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남 목사 회고록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지금 찾아갑니다.
이명남 목사 회고록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3.15  01:37:58
트위터 페이스북

이명남 목사 회고록

이명남 목사(1941- )

충남 지역의 대표적인 교계인사이자 민주화 인권운동가로 대전 성남교회 출신이다. 신학을 하기 전 대전지역에서 사업과 언론 계통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지역 목회자로는 최초로 예목협과 목회자정의평화회의 의장을 지냈고 고 조남기 목사 이후 예장인권운동의 대표선수로 KNCC 인권센터 이사장을 지냈다. 국민의 정부시대에는 충남 대전지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과 대전 충남지역의 민주화 운동 대부로, 교회는 충남 당진읍의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36년 간 시무하고 은퇴하시기까지 중부권(충청남북도, 강원)을 대표하여 많은 후배들을 끌어 주셨다. 인권운동 사회운동과 목회를 병행하기가 참 어려운데 이 목사님은 모두를 잘 하셨다. 자가용도 없이 오늘날까지 대중교통으로 성실하게 궂은 일에 언제나 앞장서서 우뚝 서 계신다. 오랜 세월 총회 총대와 임원, 부서장과 위원장 등을 지내셨다. 2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 이충영은 우리교단 목사로 서울에서 시무하고 있다. 이 글은 이명남 목사가 구술한 것을 정리한 내용으로 더 정리될 것이다.  

   
 

글 머리에

나는 지방에서 낳고 자라서 비록 내 세울 큰 학력이나 경력은 없지만 예수 믿고 목사가 된 이래 성실하고 정감있는 사람으로 살았고 항상 진실한 마음과 정신으로 불의에 도전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한 번 마음에 정한 일은 반드시 이루고 특히 공적 유익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라면 시간과 물질을 내가며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또한 자랑 같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찾아가고 격려하는 역할을 그만 둘 수 없었던 것은 나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지방에서 주로 활동한 연고로 지역에는 나보다 윗사람이 없어서 누군가가 방패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연배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천성이 부지런하고 적극적으로 시위 현장에서 후배들이나 노동자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험한 자리도 마다 않고 살아왔다.

사실 이런 생활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의롭고 신실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있지만 돌아보면 몸과 마음은 물론 많은 시간과 물질이 드려진 활동이었다.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는 여러 불만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큰 방해와 어려움은 없었다.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믿고 따라 준 아내에게 가장 감사하고 자녀들에게도 고맙다. 특히 은퇴 직전에는 내가 사는 당진군의 숙원사업인 당진 시승격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백방으로 뛰었는데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 일은 내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만난 여러 인연들이 모여 이뤄진 것으로 참여정부 인사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이자리를 통하여 밝히며, 지역사회를 위한 나의 마지막 봉사가 되었다.

   
* 당진시 추친기념탑에서(시 승격 추진위원장) 

지금도 넓은 당진시 청사 앞 마당에 가면 시승격 기념비가 있는데 당당하게 목사로서 지역사회를 위하여 일한 흔적이 있다. 주변에서 하는 말은  목회하는 것 하나도 힘든 일인 데 80년 대부터 군사정권과 싸우고 경찰과 싸우면서 소홀히 한 것이 하나도 없이 살아온 것을 부러워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내 자신이 매사에 바르고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불법이나 하고 잘못을 하는 놈이 무슨 낯짝으로 그런 일을 하겠나?  그러나 나는 당당하다. 무엇이 되려고 했으면 눈치도 많이 봐야 하는 데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이 오직 성경과 신앙에 어긋난 것에 대하여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정도에 맞지 않으면 비판하고 옳고 선한 일이면 적극해 온 것이다. 

나의 회고와 관련하여 대화를 하전 중에 2013년 5월 27일 대전빈들교회당에서 '정의평화를 위한 목회자 협의회(이하 정평목협 / 이후 정평목협은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로 개명되었고 오늘날에는 '목정평'이라 약칭한다) 총회에 참석해 달라는 상임의장 남재영 목사의 전화를 받고 가겠노라고 대답을 하였다. 정평목협은 내가 교회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드려 섬긴 기관으로 3대 회장을 지냈는데 예장 목회자로는 처음으로 의장을 맡았다. 이 기관은 나의 사회운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정평목협은 신군부의 재 집권을 막기 위하여 호헌철폐 운동을 가장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당시 대통령 선거 직선제를 쟁취한 성과를 남겼다. 그 후로 정평목협은 개신교 목회자들의 액션그룹으로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참고 : 목정평/정평목협 역대 임원명단)

