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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의 평화의 바람4.3 항쟁에 대한 기독교 연구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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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06  1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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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서의 평화의 바람

최근 각종 메스컴에 제주도가 뜨고 있다. 교통이 복잡한 서울을 떠나 이국적인 분위기의 환경으로 인하여 각종 모임들도 예전보다 많이 열리고 있다. 지난 5월에는 CWM 세계 총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강정마을이 해군기지화 하는 것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유명한 구럼비 마을 지키기 운동으로도 유명하다. 우리교단 출신의 송강호 대표가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평대리 일대에 들어서는 제주 제 2 신공항부지 결정으로 제주도 땅값과 건물들은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우리 근현대사에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섬이자 기독교선교에서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제주도에 적지 않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특히 우리교단 교회들이 많이 세웠졌다.  이번에 제주도에서 제주 4.3 항쟁에 대한 기독교 차원의 연구와 발표가 있었다. 이 모임은 “2016 제주평화포럼” 으로 지난 216년 7월 28일(목)에 서귀포시 강정마을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열렸다.

 장신대 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소장: 임희국 목사)와 제주사랑 선교회가(회장: 서성환 목사)가 공동으로 개회한 이 행사는 “제주 종교개혁 500주년 콜로키엄” 의 일환으로 열었다.
   
                       * 제주 4.3 유족회 양윤경 회장과 면담하는 포럼 참가자들

 임희국 교수는 이 모임의 초청 글에서

 평화의 섬’ 제주도입니다. 이 섬은 -역사 속에서- 조선시대 귀양살이 억울한(?) 죄수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고, 이 섬은 1950년부터 시작된 3년 전쟁 기간에 들어온 수많은 피난민을 푸근하게 돌봤습니다. 따뜻하고 푸근한 평화의 섬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평화로운 삶을 그리며 이 섬으로 찾아옵니다. 유채꽃이 노란색을 뿜어내며 온 섬을 뒤덮는 계절이 되면, 우리는 노란빛 피조세계의 평화를 맛봅니다.

이 섬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외세에 정복되었고 그때마다 이곳 사람들은 억압받고 유린당했습니다. 그래서 한 맺힌 사람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섬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평화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이 점을 인류의 역사가 증언해 주는바, 로마시대의 세계평화(Pax Romana)는 참된 평화가 아니었고 무력으로 침묵을 강요한 위장된 평화였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부른 찬송처럼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로다.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공적신학과교회연구소’는 작년부터 여러 차례 다양한 분야에서 평화세미나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평화의 섬 제주도에서 “제주사랑 선교회,” “제주 종교개혁 500주년 콜로키엄”과 더불어 첫 번째 ‘평화포럼’을 갖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의미 깊고 유익한 포럼이기를 기대합니다“ 라고 쓰고 있다.  

행사의 1부 사회는 안광덕 목사 (성산포교회)가 했으며 성요한 신부 (성공회)의 평화 노래 배우기로 시작하여 박경수 교수(장신대)의 기도가 있었다.  

2부는 장신근 교수(장신대)의 사회로 먼져 이형기 박사 (장신대 명예교수, 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 명예소장) 가 “교회의 정체성과 평화운동(2016): 몰트만 신학을 중심으로” 발표를 하였다.

두 번째로 김명용 박사 (장신대 총장, 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 명예소장, 온신학회 회장 및 생명신학연구소 소장) “온신학의 평화신학” 을 들은 후 질의와 응답의 시간이 있었다.

 3부는 서성환 목사(사랑하는교회)의 진행으로 제주 측에서 화제의 내용인 “제주4.3사건 속의 개신교” 에 대하여 김인주 목사(봉성교회)와 송강호 박사 (개척자 대표)가 “강정 해군항, 그 경과와 전망” 을 한후 질의와 응답 시간을 갖었다.  

4부는 종합토론으로 장신대 임희국 교수(공적신학과 교회연구소 소장)사회로 진행했다. 이 날 귀한 발표들이 많이 있었지만 지면의 한계로 그중 김인주 목사(제주 봉성교회)가 발표한 “제주 4.3사건 속의 개신교”  원고만 저자의 허락을 받아서 게재한다. 
     

