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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 한국군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 드러나LA 타임즈 보도로 본 베트남 전쟁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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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23  23: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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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참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 파문

LA타임즈

지난 4월 초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알리기 위해 베트남 희생자 유가족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LA 타임즈는 16일 이들의 방문을 전하며 그 동안 은폐됐던 베트남 전쟁 중 일어난 한국군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을 보도했다. LA 타임즈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한국이 일본 정부에 현재까지도 그들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무엇을 남겼는지, 논쟁에 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로를 위협하는 한국군

기사는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한 방대한 군사 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3년 베트남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도 전쟁 중에 한국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국교정상화를 했으며 그 이후 양국 간의 무역량은 꾸준히 늘어나 FTA까지 체결한 상태이다. 양국 간의 경제협력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베트남전 참가국과 피해국의 정치적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앙금으로 남아있다. LA 타임즈는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미국의 막대한 경제지원과 박정희 독재체제의 공고화라고 전하며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대한 역사를 지우고 싶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고 기사를 마무리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학살을 했^다는 증거는 오래전 부터 나왔다.  1969년에 김종수 소위가 군사법원에서 학살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이후 15년형으로 감형된 것이 기록상 남아 있다. 그 밖에 위키피디아에 개설된 여러 한국군 학살 사건은 한번도 조사된적이 없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도 그렇고 전쟁기록과 개인적인 증언에서 나오고 있다. 정확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밀해제된 미국 문서보관소 NARA에서 증거를 입수했다는 고수정씨는 월남전에 대하여 많은 조사와 연구를 하여 한겨례 21에 기고 했다. 한국공군이 B-52기로 베트남 마을에 독가스를 살포했다고 주장한다.  진보 민족주의 계열에서 과거 일본군의 만행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의식하여 '우리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군사정권의 도덕성을 부각하다가 보니 이런 주장이 나온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설이 퍼지게 된 이유 중 하나론 군의 책임도 있는데 현역 군간부라는 자들이 정훈시간에 장병들을 대상으로 무용담으로 늘어놔서 정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실제로 있었다고 믿게 된 사람들도 많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이든 고위 군인이 떠드는데 신빙성이 실릴 수 밖에 없기 때문. 그래서 민간인 학살에 관해 논쟁이 벌어질 때 난 군대 있을 때 정훈시간에 직접 들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다만, 위의 김종수 소위의 사례처럼 실제 기록에 남아있는 사건도 있으니 정확한 정보 없이 학살이 없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반대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주장을 하는 것도 문제다.  결론적으로 사실관계는 철저히 밝히되, 만약 잘못된 과거가 있다면 겸허히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역사
일반적으로 베트민(Viet Minh)으로 알려진 베트남 독립동맹은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당으로 1941년에 조직되었다. 이 정당이 공개적으로 공산주의 정당임을 표방한 것은 1950년대 중엽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아서 베트남 독립동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지배권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946년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은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때까지 계속되었 다. 이 전투는 라오스 근처 베트남 국경의 작은 산 전초기지를 놓고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남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8년 동안의 전쟁이 끝났으며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지배에 손을 떼게 되었다. 1953년말 국민 대중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독립동맹에게 급속히 밀리고 있던 프랑스군이 라오스로 들어가는 민족주의자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디엔비엔푸 마을을 점령하자 이 전투가 일어났다.

이에 베트남 군대가 재빨리 디엔비엔푸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막자 공수(空輸)에 의해서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프랑스 군대는 자신만만했다. 그들은 베트남 독립동맹의 장군 보 구엔 지아프가 4만 명의 병력으로 포위하고 대포를 앞세워 저지선을 뚫고 들어오자 비로소 크게 놀랐다. 인력으로 우마와 자전거를 이용하여 대포와 중화기를 산까지 끌어올린 베트콩들의 끊질긴 정신과 전투력은 미국의 많은 원조에도 불구하고 1954년 5월 7일 이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 1만 여 명이 항복하고 5,000여 명이 전사했다.

