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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에서 배우는 죽음과 부활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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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16  14: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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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사건에서 배우는 죽음과 부활의 신학

* 이 원고는 월간 기독교사상 4월호에 게재된 원고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서 올립니다. 

박재순 목사(씨ᄋᆞᆯ사상연구소 소장)
   
 

세월호 사건에서 죽은 304명의 죽음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2년 전 세월호에 타고 있던 476명 가운데 304명이 바다에서 죽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선원들의 안내방송을 듣고 배에 머물렀던 304명은 모두 죽었고 스스로 배에서 탈출한 소수의 사람들만 구조되었다. 온 국민이 304명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운데 국민을 지키고 구조해야 할 정부당국자들과 기관들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국민을 보호하고 구조하는데 정부와 기관들이 참으로 무책임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다. 승객들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선원들은 승객들을 버리고 빠져나와서 목숨을 건졌다. 왜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에 남아 있게 하고 자기들만 서둘러 빠져나왔을까? 배가 기울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해경이 보낸 구조선 1척은 규모가 작아서 승객들을 모두 구조할 수 없었다. 승객들을 먼저 구조하면 선원들은 구조 받을 기회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선원들은 승객들을 배에 남게 하고 자기들만 먼저 빠져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 있던 어부들이 어선을 끌고 와서 100여명을 구조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정부당국과 구조기관 책임자들과 선원들의 무능력과 뻔뻔함이 극적으로 드러났다. 온 국민이 함께 슬퍼하면서 국가재난구조기관인 해경과 정부책임자들과 선원들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다. 대통령과 정부책임자들은 근본적인 재난구조대책을 마련하기로 거듭 약속하고 다짐하였다. 대통령은 해경을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기관을 만들었고 국회는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고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죽은 학생들과 그 학생들의 학부모를 조롱하고 모독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해경을 해체하고 새로운 기관을 만들었으나 세월호 참사의 구조 책임자들이 그대로 새로운 기관의 요직을 차지했다.

당시 해경의 현장 책임자들은 세월호 사건에서 구조활동에 나섰던 민간잠수부들에게 사고와 손해의 책임을 전가하거나 뒤집어 씌웠고 경찰과 검찰은 민간잠수부들을 형사법정에 세웠다. 세월호 특별조사 위원회의 예산과 조직은 대폭 축소되었고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서 정부와 여당은 협조하기는커녕 훼방을 놓는 것 같다. 왜 이 나라 정부와 구조기관들은 국민을 보호하고 구조하는데 이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하며 성의가 없는가? 국민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은 잘 하지만 국민을 받들고 지키는 일에는 열정과 생각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말엽의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 일제의 식민통치, 군사독재정부를 돌이켜보면 국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민주정부의 경험과 역사가 없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에서 304명의 죽음은 한국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 죽음은 우리의 정체와 실상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한국사회는 스스로 개혁하고 새롭게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았다. 온 국민의 마음이 뜨거웠고 낡고 부패하고 무능한 잘못된 관행과 기풍을 바로 잡고 새롭게 나아가려는 열망과 의지가 가득 했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정치사회의 낡고 부패하고 무능한 관행과 기풍을 바로 잡을 동력과 기회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받들고 지키는 민주정부, 민주국가사회의 길은 멀어만 보인다. 304명의 죽음을 헛되게 할 것인가? 앞으로도 그런 죽음이 거듭 되풀이 되게 할 것인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적어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세월호의 죽음에서 생명의 길을 배우고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1~2년 사이에 잊고 말았다면 부활신앙도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 속에서 부활생명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을 열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갈 수 있었다. 인간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죽음 속에서 죽음을 통해서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 것뿐이다. 죽음이 만일 생의 마지막이라면 죽음으로 생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하나님도 없는 것이고 인생도 허무하고 덧없는 것이다. 잠시 살다가 덧없이 죽고 마는 것이라면 인생은 참된 사랑도 믿음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것이리라.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성경도 기독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죽음 속에서 죽음을 통해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 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신앙을 과거의 예수와 관련해서만 이해하는 사람은 교리적이고 신화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리적 신화적 신앙은 과거의 시간에 갇혀 있고 믿는 자들의 주관적 신념과 주장에 머물러 있다. 이런 신앙은 역사와 사회 속에 살아 있는 신앙이 될 수 없다. 기독교 성경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설명하는 핵심어는 ‘씨알’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밀알로 번역되어 있지만 성경원어는 ‘일반적인 곡식의 낟알’(코코스 투 시투) 다시 말해 ‘씨알’이다. 빵과 밀을 주식으로 하는 유럽인들은 이것을 밀알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할 때 원어에서 번역하지 않고 영어성경에서 번역했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도 ‘밀알’로 되었고 ‘밀알’이 기독교 신앙을 상징하는 말로 기독교 밖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것은 문화적 주체성을 잃은 잘못된 번역이다. 우리는 빵과 밀을 주식으로 하지 않고 쌀과 보리를 주식으로 한다. 원어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식생활 문화에 맞게 주체적으로 번역한다면 당연히 ‘씨알’로 번역했어야 한다. ‘씨알’은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면서 보편적인 말이기 때문이다.

