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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오랜 시간 끝에서 새로운 시작누비공방 민들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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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26  20: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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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오랜 시간 끝에서 새로운 시작
   
 

통영은 서울에서 4시 30분 걸리는 남해 끝자락으로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통영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똑 한번쯤은 가봐야할 땅이다.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며 삶을 일구는 땅의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대지와 항구를 간직헤온  자취가 외지인을 반긴다.  한려수도와 통영굴밥, 멍게도 유명하지만 사실 통영은 막상 다가가면 더 많은 것으로 우리를 반긴다.   역사적으로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 충렬사와 그외에도 근대 현대를 대표하는에는 문화 예술인이 많이 나온 곳으로 남도의 예향이라고 부르기에도 충분하다.  또 통영은 엣날 부터  12공방을 두워 각종 공예품을 생산하는 솜씨 좋은 예능인과 악사들의 배출지였으며 극상품을 중앙에 납품하였는데 이를 주관한 교방청과 취고수청이 있다.  

통영 최초의 화가 김용주와 소설가 청마 유치환, 김용익, 토지의 박경리, 시인 김춘수를 품은 곳이다.  또 동백림 사건의 주인공 코리아 환상곡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기념공원과 윤보선 대통령의 영부인 공덕귀 여사 생가와 전혁림의 미술관 있다.  또 그 유명한 통영 갓과 오광대 놀이,별신굿도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그렇게 많은 문화예술인을 배출한 곳은 드물다.  잔잔한 통영 앞바다 위로 밝은 햇살이 쪼이면 이 바다는 보는 이의 각도와 시간에 따라서 오만가지 색을 보게 되는 데 이러한 분광현상은 통영만의 아름다움 이라고 한다. 또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은 온갖 해산물과 건어물로 넘친다.  그 유명한 충무 김밥의 원조집도 꼭 한번은 보고 먹고 와야 할 별미다.  
   
 

총무는 역사적으로 남해를 대표하는 항구도시로 1914년 용남·거제시를 통합하여 통영군(統營郡)이라 개칭하였으나 1953년 거제시가 잠시 분리 되였다가 다시 통영 읍이 충무지(忠武市)로 승격되면서 통영군과는 분리되였다. 그러나 1995년 1월 1일 충무 시와 통영군을 통합, 도농복합형태의 통영시로 다시 설치되었다. 인구 현재 인구 14만의 항만도시도 어장 중심의 해안 도시로 굴고 멍계등 해안에 파도가 없어 양식어패류양식에  전혜의 조건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가 있는데  지금 직제로 하면 “해군사령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조37년(1604) 통제사 이경준이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통영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충무시(忠武市)의 본 지명은 통영군이고, 통영군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따서 충무시라 하였으며, 통영이나 충무시의 탄생은 삼도수군통제영과 충무공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불과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맞이해야 하는 울돌목의 격전을 하루 앞둔 1597년 9월 15일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한 말이 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이를 다하고 죽는다면 죽어도 산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다.  이번에 세월호의 사고지점에서 멀지 않은 명랑해전에서 왜구의 대 침략을  맞아 이 정신으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의  정신적 고향이 바로 통영이다.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지휘본부와 현판이 당당하다.   

통제영은 조선시대 부터 있었고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로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인 충렬사(사적 제236호)는 1606년에 건립된 이순신의 사당으로, 문화동에 있는 세병관(보물 제293호은 1603년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여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영을 이곳에 옮겨와 300년간 본영으로 삼은 곳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부에 있고,  한산도의 충무공 유적지, 해수욕장과 낚시터 등이 많은 한국 제1의 해상관광지이다. 또 한산면의 비진도 해수욕장· 추봉리 자갈해수욕장, 산양읍의 연대 해수욕장, 욕지면 동항리의 자갈해수욕장 등이 있다.

이 통영에 다문화 이주 여성들의 행복한 일터가 있다.

통영 YWCA의 지역 프로그램으로 이주 여성들의 한글 교실에서 만나서 시작하게 된 민들레 누비 공방은 사회적 일자리 사업장이다. 이 사업단을 계획하고 이끌고 있는 사람은  부산 출신의 대찬 여성 활동가 강분애 대표(전 통영 YWCA 사무총장)다.   Y총장을 지내다가 이들과 지속적인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생업을 위해서 착안한 것이 바로 지역특성화를 통한 일자리다. 그래서 지난 4년전 부터 이들에게 직접 미싱과 누비기술을 가르쳐서 이제는 중급 기술자들로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누비는 통영의 유서깊은 수공예품인 누비다. 누비는 2겹의 피륙(실크나 면등) 사이에 솜을 넣고 줄줄이 홈질하는 손바느질로 부터 시작했다.  누비의 원류는 보강과 보온을 위한 기법으로 몽골의 고미 사막 일대에서 시작되어, B.C 2000년경 중국과 티베트에서 쓰였다고 한다.
   