* 김인주 목사는 서울 고등학교와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으며 장신대졸업후 독일 에어랑겐대학에서 수학한후 지금까지 고향인 제주도에서 목회하고 있다.  전체 원고중 전반부만 소개한다.  필요한 분들은 김인주 목사에게 부탁하기기를 바란다.   

제주 4.3사건 속의 개신교 

김인주 목사(봉성교회)

1. 제주4.3사건 당시 각 종단들의 관련사실과 해석은 불교와 천주교 측에서는 연구가 다소 진전되었으나, 개신교는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이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천주교회 100년사>(2001) 편찬을 통하여서, 4.3사건과 관련된 천주교의 경험을 일차 정리하였다. 2013년 12월 8일, 제주4.3 심포지움을 통하여 4.3과 천주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박찬식은 이 기회를 통하여 정리한 내용을 발전시켜, “제주4.3사건 당시 교회의 역할”을 발표하였다. 제주의 천주교회에는 상주하는 외국인 신부들이 3명이 있었다. 미군과의 접촉이 개신교에 비해 훨씬 쉬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회담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협력, “유지사건” 연루자들을 위한 구명운동, 신성여중 교사들이 선무 공작대로 활동했던 일 등 당시의 천주교의 역할이 정리되었다.

양봉철은 “제주4.3과 서북 기독교”가 서북청년단,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등을 다루었다. 최태육은 “남북분단과 6.25전쟁 시기(1945-1953)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연구”에서 제주4.3사건도 면밀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2. 개신교와 좌익 세력 간의 갈등 혹은 충돌은 1930년부터 나타났다. 이러한 경험이 4.3사건에서 양측의 대립 혹은 분명한 선긋기의 배경이 되었다.  

최흥종 목사(1880-1966)는 광주를 대표하는 목회자였고, 교회 밖에서도 크게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1929년 6월 모슬포교회에 부임하였고, 1930년 11월 14일 제주노회를 분립할 때에 노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미 총회장을 역임한 이기풍 목사 제주성내교회에서 두 번째로 사역하고 있었지만, 노회를 이끌어갈 책임을 최흥종이 떠맡았다. 이기풍은 다음 해에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최흥종은 2년 동안 모슬포교회에서 시무하였으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광주의 한센환자들의 요청에 응하여, 1931년 7월 19일 그는 광주로 돌아갔다. 

제19회 총회(1930) 보고서에는 “제주 모실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난이 있사오며”라고 어려움을 적고 있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모슬포의 청년들이 1929년에 마을의 당을 파괴하였다. 1930년에는 교회에 몰려가 예배를 방해하였다. 주동자는 이운방(1909-2013)과 잠시 고향을 방문한 강문석이었고, 오대진, 이도일, 이신호, 진해생, 이기효, 변신흠 등이 합세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던 강흥주와 허생재 등 젊은 장로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강 장로는 갈비뼈가 두 개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였다. 가해자들은 고소되었고, 벌금을 물거나 징역을 살았다. 

강태국(1904-1988)도 이 시기에 모슬포에서 좌익 청년들의 습격으로 크게 폭행당했던 일을 기록하였다. 그는 숭실전문학교 재학중이었는데, 방학에 고향을 찾았고, 모슬포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사회주의 청년들이 다수 청중석에서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사상적인 주제로 설교하였다. 그랬더니, 밤에 수십명이 몰려와서 죽지 않을 정도로 때려놓고 갔다. 

서서평 선교사(1880-1934)도 선교보고서 "제주에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염려하였다. 