결국 1954년 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려 프랑스와 베트남 독립동맹 사이의 정전협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양측의 무력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들은 북위 17°선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베트남 독립동맹군은 북위 17°선 북쪽으로 이동시킨 다음, 북위 17°선을 비무장지역(DMZ)으로 둘러싸인 군사분계선으로 정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떠나 남으로 혹은 북으로 떠났고, 프랑스군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마지막 철수를 시작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북베트남이 독립의 쟁취를 위해 프랑스와 치른 제1차 전쟁  미국의 비호를 받는 남베트남과 치른 제2차 전쟁으로 구분되며 제2차 전쟁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전장이 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베트남전쟁은 '30년전쟁'이라고도 부르며 2차 전쟁으로 구분한다. 1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46~1956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프랑스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하며, 2차 전쟁은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며 1960~1975년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국간에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1,2차에 일어난 전쟁을 통틀어 베트남전쟁 또는 30년 전쟁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들어와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며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인도차이나(Indochina)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불리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베트남 내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프랑스세력을 몰아내고 공산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도차이나공산당(Communist Party of Indochina)이 1930년에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베트남 독립연맹인 베트민(Viet Minh)을 결정하여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8월혁명'이라고 부른다. 8월혁명은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운동이지만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구성원이 결집하여 일어난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베트남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자각하였고 하노이, 후에, 사이공 등에서 성공적인 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해 9월 2일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하였다. 호치민은 맑스 사상을 공유한 공산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저항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1946년 말 하이퐁 항구에서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직접적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 무력 충돌을 제1차 베트남 전쟁(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은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9년간 지속됐다. 1950년대부터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프랑스는 베트민을 압도하지 못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실질적인 자신의 토지를 받은 농민들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고 그로 인해 병력을 동원하는 막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이런 토지라는 구체적인 성과물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전쟁참여와 게릴라전을 프랑스군은 감당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군사작전에서도 실패를 하였는데 라오스 국경 부근 디엔비엔푸에 집결하여 이곳으로 베트남군을 유인해 한번에 괴멸시키려는 계획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한곳에 집결된 좋은 목표물이 되고 말았다.

뿐만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제네바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국제회담(제네바극동평화회의)이 성사됨에 따라 프랑스는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베트민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된다. 전쟁이후 중국과 소련은 공산세력의 확대를 희망하며 베트민에게 1956년에 실시될 베트남 남북총선 이전까지 위도 17도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분할 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과의 전면적인 확전을 우려하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으로 이를 받아 들였다. 이에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구분되어 통치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쟁 개입
한편 남베트남에서는 미국의 후원을 받아 응오 딘 디엠(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1955년 건국되었다. 디엠 정권은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할량받은 농민에게서 다시 토지를 회수하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을 억압했다. 표면적인 안정을 이루었지만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것이며 점차 정권의 취약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디엠 정권은 제네바 협정에서 합의된 베트남 남과 북의 총선 실시 조항을 거부하고 미국의 후원을 받아 남베트남 내 노동당 운동원과 그 지부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시작했다. 1958년 12월 1일 대학살이 자행되었고 반공법이 시행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제2막은 노동당을 중심으로 응오 딘 디엠 정권에 대항하고, 베트남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제네바협정에서 약속한 통일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노동당 조직이 축소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남베트남에서는 메콩강 하류 델타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 점차 확산되었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 NLF)이 결성되었다. 디엠 정권(사이공 정부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때까지 베트남 북부에서는 본격 개입하지 않았다.

   
시가전 중 사로잡힌 베트콩 장교로 추정되는 응우옌 반 램(Nguyễn Văn Lem)을 남베트남 경찰서장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 즉시 자신의 권총으로 사살한다. 경찰서장과 같이 있던 AP통신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와 NBC 취재팀이 그 현장을 취재했다.
 
구정 공세는 전술적으로 북베트남의 완벽한 실패였다. 월남군만이라도 단독 북진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북진 통일이 가능했을 정도로 월맹 주력부대와 베트콩의 병력손실은 심각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베트남전 반전 시위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고, 미국이 미적거리는 사이에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던 월맹군이 기사회생할 시간을 주었다.
 
이 사진을 촬영한 에디 애덤스는 1969년 퓰리쳐상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뉴욕타임즈에 서장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서장을 내 카메라로 죽였다. 아직도 카메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기이다. 사람들은 사진들을 믿지만 사진들은 거짓말 한다, 조작되지 않은 사진들도 말이다. 사진은 오직 진실의 절반을 묘사할 뿐이다. 내 사진이 당신들에게 전달하지 않은 질문이 있다. "무더운 날씨에, 온 사방에서 혼란스러운 전투가 진행중일때, 소위 '나쁜놈'이 미군 두세명을 죽이고 당신 앞에 잡혀왔다면, 당신은 무엇을 했을까?"

