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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재의 (JPL, 정의 평화 생명)제10차 WCC 한국 총회 주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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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8  22: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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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선교와 경제정의

- 제10차 WCC 총회 주제를 중심으로-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 Ph,D)

들어가며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보다 배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신앙이 강한 곳이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적 풍토에서 대화와 관용의 문화는 자리 잡기 참 힘들어 보인다. 잘 참고 대화하다가도 ‘너 몇 살이냐?’(How old are you?)면 그것으로 모든 대화가 끝나버리는 게 한국의 풍토이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하면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아마도 우리의 역사가 너무나 힘들고 고단했나보다.

상호소통 능력이 빈약한 ‘가부장 문화’와 ‘군사주의 문화’에 배타적인 ‘근본주의 신학’이 결합하면서 한국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꽃피우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보다 에큐메니칼 정신과 문화 그리고 운동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이야말로 이제 탈성장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한국교회가 새로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러한 에큐메니칼 정신과 문화 및 운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에큐메니칼 vs 에반젤리칼’ 이라는 잘못된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이 잘못된 이분법적 도식은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 상황이 낳은 불행한 산물이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의 반대말은 ‘에반젤리칼(evangelical)’이 아니다. 그것의 반대말은 ‘섹테리안(sectarian)’, 즉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이다. 분파주의/당파주의란 자신의 특정한 신앙체험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마치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최고의 것인 양 주장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분파주의/당파주의이다. 따라서 에큐메니칼적인 시각을 결여한 교회는 복음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편협한 공동체로 전락되기 쉽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긍정하는 태도와 정확히 대비되는 자세이다. 분파주의는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복음을 ‘사유화’한다. 이에 반해 에큐메니칼은 교파적 신앙고백(confession)의 부분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고전 12:25) 하려는 정신이자 문화이고 운동이다. 이는 곧 자기 비움, 자기 초월의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에큐메니칼은 곧 철저한 에반젤리칼이다. 에반젤리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evangelion)’을 최우선시 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신앙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한 그의 선언(Mission Statement)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 4:18-19)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이 ‘복음적 이상들’(evangelical ideals)이 다름 아닌 에큐메니칼 운동의 최우선의 가치이고 이상이다.

한국과 세계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누구보다도 에큐메니칼 운동이 바로 이와 같은 복음적 이상의 구현을 위해 앞장 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 7:20)고 말씀하셨다. 에큐메니칼은 ‘탈복음주의’도 ‘후기 복음주의’도 혹은 ‘세속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충실하려고 하는 지극히 복음주의적인 운동이다. 한국교회 안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꽃피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에큐메니칼을 에반젤리칼에 반대되는 말로 오해해온 잘못된 이분법적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

WCC의 구조와 사업
오는 2013년 부산에서 열릴 WCC 제10차 총회의 주제가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로 결정되었다. 이 주제는 지난 2011년 2월 제네바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 "In God's World, Called to be One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하나 되게 부르심 받다)"는 또 다른 주제제안과 경합하여 최종적으로 선정된 것이다. WCC 역사에서 총회주제에 ‘정의(justice)’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치(unity)’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그리고 ‘정의 없는 봉사(diakonia without justice)’로 이끌어가려는 보수파의 노력 속에 이루어진 작은 승라라고 할까. 이번 총회주제 제안 작업에 열심히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이제 한국교회가 더 이상 허송세월하지 말고 남은 기간 동안 잘 협력하여 인류 문명과 지구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열리는 이번 WCC 총회를 잘 치러내길 기도할 뿐이다.
WCC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라고 말할 수 있다. WCC가 전개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① 가시적 일치(visible unity), ② 공동의 증언(common witness), 그리고 ③ 기독교적 봉사(Christian service)를 추구한다. 줄여서, ‘일치’(교회의 하나됨) ‘증언’(선교) ‘봉사’(사회참여)를 추구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세 번째의 것이다. 왜 우리는 사회적 참여를 추구하는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가 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다.(엡 4:6) 따라서 WCC의 대화는 교회 안의 대화로 국한되지 않고, 타종교로, 인류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모든 창조의 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그것이 바로 WCC가 빈곤과 인권 그리고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전개한 ‘사회참여’의 신학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정치적 해방으로 축소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결코 개인의 사후 영혼구원으로만 축소될 수 없다는 믿음의 발로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 3:16)고 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이 ‘세상(cosmos)’, 곧 온 우주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이고 그의 사랑은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교회만의 머리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가 되시기에, 그가 다스리는 이 세상이 불의와 폭력과 생명파괴로 얼룩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WCC가 전개해 온 교회의 ‘기독교적 봉사’ 혹은 ‘공적 증거(public witness)’는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WCC가 지난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egre) 총회 이후 2007년 1월 중앙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현재 개편 · 운영하고 있는 7개 프로그램 구조를 가만히 살펴보면, ‘봉사’의 영역이 ‘일치’ 및 ‘증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결국 ‘교회란 무엇인가’에 관한 신학적 성찰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봉사-증언-일치는 해석학적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다. 현재 WCC의 프로그램 구조는 다음과 같다.