죽음의 위협에 처하거나, 심하게 얻어맞은 청년과 목사도 있습니다. --- 제주의 내 친구들 중에 몸에 고난의 표를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고난의 증거입니다. 일본에 갔다 온 제주인들 중에 볼셰비키의 치명적 사상에 빠져 돌아오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번져갑니다. 교회를 포위하고 지도자들을 때리는 사람들입니다. 매우 악명 높은 공산주의 지도자가 섬에 사는데, 일본 정부의 요시찰 대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자들이 우리 주님의 깃발로 승리하였습니다. --- 그러면 왜 저들을 염려해야 합니까? 심각한 가난, 엄청난 무지, 훈련받은 지도자가 없는 점, 고립된 환경, 열광적인 공산주의자들의 난폭한 움직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귀신을 무서워하며 미신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여인들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좌익의 반감은 4.3사건에서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도종 목사, 허성재 장로 등 그리스도인들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3. 당시 시국을 보는 입장은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하게 표출되었다. 그러나 전쟁과 분단의 고착화로 말미암아 단일한 견해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제주에 상주하던 천주교 선교사들은 4.3사건을 공산분자들의 폭력적인 사태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스위니 신부는 경찰의 폭력과 테러에서 사건이 커졌다고 이해하였다. 

폭력적인 진압이 진행되면서, 많은 인명이 다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제11연대장 박진경은 무자비한 살상으로 전과를 올렸다. 딘 군정장관은 가차 없는 그의 성격을 두고서, 조선에서 가장 탁월한 지휘관으로 칭찬하였다.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6월 17일에 진급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6월 18일 새벽에 숙소에서 부하들의 총에 살해되었다. 

면밀한 수사를 진행하던 중에, 한 투서에 의해서 실마리가 풀렸다. 육사 3기 문상길 중위와 선임하사를 잡으면 전모를 밝힐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었다. 손선호 하사가, 무모한 토벌전으로 동포를 학살하는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한 것으로 밝혀졌다. 관련자들이 체포되었고, 7월 12일 서울로 압송되어,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 4인은 총살형으로 선고되었다. 그러나 각계에서 총살형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으므로 신상우, 배경용은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결국, 문상길과 손선호는 9월 23일 오후 15:35에 총살되었다. 두 사람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더 큰 참화를 막기 위해 상관을 살해하였다고 말하였다. 문상길은 충남이 고향이었고, 그의 아내는 모슬포 출신이었다.

김익렬과 문형순 경찰서장의 사태 이해, 조남수 목사의 선무 공작 등도, 당시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4. 4.3사건으로 희생된 개신교인들의 수는 당시 집계된 17명에서 큰 변화가 없다. 희생자들 중에는 토벌대에 의해서 사살된 사람도 4명이 있다.  

당시 제주노회장으로서 강문호 목사는 총회에 아래와 같이 참상을 보고하였다.  

제주도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져 사상자가 양민 1,512명, 반도가 수만 명, 가옥 소실은 34,611동, 이재자는 86,757명, 학교 소실은 초등학교 175학교, 중등학교 11개교, 교회 관계 피해는 피살자가 15명인데, 이도종 목사는 작년 6월 16일 교회로 가던 도중에 납치된 후 종적이 없사오며, 허성재 장로는 중학생에게 살해를 당하였고, 서귀포교회 임 씨는 예배당 소재를 하던 중 폭도에게 피해를 당하였고, 교회 건물 피해는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등 4처 예배당이 소실되고, 서귀포, 세화 등 2처의 목사 댁이 소실되었고, 교인 가옥 소실은 서귀포 1, 중문 1, 금성 3, 협재 6, 삼양 15, 제주읍 1, 외도 3, 남원 3동 이상 33호이옵고, 농작물 형편은 전 경작지의 5분의 1에 불과하오며, 총성이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민중은 공포에 싸여 실로 생지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에 당하여 중앙정부에서는 반도 진압에 주력함과 동시에 이재민 구호에 힘쓰고 있고, 신·구 양 선교사 단체에서는 구호물품을 가지고 와서 분급하기도 하며 진상을 조사하는 등의 활동이 있으나 같이 동포 된 우리 민족에서는 아직까지 개인이나 단체로서 여기에 대한 여하한 동태도 없음은 실로 유감천만이외다. 민족의 동맥이 되어야 할 우리 총회는 급속한 시일 내에 위문단을 특파하여 진상을 조사하시며 조국의 평화 수립과 아울러 동포의 구령을 위하여 유효한 대책을 강구하여 주시옵고 또 총회로서 중앙정부에 종군목사제도 설치를 건의하여 주시옵기 자에 청원하오니 조량하시옵소서. 

