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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목회 신학을 향하여 (강연록)“생명·정의·평화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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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5  1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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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목회 신학을 향하여, “생명·정의·평화의 관점에서”

정경호 목사(대구기독교협의회 회장, 영남신학대학교 은퇴교수)

영남신학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카나다 멕메스터 신학대학원 석사, 유니온신학대학원 박사(Ph.D.)  영남신학대학교 교수(은퇴), 세계개혁교회(WCRC) 실행위원 역임
   
 
I. 마을신학 이야기의 문을 두드리며

벨 훅스(Bell Hooks)란 여성 흑인학자는 “여성운동의 이론: 변두리로부터 중심으로”(Feminist Theory: from Margin to Center)란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종래의 여성운동은 백인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여성들이 펼치는 여성운동에 대하여 곧 남성에 의해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해방을 강조하던 여성운동(feminist movement)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남성에 의핸 착취와 차별에 대한 여성해방은 물론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흑인 여성의 눈에서 여성해방을 외친 여성운동(womanist movement)의 이론을 만든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사회·경제·문화적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라고 하는 주변부(margin)의 흑인 여성들이 삶이 안정되고 존중받으며 생명이 풍성한 해방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중심부가 변화되고 중심부가 건강한 사회가 된다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제창하였다. 이 책은 중심부가 새로워져야 변두리라는 주변부가 새로워진다는 종전의 이론을 뒤집고서 작고 초라한 주변부가 달라지고 새로워져야 중심부도 달라지고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신학서적이 바로 오래 전 드루신학대학원 교수로 있었던 이정용 교수가 1995년에 저술한 주변성이라고 하는 “마지널리티”(Maginality)란 책이다. 최근 그의 제자로 있었던 호남신학대학교 신재식교수가 “마지널리티: 다문화시대의 신학”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는 이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주변성의 극치”요의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변성의 공동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계속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주변부 백성”이며 오늘의 교회와 세상을 창조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주변성을 통한 주변성 극복”이라 강조한 바 있다.

여기에 나오는 주변성은 휘황찬란한 도시 곧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는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변두리이기에 이를 마을로도 대치해볼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심이라고 하는 대도시의 거대한 교회그룹들이 한국교회의 생명을 살리고 변혁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대도시에 밀려난 작고 초라한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곳을 새롭게 하고 그 마을을 살려나가는 목회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중심부에 자리한 병든 한국교회와 자초 일보 전 비틀거리는 한국사회를 치유하여 하나님의 바라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II. 마을목회의 성서적·신학근거

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당시 강대국들에 둘려 쌓여 있던 주변부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룩해 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가장 풍요하고 가장 발달된 중심부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여 안정적으로 살아가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가장 작고 척박하며 가장 변두리였던 가나안 마을로 옮겨가서 그곳에서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중심부에서 살아가던 아브라함과 사라와 그의 가족들을 가나안 마을로 보내어 "주변부 사람"(marginal)이 되어 하나님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라고 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해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라고 증언한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사회적으로 발달되고 경제적으로 물질이 풍요하며 문화적으로 화려한 도시라고 하는 중심부가 아니라 그 누구도 가지 싫어하는 미미하고 초라하며 부족함이 넘치는 변두리 마을로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게 하신 것이다. 이정용 교수는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그 주변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여 중심부를 변형시키고 치유하며 구원케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요 선교적 명령이었던 것을 오늘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각도에서 출애급기를 본다면 당시 세계의 중심부인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주변화된 삶을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나가게 하신 것이다. 이집트 세상을 섬기기 위해 파라오의 종이었던 그들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을 향해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주변부에 있는 미미하고 초라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이 위치한 주변부의 삶을 통하여 중심부 세상을 변형시켜 나가며 구원의 세상을 열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이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해나갔던 갈릴리사역에서도 이러한 기본 원리를 발견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당시 이스라엘의 중심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장 작고 미미한 주변부 시골마을, 베들레헴이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출발점을 작은 시골마을 베들레헴이었고 그 중에서도 거처할 곳이 없어 짐승의 밥통인 구유라고 한다.(눅 2:4-7)

우리가 공관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역시 주변부 마을인 갈리리란 곳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갈릴리에서 선포하신 첫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막 1:15)는 것이었다. 특히 누가복음 4장 16-30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안식일 날 자신의 동네에 있는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 성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풀어 말씀하셨다.

