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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평적 작업이브에서 에스더까지(성서속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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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5.05  10:2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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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평적 작업

성서 속의 여성들

   
 


저자 유연희 박사
뉴욕 올리브브리지언 감리교회, 삼손빌 연합감리교회 목회, UMC(미연합갑리교회) 세계선교부 여성국 파송 아시아 태평양 선교사(컨설던트), 스트랜튼 여성리더쉽쎈타, 현재 한국 천성교회 영어예배 담당과 감신대 외래교수

학  력
감리교신학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졸업 논문 제목: “구약성서 시의 대구법 연구”
우수논문상, 한국신학교육협의회[KATS] 논문상 수상) 

석 사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City, New York
Master of Sacred Theology(S. T. M.), Old Testament, 1991년 5월 24일 졸업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City, New York
Master of Philosophy(M. Phil.), Old Testament, 1995년 5월 19일 졸업
박 사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City, New York
Doctor of Philosophy(Ph. D.), Old Testament, 2001년 5월 졸업
Dissertation Title: "A Rhetorical Reading of the Rebekah Narratives in the Book of Genesis

그 동안 한국신학은 서구신학를 복제하여 수입한 학자들에 의하여 답습되고 논쟁하며 갈라져 분열을 해온 것이 한국신학과 교회의 풍토이다. 그러나 이후 진취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시도된 토학화신학이나 민중신학이 유일한 한국적 신학의 모색이고 시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척박한 토양속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정치권력과 교권신학에 의하여 저주받은 의붓자식 신학이 되었다. 민중신학의 1세대들은 대학에서 해고되어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현장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현장에서 신학의 소재를 구성했다. 문희석은 출애굽기 하비루로 서남동은 한의 사제를 안병무는 마가복음의 오크로스를 현영학은 해학과 풍자의 탈춤에서 김용복은 소시얼바이오그라피로 구성했다. 

이에 비하면 2세대 신학자들은 강단 신학자가 되여 현장들을 떠났다. 그리고 3세대 신학자들은 다원화 시대에 포스트모던의 영향으로 개인화 되었다. 저작물은 많으나 실천적 작업이 아닌 머리와 책에서 책을 뽑는 전문 글쓰기로 고립화 되었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약화는 무엇보다 시장에서 유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찾지도 않게 되어 박물관 신학이 되가는 중이다. 우리의 신학을 우리가 외면하고 공격을 하니 누가 알아주겠는가?

세계신학계는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야말로 신학이 삶의 자리에서 시대의 아픔을 자신들의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께 드린 신학이다. 대만의 송천성이나 스리랑카의 피어리스, 필리핀이나 태국도 그들 민중들의 삶을 신학화한 주제어들이 있지만 민중신학 만큼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땅 한 쪽에서는 아직도 서구에서는 용도 폐기된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유통하고 써먹고 있는 것이 한국 주류 신학대학의 현실이다.

신학계에서도 언제나 논쟁과 유행이 있었다. 그리고 발전하고 있다. 해밀턴이나 고르가탱의 사신신학이나 하비콕스의 세속화, 몰트만의 환경과 생태평화와 정의, 통일이라는 주제어들, 최근의 스택하우스의 공적신학까지 그 담론은 변화되어 왔다. 그런 면에서 과거 주류였던 성서신학도 응용신학으로 그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성서신학은 고대근동 언어나 주변학문과의 관계성으로 사실 공부하기도 쉽지 않은 것도 원인이지만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수요가 공급을 결정하는 데 한국교회와 부흥과 성장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성서신학의 기초 없는 어떤 신학도 사상누각이다.     

그렇다면 지금 신학계 흐름은 어떠한가? 그것을 알면 과거를 알 수 있고 내일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학에 국한하여 본다면 과거 성서연구에 크게 공헌한 궁켈의 양식사비평이나 폰 라트의 문헌비평 방법이나 JEDP문서설, 가나안 암피티오니동맹설, 족장설화, 출애굽과 다윗과 솔로몬의 왕조사도 그 진위 여부에 대하여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고고학에 의하면 어떠한 단서들도 발견할 수 없다)  특히 비교적 자유스러운 신학자들이나 신학 비전공자들의 성서분석이나 응용, 원본(Text)에 대한 도전과 해체 작업들은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한국적 풍토에서 본다면 대단히 위험하고 큰일 날 일이지만 학문적 동향은 그렇다.