<Program 1 : "WCC and the Ecumenical Movement in the 21st Century (WCC와 21세기 에큐메니칼 운동)">

- Ecumenical vision of the WCC
- Global platform for theology and analysis
- Relationships with member churches
- Partnership with ecumenical organizations
- Youth in the ecumenical movement
- Women in church and society

<Program 2 : "Unity, Mission, Evangelism and Spirituality (일치, 선교, 전도, 그리고 영성)">

- Called to the one church
- Spirituality and worship
- Mission and unity
- Just and inclusive communities

<Program 3 : "Public Witness: Addressing Power, Affirming Peace (공공의 증언 : 권세에 대항하기, 평화를 지지하기)">

- Overcoming violence
- Justice and accountability
- Human rights
- Churches in the Middle East
- Palestine and Israel: EAPPI
- Poverty, wealth and ecology

<Program 4 : "Justice, Diakonia and Responsibility for Creation (정의, 섬김,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

- Ecumenical solidarity and regional relations
- Migration and social justice
- Faith, science and technology
- Climate change and water
- Health and healing
- HIV/AIDS Initiative in Africa (EHAIA)

<Program 5 : "Education and Ecumenical Formation (교육과 에큐메니칼 구성)">

- The Ecumenical Institute at Bossey
- Ecumenical lay formation and faith nurture
- Ecumenical theological education
- Scholarships
- Library and Archives

<Program 6 : "Inter-Religious Dialogue and Cooperation (종교간 대화와 협력)">

- Strengthening inter-religious trust and respect
- Christian self-understanding
- Accompanying churches in situations of conflict

<Program 7 :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

여기서 <프로그램 1>은 오늘의 세계의 상황과 교회의 지형 변화 속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하자는 것이고, <프로그램 2, 3, 4>가 1910년 에딘버러에서 합류한 ‘세계선교(World Mission)’, ‘신앙과 직제(Faith & Order)’, 그리고 ‘삶과 일(Life & Work)’이라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적 세 강줄기를 표현한 것이다. WCC의 프로그램 구조는 여기에 1907년 로마에 뿌리를 둔 <프로그램 5 (신학교육)>이, 그리고 최근 많은 중요성을 인정받는 <프로그램 6 (종교간 대화)>이 가세한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과거 ‘정의, 평화, 창조(JPC)’ 안에 있던 주요 이슈들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경제정의’, ‘생태보존’, ‘인종차별주의와의 싸움’, ‘원주민’, ‘달릿’, ‘장애인’, ‘청년’, ‘여성’ 등 과거 JPC의 중심을 이루던 이슈들이 한군데 뭉쳐있지 않고 프로그램 1~4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회참여(‘봉사’)가 결코 교회의 하나됨(‘일치’) 및 복음의 증언(‘선교’)과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아가 ‘봉사’가 ‘일치’와 ‘선교’를 자극하여 더욱 심오한 일치와 선교의 신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현재 <프로그램 2 : "Unity, Mission, Evangelism and Spirituality (일치, 선교, 전도, 그리고 영성)">에서 program executive로 일하고 있는 디나반두 만찰라(Deenabandhu Manchala)에 의하면, 오늘날 세계화의 영향으로 이주(migration)가 보편적 현상이 되었고, 그 결과 오늘의 유럽 교회는 과거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유럽인들의 교회보다 아프리카 이주자들의 교회가 유럽 안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주 노동자의 공동체가 유럽 교회의 성격을 바꾸고 있다. 다른 말로 유럽 교회를 다문화 교회로 변모시키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상황이 유럽의 교회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 지금까지 “일치, 일치”를 이야기해왔는데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일치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변화된 상황은 선교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하였다. 끝도 없는 이주자들의 행렬은 단순히 나그네들을 환대하는 차원(‘자선’)을 넘어 그들을 고향에서 내몬 세계화의 문제(‘정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선교가 단순한 응급처방(ambulance service)이 아니라 성서에 기초한 정의로운 경제체제를 옹호(advocacy)하는 차원으로 격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성을 준 것이다. 결국 이주자에 대한 봉사는 우리가 어떻게 진정으로 정의롭고 포용적인 교회 공동체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다. 이렇듯 ‘봉사’가 ‘일치’와 ‘증언’을 자극하여 새로운 교회론과 선교론을 사유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일치, 선교, 전도, 그리고 영성의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 2>에 "Just and Inclusive Communities (공의롭고 포용적인 공동체들)" 사업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재의 WCC 프로그램 구조를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가 에큐메니컬 운동을 이야기할 때 전체를 통전적으로 사고하고 접근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더 이상 기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일치’와 ‘증언’과 ‘봉사’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각각의 것에 집중하느라 나머지 것들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의 실천과 이론이, 우리의 봉사와 증언과 일치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WCC는 지금 현재 어떤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필자는 여기서 현재의 다양한 WCC 프로그램 가운데 이번에 선정된 총회 주제와 직결된, 그래서 오는 2013년에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들어올 ‘생명’과 ‘평화’와 ‘정의’에 관련된 세 가지 굵직한 우선사업들(priorities)에 집중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구체적으로는 경제정의를 향한 우리의 산업선교가 어디에 어떻게 초점을 맞추어 준비해야 할 지가 자연스럽게 도출되길 기대한다.

‘평화’ : 정당한 평화 vs 정의로운 평화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주요 흐름은 다음 달 자메이카 킹스턴에서의 개최를 코앞에 두고 있는 <국제 에큐메니칼 평화회의 (International Ecumenical Peace Convocation, 이하 ‘평화회의’)>이다.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된 땅 한반도에서 열리는 총회이기에, 또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남과 북의 교회가 세계교회와 함께 ‘도잔소 여정(Tozanso Process)’을 함께 해 왔기에 우리는 이 흐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평화회의’는 본래 WCC의 <폭력극복 10년 운동 (The Decade to Overcome Violence 2001-2010, DOV)>의 ‘추수 축제(harvest festival)’로 기획되었다. 한국교회도 열심히 참여한 이 운동이 작년에 끝남에 따라 그것을 마무리하고 이 운동의 이후를 모색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여기서 이 ‘평화회의’가 평화에 대해 이번보다 더욱 입체적이고 포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이 모임이 강조하는 평화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평화이다. ① “공동체 안의 평화 (Peace in the Community)”: 인간 공동체 안에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기타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의 문화 근절하기; ② “땅과의 평화 (Peace with the Earth)”: 생태적 위기 앞에서 창조세계의 청지기 되기; ③ “장터에서의 평화 (Peace in the Marketplace)”: 부와 가난, 성장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전제들을 극복하기; 그리고 ④ “민족들 사이의 평화 (Peace among the Peoples)”: 민족 간, 인종 간, 그리고 지역 간 갈등을 해결하여 평화 이루기이다. 첫 번째와 네 번째의 평화가 지금까지 우리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개념이라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상대적으로 새로 강조되는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평화는 자연스럽게 ‘생태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로 이어질 수 있는 주제들이다.