씨알은 흙 속에 묻혀서 깨지고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음을 통해서 새롭고 풍성한 생명에 이른다는 점에서 씨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 열쇠 말이 되었다. 씨알은 참으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 깊고 높은 뜻을 드러내는 말이다. 씨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신화적 교리적 신앙에서 벗어나고 기독교의 울타리서 벗어나 역사와 사회 속에서 더 나아가 생명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해하게 한다. 씨알은 죽음을 통한 생명진화의 신비와 깊이를 보여준다.

씨알과 생명진화: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진화가 일어나기 전에 생명은 원핵세포의 형태로 다시 말해 세균의 형태로 존재했다. 세균들은 몸집이 커지면 스스로 쪼개지는 방식으로 번식했다. 세포분열의 방식으로 번식했기 때문에 원리적으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몸을 쪼개는 방식으로는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쪼개져도 동일한 세균이 되었다. 아주 낮은 차원의 생명체였던 세균들의 번식방법은 물질적인 성질과 원리를 따른 것이다. 물질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 물질은 아무리 쪼개도 똑 같은 물질이다. 쪼개서 수가 늘어난다고 해도 쪼개는 방식으로는 물질의 본질적 변화가 없다. 오랜 세월 세포분열의 방식으로 번식하던 생명세계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으면서 진핵세포와 다세포생물이 생겨났다. 진핵세포와 다세포 생물은 자신의 몸을 쪼개는 방식으로 번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씨알을 통해서 번식하게 되었다.

씨알을 통해서 번식하면서 개체의 생명체들은 죽음을 감수하게 되었다. 죽음을 감수하면서 씨알을 통해서 번식함으로써 생명의 진화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생명진화과정에서 죽음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더욱 깊고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점에서 죽음은 생명진화의 필수적인 계기이고 방법이다. 씨알은 죽음을 통한 생명진화의 신비와 깊이를 드러내는 실재이며 상징이다. 만일 죽음이 없었다면 생명은 세균과 곰팡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을 통한 생명진화가 없었다면 아름다운 꽃과 과일, 새들과 포유류,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그리고 인간들에게 죽음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명진화의 목적은 물질적 육체적 생명을 연장하는데 있지 않고 깊고 풍성하고 다양한 생명에 이르는데 있었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의 깊이와 풍부함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수 십 억 년 생명진화 과정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죽고 낳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면서 생명의 진화와 고양을 이루어 왔다. 생명은 죽음을 넘어 영원히 사는 길을 걸어왔다. 모든 생물학적 죽음에는 새롭고 높은 생명을 낳으려는 염원과 기대가 담겨 있다. 생명의 죽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생명을 혐오하거나 절망하기 때문에, 삶에 대해서 좌절하고 체념하기 때문에 죽는 것은 진정한 생명의 죽음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의 값과 뜻이 드러나고 삶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이 확인되어야 한다. 새 생명을 낳기 위한 거룩한 열망과 자기희생이 죽음 속에 담겨 있다. 씨알은 죽음을 통한 생명진화의 신비와 지혜를 보여준다. 깨지고 죽음으로써 더 크고 풍성한 생명을 낳는 씨알은 전체 생명의 진화와 고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생명의 진리를 보여주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정신적이고 영적인 생명에 이르려는 염원과 희망을 나타낸다.

