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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민족의 말씀"내게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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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17  1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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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로 와서"
(창 25:19-34; 롬 8:1-11; 마11:16-19, 25-30)

황남덕 목사 (새민족 교회)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는 말씀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 두 말이 아무 관계가 없는 듯 하나 깊이 들어다 보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말씀에서 또 참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첫째 단락은 예수께서 이 세대의 무감각과 무관심을 지적하시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대는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피리를 불어도 상대방이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것 같은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아마도 당시 아이들이 장터에서 한 놀이 같습니다. 즉 장터에서 아이들이 피리를 불며 가락이 흘러나오면 다른 아이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고 곡을 하면 함께 우는 아이들의 놀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이제는 춤도 추지 않고 울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무감각해 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습니다. 특히 갈릴리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힘이 부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법도 못 지키고 그래서 유대종교로부터는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토지는 예루살렘 지주들이 다 가지고 있고 소작농으로 일년 농사에서 소출을 거두어야 세금을 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로마에게 나라 마저 빼앗긴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갈릴리 이곳 저곳에서는 민란이 일어나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폭도로 잡혀서 십자가의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하나의 목에 풀도 붙이기 힘든 상황에 이웃의 처지를 돌아볼 기력도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웃과 사회를 향해서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무기력에 빠져 이웃에 대한 무관심의 상태가 되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조차도 할 수 없는 무지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흥이 나지 않고 누군가가 곡을 해도 울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사회체제가 한 개인의 마음의 문까지도 이렇게 굳게 닫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예수 당시의 시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모두를 강팍하게 만들었습니다. 1대 99의 사회가 되어 모두가 1이 될 수 없는 걸 뻔하게 알면서도 1이 되고자 하며 또 99의 사람들이 살아남고자 그 가운데 서로 경쟁합니다. 

언제 해고가 될 지 모르는 불안감을 가지고 일터에 나가 상관 눈치 보며 실적을 올리려고 서로 경쟁합니다. 훈훈한 공동체의 정신은 이미 사라지고 나와 당신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일찍이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나와 당신 (I and You), 그리고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로 표현했는데 오늘의 사회 속에서는 타자가 나와 그것의 물질적인 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점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들과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전락되며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죄악성을 보고 있습니다. 인간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생명경시 사상도 그것에서 나옵니다. 

세월호 사건 후에 고양종합터미널의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6명이 죽었다는 소식에 저는 별로 큰 사건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순간 제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졌습니다. 어느새 제 마음이 이렇게 강퍅해진 것입니다. 전에는 버스사고로 1-2명만 죽어도 신문에 큰 기사거리로 나곤 했는데 이제는 10명 정도 죽어도 그래.. 음.. 하는 정도입니다. 제 자신의 강팍함, 그리고 세상의 이런 세태를 보며 무서움을 느낍니다. 청소년들이 길에서 담배를 피워도 못 본척하며 지나가야 하는 세대이지 않습니까? 

고층아파트에 살면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지 않습니까? 이제는 마을이 없어졌습니다. 겨울에 김장을 하면 동네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해주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날 한 김치 맛도 보며 점심도 같이 먹었던 그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난했지만 이웃과 정겹게 살아갔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 그러나 한편 이웃에 대한 무관심, 시대에 대한 무감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관심 시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주 왜곡되고 파행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라는 책을 쓴 에모토 마사루 라는 일본의 파동연구가가 있습니다. 일각의 물리학자들은 그의 이론을 사이비라고 혹평을 하기는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과 에너지의 중요함을 일깨워준다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볼만한 내용입니다. 서로 준다는 그는 눈 (snow)의 결정 모습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에 착안해서 물도 얼려 물의 결정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 때 물을 병에 담고 사랑, 감사, 고맙습니다. 라는 글을 써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진을 찍고 그 결정의 모습을 보니 물이 아주 아름다운 결정체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반면 짜증나네, 바보, 죽여버릴거야 등 아주 부정적인 단어를 보여주고 며칠 있다가 보니 결정체는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실험은 계속됩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렇게 못해, 천사/악마 등의 대비되는 단어들을 보여주며 찍은 물의 결정체 모습은 아주 대비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음악으로도 실험을 했습니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운명 등의 음악을 들려주자 모양은 아주 세밀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분노의 언어로 가득 한 헤비메탈의 음악은 흉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발디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음악이 다 각기 아름다운 모습의 물의 결정체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보기 흉한 모습이 하나가 나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물을 그냥 나누는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고 아무 음악도 들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물의 결정체는 가장 추한 (ugly)모습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관심이었습니다. 물 조차 무관심할 때 그것의 결정체는 가장 보기 흉한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무관심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처럼 보기 흉해지는 것입니다. 가족간의 관계가 무관심할 때 이것보다 더 힘든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부부간에 싸우고 나서 서로 말을 안 할 때 얼마나 힘듭니까? 교인간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무관심한 교인간의 관계는 참 힘들게 됩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면 모양은 흉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체의 70% 가량이 물이라고 합니다. 고맙다고 하는 말, 감사하다고 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기분이 좋아지고 서로 서먹하던 관계도 좋아지는 것을 보면 우리의 몸 속의 물이 반응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욕을 하고 험담을 하면 혹은 그런 말을 들으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마음이 안 좋아지는 것을 보면 에모토 마사루의 실험이 옳은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무관심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현대인의 가장 무서운 죄는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타인과 사회에 대해 무감각해진 사람들, 그래서 마음이 강팍해진 사람들은 이제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고 무관심해집니다. 이러한 무감각과 무관심은 요한과 예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금욕생활에 대해 비난합니다.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귀신들렸다고 힐난합니다.  또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마구 먹어대는 사람이다. 포도주를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이래도 꿍 저래도 꿍 합니다. 안 먹어도 뭐라고 하고 먹어도 뭐라고 합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 된다는 그들은 매사에 뜨집만 잡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강팍해졌고 진리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요한과 예수의 선포가 사람들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감각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겔11:19)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이 없는 한 늘 타인을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자,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살고자 합니까? 무감각의 시대, 그래서그 속에서 무기력하게만 살 것인가? 마음의 깨우침으로 자신과 이웃을 향해 민감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겉 모습만을 보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그의 삶의 열매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19절) 