하지만 이 킹스턴 평화회의에서 한 가지 우려할 문제는 이 회의가 말하는 평화가 전체적으로 특정 교파의 평화 이해에 심히 경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번 평화회의에서는 "just peace" 즉 ‘정당한 평화’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정의에 기초한 평화(peace based on justice)’, 즉 ‘정의로운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의 평화와는 거리가 있다. 평화교회로 알려진 메노파교회(Mennonite Church)는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에 대한 반대로 ‘정당한 평화(just peace)’라는 이론을 전개해왔다. 이 평화론은 정의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의가 중요하지도 않다. 우리 교단 신학자들의 심각한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곧 이 모임이 열린다. 그렇다면 킹스턴 방문을 준비 중인 한국교회 대표단의 활약이 중요할 것이다. 우리 대표단은 이전과 같은 수사학(修辭學)으로 한반도의 분단 문제를 부각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세계교회가 ‘지루하게’(sick and tired)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신한 방식으로, 그러나 핵문제와 분단문제를 가지고 강하게 발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임의 결과가 곧바로 2013년 부산에서 어떤 평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규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한국교회가 중동교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번 제10차 총회가 부산이 아니라 유력한 경합지였던 시리아로 유치되었더라면 세계교회는 훨씬 더 중동 평화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분단문제만 호소하는 자기본위주의에서 벗어나 세계각지의 평화문제와 적극 연계하여 높은 연대와 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 WCC의 프로그램을 보면 전통적인 에큐메니칼 사회참여 프로그램이 집중되어 있는 <프로그램 3 : "Public Witness: Addressing Power, Affirming Peace (공공의 증거 : 권세에 대항하기, 평화를 지지하기)">에 중동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Churches in the Middle East"와 "Palestine and Israel: EAPPI" 등 두 가지나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종사하고 있는 란잔 솔로몬(Ranjan Solomon)과 마누엘 킨테로-페레즈(Manuel Quintero-Perez)에 의하면, WCC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를 더 이상 유럽 혹은 북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지구의 남반구(Global South)가 이를 자기의 문제로 인식하고 참여하지 않는 한 해결책이 없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지금 거룩한 땅이 불의의 땅이 되었다”고 개탄하면서,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가 ‘약속의 땅’의 문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문제,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의 해외 피신으로 인한 기독교인 공동화(空洞化)의 문제, 매년 5월 29일~6월 4일로 선포된 팔레스타인 평화주일 지키기의 문제, 이념적 선전 수단으로 전락한 성지순례 관광의 문제, 구호적인 화해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역사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문제, 그리고 ‘카이로스 문서(Kairos document)’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지지를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

‘생명’ : 기후변화와 기후정의
현재 WCC가 전개하고 있는 ‘생명’ 관련 핵심사업은 기후변화와 관련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1988년에 시작되었고, 1990년 서울에서 열린 JPIC 대회에서 그 기본방향을 설정한 후 오늘에 이르렀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구일레모 커버(Guillermo Kerber)에 의하면, WCC 기후변화 프로그램의 핵심어는 ‘기후정의(climate justice)’이다. WCC는 처음에 기후변화(climate change)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2006년부터 기후정의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WCC가 이렇게 기후변화를 정의의 문제의 하나로 간주하는 이유는 기후변화에 가장 적게 기여한 지구 남반구의 가난하고 힘없는 공동체들이 지금 기후변화로 인한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도 그들에게는 급속한 기후변화로 인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할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WCC는 기후변화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단순한 몇 가지 행동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경제 정책, 소비, 그리고 생산 및 발전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인식변화, 즉 회개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아프리카에 사막화가 심각해지면서 WCC는 2003년 이후 이 기후변화 관련 프로그램을 물 문제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5년에 ‘에큐메니칼 물 네크워크(Ecumenical Water Network, EWN)’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에 접어들어서부터는 현재 북극의 빙하가 녹아 서서히 물에 잠기고 있는 투발루(Tuvalu)의 교회지도자들을 물론 태평양 지역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의 협력 속에 UN과 각국의 정부를 상대로 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실 오늘날의 예언자는 태평양 지역의 섬나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졸지에 국제법상 난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기후난민(climate refugee)이 된 투발루의 교회 지도자들은 제작년 코펜하겐의 기후협의회에 참여해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예언자적 목소리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무기력한 교회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금도 남반구가 북반구에 지고 있는 ‘금융 빚(financial debt)’보다 북반구가 남반구에 지고 있는 ‘생태 빚(eco-debt)’이 더 큼을 강조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WCC의 대처에 이처럼 ‘정의’의 관점이 살아있음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정의’ : “가난-부-생태”
마지막으로 살펴볼 WCC의 주요 운동은 경제정의 운동이다. WCC는 이미 지난 제9차 총회에서 경제의 문제가 곧 신앙의 문제이며, 경제적 불의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정당한 교회의 관심사임을 명시했다. WCC 안에서 오랫동안 경제정의의 문제를 대변하며 지난 9차 총회에서 AGAPE 문서를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한 로가테 므샤나(Mshana) 국장은, 현재 그 문서의 후속작업으로 “가난, 부 그리고 생태(Poverty, Wealth and Ecology, PWE)”라는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아프리카(2007년)-남미(2008년)-아시아(2009년)-유럽(2010년)-북미(2011년)를 거쳐 (이 과정에는 특히 청년과 여성의 참여가 강조되어 있다) 다음 달 킹스턴 평화회의에 합류한 후 2013년 부산총회로 들어올 전망이다.