세월호 참사와 씨알의 신학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로 보고 여기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 그만 잊자는 이들도 있다. 교통사고로 죽었건 병으로 죽었건 나이 들어 자연스럽게 죽었건 죽음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라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죽음은 생명의 깊이와 높이를 드러내는 거룩한 사건이다. 더욱이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다. 거기에는 기독교 신앙과 복음을 왜곡하고 악용하여 부와 권력을 누린 구원파가 있었고 수 백 명의 죽음 앞에서 무책임과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준 국가구조기관들이 있었다. 온 국민이 함께 슬퍼하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분노하면서 여러 달 동안 한 마음이 되었다. 어떻게 세월호 참사를 잊으라고 하는가?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모든 죽음은 생명의 깊이와 높이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새롭고 큰 생명을 낳는 계기다. 모든 죽음에는 유한한 생명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있고 죽음의 안타까움과 슬픔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움과 열망을 품고 있다. 죽음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씨알을 심는 것이다. 죽음의 절망과 슬픔이 깊을수록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크다. 죽음을 통해 생명의 깊이와 진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다. 개체의 죽음을 통해서 전체 생명의 진화와 고양에 이르고 물질(기계)과 육체(본능)의 극복과 초월을 통해 정신과 영의 깊이와 고양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다.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이를 수 있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철학이고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제대로 사는 것이 종교다. 철학과 종교는 죽음을 생각하고 연습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만큼 인간은 성숙하고 존귀해진다. 어린 아기의 탄생이 춥고 캄캄한 밤을 몰아내며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듯이, 어른의 죽음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처럼 장엄한 일이어야 한다. 한국인처럼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민족도 없다. 한국인은 죽은 사람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 앞에서는 맘을 열고 하나로 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현대사의 위대한 사건들은 모두 죽음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동학은 억울하게 죽은 교주 최제우의 신원운동으로 힘을 얻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갑작스러운 고종의 죽음으로 민족의 감정과 의지가 크게 고양되었을 때 삼일운동이 민족 전체의 반일독립운동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고등학생 김주열의 참혹한 죽음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7~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에서 큰 자극과 영감을 얻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죽은 수 백 명의 열사들도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시대를 여는 데 큰 동력이 되었다.

부활은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서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것이다. 먼저 죽어가지고 부활하는 것이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는 참된 부활이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왔다. 생명진화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신앙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씨알은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고 보다 높고 풍성한 생명세계를 열어온 생명진화의 길과 진리를 보여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신앙을 나타낸다.
 
죽음을 통한 인간의 성숙과 부활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삶은 진실할 수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불안에 떠는 한 의젓하고 자유로울 수 없다. 살고 죽는 일에 대한 준비와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어린이처럼 미성숙한 삶을 벗어날 수 없다.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살아야 어른으로 살 수 있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을 논리적으로 이치에 따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찾았다. 민주화 과학기술산업화 세계화를 동시에 경험하는 21세기의 인간에게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은 생사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돈과 기계가 지배하는 오늘 인간은 더욱 미성숙해졌다. 농촌마을공동체서 자연생명의 질서와 순환에 맞추어 살던 때에는 가족과 마을공동체의 품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성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퇴계나 율곡 같은 선비들도 죽음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하고 살았기에 의젓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오늘 인간은 병원에서 기계장치에 매여서 또는 독방에서 홀로 비참하게 죽는다.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오늘의 산업기술문명은 산술계산과 기하학에 과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산술계산기다. 산술계산과 기하학적 도형의 수학적 세계는 수와 논리와 도형이 지배하는 순수 관념의 세계다. 이런 수학적 원리와 방법으로 물질적 우주세계, 돈과 기계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생명과 정신의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고 표현할 수 없다. 산술계산의 세계는 낳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그것은 생명과 감정과 영혼이 없는 세계다. 인공지능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그것은 결코 스스로 깨지고 죽음으로써 더욱 크고 높은 생명을 낳는 씨알의 진리와 길을 알지 못하고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지 못한다. 인공지능의 산술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기계적 인간들은 세월호의 참사를 통해 생명진화와 인류역사의 길과 진리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보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씨알의 죽음과 신생의 진리를 삶 속에서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계문명의 성숙한 주인과 주체로 살 수 있고 기계와 돈을 넘어서 생명과 영의 높고 깊은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박재순의 최근 도서 소개 "생명의 길, 사람의 길" (홍성사 간)

