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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군가 그 한 사람! 나는...강치원 목사 장신대 채플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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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12  23: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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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군가 그 한 사람! 나는...

1년여 만에 다시 도진 장신대 김철홍 교수의 정치성 짙은 글에 대한 학생들과 동문들의 항의 글이 장신대 게시판과 페이스북을 달구고 있다. 급기야 역사신학과 교수들의 입장도 나왔다. 그러나 김 교수가 다시 막말 수준의 반론글을 올리고 이에 모욕감을 느낀 일부 학생들은 김 교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바라기는 이 논쟁이 학교에서 끝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수선한 정국과 벌집 쑤신듯한 학교에도 채플은 계속되는 가운데, 임성빈 총장은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이럴수록 면학과 경건에 힘써 달라는 당부의 말을하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016년 11월 11일(금) 장신대 교회사 교수를 지내기도 한 강치원 목사(모세골교회)의 설교가 학생과 교수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강 목사는 매주 설교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설교도 공개된 것이지만 설교자의 허락을 받아 우리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예레미야 5: 1

목사인 저를 ‘뒷집 남자’라 부르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목사인 저에게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욕을 하시던 분이 계셨습니다. 기분이 안 좋으면, 목사인 저를 빗자루로 마구 때리던 분이 계셨습니다. 제가 7년 정도 목회를 했던 시골교회에 유치원 정도의 지능을 가지신 지적 장애 할머니이십니다.

처음 그 교회에 가게 되었을 때, 그분은 교인 수에 들지도 않을 정도로 교회에서조차 존재의 의미가 없던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70이 넘도록 온갖 멸시와 구박을 받으면서 살아오신 할머니를 보면서 ‘저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들게 하면 내 목회는 성공이다’라는 좀 교만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목회는 그 한 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사시는 집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사택 옆에 남는 방이 하나 있어서 그곳을 수리하고 모셨습니다. 그분이 기분이 좋아 춤을 추실 때는 함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이렇게 그 분과 서로 마주 울리는 삶을 살자, 교회의 다른 분들과 동네 분들이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옛날에는 자신들의 말을 잘 듣고 순종했는데, 저 때문에 말도 잘 안 듣고, 대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평도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그 할머니와 마주 울리는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골에서의 목회를 통해 ‘한 사람’에 주목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 모새골교회에서도 매 주일마다 이런 한 사람을 기대하며 강대상에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 한 사람을 찾으시는데,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주목할 때, 서로 마주 울리는 영적 공명(共鳴)이 일어납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 이런 영적인 마주울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설교를 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에게 말씀해주시고, 또한 하나님 말씀에 주목하는 한 사람이 있기를, 그래서 영적인 공명, 영적인 전율에 사로잡히는 한 사람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군가 한 사람을 찾는 것은 예배 시간만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장신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누군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교수님들의 연구실을 기웃거리고, 직원 선생님들의 사무실도 들어가 보고, 여러분이 사용하는 도서관과 강의실 곳곳을 돌며, 누군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누군가 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을 샅샅이 뒤져 누군가 한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누군가 한 사람은 어떤 자입니까?

그 한 사람은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정의’(מִשְׁפַּ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만 따로 떼어놓고 그 의미를 살피면 매우 복잡합니다. 예레미야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대로 ‘행하다’(עָשָׂה)라는 말을 더하여 ‘정의를 행하다’는 말에만 머물고자 합니다. 이렇게 한정하면, 예레미야에서 두 곳이 특별한 주목을 끕니다. 먼저 22, 3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을 순서에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억압하는 자의 손에서 약탈당한 자를 구하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말라!

이 구조에 따르면,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약탈당한 자, 빼앗긴 자를 구하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지도, 학대하지도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않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본문은 예레미야 7, 5-6절입니다. 이 구절도 순서에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의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면,
만일 너희가 이웃들 사이에 참으로 정의를 행하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죄 없는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고,
너희에게 해가 되도록 다른 신들을 쫓아가지 아니하면,

이 구조에 따르면, 이웃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고, 다른 신을 쫓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22장과 공통된 것을 뽑아내면, 정의를 행하는 자란 사회적인 약자들을 괴롭히지 않고, 아무런 잘못이나 허물이 없는 무고한 자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자입니다.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면, 사회적인 약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자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을 짓밟는 권력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내는 자입니다.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힘없는 자를 억누르고, 남의 것을 반강제로 빼앗고, 개인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밑에 있는 자들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 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망령된 자의 손에서 구해내는 자가 바로 정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회정의를 행하는 자는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는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이 순실, 저 순실 뒤를 따라다니며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찾아보라고 말씀하시는 누군가 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군가 한 사람의 또 다른 속성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אֱמוּנָה)란 무엇입니까? 이 말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질문했던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인 2절에 보면, ‘거짓으로 맹세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러한 배열은 1절의 ‘진리’가 ‘거짓’(שֶׁ֫קֶר)에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됨을 추측하게 해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새번역은 ‘진리를 구하는 자’를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번역합니다. 실제로 ‘진실’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말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고, ‘진실’은 없다고 말씀하시는 예레미야 9, 3절이 한 예입니다(잠언 12, 17.22; 14, 5; 이사야 59, 4).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진실’이라는 말은 단지 어떤 말 한 마디에 국한되어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전인격적인 행동 양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구하는 자’란 말뿐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진실한 자를 의미합니다. 속엔 거짓이 있는데, 밖만 진실한 척 하는 삶이 아니라, 안까지 온통 진실로 가득 찬 삶을 갈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찾아보라고 하시는 ‘누군가 한 사람’이 바로 이런 진실한 자입니다.

