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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용의 <마지널리티>로 읽는 진보당 해산사태주변 거부하는 한국사회, 누굴 위한 중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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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9  18: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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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거부하는 한국사회, 누굴 위한 중심인가

[서평] 이정용의 <마지널리티(marginality)>로 읽는 진보당 해산사태
 당당뉴스
김학현 | nazunja@yahoo.co.kr

이른 봄 가지런히 손질된 잔디밭 한 귀퉁이로 노란 꽃을 살포시 드러낸 민들레가 피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한다. “참 곱기도 해라.” “노란 꽃이 아름답네.”

   
꽃씨는 어느 집 정원의 잔디밭에 떨어졌다. 곁에서 잔디가 말했다. “여긴 네가 자랄 곳이 아니야” 그러나 민들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잔디 주인 눈에는 민들레 꽃이 전혀 예쁘지 않다. 넓고 아름다운 잔디밭 가운데 핀 민들레는 잡초일 뿐이다. 중심부의 주인 눈에는 그저 하찮은 주변부일 뿐이다. 주인은 이내 문을 박차고 나와 민들레 앞으로 돌진, 민들레를 단번에 뽑았다. 그러나 민들레는 뿌리 일부분이 남았다. 이른 여름 뿌리는 잎을 냈고, 기어이 푸른 잎이 대지를 덮을 때 민들레는 꽃씨가 되어 하늘로 날았다.

꽃씨는 어느 집 정원의 잔디밭에 떨어졌다. 곁에서 잔디가 말했다. “여긴 네가 자랄 곳이 아니야” 그러나 민들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봄이 왔고 민들레는 뿌리를 내려 꽃을 피웠다. 주인이 예쁜 꽃을 보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잔디가 땅 위로 나오기 시작할 때 주인은 민들레에게 다가와 “완전히 뽑은 줄 알았더니 귀찮게 또 나왔네”하며 민들레를 잘랐다. 뿌리째 뽑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잔디가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너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진보당, 중심부에 들지 못하는 한국의 ‘마지널리티’
책 <마지널리티>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산 이정용 교수가 자신을 동일시한 ‘민들레 이야기’다. ‘한계성, 주변성’으로 번역되는 ‘마지널리티’는 중심부에 들지 못한 다문화 사회의 신학을 정립한 이정용 교수의 이론이다.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한국계 미국인 신학자의 처절한 학문적 몸부림이 책 저변에 슬픔처럼 깔려 있다. 히스패닉계 미국인 아다 마리아 이사시-디아즈의 고백이 실감 난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둘 다 완전히 내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내 것이다. 나는 오늘날 쿠바에도, 미국에도 속해 있지 않다.(76쪽)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자꾸 지난 19일 헌법재판소(아래 헌재)로부터 해체당한 통합진보당(아래 진보당)이 떠올랐다. 진보당원도 아니고 진보당의 노선을 추종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진보당의 해체가 내게 큰 손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정당 해산 선고는 중심부에 의해 저질러진 주변부 테러라는 것이다. 중심 사회의 관점으로 진보당은 없어져야 할 주변부였다.

종북 콘서트 논란이나 진보당 해체 등의 일련의 사건은 미국의 인종 차별보다 더 심도 깊은 테러리즘이다. 중심부 보수 정권에 의한 주변부 진보 세력의 축출이라는 증오 시스템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민들레’를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민들레를 가만두면 끝내 모든 잔디밭이 민들레로 덮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런 판단을 낳았다. 보수 중심부와 그를 따르는 무리에 의해 “북한으로 가라”는 야유를 들어야 하는 진보 주변부,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동화(同化)’를 선택할 수도, 차별과 단죄를 받아들일 수도, 중심부와 경쟁할 수도 없는 그들은 누구인가? “내가 말했잖아. 너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그들은 다만 이 소리를 반복해 들어야 하는 민들레요, 주변부다.

중심부, ‘주변부는 입 닥치고 있으라’
   
<마지널리티> 책 표지
세계는 다원화 사회로 가고 있다. 내가 사는 곳만 해도 시장에 가면 필리핀이나 베트남 혹은 여타의 나라에서 이주한 이들을 쉽게 만난다. 이젠 ‘한겨레’니 ‘단일 민족’이니 하는 말을 쓸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 다원화 시대를 살고 있다. 책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주변부 사람은 배타주의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여러 세계가 함께 나타나는 주변부에 살도록 부름 받았다. 주변부적이라는 자신의 본질 때문에 다른 모든 중심부에 대해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다. 우리는 양자 모두의 세계, 혹은 모든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다원주의적이다. (85쪽)

현재 대한민국의 중심부는 다원주의와 거리가 멀다. 중심부의 생각만 강요되고 있다. 서울, 청와대, 박근혜, 보수, 반북… 등으로 대표되는 것들이다. 박근혜 정부 하의 ‘중심부’ 헌재는 진보당을 해산하면서 ‘북한을 추종하는 폭력적 사회주의 혁명’이 진보당의 목적이라고 했다. 중심부 사람들은 주변부 사람들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선 맥신 홍 킹스턴의 <중국인>의 예를 들려준다. 주인공 박궁에게 백인은 “입 닥치고 가서 일이나 해. 이 중국 놈, 가서 일하라니까. 입 닥치라니까” 박궁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을 것이다.” 중심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라고. 그러나 저자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양자택일의 사유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라며, 배타적 사유를 포기하고 “포괄적 사유방식”으로 전환하라고 촉구한다. 동일성이 지배하면 차이가 설 자리를 잃는다. 지배 집단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다름을 멀리하고 동종성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거부하는 중심부 중심 사회는 ‘힘없는 사람들을 이중으로 주변화’하려고 한다. 진보당 해산은 ‘이중적 주변화’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어느 정당도 이중적 주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정당은 교회가 아니다.

