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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베트남 국민 자긍심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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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01  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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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Điên Biên Phu)전투

베트남 국민 자긍심의 원천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언어 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다.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 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의 개입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한자문화권에 속해있으면서 오랫동안 외침에 시달린 점에서 한국과 흡사하다. 침략세력에 끈질기게 맞서 제국주의 프랑스를 자력으로 몰아낸 데 이어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겼다.  베트남의 역사는 2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11년 한 무제의 정벌 이후 1000년에 걸쳐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938년 중국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달성했다.  토착 왕조는 제국주의 파고가 거세던 19세기 중반 프랑스가 침입할 때까지 지속됐다. 인도차이나 진출을 모색하던 프랑스는 선교사 박해를 빌미로 베트남을 침공해 1884년 전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식민지배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의 탈한자 정책에 순응해 한자표기를 버리고 알파벳을 수용,중국문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후 1945년 일본군의 진주로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일시 종식됐고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호찌민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던 프랑스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고,베트남은 8년간 싸운 끝에 프랑스를 패퇴시킨다.

이 때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진 결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냉전기간 북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남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공산화 도미노를 우려한 미국은 1964년 통킹만에서 자국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이를 구실로 군사개입을 단행했다.

남베트남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질리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시달리던 미국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협정으로 전쟁개입을 끝냈다.  그 해 3월 미군이 완전 철수한 뒤 공산군은 협정을 파기하고 공격을 재개해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30여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렸고,이듬해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한국군의 참전

베트남 전쟁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9년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인 150만 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사망자 6만여 명,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크메르루즈). 이에 대응해 중국군이 베트남의 북쪽 국경을 따라 공격을 개시해 베트남의 영구 군사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약 40km 정도 진격해 들어왔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로부터 병력을 끌어오지 않고 중국군의 진격을 막았지만 9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많은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에 따라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종료했다.

심각한 경제상황과 소련에서 전개된 유사한 개혁 조치들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민간기업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들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개혁을 감행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아시아 및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으며, 이로써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과거 여러 강대국들과의 전쟁에서 굴복하지 않고 승리를 얻어낸 점이 그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원천이다. 이번에 베트남 국민들이 기억하느 가장 자긍심있는 조상들의 전투 중 하나인 보응우옌잡 (Võ Nguyên Giáp) 장군이 이끈 디엔비엔푸 (Điện Biên Phủ) 전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일어나기 전의 상황

베트남, 캄보디아 및 라오스를 일컫는 인도차이나 반도는 17C무렵부터 포루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유럽국가와의 무역을 시작했다.  18C 말,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원료 구입 및 생산품 판매를 위한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부추겼고, 이를 계기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고무나 주석과 같은 원료의 주요 생산지임과 동시에 남아시아 진출의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다. 이 중 선교활동을 위주로 베트남과 관계를 맺었던 프랑스는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문제로 들어 프랑스의 지배를 시작하였다. 비록 1945년경 일본의 쿠데타로 잠시 베트남이 일본의 군정 하에 있었지만, 일본의 세계 제 2차 대전의 패배로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들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최후 전투지로 선택한 곳은 디엔비엔푸라는 지역이었다. 

프랑스가 디엔비엔푸를 전투지로 삼은 이유

   
* 디엔비엔푸의 위치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약 300km 떨어진 베트남의 북서쪽 변방에 위치한 디엔비엔푸. 프랑스가 이곳을 전투지로 고른 이유는 지리적인 요인이 크다. 디엔비엔푸는 라오스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으로, 아편 재배 및 거래가 주로 이루어지던 곳  이다.  프랑스는 디엔비엔푸에 주둔군을 두게 되면 디엔비엔푸에서 행해지던 아편 재배 및 거래를 막아 베트남의 무기 구매를 위한 주요 수입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디엔비엔푸가 프랑스의 공격기지인 라오스와 베트남 북부의 주둔지들을 연결할 중요 장소로 인식되어, 전투에 용이할 것으로 생각했다. 

프랑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한 원인

프랑스가 전투에서 패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 지나치게 공군력에 의존한 점, 그리고 적의 능력을 과소평가 한 점을 들 수 있다.  앙리 나바르 (Henri navarre) 사령관의 지휘 아래 움직인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의 협곡에 자리를 잡고 막강한 공군력을 활용하여 베트남군을 공격할 계획이다. 디엔비엔푸의 저지대를 점령함으로써 무기 및 식량의 재공급이 용이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앙리 나바르 사령관은 베트남군이 산 위로 대포, 무기 및 식량을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이는 그의 착오였다. 예상과 다르게 고지대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프랑스군을 공격한 베트남군은 프랑스가 공군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레이더 장착 대공포로 공격을 가하는 베트남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비행기의 고도를 2500피트에서 8500피트로 올리면서, 물자 공급 뿐 아니라 공격능력까지 저하되었니다. 

기발한 전략으로 베트남을 승리로 이끈 보응우옌잡 (Võ Nguyên Giáp) 장군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장군

5개 사단 (4만 9000명)을 끌고 디엔비엔푸로 이동한 보응우옌잡 장군. 그는 베트남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프랑스군에 기발한 전략과 리더십으로 맞섰다. 그의 리더십은 승리에 목말라있던 베트남 국민들을 하나로 결속시켰다. 1953년 겨울, 베트남군에게 이동 명령이 떨어진 후 베트남군은 프랑스군의 눈에 띄지 않는 험한 산악 지형을 통해 이동하였다. 그들이 이동한 거리는 하루에 약 80Km로, 그 중 밤에 50Km를 이동하였다.

고되고 힘든 여정이였지만 승리에 대한 베트남군의 염원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짐꾼 3만 3000명은 양쪽에 대나무를 걸쳐 짐차로 개조한 자전거를 이용해 최대 320Kg의 식량 및 보급품을 실어 날랐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들은 프랑스군의 예상을 뒤엎고 최대 10,000m나 되는 산 위로 105mm 곡사포 (무게 2t, 길이 6m) 를 끌고 산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1954년 1월 하순, 보응우옌잡 장군이 이끈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 외곽에 도착하여 산 속에 자리를 잡았다. 산 위까지 끌고 올라간 105mm 곡사포(36문), 75mm 대포(24문), 박격포(50문), 12.7mm 대공화기(36문), 소련제 다연장포(12문) 무기들로 베트남군은 화력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3월 13일 밤, 그들은 마침내 디엔비엔푸 기지로 공격을 시작했다. 산 위에서 공격을 퍼붓는 베트남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프랑스군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활주로까지 파괴되어 비행기 이착륙이 어려워지게 되자 낙하산 투하로 물품 보급을 대체했다.

베트남군의 공격으로 수송기의 고도를 2500피트에서 8500피트로 올리게 되면서 물품의 낙하는 불안했고 결과적으로 물품 보급에 실패하게 된다.  26일간의 점령과 재탈환이 반복되면서 프랑스군과 베트남군 모두 사기가 떨어졌지만, 베트남군은 포기하지 않고 터널을 파 프랑스군의 허를 찔렀다. 5월 7일, 프랑스군 최고 지휘본부 벙커까지 점령하게 되면서 56일간의 사투는 베트남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이로써,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군의 참패로 종식되었다. 비록 베트남군의 사망자 7900여명, 부상자 1만 5000여명으로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보다 훨씬 많았지만, 보응우옌잡 장군의 기발한 전략과, 베트남의 독립을 갈망하는 베트남 국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리더십은 결국 베트남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구가 역사상 가장 큰 참패를 겪은 전투로 기억되는 디엔비엔푸 전투. 과연 베트남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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