요즘 대한민국호는 순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장에 의해 진실이 가라앉는 또 다른 세월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푸를 ‘청’자, 블루를 좋아하는 이들의 왕국에 숨어 있는 원초적인 거짓을 가리기 위해 되풀이 되는 거짓의 실체는 진실을 왜 이리도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드는지요?

여러분, 사회적인 정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의 존재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하는 자라면, 정의를 행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삶이 내면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아 나와야 합니다. 이런 존재의 삶을 사는 ‘누군가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 땅에서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처럼 지금 이 땅을 하나님의 용서의 품으로 던질 수 있는 ‘누군가 한 사람’ 있는지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땅을 하나님의 용서의 품으로 던지는 ‘그 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만 예레미야 시대의 예루살렘과 닮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아나 과부와 같이 아무 힘이 없는 교인들을 주술적인 능력으로 영적인 노예로 만들고, 배운 지식인들은 영성이니, 관상이니 하면서 좀 우아한 올가미로 묶어 자신을 따르는 종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자기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인적이고 물적인 자원을 쏟아 부어, 타 교회 교인을 강탈해 오는 일이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자행되기도 합니다. 이 여파로 교인수가 늘어나는 교회의 목사는 소위 ‘성공한 목사’라는 수식어가 붙고, 이곳저곳으로 불려 다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사님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에 달하는 목회자들은 무능력하다는 죄목으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을 간파하고, 일그러진 영적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가 있는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그 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하나님의 용서의 품으로 던지는 ‘그 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신대를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항상 채플이라고 대답합니다. 채플은 장신대에서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가끔 장신대의 영적 사이클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 시간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불경한 생각이죠? 맞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채플에 설교하러 오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목회의 각 분야에서 그래도 성공했다고 간주되시는 훌륭하신 목사님들입니다. 특수목회를 한다고 해도 그 분야에서 그래도 이름을 내는 목사님들입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 동안 이런 목사님들의 목회 성공담을 듣다 보면, 원하든 원치 않든 여러분의 무의식 속에는 수를 높이 평가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 유명세를 지향하는 DNA가 뿌리를 내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위험성을 간파한 저는 바로 이 자리에 기형도 시인이 애처롭게 바라본 ‘우리 동네 목사님’ 같은 분이 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이 없어 믿음도 없고 열정도 없다는 말을 듣는 목사, 천막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도 거센 장마로 인해 교인이 반으로 줄자 영적 리더십이 짓밟히는 목사, 능력의 기도로 아픈 자를 낮게 하기는커녕 둘째 아들이 폐렴으로 죽자 결국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 바로 이런 목사가 이 자리에 서서 자신의 목회 실패담을 가슴 아프게 쏟아내는 설교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아와 과부처럼 모든 기득권을 박탁당한 목사, 설교를 잘 하는 목회자들의 쓰나미에 휩쓸려 한두 명 앉아 있는 지하 예배당마저 포기해야 하는 목사, 교인들로부터 무시를 받고, 배척을 받아 목사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자긍심마저 잃어버린 목사, 이런 분이 이 강단에 선다면, 여러분이 듣고 싶어 하는 은혜로운 설교는 제대로 못하고 그저 가슴만 칠지 모릅니다. 나 같은 목사가 되지 말라고, 그저 눈물만 흘릴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이런 눈물이 이 땅과 한국교회를 보고 흘리시는 하나님의 눈물은 아닐까요? 어쩌면 이런 눈물이 장신대를 보고 흘리시는 주님의 눈물은 아닐까요? 어쩌면 목회 성공담보다는 이런 쓰라린 눈물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영적 수로가 되지 않을까요? 이런 눈물을 경험하기 위해 ‘아시아의 영혼이 되는 학교’, ‘세계적인 신학교’라는 말이 담고 있는 성장담론을 거부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가도록 유혹하는 달콤한 번영신학이 이 강단에서 전파되는 것을 거부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예배의 시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 안에 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 안에 머무는 곳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같은 신자들에게 영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목회자들에게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진실히 사는 누군가 한 사람을 찾으러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최소한의 양식도 없이 이웃 교회 신자들을 강탈하는 교회의 행태에 저항하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누군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이 예배당을, 일어설 기력조차 없이 모든 것을 잃은 목회자들이 다시금 회복되는 은혜의 자리로 만들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누군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거짓과 도적질과 폭력으로 이 땅을 혼란스럽게 하는 어둠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정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사는 누군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누군가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이 채플에서만 찾으시지 않습니다. 미스바에서도 찾으시고, 강의실에서도 찾으시고, 도서관에서도 찾으십니다. 교수님들의 연구실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시고, 직원 선생님들의 사무실 문턱을 넘기도 하십니다. 장신대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정신대에 정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정의를 행하고, 이 장신대에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 지배하기를 기도하며, 스스로 진실된 삶을 사는 누군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학교에서만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이 땅의 참된 지도자를 찾고자 하는 저 광화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누군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가 오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누군가 한 사람’을 찾으시는 길거리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요?

설교후 기도

에레미야를 통해 누군가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오신 자비로우신 주님,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 중에 주님께서 찾으시는 누군가 한 사람이 있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이 장신대와 한국교회와 이 땅이 희망을 찾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이 예배의 시간과 자리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 거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장소가 되게 하셔서 우리의 존재가 정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으로 거듭나는 신비가 있게 하옵소서.
혼돈 가운에 있는 이 땅을 긍휼히 여기시사 우리 모두가 이 난국을 잘 타개해 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새로운 질서가 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며 마음을 모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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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121.XXX.XXX.44)
모세꼴 김치원 목사님의 설교 감동감동감동적인 설교입니다.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씀 아멘 신학교에서 외톨이가 된 한 목사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같은 의미일것 같습니다.
(2017-02-10 00: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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