강문호 목사의 청원서에 따라 총회는 위문단 파견을 결의하고, 총회장 최재화 목사와 서기 유호준 목사가 제주도로 와서 각 교회를 다니면서 교인들을 위로해 주었다. 이때 총회 파송 위문단이 주로 위로하여 준 사람들은 4·3사건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은 희생자 혹은 순교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강문호 목사는 피해자를 17명으로 집계하였다. 

직분

성명

교회

피해 상황

목사

이도종

화순

공비에게 납치되어 피살됨

장로

허성재

모슬포

야간에 자택에서 공비에게 피살됨

집사

부양은

김녕

야간에 자택에서 공비에게 피살됨

집사

진시규

중문

노중 공비에게 납치 피살됨

교인

오대호

중문

자택에서 공비에게 납치 피살됨

교인

진학인

중문

노중 공비에게 납치 피살됨

교인

임명선

서귀포

교회당 소각시 공비에게 피살됨

교인

오병필

서부

자택에서 공비에게 피살됨

교인

오병필 동생

서부

자택에서 공비에게 피살됨

교인

최순임

모슬포

승차 운행도중 공비의 습격으로 피살됨

교인

허영국

모슬포

국군의 오발로 인해 사망함

교인

고창선

모슬포

국군의 오발로 인해 사망함

교인

권찰

삼양

자택에서 공비에게 피살됨

교인

학생

삼양

자택에서 공비에게 피살됨

교인

김승은

두모

승차 운행도중 공비의 습격으로 피살됨

교인

지성익

대정영락

은신 중 폭도의 혐의를 받고 국군에게 피살됨

교인

지성익 동생

대정영락

은신 중 폭도의 혐의를 받고 국군에게 피살됨

 희생의 유형별로는 산사람에게 납치되어 순교한 사람이 4명, 자택에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산사람에게 피살된 사람이 6명, 국군에게 피살된 사람이 4명, 승차 중 산사람의 습격으로 피살된 사람이 2명, 교회당 소각 시 함께 피살된 사람이 1명이다.

 5. 공산비적은 당연히 죽여야 한다는 진영논리 혹은 십자군적 공격성은 이후 월남전 참전,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강정 해군항 건설, 성주 사드 배치를 두고 생기는 갈등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토벌대의 지휘관들은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한 장교들이었다. 그리고 육사를 수료하고 막 임관한 초급장교들이 중대장 혹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중에 채명신, 이세호 등이 있었다. 당시 간접적으로 제주의 사태를 이해했던 정승화의 경우에도, 1999년-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는 과정을 보며, 일인시위를 통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기도 하였다. 

채명신, 이세호는 20년 정도 지나면서 육군의 유수한 지휘관으로 성장하였고, 파월한국군사령관으로서 활약하였다. 파월장병들 편에 서서 그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하기도 하였다. 채명신은 장군묘역에 묻히는 것을 거부하고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 파병의 댓가로 미국으로부터 많은 경제지원을 받았고, 경제발전의 기초자금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생명을 걸고 복무하였던 장병들의 수고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키며, 파월장병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 두 장군은 각기 여의도순복음교회, 광림교회 장로였다. 

맹호부대장 정득만 장로는 영락교회의 장로였다. 이러한 신앙인들이, 월남에서 지휘하여 벌였던 작전 혹은 전투를 평가하며, 민간인 학살이란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전선이 뚜렷이 형성된 것이 아니고, 도처에 적이 존재한다는 어려움이 비무장 민간인들도 쉽게 살상하고, 전과로 처리하여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4.3사건에서 민간인들을 처형하고, 모두 적으로 계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신앙 혹은 인간적인 양심을 요구할 수 있을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굳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오히려,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형편이다. 진영논리에 의해서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이로써 사회의 통합을 도모하는 “1984년”과 같은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경향이 1980년 광주의 참극을 만들어내는 배경이 되었다. 국가의 권위와 이익을 앞세워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짓밟는 일은 반복되었다. 대추리, 강정, 성주에서, 