그 후 가버나움으로 가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주변부의 사람들을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해하였기에 그들 중에서 제자들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변부의 마을 게네사렛에서 병든 자를 낫게 하시고(막 6:53-56), 여리고 마을에서는 세리장 삭게오의 마음을 치유하고 구원을 선포하였다.(눅 19;1-10) 예수께서는 갈릴리 온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 세리, 여성, 당시 율법에 금한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는 죄인이라 이름 불리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부요한 사람들과도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들이 누구였던지 신분, 성별, 종교를 따지지 않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셨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주변부 중의 주변부였던 이방 마을 두로와 시돈에도 들어가셔서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치유해주셨다.(마15:21-28)

그러나 주변부의 마을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펼쳐나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을선교는 단지 주변부 마을 사람들을 살리고 그 마을만을 구원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주변부 마을 한 곳 두 곳을 구원해 나감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원대한 뜻을 가졌던 것이다. 작고 초라하며 병들고 소외된 마을에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평화가 온 세상에 넘치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을공동체 선교는 작고 미미한 주변부 마을을 넘어 도시로, 도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온 세상에 숨쉬며 살아가는 모든 생명·생태공동체까지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서학자인 크로스비(Michael H. Crosby)는 “우리에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The Prayer that Jesus Taught Us)란 책을 통해 마태의 신앙공동체를 분석하면서 마태복음에는 “정의를 행하다”(δικαιοσυη)란 말이 일곱 번 등장하고 있음에 그는 주목한다. 그 중에 다섯 번이 산상수훈에서 사용되는 것 보아서 구제와 금식을 통해서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주기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그는 강조한다. 예수께서 사용한 일인칭 복수, 곧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하는 “우리”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탄원을 기원하고 있는 ‘한 사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억울하거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여 도와주기를 바라는 탄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와 어려움에 짓눌려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타자(他者) 곧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주기도를 통하여 마태공동체에 가르치고자 한 것은 우리가 대하는 일용할 양식 곧 날마다의 밥상은 마을공동체 내에서 날마다 밥상을 차릴 수 없는 극빈의 ‘너’라고 하는 이웃들과 함께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마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였고 마을을 통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나가고자 한 것임을 크로스비는 역설한다.

같은 맥락에서 신약성서학자 호슬리(Richard Horsley)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예수와 제국”(Jesus and Empire: The Kingdom of God and New World Disorder)이란 책에서 “마을 공동체 속에서의 선교”라고 역설하였다. 호슬리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여 더욱 경제적 풍요를 얻고자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누리고자 하였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작은 마을 특히 작은 농촌마을 주변부의 사람들을 향하여 “화평케 하는 자” 곧 하나님의 평화를 만들어가는 자가 복이 있음을 외치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평화”의 물결이 마을을 넘고 넘어 결국 거대한 로마제국의 사회·정치·경제·문화와 함께 종교까지도 변혁시켜나갔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마을을 통하여 무신성의 중심부의 세상이 구원받고 치유받아 생명·정의·평화가 풍성한 새 하늘과 새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서의 귀중한 가르침이요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신 목적인 것이다.

III. 성서 속에 나타난 마을목회 신학이야기

1. 마므레 마을의 아브라함과 사라

창세기 12장 1-9절은 믿음의 조상이란 별명을 지닌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족들을 부르셔서 당시의 번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하여 살게 하였고, 또한 뿌리를 내려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하란을 또다시 떠나게 하여 낯설고 생소한 땅, 돌이 많고 거친 땅인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다.