탄자니아 출신의 경제학자 므샤나는 지난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 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교회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아예 국제 금융시장의 투기판에서 큰돈을 날린 몇몇 유럽 교회들을 거론하며 오늘날 교회가 이 세상의 소금이기는커녕 오히려 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깊이 개탄한다. 그리고 이제 교회가 ‘빈곤선(poverty line)’의 문제만이 아니라 ‘탐욕선(greed line)’의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의제로 다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탐욕선의 문제란 과연 어디까지가 인간이 탐욕을 추구할 수 있는 한계선인지 이제 교회가 그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정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예민한 문제다. 결국 이 문제는 과연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맘몬의 교회가 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가난, 부, 그리고 생태(PWE)” 프로그램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바로 ‘정의(justice)’이다. 이 운동은 신약성서 삭개오의 이야기를 모델로 하여 ‘자선’이 아니라 ‘정의’를 강조한다. 삭개오는 자신이 빼앗은 것의 4배를 배상하겠다고 예수께 약속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회개가 낳은 열매이며, 이런 점에서 삭개오의 이야기는 ‘값싼 은혜(cheap grace)’의 이야기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의 이야기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읽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이른바 ‘번영의 복음(gospel of prosperity)’과 청부론에 심취한 한국교회에게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 제8차 하라레 총회에서 시작된 AGAPE 과정이 제9차 포르토 알레그레 총회에서 공식 문서로 채택될 때 굉장한 소란과 반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북반구 교회의 반발이 컸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AGAPE의 후속작업으로 진행되는 PWE 과정이 다음 달 킹스턴에서 어떤 결론과 제안을 낼 것인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아마도 킹스턴에서는 지난 ‘폭력극복 10년(DOV)’를 마감하면서 새로운 10년(Decade) 운동, 즉 평화와 생명과 정의를 주제어로 한 새로운 10년 운동이 제안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내년 2012년의 마닐라에서 열린 WCC의 선교대회를 통해 한 번 더 여과된 후 2013년 부산총회로 합류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난 반 세기 이상 우리의 땅과 맥락 속에서 전개해온 평화와 생명과 정의의 운동의 관점에서 이런 세계적 흐름과 깊이 소통하며 오는 2013년까지, 그리고 2013년 이후 그 다음 총회까지 한국과 세계사의 지평에서 전개할 우리의 운동을 깊이 고민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와 ‘하나님의 정의’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시나리오 작가 고(故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다. 이 쪽지를 남기고 그녀가 숨진 사실을 우리는 열흘이 지나서야 알았다. 시나리오 작가가 얼마의 돈을 버는지 필자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도 세끼 밥은 먹고, 건강 검진은 받으며, 물이 얼지 않는 방에서 겨울은 나야 할 권리를 갖고 있지는 않는가. 그녀의 쪽지는 ‘창피하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굶주림이라기보다 수치심이었나 보다. G-20 유치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32세의 한 재능 있는 영화인이 차디찬 방에서 굶어죽었다. 그렇다면 최고은씨의 요절은 사회적 타살이다. 문득 그녀가 느꼈다는 수치심은 바로 우리 자신의 수치임을 깨닫는다. 부끄러워 많이 울었다.

우리나라에 ‘빈곤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 김수현과 이현주와 손병돈은『한국의 가난 : 새로운 빈곤, 오래된 과제』에서 한국에 신(新)빈곤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빈곤의 양상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고, 또 ‘희망의 상실’이 새로운 빈곤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았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보통 경제성장과 함께 이 나라에서 빈곤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1950년대 초와 같이 국민 대다수가 끼니를 걱정하던 수준의 빈곤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빈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2007년 현재 우리나라의 빈곤율은 가처분소득 중위 50%(즉 상대적 빈곤)를 기준으로 약 16.5%다. 인구 100명 당 16명 이상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2007년 우리나라의 인구가 4,850만 명 정도였으니 무려 약 800만 명 정도의 많은 사람이 빈곤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1천 만 가난한 사람이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빈곤의 양상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일만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1997년 말 외환위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빈곤문제는 ‘일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일할 수 있는 사람들도 가난해질 수 있는 사회, 즉 ‘가난 위험 사회’로 진입했다. 잘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처럼 일을 해도 가난하게 되는 사람들을 ‘일하는 빈곤층,’ ‘근로 빈곤층(working poor)’ 혹은 ‘신빈곤층’이라 부른다. 바로 이 가난한 근로 빈곤층의 등장이 과거의 빈곤과 현대의 빈곤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그럼 누가 구체적으로 신빈곤층인가? 전통적인 빈곤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노인과 중증장애인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신빈곤층의 가장 큰 비중(60~70%)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물론 이들 근로 빈곤층의 빈곤은 그들이 부양하는 노인이나 아동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신빈곤층에는 또한 ‘결혼 이주 여성’이나 ‘탈북자’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빈곤층이 포함된다. 노숙인들은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빈곤의 문제이지만, 우리 주위에는 구체적인 ‘주거 빈곤층’이 존재하며, 빈곤율에는 잡히지 않지만 빈곤선 주변에 머물면서 빈곤층으로의 진입을 반복하는 ‘반복 빈곤층’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또한 과거와 달리 지금은 교육이 빈곤 탈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빈곤 고착화의 핵심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경제적 빈곤이 문화적 박탈과 사회적 배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빠른 고령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부양 부담의 증가, 그리고 전통적 가족구조의 변화로 인한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의 무력화 등, 현재 한국사회는 ‘총체적인 빈곤의 위기’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현대 한국의 빈곤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섰다. 빈곤 문제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한국사회 신빈곤 시대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첫째, 빈곤의 위험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는 근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에 빠졌지만, 이제는 근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쉽게 가난해질 수 있다. 급격한 사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노동시장과 상대적으로 낮아진 보상 때문에, 일할 의지가 있고 또 실제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의 어려운 사정은 곧바로 이들의 부양을 받는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가난으로 이어져 전통적 빈곤을 더욱 악화시킨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가난은 극소수 국민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넓게 보아 우리나라 국민의 약 30%가 빈곤의 위험 반경 안에 포획되었다.