한참 목회자들이 삭발 단식을 할 때 사람들이 목사를 만나면 왜 이발소에 안가냐? 고 물을 정도라는 신문 만평이 실릴 정도로 정평목협 목회자들이 삭발과 단식으로 사회 민주화를 선도한 조직으로 알렸다. 나는 아직도 이 단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오늘까지 후배들을 격려하며 함께 해 오고 있는데 이번 총회에서는 상임의장으로 그동안 공동의장을 역임해 온 우리 예장의 정태효 목사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의장이 된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구술 시기 : 2013년 5월)

나의 사회운동에 대항 영성은 막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한 임실의 성수교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기억된다. 성수교회는 두 번째 목회지였는데 그때 약 2년 정도 목회를 하여 교회당 건축도 하고 전도도 많이 되었는데 그 다음으로 부임하고 37년 간 목회 후 은퇴한 당진교회보다도 더 큰 교회였다. 당시 벽돌을 직접 만들어서 공사를 했는 데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교회 청년들이 가톨릭농민회에 관계하면서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져오는 유인물이나 책자들을 통하여 농업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가을 추수가 끝나면 교회에서 광고하여 쌀 수매가를 보장하라는 서명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런 나를 청년들이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주로 나가서만 활동을 하지 교회 안에서는 혹 반대자도 있을까 하여 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임실 성수교회에서 한 청년의 무등을 타고

출생과 가족

나는 1941년 대전시 성남동에서 당시 농업을 생업으로 하시는 부친 이규택 씨와 모친 송규헌 여사의  1남 7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7명이니 나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왕자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집안도 넉넉하여 유복하게 자라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릴 때의 추억이란 늘 대접받고 넉넉한 살림에 고생을 모르고 자란 기억이다. 그 후로 사업을 한답시고 사회에 나가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나의 유복한 어린시절을 그리워 하였고 누님들에게 사랑받고 성장한 그 때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육신의 어머니는 내가 당진교회에서 92세까지 장수하시도록 모시고 살았으니 큰 효도는 못했지만 외동아들로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편하게 모신 것은 사실이다.

내가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은 우리 동네의 성남교회(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인데 아마 개척 초기 부터 참가하여 전체 교인 중 당시 중 3년이던 내가 다섯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런 일로 어렸지만 주일학교 반사도 하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 활동을 했는지 나는 집과 학교와 교회에서 거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큰 반대를 한 것도 아니고 찬성을 하고 같이 교회에 나간 것도 아니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당시 학교 공부란 그저 판에 박힌 것이지만 교회의 설교나 집회는 어린 나의 마음을 흔들고 감동을 주어 선한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게 하는 영적 힘과 감동이 있었다.

당시 동네와 교회의 친구로는 나중에 목사가 된 강정일(감리교)과 지금까지 같은 노회에서 허물없이 지내는 합덕의 신현덕 목사가 어려서부터 "엉아, 엉아" 하고 따라 다닌 기억이 난다. 나는 고등학교 상급반이 되어서 그 또래의 청년들이 하는 고민대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대하여 많은 고민과 방황을 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상과 진로에 대하여 누구 하나 진지하고 따뜻하게 들어주고 조언해 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은 평범하게 지나갔다.

교육과 교회생활

대전 성남교회의 목회자로 당시 김덕조 목사(강도사로 와서 목사 안수을 받고 이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김 목사는 강원도 지역 원주제일교회에서 노년은 강릉교회에서 목회 후 은퇴를 하셨는데 강원도에서는 중진으로 총회적으로도 많은 일을 하셨다. 한 때 나는 사회운동에 너무 깊이 들어가서 혹시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 쫒겨나게 되면 김덕조 목사님에게 부탁하여 강원도의 산촌 아무 교회라도 부임하게 해 달라고 하면 들어 줄 것 같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마음이 있었노라고 했더니 “그럼 말을 하지 그랬냐“고 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한 10년 전에 기회가 있어 목회는 은퇴를 하고 기독교서회의 사장으로 도전을 할까 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했지만 성사 되지는 않았다.