러한 해석과 연구을 선도하는 사람은 호주 출신으로 영국에서 가르치는  D.J.A  Clines로 그의 책  "포스트 모더니즘과 이데올로기 성서비평"(Sheffield,1995) 한들출판사. 2000가 있다. 그는 이미 80세 고령이지만 지성에 호소하며 자유롭게 가르치고 있다. 그가 쓴 글에 보면 "오늘부터 나는 구약을 가르치기를 그만 두고 학생들 가르치기를 시작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책의 저자 유연희 교수는 크린스의 영향을 받고 있어 보인다. 이러한 해석방법으로 현재 한국에서는 거의 최일선에서 과거 구약학자들에게서 주변부나 조연에 불과했던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주목하며 연구하는 여성 구약신학자다.  

이 책이 성서 속의 주류가 아닌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는 과거 페미니스트들과 같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 해석의 시도나 전개는 전혀 다르다.  각 장이 여러 학술지에 게재되는 시간과 성격의 차이는 있지만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은 성서 속의 여성들을 기록된 것 이상의 것을 보게 하는 눈을 열게 하는 독자중심의 해석을 열어 놓고 있다. 이는 과거 성서해석에서 크게 공헌해 온 통시적 해석(하나님은 구원이다 사랑이다 정의다)에서 공시적 해석으로의 전환이다. 

또 과거 70년대 시작된 1세대 여성학자들은 가부장적 전통을 거부하는 해석의 경향을 보였다면   2세대 여성학자들은 여성평등과 여성옹호론적 관점으로 남성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여성상을  3세대 학자들은 이제 성서에 억압받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남성들도 억압받는 하층민이였고 몇몇의 남성들과 그들의 가족인 상류층 여성들은 같은 억압자라는 새로운 해석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남성위주의 가부장적인 주류신학속에서 여성신학자 혹은 여성의 눈으로 본 신학의 도전은 신학교나 교회에서가 아닌 신학교와 교회 밖에서 이뤄졌다. 아시아 여성신학자회를 만든 것도 한국여성학자들이고 한국의 여신협이나 기여민 등과 같은 재야 NGO 구룹들의 공헌이었다. 실제로 여성적 감성과 시각으로 이 사회를 보면 많은 것이 새롭다. 

그런 방법을 시도한 감신대의 강남순 교수(현재 미국 초빙교수)는 한 때 학생들에게 일상(가정과 직장 뉴스 간판 문화)에서 여성과 관련된 그리고 논쟁이 될 만한 것들을 적어보는 생각 Note를 통하여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뤄냈다. 그렇기에  이제는 신학도 자신의 전공이나 파는 연구는 사실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인접학문과 관련학문과의 대화나 융합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미리암과 아비가일, 룻
이 책에서 이데올로기 비평 작업을 통한 미리암과 모세 사이의 사건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이 사건에서는 미리암이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반기를 든 아론과 미리암 중 미리암만이 하나님의 진노로 피부병을 얻게 됨에 주목한다. 이 때에도 아론은 면제받고 모세는 침착하고 관대하며 오직 미리암만이 분노한 하나님의 정죄를 받으면서도 정작 당사자는 성경 속에서 침묵하기를 강요받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드러나지 않은 이 사건에서 많은 주석들이 미리암 사건을 '인간의 불의한 시기와 질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럽고 악한 죄인가'라는 관점으로 일축하면서 결론적으로는 영적 지도자에게 순종하며 공경할 것을 촉구하고 그들에 대해 비방하면 심판받는다는 본문으로 쓰이는 것을 불편해 한다. 더우기 일개 여성이 영적 지도자인 남자에게 대항하는 것은 더 어리석고 무례하게 독해된다.

아비가일과 다윗이 만나는 대목의 해석도 새롭다. 저자는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행한 다윗의 청혼도 사실 강요가 아니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청혼이라는 표현은 실은 가부장제의 옷을 입고 있어서 다윗이 그녀를 아내로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거의 보쌈이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39절 끝에서 "그리고 다윗은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아비가일을 자신을 위해 아내로 취하려고 그녀에게 말했다"라는 표현이다. '에게'를 '반대해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문법상 가능하다. '아비가일에게 반대해서'라고 번역한다면 뜻밖에도 문법은 이 결혼이 아비가일의 뜻에 반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로맨스'가 사라진다."

