렇게 임금의 요구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전통과 상관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파별로 집안별로 가나안 땅을 나누어주신 것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받은 땅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상이 하나님께 받아 전해준 포도밭을 나봇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나 권력자의 요구에 밀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봇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이방 출신의 왕비 이세벨의 음모와 그에 동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 때문에 엘리야를 통해 아합의 집안에 재난이 닥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나중에 그 예언은 이루어졌습니다.
나봇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하늘 아래 모든 땅은 본디 하나님의 것이고 사람들은 그저 빌려 쓰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런 땅을 힘 있는 사람들이 맘대로 빼앗으려 할 때 이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생각합니다. 오늘도 권력과 경제력에 밀려 땅을 포기하는 농사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땅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8. 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나무를 가꾼 아모스 (암 7:14)

엘리사 다음으로 농사를 짓다가 예언자로 부름 받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는 사람이 아모스입니다. 남왕국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북왕국의 성소가 있는 벧엘에 가서 심판을 선포하는 아모스에게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그리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예언하라고 합니다. 이에 아모스는 대꾸합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다고 합니다(암 7:14-15).
아모스서의 흐름을 따라 보면 이 말로써 아모스는 처음부터 예언자였던 것도 예언자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 자신이 예언자로 나서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음을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서 본디 자신은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목자로 옮긴 히브리 낱말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먹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또 뽕나무로 옮긴 히브리 명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돌무화과나무를 가리킵니다. 목재로 주로 쓰이는 돌무화과의 열매는 작고 즙은 많으나 일반 무화과 열매보다 덜 달고 벌레가 잘 먹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열매가 제대로 익기 직전에 바늘이나 쇠조각으로 흠집을 내어야 벌레 먹지 않고 익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열매 하나하나를 그렇게 손질해야 하는데, 여기서 ‘재배하다’로 옮긴 히브리 동사가 바로 이를 뜻합니다.
이 돌무화과나무는 낮고 평평한 곳 이를테면 이스라엘의 해안평야에서 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가 살던 드고아 마을은 베들레헴 남쪽 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해발 825미터의 높은 곳이어서, 아모스에게는 멀리 낮은 평야지대에 돌무화과나무를 가꿀 땅이 따로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에서는 주로 목축을 하고 때때로 손이 많이 가는 돌무화과 농사는 다른 곳에서 일꾼들을 부리면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흔히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아모스는 가난한 농사꾼이라기보다는 제법 여유 있게 살며 목축업과 과수원을 규모 있게 하던 중농 이상의 계층에 속했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은 아모스 1-2장에서 암시하듯이, 아모스가 나라 안 사정뿐만 아니라 나라 밖의 사정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과도 통합니다. 그러니까 아모스는 비록 시골에 살지만 재력도 상당하고 국내외 정치를 볼 줄 아는 식견도 갖춘 인물이었던 듯합니다.
그렇지만 아모스는 그저 사람만 부리며 떵떵거리고 살지 않았습니다. 직접 몸으로 앞장서서 짐승도 치고 과수 농사도 하면서 자기가 사는 시대의 문제를 두고 깊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아모스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난 전문 종교인들을 제쳐 놓고 열심히 목축하며 성실히 농사짓는 당신의 말씀을 전할 일꾼으로 불러 쓰셨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구약학자는 하나님의 긴급조치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제법 잘 사는 농사꾼 가운데서도 그저 자신의 삶에 갇혀 만족하지 않고 이 나라안팎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9. 땅을 사랑한 임금 웃시야 (대하 26:10)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주전 8세기에 남왕국 유다를 다스렸던 임금이 웃시야입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이 웃시야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방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농업을 장려했다고 합니다. 10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 이 구절의 마지막 문장 곧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는 웃시야 임금이 중농정책을 펼친 까닭을 일러줍니다. 그 히브리 문장을 직역하면 “그가 땅을 사랑하고 있었음이라”가 됩니다. 여기서 땅은 <아다마> 곧 농사지을 수 있는 땅, 경작지를 가리킵니다. 한 두어 달 전에 새 정부의 장관을 뽑는 과정에서 땅을 사랑해서 여기저기 땅을 많이 사두었다고 말해서 웃음거리가 된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런 사람은 땅이 돈 벌이 수단이 되니까 땅을 사랑한다고 했겠지요. 웃시야의 경우는 아주 다릅니다. <아다마>를 사랑하는 임금! 이런 통치자가 우리에게도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농사와 관련 있는 아홉 사람을 기억했습니다. ‘땅을 갈’ 아담(창 2장 5, 7, 15절), ‘땅을 가는 이’ 가인(창 4:1-7), ‘땅의 사람’ 노아(창 9:20), 씨 뿌려 백 배 거두어들인 이삭(창 26:12-14),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기드온(삿 6:11), 소를 앞세워 밭을 갈던 엘리사(왕상 19:19), 포도밭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나봇(왕상 21장), 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나무를 가꾼 아모스(암 7:14), 땅을 사랑한 임금 웃시야(대하 26:10)이 아홉 사람입니다. 이들의 이야기 가운데에 오늘 농사를 몸소 짓거나 농사를 귀히 여기며 후원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농사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일깨우는 가르침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가르침 하나하나를 따라 우리 자신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말씀을 맺습니다.

마지막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가 1928년 스무 살의 나이로 펴 낸 농민독본 제 3권(‘농민의 앞날’)의 제 4과(‘농민’) 제3절 전반부에 써 놓으신 글을 요즈음 맞춤법에 맞추어 고쳐 쓴 것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이 농민독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직 한 번 보시지 못하신 분은 꼭 한 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윤봉길 의사를 보통은 그저 독립투사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윤봉길 의사는 일찍이 농민 운동에 투신하신 분입니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의 먹고 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 생산에 기다리지 않는 것은 없는만큼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으로 변하여 하루 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농민이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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