   
* 대전신학교 동기들 보다 10년 늦게 한 장신대 졸업식

나는 23세에 결혼을 했으니 조혼이다. 집안에 딸들만 많고 하니 일찍 결혼을 시킨 것 같기도 한데 사실은 그때 이미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만큼 독자적인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해본 것이 농사이지만 당시 덴마크의 그룬트비 목사의 농업을 통한 사회개혁을 내용으로 담은 책이 유행을 하여서 앞으로 농업이나 축산 같은 것을 해서 잘 사는 농촌을 만들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목회자에 대한 열망이 나서 가까운 대전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공부를 하면서는 목사직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는 못하므로 졸업 후 목회를 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 동기들은 7회로 졸업을 하였지만 나는 한참 방황을 끝내고 내 동기들 보다 10년 늦은 17회로 늦갂이 졸업을 한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엄청난 수업료를 내고 사회에 뛰어들어 사업의 성공와 실패 그리고 방황으로 젊은 날을 보낸다. 그리고 한 때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볼 낮이 없어 친구가 있는 서울로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 와서 살기도 하였다.

신학교 시절

어린 시절 고생과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유복한 나의 생활은 이렇게 젊은 시절의 성공과 실패로 인하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일찍부터 훈련 받았다. 나를 하나님께서 나중에 그렇게 쓰시려고 담대하고 혹독한 훈련을 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당시 신학교 친구로는 김성업이 생각나고 곽정식도 있었다. 그리고 김만제 목사가 우리는 가르쳤다. 그 때에 합동과 통합이 갈라지는 총회가 대전제일교회당에서 열렸는데 그  생각도 난다.  그래서 아는 목사님들 중 합동측으로 갈라져 나간 분도 계시다.

   
* 가족사진 : 모친과 누님 일곱 분, 나의 옆이 아내 박동님이다

그때 모 교회인 성남교회에는 지종순 목사(지종득 목사의 부친)가 계셨는데 졸업하는 나를 빨리 목회자로 만들려고 수소문하여 유성에 있는 한 교회로 부임하라고 했지만 나는 마음의 준비 부족과 소명감의 불확실로 인하여 순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장신대로 진학하였만 나는 진학과 목회를 포기하고 대전으로 나와 친구들과 어울려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사업과 실패를 지나

나는 대전에서 제과업과 제의(엿) 공장을 시작하였다. 마침 사업이 잘 되어 우리 물건은 전국으로 나갔다. 그래서 나는 확장도 하고 이것 저것 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부도가 나는 데 이를 막지 못하게 된다. 나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없어 이것을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폐업을 하게 된다. 자존심도 상하고 망해 먹었다는 지역의 이미지를 견딜 수 없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1971년 처음으로 성남동을 떠나 서울 금호동 산동네로 갔다. 거기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사는 친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던 것이었다.

열심히 친구의 일을 돕다가 눈썰미가 좋은 나는 얼마 안 되어 중부시장 옆에 조그만 피복공장을 열었다. 잘될 것 같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잘 될 때보다는 어려울 때가 문제다. 나는 잘 되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훈련이 부족해서인지 어려움이 오자 다시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된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겪은 두 번의 사업 실패를 통하여 나의 갈 길과 소명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는 데 주변에서 하나님이 길을 막고 목회로 부르시는 것이라는 충고에 순종하게 된다. 사실 나는 세상에서 실패해서 하나님께 돌아왔고 목회자가 된 사람이라고 정직하게 고백한다. 이렇게 나의 배후에는 나를 목회자로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선배들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인생길의 큰 전환점이 일어났다. 당시 영동 학산교회에서 시무하시던 이시우 목사님이 성남교회에 오시게 되면서 첫 목회지인 옥천 동이교회로 소개를 하셨다. 그러니까 대전신학을 졸업하고 6년만에 부임한 첫 목회지였다. 그리고 중단했던 대전신학교를 더 다녀서 졸업하고 장신대에 편입, 71기로 졸업을 하게 된다. 71기는 유명한 분들이 많은 데 총회장을 지낸 김삼환 목사나 고 훈 목사, 김동엽 목사 등이 동기로 한국교회에서 왕성한 활동들을 해 왔다.

동이교회에서의 추억

동이교회에서의 추억은 전도사 초임시절로 공부하면서 배워야 했던 형편이다. 그곳의 소중한 일은 작지만 교회당을 지은 일이다. 당시 우리 교회당은 좀 언덕진 곳에 있었는데 건축 자재들을 올리느라고 온 교인이 큰 고생을 하였고 나는 완전 막노동으로 일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첫 목회지로 교회에 대하여 배우고 감사하는 훈련을 한 곳이다. 또 어려웠지만 내가 신학공부를 마치고 자녀들도 모두 출산하여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이 교회에서 나는 약 6년간 시무하다가 진천의 문백교회로 이임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그리 오래 목회하지 못하고 다시 임실군의 성수교회로 부임을 한다. 이곳에서의 추억은 또렷하다. 거기서는 2년 정도 있었는데 목사 안수를 받았고 건축을 했기 때문이다. 벽들을 직접 만들어서 지은 건물로 시골교회당 치고는 상당히 큰 평수의 건물로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인생의 또 한 번의 전환점으로 사회정의 문제에 눈뜨는 계기가 찾아왔다.