자신과 사회에 대해 사랑과 관심을 가진 사람의 삶, 그리고 무감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지금은 모르지만 그의 인생의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지혜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지금의 겉모습이 아니라 삶의 결과를 보고 아는 것입니다. 나무가 좋은지 아니지는 그 나무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말도 이 말씀과 비슷합니다. 

세례요한의 금욕생활이든지, 예수처럼 세속적으로 살아가든지 삶의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삶의 결과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서 살든지, 한국에 살든지, 결혼을 하고 살든지, 독신으로 지내든지성직자로서의 삶을 살든지, 사업을 하든지 삶의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각자의 인생의 열매, 삶의 열매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삶의 열매를 강조하시면서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본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감각의 시대, 무지의 시대, 그 속에서 무기력한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과 화평의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의의 열매를 맺으려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게 됩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의 말씀이 명확해 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예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유대교의 613가지 계명에 억눌리고 짓눌려 있었습니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모두가 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들, 뱃사람들, 짐승을 잡는 사람들, 목동들, 창녀들, 이방인 노예들, 나그네들이었습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날에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결법, 안식일법과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알고 보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것은 체제의 종교였습니다. 정치사회가 그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종교가 더욱 그들을 죄인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종교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자유함을 찾아야 하는데 제도화된 종교는 세상에서 당하는 것 보다 더 큰 속박을 줍니다. 

현대사회 속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그런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불안을 이용하여 강박관념을 주입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가고 저렇게 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고를 당한다는 등 … 여러분 아닌 것 같으나 때로는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왜?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부흥? 저도 그 방법을 알고 했는데 한번 해 볼까요?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상 안 하는 것입니다) 

사회 속에서 짐을 진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더욱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 짐을 진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주님은 다 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며 인간의 위한 율법과 종교를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부르십니다. 인생고에 시달린 사람들, 지친 사람들, 하루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들, 모두 다 오라고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주지 안을 테니 아니 오히려 지금의 짐을 벗겨 주겠으니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서 위로와 기쁨과 휴식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주님의 멍에를 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황금률(7:12)과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7:12)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22:36-40)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인 구약성서를 그것으로 요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613가지 율법으로 인해서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해방되는 길은 주님의 사랑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정치와 더욱 무거운 짐으로 속박하는 종교로부터의 해방하는 길입니다. 종교가 권력의 들러리가 되고 사람들을 무거운 짐을 지우는데 앞장설 때 지혜를 터득하고 자유인이 되는 것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를 배우는 길이요, 자유를 얻는 진리의 길입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8:31-32)

 인간을 속박하는 정치와 종교는 이 세대에 대해 무관심 속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곡을 해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의 참제자가 되어 그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길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르나 어린아이와 같이 순박한 사람만이 아는 길입니다.

 여러분, 새민족교회가 율법으로 사람들을 속박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 속에서 자유함을 얻고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만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 힘이 든다고 말하는 교우가 단 하나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 지 공동체적으로 돌아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새민족 공동체 전체가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주님의 멍에를 메는 길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길이요, 우리가 해방되는 진리의 길, 자유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이 길을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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