1963년 사이공에서는 불교도들의 시위와 분신자살이 발생했고, 미국도 디엠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인가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1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디엠 대통령이 암살되고 인해 남베트남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새로 집권한 군사 정권이 NLF(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에 대해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자 미국은 남베트남의 혁명세력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남베트남 혁명세력의 공세가 점점 강해지자 미국은 베트남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관통하는 이른바 호치민 트레일(Ho Chi Minh Trail)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64년 8월 마침내 통킹 만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은 1961년 캐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결정으로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전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해방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간주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여 전투력을 상실시키고자 했지만 오히려 북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남베트남군이 더 이상 남베트남을 위해 싸우지 않고 오히려 북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1964년 9월 11일 대한민국은 비전투요원 이동외과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였으며 1965년 3월 10일 공병대가 중심이 된 비둘기부대가 파월되었다. 1965년 10월 맹호부대와 해군 청룡부대가 파견되었으며 1966년 백마부대 등 약 30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전쟁에 파견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은 군사 및 경제개발과 관련한 조치였으며 한국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1968년 NLF 무장 게릴라는 새해 테트(Tet:구정) 축제를 기점으로 사이공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미국의 주요시설을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했다. 베트남 노동당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내에는 전쟁이 패배할 것이라는 심리적 위축감이 팽배하게 되었다. 미군사령관 웨스트멀랜드(William C. Westmoreland)는 미군의 추가 파병을 요구하였지만 여력이 없는 미국은 이를 거절하였다. 여기에 반전을 요구하는 미국내 여론이 높아지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1968년 11월에 있은 대선에서 연임에 실패하자 새로 당선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이듬해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며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철수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17도 이남지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북베트남과 대치 국면을 유지해 나갔다. 한편 1968년 5월부터 평화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이 계속되었으나, 전황은 캄보디아(1970)·라오스(1971)로 확대되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1972년 3월 북베트남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자 미국은 B-52폭격기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1972년 여름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평화교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3년 1월에 있은 파리평화협정에서 미국은 정전협정에 합의하고, 미군 전쟁 포로를 석방해 줄 것을 북베트남에 요구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닉슨 체제의 정통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이에 따라 사이공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초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총 공세를 벌였고, 마침내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동 반 민(Dong Van Minh) 대통령이 항복했다.

베트남 전쟁에 미국은 55만 3천 명의 군 병력을 파견했고, 그 중 5만 8천 명이 사망했다. 남베트남 군은 25만 명 이상 사망했고 NLF 군도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백만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병력을 파견한 대한민국은 약 5000명이 전사하였고 1만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베트남 전체의 민간인도 2백만 이상이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라오스에는 파텟 라오(Pathet Lao)라는 공산집단이 생겨났고, 캄보디아도 1960년대 공산주의자들이 확대되는 현상이 발생하여 인도차이나 지역에는 공산주의가 확산되었다.

베트남 통일의 영웅 호치민
호치민은 지방의 가난한 학자인 구엔 신 후이의 아들로 태어나 킴리엔이라는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시절을 비참하게 보냈지만 14~18세에 휴에 있는 문법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뒤에 판티에트에서 교사로 지냈고 이어 사이공에 있는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1911년 그는 바(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증기선의 요리사 자리를 얻어 3년 이상을 선원으로 지내면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보스턴이나 뉴욕 등 미국의 도시를 여행했다. 1915~17년 런던에서 생활한 다음 제1차 세계대전 중반에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 정원사, 청소부, 웨이터, 사진 수정자, 화부(火夫)로 일했다. 1917~23년 프랑스에서 지내는 6년 동안 그는 구엔 아이 쿡('애국자 구엔')이라는 이름으로 적극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폈다.

   
호치민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그곳에서 수년 간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뒤 그는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감동적인 고별사를 실었다. 그뒤 그해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린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때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회에 제출한 그의 성명서 본문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압박받는 농민들(산업 노동자들과 대치되는 계층)의 혁명적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신념이 최초로 공식 표명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군 파병역사
추악한 전쟁 베트남전은 미국의 아시아 패권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미 이영희 교수가 저작한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미국은 통킹만 사건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밀미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미국의 죤슨 대통령과 캐네디대통령을 거치면서 미국에서 일어난 반미운동으로 더 이상 전쟁수행에 어려움에 직면한 미국은 한국군을 참전케 한다.

최초의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 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월맹 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군대 철수가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주재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데 합의하고,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의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한국군 파병은 8여 년 동안 총 34만 여명이 참전했다.