   
* 87년 정평목협 주관 민주화를 위한 목회자 삭발 시국기도회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나의 호기심과 연구는 이미 대전에서 신학를 졸업하고 잠시 중도일보의 기자로 일한 바가 있어서 어느 정도 비판적인 의식이 있었지만 그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모르니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가톨릭농민회에서 배부하거나 주는 자료들을 보니 여러 가지 농민 문제와 정치 사회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다. 그후 함평 고구마 사건이나 안동교구 오원춘 프락치 사건이 터졌는데 가농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압박을 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개신교의 성직자였지만 의식화의 첫 단추는 구교인 가톨릭교회의 활동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다.

성수교회에서의 에피소드는 내가 기자 생활도 했었다는 소식을 들은 청년들이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가 “성령”에 대하여 설교를 한 적이 있는 모양인데 그 일로 나를 좋아하던 사회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크게 실망을 하기도 했었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결혼과 자녀들

나는 처가는 옥천인데 청주에서 살고 있었다. 중매로 결혼하여 2남 1녀을 낳았다. 장인 어른은 1954년에 청주 명암교회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고 처남도 장로이다. 그 교회는 오랜 친구 김정웅 목사가  목회하고 몇 년 전에 은퇴를 한 바 있다. 김정웅 목사의 고향은 호남이지만 대전신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도에서 목회를 오래 하였고 나와 같이 정평목협 운동도 열심히 한 뒤 말년에는 평범한 목회자가 되었다. 김 목사와 나는 참으로 끊을 수 없는 절친 관계인데 만년에는 가깝게 지내지 못하였다. 당시 임실의 성수교회에서 목회하던 나를 당진교회로 소개한 것도 김정웅 목사다. 그가 나의 전임자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처가의 교회에서 시무를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 가족사진, 1980년대(뒷줄 왼쪽 이충영은 본 교단 목사가 되었다)

장남 충영은 후배인 김영태 목사가 있는 청부 청북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다. 둘째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친구들과 사업을 하고 있으며 막내 딸은 유치원 교사를 오래 하였고 당진에 같이 살고 있다. 막내는 오랫동안 나를 도와서 교회에서 반주와 주보 만들기 등 나의 비서 노릇을 충실히 하였다. 내가 이만큼 목회를 하고 은퇴를 한 것은 딸의 수고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처의 너그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나와 일찍 결혼한 처 박동님은 얌전하지만 예쁘고 잘 훈련된 여자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장로의 가정에서 자라서인지 교회의 생리를 잘 알았고 사모로서의 처신도 아주 지혜로웠다. 박봉님은 꿈 많고 자유분방한 청년기를 내게 반납하였고 사업의 실패와 낯선 곳으로의 이주 그리고 유별난 사회운동으로 인하여 마음 졸이며 불안하게 고생하며 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 내 처는 건강이 좋지를 않다. 워낙 허약한 체질이기도 하지만 나이 먹어 교통사고도 당했고 은퇴 후 부쩍 노쇠해졌다. 나는 은퇴 후에는 건강도 돌보고 여행도 하고 쉰다고는 하였지만 지역의 벌전을 위하여 후배들이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물리칠 수 없어 또 밖으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있다.

   
* NCCK 인권위원들과 한일인권협의회 차 일본 방문 

내가 장로교회의 목회자로서 목회에 소홀함 없이 사회운동에 앞장 선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간 대견해 하며 그 비결이 무언지를 묻는다. 나의 대답은 "비결은 없다" 이다. 나는 나의 민주화 운동에의 참여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고백한다. 내가 분단된 조국에 태어나서 군사독재정권을 대항하여 민주화 투쟁을 한 것이나 인권운동을 한 것은 어느 개인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나의 신앙고백이요 사명으로 알았기에 지금도 후회가 없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 기성세대를 대신하여 감옥에 가고 노동자들이 핍박 받고 정당한 산업선교까지 용공 시 하는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대하여 분노와 도전이 없다면 그는 바른 기독교인이 아니며 시대를 앞서가야 하는 목회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즐겁고 기쁘게만 감당한 것은 아니다. 내가 밖으로 나돌며 한참 민주화 투쟁을 할 때에 대학생 아들도 언제부터인가 데모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때 나도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민주화 운동은 한 집에 한 사람 정도만 해도 되는 데 하며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되나하는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이 깨달아서 민주화 운동을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감옥에도 갔다. 그러니 부전자전으로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집 사람에게나 집안으로는 걱정도 컸다.