                          오른 쪽 맨 뒤  흰브라우스 바탕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강 대표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초기의 유물에서 누비옷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이후에는 치마, 저고리, 포, 바지, 두의, 신발, 버선, 띠 등 옷가지와 침구, 보에 이르기까지 누비가 다양하게 쓰였다. 이들은 대개 솜이 떨어짐을 막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만, 장식성도 비중을 차지하였다. 일본 나라시대의 정교한 누비옷 유물이 있음을 보아, 한국에서는 이보다 앞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누비를 해 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누비의 기원은 조상들이  인체의 보온을 위해 따듯하고 부드러운 천을 만들거나 여러 천을 묶어 단단히 보강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으로 여러 민족과 각기 다른 문화속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왔으며 또한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변모 발전하였다.  겨울철의 방한을 목적으로 의복에 누비가 사용되었으며, 일반 의복뿐만 아니라 군복과 투구에도 이용되었다. 누빈 군복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 나와 있어 11세기 이전부터 누비기법이 신체의 보호를 위해 이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누비기법이 십자군 원정을 통하여 동방문화와 함께 서양으로 전래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양복식에서 누비는 12세기 십자군에 의하여 사라센에 도입된 후부터 널러 애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누비'라는 말은 깁는다는 원래의 의미가 변하여 '누빈다'는 바느질 기법을 뜻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누비는 복식을 비롯한 생활용품에까지 다양하게 이용되었으며 '지봉유설 권19 복용부'에서 보이듯이 저고리, 치마, 바지, 포 그리고 부수적으로 두의, 신발, 버선, 띠 등에서 연령별, 성별, 계급별로 구분 없이 다양하게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누비의 용도는 방한용, 보강용, 종교용(승복은 천이 귀할 때 세상 사람들이 내버린 낡은 헝겊을 모아 기워 만든 옷) 호신용, 장식용, 형태안정용 누비질에는 기본적으로 천과 솜, 그리고 실이 필요하며, 그 외에 바느질 용구로서 누비밀대가 사용되는데, 누비질에 사용된 천과 솜의 재료, 실의 종류 등에 따라 누비의 종류와 용도가 결저된다.  누비는 누비질을 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여느 바느질에 비해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기술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홈질로만 이루어진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으나 보통 뒷면이 안 보이므로 뒤에서 바늘을 꽂아 올릴 때 숙련되지 않으면 원하는 위치로 바늘이 올라오지 않아 비뚤어지게 된다.

그러나 누비외에도 모든 것의 규격화 기계화에도 불구하고 소득이 증대되자 고급화의 경향으로 핸드메드가 인기를 끌게 되자 누비도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전통 장인들이 연노하고 젊은 이들이 배우지 않게 되여 그 맥이 거의 끊어질 지경이다. 그래서 이제는 손으로 하는 자수는 한계가 있어 미싱작업을 통한 다양한 제품이 인기를 끌게 된다.  물론 전통적으로 예단에 쓰이는 누비는 아직도 수작업을 하기도 한다. 미싱 부비라고 하여도 수작업 못지않게 집중력과 정성, 시간이 필요하다.  통영누비 제작에 참여는 통영지역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며 특히 통영에 온 이주 여성들과의 만남 생업을 통한 지역 경제와 삶의 자리를 일구는 일이다. 

작업장의 분위기는 일반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적이며 공동체적인 곳이다. 기혼자인 여성들의 가정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잔업 없는 정식 퇴근 시간과 스스로 알아서 하는 자율작업장은 모성보호가 목적이다. 이는 강분애 대표의 철학이다. 같이 먹고 일하는 일터 통영의 누비 공방 민들레는 오늘도 정성과 사랑으로 만들어낸 단하나 당신들을 위한 누비 제품이다. 고가의 제품으로 날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외국에도 알려지게 되여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다량 주문제작시도 가능하고 문장도 주문할 수 있다. 또 작은 기획상품(슬피터나 작은 손지갑, 연립케이스, 아이패드케스)등 젊은 세대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아름답고 질기고 튼튼한 누비를 일단 한번 사용해본 사람들은 단골고객이 되고 있다.
   
 

통영시 동피랑 이제 산동네가 아니다.
   