파병의 명암
한국의 베트남 전쟁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야당은 파병에 대해 반대했고, 1966년 추가파병시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및 정부측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이유는 맹호·청룡 부대의 파병만으로도 미국이나 자유세계에 대한 신의를 다한 것이며,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빼돌린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세계 여론이 베트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교에서 한국의 입장이 난처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므로 더이상의 파병이 있을 때는 한국에 뚜렷한 국가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국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국회에서는 이 보장의 효력 등에 대해 많은 시비가 있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한국은 월남파병으로 1960년대말부터 1970년대초까지 많은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했으며, 군사기술 및 군장비 등의 현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군은 월남전으로 말미암아 현장 전투력을 획득했고 장비의 현재화를 이룬다. 당시 한국국군의 개인화기는 M1이라는 미국군의 체력에 맞춰서 생산된 장총을 섰다. 그러나 월남전 때문에 개발된 M16 개인화기는 정글에서 유용하고 경량화된 무기로 한국군이 귀국을 하면서 갖고 오게 되고 그후 자체 생산을 하게 된다. 군의 사기와 진급 전투력 향상 못지 않게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다. 월남전쟁중 유흥가와 월남여성들과의 동거로 낳은 미혼모들도 있었다.

그 외에도 경제적으로는 한진구룹등 대기업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전쟁물자를 수송하게 되므로 경제적 효과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고엽제등 전쟁수행과정에서의 후유증도 이루 말할 수 없다. 미국군도 영화 “디어헌터”에 소개되었듯이 육체적(상이용사)와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프래툰” "지옥의 묵시록“ 등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우리는 제네바로 간다“ 등이 있다.

전쟁영웅도 만들어졌다. 주월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맹호부대 이세호 대장등은 당시 박정희 시대에 반공국가를 만드는데 일조한 전쟁영웅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병으로 얻은 경제적 효과인데 말하기를 “장교는 돈벌러 갔고 하사관은 싸우러 갔고 사병은 죽으로 갔다” 라는 말이 있었다. 또 한국군 1인당 미국이 준 전쟁비용을 국가가 가져가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쓰여젔다는 설도 있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이제 전면 조사이뤄져야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도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인민군대지 1969. 10. 24)"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 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이는 젊은 군인들이 아군과 적군을 식별할 수 없는 정규전 형태의 전쟁이 아닌 일에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있어 저지른 폭력일 수도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가한 잔혹 행위에 관한 주제는 전쟁 당시 베트남에서 대학원생이던 고수정 기자가 1990년대 후반, 뉴스잡지 한겨레 21에 쓴 기사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한국군이 학살을 자행했다는 소문을 들은 후, 고 씨는 정부 문서를 연구했고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연이은 기사에서 고 씨는 한국군에 의해 모인 후 학살당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으며 8천 명에 이르는 양민이 죽었다고 추산했다.

김 씨와 다른 이들은 베트남전에서 약 5천 명의 한국군이 사망했으며 일부 군인은 다치거나 미군이 베트콩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빽빽한 정글을 없애기 위해 동원한 에이전트 오렌지와 같은 고엽제에 노출됨으로써 생긴 질병과 함께 돌아왔다고 말한다. 김 씨는 자신은 전투에서 단지 가벼운 상처만 입었으나, 귀국한 이후로 심한 기분의 변화와 우울증과 싸워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했는지 이해한다고 말한다.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군부 독재자 박정희는 1950-53년에 걸친 한국전에서 자신들을 도우러 온 미국인들에게 빚을 졌고 한국은 베트남의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전쟁에서 미국을 도와 이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은 동맹이 되기를 원했다는 박정희의 주장과 함께, 학자들은 남한 정부가 또한 베트남에서의 분쟁을 남한의 군사와 경제 발전의 구실로 보았다고 지적한다. 한국군의 큰 희생은 미국으로부터의 수십억 달러 지원금과 차관 그리고 보조금으로, 또한 박정희 독재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으로 이어졌다.

“박정희는 동남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한국의 약함을 뒤바꾸고 강하고 주체적인 나라로 가는 열쇠라고 인식했다”고 베트남전에서 한국의 역할이라는 박사 논문을 쓴 뉴저지의 라마포 컬리지 조교수, 곽 태양씨가 말했다. 한국의 학자들은 정부가 많은 양의 군사 기록에 접근을 금지해왔고 한국 군사들의 대학살 혐의를 조사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 추잡한 역사를 조사할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최호림 서울 동국대학교 교수이자 동남아와 한국 관계 전문가는 말했다. “한국정부는 그 전쟁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하고 싶을겁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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