또한 고 강경대 군 사건으로 모인 추모집회에 대전 충남지역 대표로 시위를 하기 위하여 앞장을 섰을 때 멀리 파이프를 들고 서있는 학생들이 보였는 데 그중에 아무래도 큰 아이 같은 학생이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하였지만 막상 아들과 같은 시위 현장에서 마주친 기분이란 참으로 묘하였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운동을 장려한 내가  아들 보고 집에 있으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나의 마지막 목회지 당진교회

당진교회는 지금 당진시의 구 도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다. 1998년 IMF직전에 완공하였는데 20억 원 정도가 들었다. 사실 충청남도는 감리교회의 세가 커서 장로교회가 자리 잡기가 어려운데 이 교회에 내가 33세에 부임했을 때 벌써 교회는 27주년을 맞고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다. 당시 영락교회의 지원으로 터전을 넓혔고 내 오랜 친구 김정웅 목사가 나를 소개하고 이임한 직후였다. 내가 시무한 임실의 성수교회보다 모이는 교인 수나 건물도 작았지만 군 소재지이고 친구들이 있는 고향 노회이니 두 말 없이 왔다.

   
* 당진교회당

나는 이미 3개의 교회에서 목회 경력을 쌓았으나 목회에는 특별한 비결이나 수단을 갖고 하지는 않았다. 워난 재주가 무재주라 그냥 마음으로 우러 나와 성실히 하는 것 밖에는 모른다. 오늘날 무슨 목회 비결이나 프로그램을 배우러 다니고 가르치고 목회 정보가 어떠니 해도 교회는 현장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기에 맞는 것도 있고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런데도 무엇을 배워서 혹은 무슨 재주로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목회는 재주가 아니다. 목회는 삶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문제가 있는 목회자들이 와서 골치 아픈 교인 때문에 상담을 하면서 “누구 없으면 목회가 잘 될 것 같다” 는 말을 하면 야단을 친다. “네가 수사과장이냐? 재판관이냐? 너는 목사야, 사랑하고 품어 줄 의무만 있어!” 라고. 그렇다. 판결은 주님만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양을 먹이고 보살피는 사명만 있는 것이다.

양은 돌아보고 사랑할 뿐이지 양에게 대접받고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물론 교회법에 치리도 있고 재판도 있고 총회의 특별 재심 재판장도 해 보았지만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지 벌주고 쫓고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과 목회는 별개가 아니다

내가 민주화 운동이랍시고 서울이나 대전에 많이 출타를 했는데 지금처럼 서해대교와 서해고속도로가 생기기 이전이다. 그러니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교통비도 많이 들고 또 돌아오는 길에 차 시간이 늦으면 택시를 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지론이 인색한 사람은 운동 못한다는 생각이다. 어디 가면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닌 데 가 보면 도리어 줘야 할 곳이 많다. 그래서 나는 생활비 외에는 모두 활동비로 썼고 교회에서 출장비도 공식적인 것만 청구했고 조금도 과다하게 받아 보지를 않았다. 그 흔한 자가용 한 대 없이 지금까지 다닌다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가용을 운용할 돈이면 충분히 대중교통을 타고 남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구닥다리 목사다.

   
* NCCK 인권센터 이사장 취임식

또 하나의 자랑 아닌 자랑은 내가 섬기는 교회의 예배와 심방 행사에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그러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설교 준비도 그렇고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여 차질이 없게 하였다. 한 몇 년은 그렇게 해도 30여 년 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부임하고부터 은퇴할 때까지, 1987년 국민운동본부 충남북 상임대표 시절에는 그 많은 집회가 하루 걸러 있었는데 새벽기도를 소홀히 하면서 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이나 활동을 이유로 교회을 소홀히 하고 돌아다니는 후배들을 질책하는 편이다. 그때 매일 새벽기도 끝나고 나가서 운동하고 새벽 전에는 꼭 들어와 준비하여 기도하는 교인들을 맞았다.