 

마침 통영을 방문한 때가 동피랑의 벽화작업을 시작가는 날이 였다.  난생 처음으로 접한 이 귀한 일은 동피랑 마을 만들기로 시작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로 그 추억의 언덕에서 보냈다.  동피랑(동쪽의 있는 비랑(통영 토속어 언덕배기)이란 통영 앞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는 언덕배기 정량동 태평동 일대로 오랜동안 서민들이 살던 산동네다.  아마도 산동네에 살면서 어장에 나와서 날품들을 팔던 서민들의 주거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주택은 노후화 되고 도시계획으로 철거 혹은 재개발 대상이 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이주할 곳도 없고 재개발도 여의치 않게 되였다. 

그러나 2007년 부터 동피랑은 뜻있는 젊은 이들에 의하여 새로 태여난다.  해안이 논 앞에 내려다 보이는 천혜의 특유하고 아름다운 절경을 조건으로 노후한 주택에 노인들이나 서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그곳을 벽화마을로 만들자 이제는 집 값도 올라가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여 볼거리와 소득 증대에도 크게 기여하는 것 같다. 이 벽화 마을에서 추억을 더듬으며 통영 앞 바다의 야경을 즐기고 싶은 이들이 누비공바 강대표가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하는 집을 소개한다.  통영의 방문하는 이들은 시장에서 산 해산물로 직접 요리하여 먹을 수 있는 곳이니  연락후 방문하기를 바란다(070-4243-8906, 페리 터미날 서호시장내)     
   
 

마음입구에 “몽마르다” 라는 포장마차도 새롭다. 이렇게 낙후되고 도시화에 밀려 없어질뻔한 이 작은 해안의 산동네가 새롭게 태여 나게 된 것은 푸른통여 21의 아이디어였다. 작은 비랑의 집에 벽화를 그리는 새로운 마을 만들기를 통하여 공공미술을 통한 명소로 태여 나게 된다. 이번에 올리는 제 4회 벽화 새 단장 작업에는 81개 그림이 새로 그려지는 데 올해 처음으로 국제공모를 한 결과, 외국 5개 팀을 포함해 68개 팀(180명)의 참가가 확정됐다.  전국의 유명 팀들이 신청을 해도 선정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이 벽화작업 은 4월 25일부터 5월 1일까지 열린다.

특히 젊은 미술가 구룹들과 마음을 합쳐서 마을 벽화 전시회를 시작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특히 이번에 국가적인 참사인 진도의 세월로 침몰사고에 대해서도 비겨가지 않으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의 벽'이 마련되여 안타깝게 희생된 영혼들에게  헌화와 애도의 공간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벽에는 '좋은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살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등 이번 사고를 애도하는 추모 글이 쓰여져 있고 먼저 떠나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국화 송이가 쌓여 있다. 이 추모의 벽은 제5회 벽화전이 열리는 2016년까지 보존된다.
   
                                                                세월호 추모 벽화 장소

푸른통영 21 관계자는 "이번 벽화전이 세월호 사건을 되새기고 아픔을 달래는 해방구로 표현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벽화전 참가팀들은 지난 22일 세월호 사고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 행사를 가졌다. 
                                                                   
   
 

                                                         <추모의 글 전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런지 몰라서 그저 며칠을 허둥대기만 했습니다.   번개처럼 달려가 구조해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허수룩한 구조체제의 정부와 관료들에게,화만 내고 속만 끓였습니다.

원인과 결과는 명명백백히 밝혀져야 하겠지만 결코 되풀이 되어서도, 잊혀져서도 안되겠지만 분노에서 분노로 이어지는 감정의 상실과 누수는 먼저 간 가엾은 넋들에게도, 살아남은 유족들에게도 집단상실감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더한 생채기를 남길 뿐입니다.

지금은 치를 떠는 분노 대신에 차분한 냉정을 되찾아 유족들의 상처를 공감 공유하고, 치유하는 방안도 강구해야 할 때입니다. 어떠한 위로라도 위안이 될 수 없는 지금, 우리는 시간과 약속이라는 굴레에서 동피랑에 그림전을 펼치려합니다. 아마도 이번 그림전은 절망과 한탄이 뒤섞인 슬픈 언어들의 색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 동피랑은 모든 벽을 기꺼이 내어주어 애틋한 마음과 염원을 담아 고스란히 새기고 기억하려합니다. 우리는 오늘 동피랑 2길, 23-10번지 흰 벽을 세월호의 희생자들에 바칩니다. 추모의 벽입니다. 그리고 숙연한 우리의 마음도 함께 바칩니다.

모쪼록 슬픔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손톱만큼의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여기 모인 동피랑의 착한 주민들과, 눈치를 보면서 소리없이 벽화전을 준비하느라 애쓴 푸른통영21 위원들과, 함께한 기자분들,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 한국의 동피랑을 찾아온 작가들이 마음을 한데 모아서 님들의 영혼의 안식을 간절히,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4년 4월22일/푸른통영21, 동피랑 작가촌, 주민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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