둘째, 가난을 느끼는 영역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빈곤은 소득의 부족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신빈곤은 이보다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우리나라처럼 소득에 비해 주거비가 많이 들고 특히 전세로 방을 구해야 하는, 말하자면 ‘목돈이 필요한 사회’에서는 주거문제가 빈곤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의료와 교육과 문화생활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 가난하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해 기본적인 생활이라 여기는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빈곤을 결정하는 영역이 종래의 협소한 ‘생존’ 수준에서 ‘인간다운 생활’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셋째, 가난의 결과가 물질적 결핍을 넘어 사회적 고립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해도 이웃이 함께 살던’ 판자촌은 이미 사라졌다. 오늘날 가난은 곧바로 고립과 단절을 의미한다. 요즘 가난으로 쉽게 가족이 해체되는 것도 이런 현상을 가속화시킨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곤층은 쉽게 자존감과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에 빠진다. 나아가 사회적 ․ 문화적 단절은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더욱 왜소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무력한 존재가 되어간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 부른다. 한국의 신빈곤의 시대에 새로운 인간의 유형, 즉 눈에 보이나 존재하지 않는 인간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등장한 것이다.

넷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판자촌 시절만 해도 우리는 ‘희망이 있는 빈곤(slum of hope)’의 시대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 유종일 교수에 의하면, 우리의 상대적 빈곤도 OECD 상위권일 뿐만 아니라 절대빈곤도 1997년에 3%이던 것이 지금 12%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또 이 극심한 양극화의 고통 속에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압도적인 세계 1위이며, 노인의 자살률은 OECD 평균의 무려 5배나 된다고 한다. 그 만큼 이 사회는 희망이 사라진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빈곤은 더 이상 경제가 나아지거나 경기가 회복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극심한 사교육 현장에서 우리의 청소년들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신의 미래를 규정한다는 것을 곧바로 예감한다. 또한 자녀의 장성이 곧 빈곤 탈출의 시점이었던 일이 과거의 이야기가 되면서 이제 빈곤의 대물림은 눈앞의 현실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곤 해결의 가장 큰 동력인 ‘희망’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가난과 마주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인용하고 있는 책의 저자들은 그것이 선진국이 이미 경험한 다각적인 사회안전망, 더 많은 일할 기회, 그리고 적절한 노동의 대가라고 주장한다. 특히 현재 공공부조 일변도의 사회적 안전망을 균형 잡힌 안전망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후의 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부조를 마치 ‘최선의 안전망’인 양 취급해온 것에서 벗어나, 공공부조와 사회보험 그리고 사회서비스라는 3대 안전망을 견실하게 만들어 빈곤 문제를 예방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필자는 이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해법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최소한 이들로부터 우리 교회가 좀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몇 가지 도전과 영감을 받았다. 첫째는, 빈곤의 이유와 양상이 급격히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빈곤이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라고 질책하는 소리("victim blame")가 큰 반면, 그들을 북돋고 격려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작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그리고 대통령 자신부터 가지고 있는 자수성가의 신화는 아직도 가난을 당사자의 책임으로 질책한다.

빈곤층이 15%가 넘는 이 시대에도, 반복 빈곤층까지 포함하면 국민의 약 30%가 빈곤의 직접적 위협 아래 사는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받을 권리를 부끄러운 것인 양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오늘의 가난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범죄시하던 시대의 가난과 질적으로 다르다. 지금의 빈곤은 산업화 시대의 빈곤, 즉 모두가 미친 듯이 일하려 했고 또 일자리도 넘쳐났던 시절의 빈곤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도 가난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차갑다. 따뜻해도 일시적 자선에 머문다. 빈곤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과연 누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할 것인가?

둘째는, 빈곤 극복과 복지국가체제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합의’ 수준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의 사회적 합의 수준은 심지어 우리와 경제 단계가 비슷하던 시기의 선진국들과 비교해보더라도 무척 낮다. 이제 빈곤의 극복의 방법은 구시대적 패러다임, 즉 고도성장 시절에 ‘경제가 나아지면, 혹은 일할 의지만 있으면 빈곤은 해결할 수 있다’는 해법으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안에는 여전히 성장이 곧 빈곤 극복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빈곤 극복과 복지국가체제에 필요한 부담을 감당하려는 ‘사회적 자세’가 여전히 형성되어 있지 않다. 누가 이런 사회적 자세의 형성과 사회적 합의 수준의 제고에 기여할 것인가?