이런 철저한 사명의식은 어려서부터 배운 신앙의 훈련 덕분이다. 나는 나이 먹어서 피곤하고 평생했으니 그만 좀 쉬면서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겠지만 나는 늘 하던 대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탈 없이 목회와 운동을 병행한 데에는 당진교회 당회원들의 이해와 혜량이 컸지만 그중 수석 장로였던 ㅇㅇㅇ장로의 높은 사회의식과 넓은 마음의 뒷받침이 컸다. 이 분은 전에 민주당 배경으로 당진군수를 지내신 분이다. 그처럼 야성을 가진 지도자가 교회에 있으니 내가 그런 활동을 하고도 붙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번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은 데 이제는 모든 것을 감사하다는 인사를 그 어른에게 한다.

또 하나는 내가 당진교회에 부임하여 가장 자랑스럽게 기록될 역사로는 신협을 창설한 것이다. 현재는 약 800억 원의 자산을 가진 알짜배기 금융기관으로 지역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당진 새마을 금고로 부르게 되었지만 원래는 우리교회에서 자그마하게 시작한 협동조합 운동이었다. 당시 은행도 없고 소액 대출도 할 수 없는 서민들을 위하여 만들어서 내가 이사장을 하고 당회원들도 하다가 지금은 지역사회로 돌렸다. 그래도 직원들이 당진교회에 많이 나오고 있으며 당진교회가 기여한 공로를 모두 잊지 않고 있다.

1984년 대전 충남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의장을 자그마치 12년 간 했다. 86년에는 PCK 총회 사무실에서 동료 목회자들과 삭발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해서였다. 당시 승복교회 ㅇㅇㅇ목사, 노신복 목사, 인명진 목사, 김정웅 목사, 노영우 목사 등과 후배들로 이근복, 허춘중, 임광빈, 유재무 목사 등이 참여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1987년 6월 그 유명한 새문안교회 집회를 주도했다. 당시 성명서를 보면 우리의 각오가 얼마나 결연했는지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 2012년 한기총 탈퇴 예장대책위 위원장 시절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과 정의감으로 뭉친 우리는 두려움보다 애국 애족의 마음으로 마치 독립군 출정과 같은 심정으로 집회나 행사에 임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목회적으로 소홀함 없이 병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교단 같으면 칭찬도 받으면서 했을 것이지만 나는 눈치를 봐 가면서 해야 했고 교회와 교인들 앞에는 항상 죄인된 심정이었다. 그러나 내가 취미생활을 하고 즐기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알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 총회장 김기수 목사님과 총회 임원회 

그러면서 총회 일까지 했다는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다. 나는 충남노회가 27년 간 총회에 총대로 파송해 줘서 김기수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모시고 임원을 하고 부장도 하고 특히 인권위원장직을 오랫동안 했다. 사실 운동권 목사가 자력으로 총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운동과 교회, 총회 일 모두를 겸했고 말년에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하에서 국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지역적으로는 당진시 승격 추진위원장으로 6년간 노력한 끝에 2012년 1월부로 당진시로 승격되는 것도 보았다.

   
* 최근에는 우리교단 정화를 위한 예장목회자시국대책협의회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다.

(이명남 목사는 목회와 민주화운동, 교회개혁운동으로 목회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지금은 당진시가 발주한 '시민 주식회사'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작년 말부터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일기 시작한 촛불 시민들의 탄핵요구로 인하여 결국 헌재 재판관 전원일치로 박근혜는 탄핵 인용되어 검찰수사를 앞두고 있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국민들의 요구는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우리 교단 출신의 목사들인 인명진 목사와 서경석 목사의 일로 마음이 개운치 못하게 지내시고 있다.)

사실 인명진 목사는 동향으로 그 부친되는 고 인치희 장로는 당진농업고등학교 교감으로 퇴직하였고 같은 노회 초대 장로 노회장도 지낸 분이다. 당진 시내에 거주하셔서 새벽기도는 두 부부가 내가 시무하던 당진교회에 출석하였다. 또 인 목사의 실제인 인광진 장로와는 노회 일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이런 인연이 있는 민주화 동지들을 예장목회자들과 함께 비판하는 일에 내가 앞장 서고 있기 때문이다.

서경석 목사도 같은 교단의 후배로 그럴 수 없는 사이인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마음 아픈 일이다. 우리 교단 민주화 운동과 교회개혁운동을 하고 있는 선후배들과 함께 하면서, 군사 정부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요즘 나는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하루 빨리 회개하고 과거 존경 받던 목회자의 위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있다.

[관련기사]

예장뉴스 보도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5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6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7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8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9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10
원주제일교회 성도들 주일 날 상경 시위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