또한, 룻기에서 룻은 '착한 사람이 등장하는 착한 책'이 아니라 이주 노동자의 성공담으로서의 내러티브로 읽힌다. 저자는 본서가 착하게 읽히는 이유가 서정적이고 따뜻하게 읽고 싶은 독자의 욕구 때문이며 사실 억척스런 글로벌 시민 룻이 이주 노동자에서 글로벌 시민으로 도약하여 불과 삼대 만에 왕으로 탄생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족보의 진정한 급진성은 오벳의 손자가 다윗 왕이라는 점이다. 곧 이주 노동자가 정착하여 산지 불과 삼대 만에 그 나라 대통령을 냈다는 선언이다. 현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급진적인 선포요 도전이지 않을 수 없다."

행간의 여백에 채워진 해석들
사실,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신학 풍토에서 이러한 성경 해석이 다소 불편할 수 있다. 창조 진화론 논쟁 때에도 자주 등장하는 논지이지만, 성경은 과학을 입증하기 위한 책이 아니듯 여성의 인권에 대해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명제들을 나열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편집된 내러티브 안에서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려 할 때 그것은 자주 컨텍스트와 충돌하고 어떤 원리를 찾아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성경의 해석은 다양한 방법과 과정을 거쳤는데 최근 텍스트 행간의 여백에 채워진 해석의 과잉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구약을 읽으면서도 컨텍스트 안에서 노예제도의 당위성이라거나 선민의식을 고취하는 어떤 텍스트를 유추할 수 없듯이 성경 속 여성들을 조명한다고 해서 여성 비하적인 과잉 해석을 끌어낼 수 없는 이치와 같은 셈이다. .

본서에서도 언급하듯 에스더서에서 왕의 성희롱에 가까운 명령을 어긴 와스디에게 주어진 형벌을 쉽게 지나치면서 왕에게 순종적인 에스더의 행실은 이스라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권장되고 '선하다'는 평가를 내린다는 대목도 그러하다. 에스더가 왕을 꼬드겨서 모르드개와 자기 민족은 살려내고 하만과 수백 명의 사람들은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건에 대한 평가는 선민의식과 구속사의 큰 틀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교와 신교를 통틀어 기독교는 자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피치 못할 역사의 흐름에도 어떤 당위와 명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우리의 편, 즉 기득권의 입장에서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욕망을 표현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예와 흑인, 그리고 식민지 국가에 대한 시각들이 변화해 왔다. 그리고 본서는 여성에 대한 시각도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은 성서가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이 읽히고 설교 되는 곳이다. 한국에서의 강단 설교자는 가장 독특한 독자이며 가장 자유롭고 가장 권위있게 하는 해석자"이다. 과거에서 가장 권위을 부여 받았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게 하라" " 성경에서의 마스터 키는 예수 그리스도다" 라는 말의 억지에 대하여 반발해야 한다. 성경는 누가 어디서 해석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노예제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고 부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고 있지 못하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어떤 독자나 목격자라도 사실은 보고 싶은 대로 그가 원하는 대로 보는 것이다. 이런 독자중심의 해석을 십계명에 적용하여 보면 11계명은  "들키지 말라" 라는 조크로 율법주의적 해석자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여성학자들의 더나아가 11계명은 "우리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 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배경은 여성적(양성 평등) 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은 제외되었으니 계명의 준수로부터 제외된다는 기발한 해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성서의 기록과 사건은 한 시대의 산물이다. 이미 오래전 부터 학자들은 구약은 신약과 거의 상관이 없다고 했다. 연속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와도 아무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연관시키고 계시된 메시야, 오실 메시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바울이나 초대교회, 기자들이 소속한 공동체나 회의에서 정한 것이다. 정경화 작업은 얌니아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삼위일체 신론이나 두 왕국론 등과 같은 신학 작업은 어거스틴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그 감동을 받은 인간은 불행하게도 국가라는 문화의 유산 언어적이 특성 그의 학업과 정신적 배경을 떠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기록 자체가 해석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경은 항상 해석되어 왔다. 그들에게 필요하고 유리한 대로 그리고 그 해석의 자유는 오늘 우리게도 유효하다. 그렇기에 지금 성경을 읽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 단 하나의 독자이며 해석자이다. 다만 과도한 목적을 가진 독자와 순진한 독자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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