셋째는, 지금 우리가 ‘희망은 작아지고 절망은 커진 새로운 형태의 빈곤의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이 확산되면서 사람들 사이에 낙심과 체념과 절망감과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과연 누가 이런 절망 속에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지금 복지 이슈가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복지는 곧 자선 혹은 사치라고 여겨왔던 우리나라의 정치풍토에서 우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구호의 효력을 본 야권이 무상의료와 무상보육을 추가로 내세우고 있고, 차기 유력한 대권주자라는 여권의 한 의원까지 ‘맞춤형 복지’를 내걸면서 앞으로 상당기간, 적어도 다음 대선까지는, 복지가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될 것이다. 지금 정치권은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 ‘세금 폭탄론’이 난무하고, ‘도와주면 도덕적 해이에 빠진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세금으로 재정을 마련하려하면 ‘왜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내 돈으로 부양하느냐?’는 반대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그리고 산업선교는 어떤 복지를 말해야 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필자는 여기서 다만 우리가 ‘하나님 정의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인 복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것이 산업선교가 펼쳐나가야 할 경제정의 운동의 신학적 근거라고 제안하고 싶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다. 성서의 수많은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에 특별한 사회적 책임을 가지고 있고, 권세자들은 부와 권력을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예언자들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듣는다.

사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신다는 성서의 시각은 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신학자 알로이스 피에리스(Aloysius Pieris)가 지적하듯이, 하나님과 맘몬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 사이의 파기할 수 없는 계약관계”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성서뿐이다. 성서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호적/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은 일부 급진적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성서의 중심적 메시지인 것이다.

때문에 이 땅에 가난과 절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6:11, 막 14:7, 요 12:8)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로부터 가난은 임금도 구제 못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무한한 탐욕과 이기심 속에서 이웃을 제도화된 영구 가난 속에 방치하는 우리들을 향한 질타의 말씀으로 필자는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이러한 기독교 신앙이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만나고 있다. ‘생명의 하나님’이 지금 이 땅에서 당신의 ‘가난한 백성들’과 마주치고 계신다. 바로 이 상황이 바로 지금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놓인 산업선교의 자리이고 맥락이다. 지난 신자유주의 40년의 지배 아래서 사회적 정의와 이웃사랑은 철저히 부정되었다.

‘신자유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하이에크(F.A. Hayek)는 노골적으로 사회정의와 예수의 이웃사랑 계명을 거부하였다. 그에게 사회적 정의는 오직 ‘신기루,’ ‘미신,’ ‘사교,’ 그리고 ‘자유문명에 대한 중대한 위협’일 뿐이었다. 그에게 기독교의 이웃사랑 윤리는 현대사회에 맞지도 않고 또 실행에 옮길 수도 없는 ‘원시적 윤리’일 뿐이다. 그에 의하면,

성서가 말하는 ‘이웃’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우리가 가까이에서 보고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로 제한되어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소그룹 부족사회를 위해 개발된 지침이다. 이제 우리가 그런 원시적인 사회를 떠났다면 우리는 그런 태생적 도덕률을 뒤로 버리고 ‘상업적 도덕률’을 따라야 한다.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 계급간 이해의 충돌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물질적 형편에서 남들보다 단지 조금 앞서 있는 것뿐이며, “다른 사람들이 아직 다다르지 못한 [사회적] 진화의 한 단계”를 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수탈’이라고 하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적 진화 속에서 어떤 자들은 단순히 앞서고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를 가장한 이런 노골적 사회 불평등주의가 지난 40년간 세계경제를 지배하였다.

그 결과 지금 이 땅에서 곳곳에서,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이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정의를 향한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불의로 인해 곤궁해진 사람들에게서 생명과 정의를 향한 외침이 들려온다. 그 외침은 곧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다. 그 외침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것 같은 밑바닥 상황에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절규이다. 몰트만은 이런 절규로 가득 찬 이 세계가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안에 사는 우리 역시 죄에 연루되어 있음을 고발한다.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는 강자와 약자를 분리해 놓은 정치적 체제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동식물의 다양한 종을 매년 감소시키고 있는 인간 사회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다.

우리는 미래 세대를 희생시켜 가면서 우리의 현재를 즐기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의 잘못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이러한 체제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체제 안에서 먹고 일하고 사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 이 체제 안에서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선이 우리를 고발한다.

우리는 이렇게 정의롭지 않은 체제를 산다. 이 체제는 생명을 파괴하는 체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악에 빠뜨리는 체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의 권리가 바로 복지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아마도 이 개념은 2013년 WCC 부산총회에서 가장 자주 언급될 개념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선과 악을 판별하여 선엔 상을 주고 악엔 벌을 주는 정의가 아니다. 몰트만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굽을 것을 곧게 하는 정의,’ 곧 ‘치유하고 구원하는 정의’라고 강조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고(시 146:7, 103:6),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변호”하시며(신 10:18, 시 82:3, 사 1:17), 이방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신다. 이처럼 빼앗긴 권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정의는 해방하고 치유하고 구원하는 정의다. 이 정의는 하나님의 자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가 정의를 세우시는 것은 그가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을 말라기 예언자는 ‘정의의 태양’이라고 불렀다.(말 4:20)

이스라엘이 기다린 언약의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바른 판결을 내리시는”(사 11:4) 분이다. 그 분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42:1),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실”(시 96:13) 분이다. (사실 이 구절이 이번 WCC 총회 주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의 성서적 근거로 채택된 구절이다.) 실로 예수의 시선은 특히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에 주목하셨다. 그

