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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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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7  18: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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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1)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홍인식 목사 : (장신대를 졸업하고 현대교회에서 목회)
- 파라과이 국립 아순시온 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ISEDET 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 신학대학 교수 역임.
- 현재, 멕시코 장로교 신학대학 교수.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 한국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치만 우리가 거기서 배울 것과 극복할 것이 무언지를 알려면 우선은 잘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카토릭교회의 사회복음(사회선교)의 근거와 배경에 대하여 일부 카토릭 신학자들로 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우리 동문가운데 해방신학을 전공한 홍인식 목사(멕시코 장신대 교수)가 있어 개신교 학자의 눈으로 본 해방신학을 소개받으려고 합니다. 이 원고는 홍인식 교수가 “지금여기” 라는 신문사로 부터 의뢰를 받아서 집필한 것을 저자와 신문사의 허락을 받아서 다시 연재를 하게 됩니다.

지난 8월 교종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종교와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첫째는 그의 문화적 배경이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이다. 특히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문화는 무엇보다도 그의 친밀성과 삶의 단순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교종의 행위는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신학적 배경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인정되는 해방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신학적 배경에 해방신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하면 그의 파격적인 행동을 신학적 행위로 간주할 때 그것을 우리는 해방적 신학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한국에서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만한 현상이다. 그것을 단지 교종의 한국 방문으로 인한 일시적인 분위기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교회(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하여)가 해방신학에서 나름대로 대안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한다.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해방신학을 변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해방신학에 대한 편견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이 오늘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현재도 그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는 해방 신학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는 그런 의미에서 절실하다. 레네 파댜(Rene Padilla 라틴 아메리카의 통전적 선교학의 대가)에게 데이튼 로버츠(Dayton Roberts)가 물었다. “만일 당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해방신학과 관련된 신학교에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당신을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파댜는 이 질문에 “바울의 답변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1데살 5,21-23)”라고 확신을 가지고 답변하고 있다. 해방신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먼저 나의 해방신학과 얽힌 사연과 그리고 해방신학과의 만남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의 해방신학과의 만남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분이 나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다. 지면을 통하여 나를 잘 소개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그런데 그 글에 댓글이 달렸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해방신학을 한 사람이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한국의 대도시에 있는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에 응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면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가진 자, 그리고 높은 사람들을 위한 목회가 아니라 소외되고 가난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를 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다음 질문을 한다. “해방신학을 하셨네요....” 나는 답변했다. “바로 해방신학이 나로 하여금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한 목회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실패했다.

내가 해방신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2년 파라과이에서였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나의 눈에 한 책의 제목이 들어왔다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당시 파라과이는 극심한 군사독재의 학정 밑에서 민중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억압을 받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에 나는 ‘벗어남’에 상당히 목말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해방, 그것은 얼마나 시원한 단어였던지! 주저 없이 책을 구입하고 단숨에 읽어 나갔다. 그 책이 바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었다. 스페인어 원어의 제목은 “해방신학: 그의 전망에 대하여”였다.

구티에레스의 저서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후 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와서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91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갔다. 파라과이에서 2년 정도를 선교사로 사역한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단했다. 정보를 탐색해 본 결과 아르헨티나에 이세뎃(ISEDET)이라는 개신교 해방신학의 산실인 신학대학이 있었고 거기에 후일 나의 스승인 되신 고 호세 미게스 보니노(Jose Miguez Bonino) 박사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아르헨티나로 날아가서 그의 집을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 후 아르헨티나로 거처를 옮겨 이세뎃에서 미게스 보니노 선생님의 지도로 해방신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우연히 시작되었던 해방신학과 나의 인연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해방신학과의 만남은 나의 삶을 변화시켰고 나로 하여금 진정한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를 늘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해방신학이 나의 삶에 있어서 주홍글씨로 남아 많은 경우 어려운 일과 오해도 겪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은 나의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 준 신학이다. 이제 몇 번에 걸쳐서 독자들과 함께 해방신학을 향한 여행길에 나서고자 한다.

해방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과의 연계성일 것이다.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는 극심한 이농현상을 경험한다. 많은 농촌인구가 대도시로의 유입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대도시 내에 대규모 빈민촌이 급격히 형성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사역의 현장에서 그들은 많은 질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성찰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해방신학이 태동하게 되는 상황이 형성된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삶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성찰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문제를 가슴에 품고 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현장과 그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해방신학이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Colombia, Medellin)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에서 발표된 문서와 19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의 저서, '해방신학'의 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해방신학의 역사는 그의 본격적인 시작을 위한 훨씬 이전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오늘의 해방신학 이야기를 해방신학의 태동을 전제로 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언급할 것이다.

해방신학을 낳은 두 가지 사건
첫 번째는 1511년 12월 21일 도미니코회 안토니오 몬테시노(Antonio Montesino) 신부의 강론이다. 안토니오 신부는 신대륙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인디오들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펼쳐나가게 된다. 안토니오 신부를 비롯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신부들은 신대륙에서 벌어지는 인디오들에 대한 학살과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사역을 펼치게 된다.

그는 1511년 12월 21일 대림절 제4 주간의 강론에서 요한복음 1장 23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라고 규정하면서 강론을 시작한다. "여러분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악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죄 없고 순진한 사람들에게 행한 폭행과 잔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죄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죄로 인하여 죽고 말 것입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권리와 정의로 순진한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고 잔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권한으로 평화롭고 순전하게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들을 향하여 전쟁을 하고 그들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 일을 계속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의 강론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74-1566)를 감동하게 만들었고 그 후 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한 학살과 참상을 고발하고 ‘그들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는 인간’임을 선포한 예언자로 살아갔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안토니오 몬테시노 신부와 라스 카사스 주교가 선택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서 우선적으로 다시 선택했던 신학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화형당하는 아투에이 추장.(사진 출처=de.wikipedia.org)

두 번째는 아투에이(Hatuey) 추장 사건이다. 아투에이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의 타이노(Taino) 부족의 추장이었다.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쳐들어오자 부족 사람들을 결집시켜 용맹스러운 투쟁을 벌인다. 그러나 잘 훈련된 스페인 군인들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의 부족은 전멸하게 되고 그는 수백 명의 남은 타이노 부족 사람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스페인 정복자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고 1512년 2월 2일 결국 그는 사로잡혀 화형을 당한다.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직전 그는 스페인 가톨릭의 종군 신부로부터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갈 것”을 제의 받는다.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신부에게 되묻는다. “여기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사람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는 나의 가족을 겁탈하고 그리고 나의 온 재산을 빼앗고 가축들을 탈취해 간 이 군인들도 천국을 가는가?” 신부는“당연히 이들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라고 답변한다.

아투에이는 즉시 “그렇다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다. 이들이 없는 지옥이 바로 천국이다.”라는 말과 함께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아투에이의 사건을 해방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Luis Rivera Pagán, "A violent evangelism: the political and religious conquest of the America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2.) 이 같은 아투에이의 천국과 구원에 대한 이해를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첫 번째 신학적 해석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아투에이와 같이 거대한 권력과 힘 앞에 쓰러져가면서도 당당하게 저항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갔던 억눌리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던 민중들의 의식과 행위[praxis]를 오늘의 상황에서 되살린 신학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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