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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 교수의 기죽지 않기
이종록 교수  |  한일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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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3.31  09: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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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록 교수의 기죽지 않기 

1. 원론적인 이야기한다고 기죽이는 사회
서점에 가서, 사람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어떤 책을 진열했는지를 살펴보면, 그 시대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서점을 가나 대체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그 책들은 “원론”(原論)을 거부하고, “요령”과 “비법”을 들려주는 “비서”(秘書)들이다. 한때 유행했던, 세상사람 1%를 지향하는 『시크릿』(Secret)같은 책들이다.  지금도 인상 깊게 생각나는 『제 장례식에 놀러오실래요?』(원제는 From Beginning to End)라는 재미난 책을 쓴 로버트 풀검은 그 이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을 썼는데,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http://robertfulghum.com/index.php/fulghumweb/entry/3276_private_eye/

 

 

 

 

 

 우리는 살면서 옳고 그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문제에 부딪힌다. 그럴 때마다 아주 어린 시절,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세심하게 가르쳐주던 그 방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때 배운 것이 말 그대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 배운 기본적인 것을 체득하지 못했다면, 자신과 사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대로 기본적인 것을 잘 알고 있고 아는 대로 실천하고 있다면, 인생에서 더 알아야 할 나머지 것들을 위해 튼튼한 토대를 쌓아놓은 셈이다.

“시크릿”은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유치원”은 남들과 어울려 바르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런데 바르게 사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치”하고,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씨크‘(chic)하다.  하지만 우리가 대학에 가서 처음 배우는 것은 “개론”과 “원론”이다.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도 처음 배우는 것은 “경제학원론”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씨크한 한국 사회는 실용성을 첫째 기준으로 삼으면서 모든 원론적인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하고 폐기처분한다. 이데올로기를 부인하고, 옳고 그름보다 좋고 싫음을 기준으로 삼는 사회이다. 이것은 매우 염려스러운 현상이고, “매우 위험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원론, 즉 성경말씀을 거부한다. 한국기독교인들은 목사에게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잘 사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나님 힘을 빌어서 성공하고 복을 누리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강요한다. 이렇게 종교도 원론을 폐기하는데 나머지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어쨌든 이사람 저사람 모두가 달려들어서 “원론적인 이야기하지 말라”고 우리를 협박하고, 그래서 기를 확 죽인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원론적이다. 우주만물도 여전히 원론적인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은 여전히 아니 영구히 유효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원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하던 기죽지 말고 담대하게 원론을 이야기하자. 믿음을 갖고 원론을 가르치자.

2.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기죽이는 사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유치원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는 짝짓기 게임, 제대로 말하면, 승자독식의 “익스트림 생존 게임”을 즐긴다. 그런데 우리가 좋아서 그런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무엘 헌팅턴 같은 사악한 사제의 말을 따라, 누군가가 막대한 자본을 들여서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 같은 거대한 게임 돔을 만들어 놓은 다음, 우리를 글래디에이터들로 끌어다 놓고는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게 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들은 티비에서 액션 영화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을 온통 격투기장으로 만든다. 그들은 그들이 조장한 무한경쟁 경기장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끌려온 글레디에이터들에게 살아남는 길을 가르치는 자비로운 조련사들이고,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인데, 정신 놓고 있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안타까운 듯 닥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위대한 멘토는 삼성 이건희 회장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계시”이다. “모든 것을 바꿔라.” “인재를 키워라. 인재 한명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삼성도 삽시간에 구멍가게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말 한마디에 한국 사회가 감동을 받고, 경성하고 회개하면서 “무한경쟁”(無限競爭) “승자독식”(勝者獨食) “생사위부”(生死爲富)를 외치는 아수라장 부흥회를 연출한다.