출판사 서평
   
 

새 시대, 새 인간을 위한 새로운 사상, “깨지고 죽음으로 생명은 꽃피고 열매를 맺는다”

1. 세계평화문명으로의 대전환

대도시 한복판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부모가 자녀를, 자녀가 부모를 돈 때문에 죽였다는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시대이다. 도덕적 타락을 개탄하거나 상대를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근본을 묻는 목소리는 드물다. 《생명의 길, 사람의 길》은 이성과 영성의 자각으로 시작된 기축 시대, 2,000년 넘게 지속되어 온 문명이 그 생명력을 다하고 있는 현상으로 오늘날을 진단한다. 민주와 평화의 시대, 나와 하늘 사이에 가로막힌 중개자가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고 진단하는 저자는 씨알사상을 통해 생명과 인간을 새롭게 보고자 한다. 생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길을 제안하고자 한다.

박재순 박사의 우리 철학 시리즈 제4권인 《생명의 길, 사람의 길》은 총 열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을 큰 나라로 섬기던 오랜 세월을 지나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어서는 과정과 그 한계를 한국 현대사를 통해 들여다보며(1장), 안창호,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을 거쳐 씨알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정리한다(2장). ‘씨’와 ‘알’을 나타내는 평범한 말(‘씨알’)에 담긴 씨알사상의 의미를 돌아보고(3장), 씨알사상의 뿌리인 유영모의 천지인 합일 사상을 검토한다(4장). ‘주체’와 ‘전체’라는 열쇠말로 씨알사상의 주체론을(5장), 생명의 피어남으로 ‘평화론’을 펼쳐 보이며(6장), 몸, 맘, 얼의 통일을 통해 이루는 세계통일을 주창한다(7장). 또한 서로 섬김으로 서로 주체가 되는 지도력을(8장), 공자, 노자, 석가, 예레미야 등 기축 시대 영성의 위대함을 이어받으면서도 민중이 주체가 되지 못한 한계를 극복하는 씨알사상의 새로움을 밝히며(9장), 민이 주체가 되는 정치, 경제, 세계화를 씨알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내기를 소망한다(10장).

2. 인간, 생명, 문명을 이해하는 미완(?)의 사상

씨알사상은 동서양 철학과 기독교, 우리 민족 고유 사상을 통합한 우리의 철학이자 사상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논하는 인간론, 다른 생명과의 관계를 논하는 생명론, 우리 시대 너머를 상상하는 문명론이 담겨 있다. 사람은 생명 진화의 사다리 맨 끝에 선 존재다. 사람 속에 무궁한 힘과 지혜가 있으며 물질과 몸, 본능을 뚫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갈 책임 또한 있다. 몸의 욕망을 넘고 나를 부정하고 비움으로써 전체의 하나 됨으로 갈 수 있으며, 생명 역시 스스로 비우고 버림으로써 과거부터 오늘까지 향상의 길로 나아갔다. 흔히 이해하듯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아닌 공생과 협동의 길을 생명은 걸어왔으며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생명과 인간의 길을 밝혀 주어야 할 철학과 종교는 혼란에 빠졌고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산업문명의 진보를 넘어서고 이끌어야 할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씨알사상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동서문명이 합류하면서 민중의 주체적 자각운동이 일어났다고 보며 여기에서 새로운 문명의 희망을 찾는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각하고 깨어남으로써 만들어 가는 새 문명의 사상이자 다듬고 완성해 가야 할 사상이다.

저자 박재순은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다.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경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의 지도 아래 카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공부했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국제성경주석서를 번역하면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고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씨알사상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보람과 사명이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냈으며,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사상》, 《다석 유영모》,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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