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멸시 당하던 사람,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다.”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권리를 되찾아주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영적인 치유와 사회적 회복을 의미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이 하나라고 연대를 선언하셨다. 이렇게 성서를 통틀어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이 누려야 할, 그러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어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정의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정의가 다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가난한 자들의 권리’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성서는 곳곳에서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사 10:2) 것이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경고한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렘 5:28)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것이라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경고한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욥 36:6)하시는, 그래서 실로 “주님은 공의를 세우시며 억눌린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변호하시는”(시 103:6) 분이시다. 진실로 하나님은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 주시는”(미 7:9) 분이시다. 그런데 무엇보다 성서에서 가난한 자의 권리가 가장 잘 표현된 곳은 누가복음 18장 2-9절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가 아닐까 한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이 비유에 여러 제목이 붙어 있지만, 이 비유에 가장 알맞은 제목이 ‘낙심하지 말아라’는 비유인 것은 이 짧은 비유에 무려 여섯 군데나 반복되고 있는 동일한 말 때문이다. 그것은 3,5,7,8절의 ‘권리를 찾다’이다. 헬라어 어원은 ‘에크디케손(ekdikeson)’인데 그 원뜻은 ‘권리를 회복하다’ 혹은 ‘정의를 세우다’이다. (때문에 영어성경 NRSV는 이것을 "grant justice"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네 군데 외에도, 3절에 나오는 “내 적자에게서”에서‘적대자’라고 번역된 ‘안티디코스(antidikos, 고소하는 사람)’라는 낱말과, 6절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에서의 ‘불의한’ 즉 ‘아디키아(adikia)’라는 낱말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권리’ 또는 ‘정의’를 뜻하는 동일한 어간(dik)을 확인한다.

모두 여섯 군데에서나 동일한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부의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지금 그가 빼앗긴 사회적 권리의 회복이 문제가 되고 있다. 때문에 이 비유는 보통 알려진 대로 ‘기도하라’가 아니라 어떤 악조건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라’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낙심하지 않은 것의 구체적인 모범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고 성가시게 자신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여 그것을 관철시키고야만 한 과부의 행위를 들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은 이 과부가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힘차게 두드렸는지를 아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5절에 재판관은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고 말한다. 이 말의 요지는 “‘자꾸만(eis telos)’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하다(hypopiazo)’”에 있다.

이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마침내/결국 찾아와서 (내) 눈 밑을 때리다/얼굴을 치다’이다. (여기 ‘얼굴을 때리다’가 그리스어에서 ‘권투시합 하다’와 동의어다.)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영구히 찾아와서 (나를) 귀찮게 하다/괴롭히다’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회적 약자인 과부가 감히 재판관에게 폭행을 가할 것이라는 표현은 어색하므로 본문은 후자의 번역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용기와 집요함이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의 구체적인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다. 상황은 악조건에 절망적이다. 마치 오늘 우리의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악조건이라 함은 과부라는 신분 그 자체를 가리킨다. 철두철미한 가부장 사회에서 남편의 법적 보호라고는 전혀 없는, 사회적으로 최대의 약자라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악조건이다. 절망적인 상황이란 사회적 약자인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재판관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뇌물을 받아먹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기어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고야 말았다. 무엇이 그의 무기였는가? 그것은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자신의 권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용기와 집념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 바로 믿음의 결과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이런 물음으로 이 비유를 끝내고 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여기서 ‘믿음’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믿음’을 누가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일까? 그가 이렇게 말한다. 7-8절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실 것이다.” 누가가 오늘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제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 새로 존재하는 ‘가난’ 및 ‘절망’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다.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어, 그들에게 힘을 주고(empowerment),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그들과 함께 고난 받고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교회가 성장을 추구하면 그것은 죄다.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운동, 그리고 그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의 권리로서의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선교는 한마디로 ‘경제정의’를 위한 실천이다. 이 실천은 이미 세계적 지평에서 CCA와 WCC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에 대한 논의’(JPSS), 그리고 ‘정의 · 평화 ·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한 공의회 과정’(JPIC)과 맥이 닿아 있다.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이 앞서 언급한 WCC의 세 가지 주요 프로그램들이다.)

또한 이 실천은 ‘경제정의와 생태정의를 위한 계약운동’인 ‘오이코트리 운동(Oikotree Movement)’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성서의 신앙에 기초해 오는 2013년 WCC 부산총회의 핵심주제어가 된 정의의 문제를 준비하면서 가난 위험 사회로 진입한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의 권리를 되찾아주는 운동을 전개해야 하고 이를 세계교회와 연대해야 한다.

산업선교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선교 가운데 가장 실제적인 영역, 즉 경제영역에 뛰어들었던 선교이다.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의 말처럼, 기독교가 사랑,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경제학 없는 사랑은 공허한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산업선교는 기독교의 사랑을 가장 몸으로 체현한 선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산업자본주의 이후의 산업선교를 기업과 노동문제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산업은 인간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하기 위해 재화나 서비스를 창출하는 생산적 기업이나 조직에만 집중했다. 산업은 좁은 의미로 공업을 가리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본래의 산업의 의미로 돌아가야 한다. 산업(industry)이란 본래 재화를 생산하는 모든 경제활동을 가리킨다. 이제 산업선교는 산업 자체에 대한 선교가 되어야 한다. 성장의 수단이었던 산업, 자연수탈의 수단이었던 산업, 노동소외의 현장이었던 산업, 하나님 창조질서 파괴의 현장이었던 산업 자체를 선교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을 복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구 생태계 전체가 거대한 위기 앞에 놓여 있고,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발전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이 때, 기독교의 산업선교는 경제 자체에 대한 복음화 운동, 생명을 살리고 지구와 평화를 이루는 운동으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정의와 생명과 평화가 통전적으로 이해되고 추구되면 좋겠다.

‘사력’을 다해
우리는 여기서 잠시 왜 WCC가 시리아가 아니라 한국(부산)을 차기 총회 개최지로 선정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난 제9차 총회의 실무총책을 맡았던 WCC의 책임자는 이번 제10차 총회의 유치국을 결정할 때 무엇이 한국교회로부터 매우 인상적이었든지 귀뜸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초대장 안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협력의 느낌(strong sense of togetherness)”이었다. 한국교회가 제9차 총회 유치를 위해 보냈던 초청장과 이번 제10차 총회 유치를 위해 보낸 초청장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이번에는 WCC 회원교회를 넘어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서명이 추가되었다. 중국교회와 일본교회의 지지도 크게 작용했다. 한마디로 WCC는 한국의 다음과 같은 매우 독특한 상황에 끌린 것이다. 아시아의 국가이면서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을 자랑하면서,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고,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교회와 에큐메니칼과 정교회가 협력하는, 그래서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잠재력으로 가진 나라라고 세계교회 지도자들은 본 것이다.