게다가 한국교회도 이건희 말씀을 경전으로 삼아서, 입만 열면, 이 험악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그분의 뜻을 전하는데 열심이다. 삼성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이다.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한한 탐욕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현대판 야곱이 되라고 강요한다.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면, “신”이라고 칭하는 존재(大他者)는 이름만 있을 뿐, 텅 비어 있고, 그 빈 공간을 우리의 탐욕으로 채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진리의 이름으로 감언이설(甘言利說)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건희나 그 아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각박하지 않다. 이런 세상은 그야말로 “당신들의 천국”이고, 대기업 회장단이 감독하는 “매트릭스”이다. 생존게임장만 철거하면 모두가 나름대로 살 것이다. 우리 몸에서 그들이 공급하는 영양분을 받아들이는 고무호스만 떼어내면 우리는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은 세상이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은 다양하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세계테마여행”같은 프로그램들은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다양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들에게 기죽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아니 영구히 옳고 유효하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가능하지는 않아도 그런 세상을 지향할 수는 있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눈 덮인 산을 오를 때, 그 눈을 모두 치우고 걸어갈 수는 없지만, 아이젠을 신고 걸어 올라갈 수는 있다. 우리는 혼자 잘 사는 “비법”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함께 어우러지는 마음을 갖고 동행할 수는 있다.

3.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기죽이는 사회
요즘 세상을 보면, 우리는 동굴 속에 사는 것 같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 비유를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동굴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동굴이 있는데 동굴 입구가 상당히 넓다. 그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온 몸이 묶여서 일생을 동굴 안쪽 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그들은 동굴 밖을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동굴 벾에 비치는 바깥세상의 그림자이다. 동굴 속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산다. 소크라테스는 동굴 속 세상을 이렇게 묘사한 다음에, 글라우콘에게 그들이 어느 날 거기서 풀려나 바깥으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들이 풀려난 것을 기뻐할까?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환한 빛 때문에 바깥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고 눈을 뜨지 못해서 괴로워 할 것이다. 그리고 바깥세상을 오히려 거짓으로 여기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동굴 속 세상을 진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바깥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반 한 자본주의를 가장 확고한 규준으로 여기는데, 실제로 민주주의라는 것은 대중민주주의(Mass Democracy)이다. 소수가 여론을 조작해서 소수의 뜻을 다수의 뜻인 양 인식하게 만드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모크라시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이다. 민주주의라는 이 프로그램이 정식버전이 아니고 “데모 버전”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치버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동굴로 만든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짜라고 믿게 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게 한다.

스펙터클의 시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니터에 나오는 것만 보게 한다. 티비나 인터넷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티비나 인터넷이 보여주고 알려주는 대로 우리는 보고 안다고 믿게 한다. 티비가 아마존의 눈물을 보여주어야 우리는 아마존 사람들을 생각한다. 티비가 아프리카의 눈물을 보여주어야 우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생각한다. 티비가 부모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여주어야 우리는 효도를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하는 이 놀라운 통제력으로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보면서도 정작 본질은 전혀 못 본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다. 마치 “백문이 불여일견” “우리는 보는 것만 본다.”는 주문을 외우면서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단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뻔히 볼 수 있는 것을 안 보려고 한다. 이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예를 들면, 1박2일을 보면서, 티비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본다. 유명한 드라마를 보면서, 등장한 사람들만 본다. 험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들을 찍는 카메라맨들은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면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면서도 부재한다. 그래서 그들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우리가 그들을 실재가 아닌 허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다. 인간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과 달리, 기계가 아니다. 기계가 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는 없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꿈꾼다. 그것이 우리의 실재 삶이다. 그것이 지정한 시뮬라크르이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서도 있는 것, 그것을 보는 것이다. 특히 믿음은 더욱 그러하다. 믿음의 본질은 없음의 있음이다. 아직 없는 것을 미리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르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육안뿐만 아니라 우리 몸 전체를 통해서 보고 듣고 깨닫는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어떤 영화 제목처럼, 결코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것들은 여전히 아니 영구히 옳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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