중심부는 주변부와 교류할 때 자란다
예수는 철저히 주변부였다. 버림받은 이방인, 세리, 여성, 가난한 자, 억압받는 이들과 영문 밖에서 어울렸다. 주도(主都)인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줄곧 활동했다. 현대 교회의 타락은 스스로 주변부를 포기하고 중심부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시작됐다. 보수 중앙 정권과 보수 대형 교회,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가. 저자는 예수의 주변성이 상징하는 의미를 상실할 때 교회의 설 자리가 없다고 경고한다. 주변부가 설 자리가 없는 나라 또한 그 끝이 보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창조적이 된다는 것은 주변 중 주변, 즉 창조적인 중심에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주변에 머무르지도 않고, 주변을 없애려고만 하는 중심부는 고목이 될 수밖에 없다. 책은 여기에 대해 명쾌하게 말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나무는 테두리나 가장자리를 따라 자라고, 중심이 가장자리와 교류하지 않으면 메마른다. 태풍으로 손상된 거대한 나무가 중심이 썩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썩은 중심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테두리 부분은 단단히 살아 있다. 창조성은 나무의 테두리나 가장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중심이 가장자리와 교류하지 않으면 나무는 결국 죽는다.(169쪽) 주변부를 싹둑 잘라버린 대한민국 중심부. 과연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정치란 티격태격하더라도 정강 정책으로 경쟁하고, 때로 공유하며 커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중심부가 영원한 중심부는 아니다. 중심부가 주변부이고, 주변부가 중심부다. 민들레 꽃씨는 하늘을 나는 한 언젠간 잔디밭에 앉게 된다. 그때 잔디밭에 고목이 누워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마지널리티:다문화시대의 신학, 이정용 지음 / 신재식 옮김 / 포이에마 / 2014. 12 / 336쪽 / 1만 5000원
* 원제 : 'Marginality: The Key to Multicultural Theology';1995. 

이정용 교수는 한국인으로 일찌기 미국신학대학의 교수가 되여 "易의 신학" 이라는 동양적 관점에서의 신학을 구성한 학자이다. 그 동안 기독교의 사유는 철저히 헬라의 사유 방식을 따라왔음을 우리는 한눈에 알 수가 있다. 곧 이 말은 神學은 한다는 것은 헬라의 사유에서 神을 분석하고, 그 헬라의 사유에서 도출된 神과 서구 사람들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철저히 서구 헬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으로 그렇다면 동양인들에게 神學을 한다는 것은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 있는 神에 대하여 논하는, 어떻게 보면 神學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참여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문화와 철학이 있었지만 워낙 서양의 철학의 힘이 강하여 우리의 소중한 철학을 경시하며 잊고 있었다. 이제 서양의 철학과 사상들은 커다란 이성의 고갈의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소홀히 여기고 무시했던 동양의 철학들을 다시금 재고하고 고찰함으로 서양철학의 영적인 고갈을 동양의 철학에서 채우려 하고 있다.

이정용 박사는 서양철학의 한계를 지적하시면서, 왜 동양의 철학으로 神을 표현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계신다. 박사님은 기독교가 아시아의 타종교들과 공존할 수 없었던 이유를 “기독교가 헬라의 사유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시면서, 기독교가 세계 문화 속에서 살아 생동감 있는 종교이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철학적 양식으로 표현되고 전해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헬라의 개념들과는 판이한 동양의 개념들과 다른 세계의 철학으로 기독교 신앙이 표현되는 것이 필연으로 요청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동양의 관점에 주목하여 쓰여진 책이 易의 神學이다. 철저히 헬라적 사유를 벗어버리고, 동양의 잠재되었던 위대한 철학을 周易을 통하여 펼쳐 보임으로써, 동양의 神學이 서구의 神學보다 열등하거나 뒤지는게 아니라, 서구 神學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까지도 동양의 神學은 넘어 설 수 있다는, 곧 神을 설명함에 있어서 동양철학의 위대함과 완전함을 설명하셨다.

이정용 박사는 Poul Thillich가 말하는 神學, 즉 神學은 그리스도교적 진리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시대적 상황 사이를 왕래한다고 Thillich는 말한다. 분명히 새로운 것은 “위”에서 오지만, 새로운 것을 담아 내는 방식은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Thillich는 이 형식을 “상황”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다. 이정용 박사님은 Poul Tillich가 말하는 “새로운 것을 담아 내는 방식”을 동양철학의 학문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周易의 개념들을 통하여 훌륭히 담아 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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