우리는 경제정의 운동으로서 산업선교를 더욱 힘차게 추진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의 권리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기치로 내걸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해야 한다. 우리가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길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세계교회가 오는 2013년 한국에서 기대하는 것도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운동에서 어떻게 교회의 ‘일치’할 수 있는가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기존의 "ecumenical"이 "evangelical"과 "pentecostal" 그리고 "orthodox”와 협력해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운동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이 세계교회의 지형변화 속에서 앞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후인 2050년이 되면 전 세계 30억 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50% 이상은 아프리카에, 그 다음 남미와 카리브 해에, 그 다음은 아시아에, 그리고 유럽에, 마지막으로 북미에 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세계교회의 지형변화 속에서 그동안 에큐메니즘에 폭넓게 참여해 온 기성 교회들은 오순절 및 성령파 교회와 복음주의로 부터 영향을 받은 거대 교회들과 마주치고 있다. 이러한 세계교회의 지형변화는 교회 간의 협력과 일치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틀 그리고 접근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은 동의어가 아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기구는 영원한 것도 아니다. WCC 안에서는 지금 이제까지 WCC 안에서 누려온 교회 간의 친교를 로마 가톨릭과 오순절 교회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로 넓혀,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을 ‘하나의 새롭고 보다 넓은 지구적 포럼’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있다. 또한 기존의 ‘교회 협의회(council of churches)’가 지나치게 회원교회에 의해 안수 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려가는 것을 반성하면서 학생 ․ 청년 ․ 여성 ․ 평신도 운동의 강화와 그들의 참여를 강조한 바 있다. 2013년 부산총회는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운동 새 판 짜기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형은 이와 같은 세계교회 에큐메니컬 운동의 새로운 방향성을 가름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상황은 매우 독특하다. 한국은 아시아의 국가이면서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을 자랑하면서,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고,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교회와 정교회 그리고 에큐메니칼이 협력하는 나라다. 그래서 ‘하나의 새롭고 더 넓은 지구적 포럼’을 향한, 즉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평가된다.

이제 한국의 에큐메니칼과 에반젤리칼, 오순절과 정교회,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톨릭이 어떻게 함께 WCC 총회를 계기로 서로 협력하여 세상 앞에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기독교적 봉사의 삶을 살 것인가가 바로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미래이자 모형이다. 세계교회 지형변화의 축소판으로서의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새로운 에큐메니칼 일치의 정신과 방법을 보여줄 수 있다. 과거에는 우리가 제네바를 따라갔지만 이제는 우리가 가는 길이 세계교회가 따라올 길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부산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제네바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는 멍석만 깔아주면 생각은 너무도 안이하고 소극적 발상이다. 한국교회는 먼저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힘을 최대한 결집해야 한다. 하지만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세계교회의 흐름을 열심히 따라 열심히 배우고 겸손히 부족한 것을 채우도록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매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이 가진 5천년의 문화전통과 짧지만 식민과 분단과 독재에 저항해 쌓아온 교회사적 전통의 매력으로 세계교회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협력’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달려서는 안 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오는 부산총회는 ‘혼자 몰래 먹기에는 너무 큰 떡’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나누어먹고도 12광주리 이상 남을 하나님 나라의 큰 잔치가 바로 부산총회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에큐메티칼, 에반젤리칼, 오순절, 그리고 정교회가 협력하는 가운데 이 일을 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세계복음주의연맹(WEA)도 2014년에 한국에 온다고 하지 않던가. 한국교회는 능력-노력-매력-협력의 ‘사력(四力)’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며
WCC의 총회는 구체적으로 "business", "worship", 그리고 "event"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제네바가 다 준비해올 것이다. 두 번째는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예배 및 문화 전문가들이 잘 준비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 번째의 것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지난 8차 하라레 총회에서는 ‘파다레(Padare)’가, 지난 9차 포르토 알레그레에서는 ‘무치라오(Muchirao)’가 총회 주제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했다. 한국에도 WCC는 잘 몰라도 정의와 평화와 생명과 영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총회 "business"에는 관심이 없어도 "real things"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이 축제에 함께 할 수 있는가도 미리 깊이 고민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에큐메니칼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교회 간의 협의회는 지나치게 성직자 중심, 지나치게 회원교회에 의해 안수 받은 지도자들에 의존할 위험성이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 한계를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산업선교는 구체적으로 총회 전에 어떤 "people's forum"을 세계교회와 함께 할 것인지 고민하면 좋겠다. 총회 전후에 어떤 현장방문 프로그램을 조직할 수 있는지도 지금부터 섬세한 기획과 준비가 필요하다.

WCC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지만 그 핵심은 ‘대화(dialogue)’라고 할 수 있다. WCC는 서로 다른 배경과 역사 및 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나 다툼과 분열과 상쟁의 역사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가려는 ‘대화의 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분열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나 되지 않은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게 할 수 없다.(요한 17:21) 교회의 하나됨은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관건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경쟁적이고 개교회적인 양적 팽창의 시대를 끝내고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를 도모할 때를 맞이했다.

바로 이 질적인 성국과 내실화의 관건이 에큐메니칼 정신이고 운동이다. 그것이 21세기 한국교회를 살리고 재도약하게 만드는 발판이 될 것이다. 2013년 WCC 총회의 한국 유치는 바로 그런 패러다임 전환을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초대라고 믿는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런 복된 초대 앞에 과거의 오해와 편견과 상처와 아집을 다 털어버리고 인간의 지혜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아직 한국교회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믿음으로 달려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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