주변부의 사람이 된 아브라함은 가족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란을 떠난다. 그는 가는 곳 마다 낯선 나그네로서 삶을 살아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신비한 환대의 손길을 체험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란 중심부의 아브라함을 낯설고 생소한 변두리로 가게 하시어 그곳에서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낯설고 외로우며, 불편하고 초라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중심이 되게 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그네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따뜻한 환대의 손길이나 주위의 이웃들로부터 받았던 잊지 못할 환대의 경험은 그가 가나안땅 작은 마을에서 만났던 낯설고 생소한 나그네들을 정성을 다하여 환대하고 있는 아브라함이 되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환대 : 창세기 18장에는 지극 정성으로 낯선 이웃을 대접하는 “환대의 밥상”이 나타난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 불린 아브라함이 무더운 어느 날, 천막 문어귀에 앉아 쉬고 있는데 낯모르는 세 사람들이 땀을 흘리며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와 체면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곧장 달려간다. 매우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낯선 손님들 앞에서 땅에 엎드려 한 가지 “청”을 하고 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을 낯선 사람들이 지나가시니 부디 자신의 집에 오셔서 손과 발을 씻고 잠시 더위를 식힌 후 식사를 한 후 편히 쉬었다가 가시라고 하는 부탁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나그네들을 귀한 손님으로 모시어 따뜻한 마음으로 환대의 밥상을 대접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환대의 7가지의 모습을 주의 깊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마을목회에 있어서도 이러한 환대의 원리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환대의 첫째의 모습은 멀리서 지나가고 있는 낯선 사람들을 반가운 마음과 대접하고 싶은 마음으로 유심히 바라보는 행동(seeing); 둘째, 만나기 위해서 달려가는 행동(running to meet); 셋째, 존경을 표하는 행동(honoring); 넷째, 초대하는 행동(inviting); 다섯째, 새 힘을 얻도록 자신의 공간에서 쉬게 하는 행동(refreshing); 여섯째, 음식을 준비하는 행동(preparing)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낯선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접하며 섬기는 행동(serving)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낯선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그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서 그들에게 신적인 환대로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그들 중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현현(顯現)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환대의 밥상으로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을 하나님을 섬기듯 섬기고 봉사한 것이었으나 이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한 결과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낯선 세 사람의 나그네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여 자신의 천막 앞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모신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인들을 시켜 100인분의 빵을 빚을 수 있는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내다가 맛있는 빵, “크고 넓적하고 둥근 빵”을 굽게 하였다.(창 18:6) 이어서 아브라함은 맛있는 송아지의 연한 고기를 대접하기 위하여 제일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잡기도 하였다. 이제 갓 구운 군침 도는 빵과 연한 송아지 요리와 함께 버터와 우유로 그들을 위해 환대의 밥상을 준비하여 드렸던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버터와 우유는 당시의 음식문화에 의하면 두 가지의 양젖을 대접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하나는 오늘날 아랍인들이 레반이라고 부르는 껄죽하게 된 양젖과 신선한 양젖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인으로서 손님들이 잡수시는 동안 그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는 일이 없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사 사라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고대 근동의 풍속을 따라서 사라는 남자 손님들 앞에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는 환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그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100여명의 모든 식솔들이 그들에게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봉사하면서 그들이 편안하고 즐겁고 그리고 조용한 쉼이 될 수 있도록 흥겨운 잔치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생명을 이어간 신적(神的)인 환대의 밥상: 사라와 아브라함의 환대의 밥상의 절정은 손님들을 위해 사용한 송아지 연한 고기와 함께 밀가루 세 스아 즉 밀가루 서 말로 만든 빵이다. 밀가루 세 스아는 창세기 18장외에도 사사기 6장 19절과 사무엘 상 1장 24절에도 나타나며 신약성서 마태복음 13장 33절과 누가복음 13장 20-21절에도 나타난다. 구약성서 사사기에는 기드온이 사무엘 상서에는 한나가 각각 야훼 하나님의 천사와 성전에 바치기 위해서 밀가루 한 에바 곧 서 말 분량의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나오는 밀가루 서 말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비유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여인이 밀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과 꼭 같은 것이라고 한다. 미미한 양의 누룩이 엄청난 양의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신비한 변화를 가져오듯이 하나님의 나라운동도 그와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나라 비유는 처음에는 작고 미미하게 시작되지만 완성의 때가 오면 반듯이 반생명적이고도 반평화적인 이 세상의 덩어리들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확신에 찬 이야기설교인 것이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밀가루 서 말이라는 분량은 신현현(神顯現) 즉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나 또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낯설고 생소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정성껏 마련한 환대의 밥상으로 봉사한 것이었는데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라와 아브라함이 밀가루 서 말로 빵을 만들고 있는 것은 낯선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 곧 하나님의 천사로 일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들 세 사람 속에 있는 한 사람을 하나님으로 깨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믿고 하나님께 대접하는 마음으로 낯선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마저도 사라와 아브라함의 따뜻한 환대의 대접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나이가 들어 자궁에 생명의 샘이 말라버린 사라에게와 연로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셔서 생명을 이어가게 한 것이다. 이렇듯 환대의 손길은 하나님을 느끼고 맛볼 수 있는 통로요 풍성한 생명을 이어가는 축복의 통로인 것이다.

환대의 신학(New Testament Hospita;ity)을 저술한 죤 코닉(John Koenig)은 성령의 역사로 급격한 부흥과 성장을 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확대해보면 초대교회는 환대의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강조한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이 가까운 마을 이웃들에게 따뜻한 환대로 맞이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무한한 감동을 끼쳤기에 생명력을 이어간 것이라고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마을목회의 모습은 바로 낯선 이웃들 곧 우리들 주위에 있는 여러 다양한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귀중한 선물이란 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그들을 하나님 대하듯 극진히 섬기고 대접하며, 사랑을 베풀고 나누어서 그들 모두가 생명·정의·평화 넘치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섬기고 봉사해야 할 환대의 목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베들레헴 마을의 룻

구약성서 룻기의 이야기는 베들레헴 마을의 심각한 생명죽임의 기근으로 시작된다. 그 기근은 하나님을 섬겨나가던 한 가정인 엘리멜렉과 그의 부인 나오미에게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배여 있는 선조들의 땅, 베들레헴 마을을 뒤로 하고 두 아들들과 함께 가난한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말로 하면 그들은 경제적 난민이 되고만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위해 이방의 땅이라 불린 모압 땅에 간신히 도착한다. 모압은 자신의 자녀들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종교적 행위 때문에 예언서에서는 그들을 공공연하게 맹렬히 비난한 곳이기도 하다.(이사야 15, 예레미야 48, 아모스 2 참조)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모압 땅에 도착하여 서서히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비극이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비극의 제 2막이 오른다. 처음 얼마간은 그들이 모압 땅 어느 마을에서 자리를 잡아 살았기에 어느 정도 먹을거리가 해결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성한 두 아들들은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위해 모압 마을에서 그곳 여인들과 결혼을 한다.