4.3과 관련하여 서북청년단의 만행은 쉽게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다. 북한 지역에서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이 살해당하는 통한을 겪은 월남인들이 그 적개심과 원한으로 어디서든지 공산주의자 혹은 연관된 사람들 아니면 의혹을 살만한 사람들을 모두 살상하였다. 이 흐름의 저변에 개신교의 성서와 역사 해석 그리고 강단의 협착한 복음 이해가 작동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서북청년단과 영락교회의 관련을, 쉽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1982년이었다. 한편으로는 제헌의회 의원이었고 이승만 정부에서 사회부장관을 역임한 이윤영 목사 역시 이러한 일에 중심에 섰다. 이것이 한국개신교의 한계였고, 지금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별첨자료는 다음의 목차만 소개하고 내용은 길어서 생략 > 

1. 제주사삼사건  2. 반헌법행위자 열전 3. 군사영어학교4. 군영 졸업생 명단(군번순)  5. 조몽구 6. 이운방 7. 고 이운방 추도사 8. 유재흥 9.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10. 송요찬의 학살 11. 최난수12. 사삼희생자 재심요구 13. 제주기독교는 지혜로웠다? 14. 김대봉 15. 문형순16. 역대 육군참모총장  17. 역대 제주경찰국장18. 미군정과 제주4.3사건  19. 4.3 당시 토벌대 지휘관들20. 신촌회의  21. 유지사건22. 계엄령과 소개령, 주민학살  23. 예비검속, 보도연맹, 수형자들24. ‘4.3보고서’에 대한 반론들

                                                               1. 제주사삼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광복 직후 극심한 실직난, 콜레라 전염, 극심한 흉년 등으로 인한 여러 악재들이 이어졌고, 여러 사회 문제들이 생겨나면서 제주 사회는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일어난 경찰의 총기발사로 인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국 중요도시에서 충돌과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좌, 우익의 시위대 간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이에 비해, 제주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살상이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대규모 민. 관 총파업으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조속히 수습하지 못하면서 긴장은 고조되었다.

1948년 2월 제주도 남로당 대표들은 신촌회의를 통하여 무장저항을 택하였다. 격렬한 토론 끝에, 12:7로 봉기를 결정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5.10 총선거를 거부한다는 명분도 작용하였다. 장년층은 주저하였고, 청년층은 거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총성과 함께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00명의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등을 상대로 탄압을 중지할 것과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였다.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남군에서만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듬해 5월 10일에 나머지 북군 두 선거구에서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조병옥은 강경진압을 택하였다. 4월 말에 무장대와 9연대의 평화협상이 시도되었으나, 실효성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쉽게 진압할 수 있다는 생각도 적절한 판단은 아니었다. 안전한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못하는 상황은, 더 많은 입산자를 만들어냈다. 국면은 악화되었으며, 토벌작전은 목표를 쉽게 달성하지 못하였다.

1948년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무차별 학살이 그 겨울에 진행되어, 20,000명을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전에 사망한 인명은 1,000명 정도였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장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국면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귀순 혹은 하산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이어가는 소수의 인원들이 있었지만, 조직은 와해되었고 명분을 잃은 생존투쟁에 지나지 않았다. 1954년 9월 21일이 되어서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1957년 4월 2일에 마지막 산사람이 생포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혹은 예비검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제주지역에서는 4.3관련 입산하였던 전력이 있는 사람 1,000여명이 희생되었다. 육지의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2,500명의 제주인들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4.19혁명 직후 잠시 참혹한 일을 정리하려던 노력이 있었으나 곧 억압되었다.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으로 잊혀졌던 과거가 되살아났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증언들이 수집,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이러한 작업은 크게 성과를 나타내었다. 1999년 12월 16일 국회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하였다. 

2003년 10월 15일 특별법에 따른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었다. 이어서 10월 31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와 희생자와 유족, 도민들에게 사과하였다. 봉개동에 4.3평화공원이 조성되었으며,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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