그런데 바로 그곳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으며 그들에게 비극적인 기근과 가난은 쉬지 않고 계속 된다. 불행하게도 그 가정의 세 남자들은 때 이른 죽음에 무너지고 만다. 그리하여 남은 세 여인들은 한편으론 기근이라고 하는 살인적인 가난이 도사리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이웃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있어서 모압의 마을은 신앙과 문화와 생활관습이 다른 적대적인 이웃들의 문제도 비극의 한 요소이기도 하였다. 결국 나오미는 이미 마음속에서 고향 마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이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고 그녀들의 고향 모압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니오미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오르바와는 달리 나오미의 고향 유대나라의 베들레헴 마을로 되돌아가려고 굳은 결단을 내린다. 시어머니와 함께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땅, 불확실하고도 심히 어려운 길을 목숨을 걸고 선택한 것이다.

믿음의 조상 룻과 아브라함 : 룻기 1장 16-17절을 보면, 룻이 나오미에게 자신의 단호한 결단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즉 룻은 어머니의 민족이 자신의 민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실로 이 고백은 엄청난 고백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 어머니 나오미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삶을 다짐하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공동체를 재확인하고 있다. 룻은 이렇게 유다 사람인 나오미를 받아드렸던 것이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명예 교수인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란 여성신학자는 “모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힘든 결단은 룻의 결단”이라고 말한다. “룻의 과격하고도 모험적이며 파격적인 결단에 버금가는 사건은 오직 아브라함의 결단 뿐”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트리블 교수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창 12:1-5) 룻은 하나님의 음성이나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 내린 결단”이라고 지적한다. 매우 탁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75세의 노년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간다. 아브라함에겐 그의 동반자인 아내가 함께 동행을 하였으며 동시에 풍부한 재산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굳은 약속이 그를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비해 모압 여인 룻이 시어머니의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갈 때에는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르심도 없었으며,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축복도 약속받지 못하였다. 남편이 죽어 혼자가 된 룻은 자신의 생명을 지탱시켜 줄 남편이나 재산은커녕 오히려 자신이 노동으로 책임져야 할 시어머니 나오미만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무력하고 나이든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해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일평생 헌신하겠다고 결단을 다짐하며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믿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결국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데리고 희망을 가지고 고향마을 베들레헴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더욱 더 잘 살아보기 위해서 모압 땅에 갔던 사람들이 잘 살기는커녕 그곳에 간 남자들이 모두 죽고 알거지가 된 여성 나오미와 함께 그 빈곤의 시어머니를 섬기며 봉사하려고 따라온 극빈의 며느리, 룻이 베들레헴 마을에 도착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 마을은 경제적 빈곤과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삼중의 장애물이 있는 곳이었다.

경제적 빈곤 :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도착한 베들레헴 땅 그곳에서 룻은 엄청난 문제에 당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룻이 당면한 첫째 문제는 베들레헴 땅으로 이주해온 외국인으로써 당면한 경제적 빈곤(economic poverty)의 문제였다. 남편을 잃은 여성으로써 혼자 살아간다는 것 그곳도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이중 삼중의 경제적 문제가 쌓여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 그 자체가 고난 중의 고난이었고 어떻게 생존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룻의 고민들은 과연 자신이 머물 곳은 어디인가 하는 주택의 문제였고, 무엇을 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먹을거리의 문제였으며 그리고 자신의 재능이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거나 외면당하지 않고서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인종차별 : 룻은 외국인 다문화가정으로써, 자신의 민족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종교와 신앙으로 형성된 자신의 정체성마저 버리고 모압 마을을 떠나 베들레헴 마을로 떠날 결단을 하였다. 신명기 23장 3절에는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야훼의 총회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들 사이의 난 자녀들도 금지되어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모압 여인 룻은 나오미를 받아드렸고 나오미가 믿는 신앙과 전통 그리고 문화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드리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룻이 당면한 둘째 문제는 히브리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유대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곧 다문화가정으로써 타향살이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였다.

가난한 외국인으로 그리고 여성 이방인으로 냉대를 당하며 소외받으며 살아갈 인종차별(racism)을 극복해나가야만 그는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히브리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범죄한 집단으로 이해하였고, 율법이 없는 자로, 우상숭배자로 그리고 악독한 자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방인을 향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 이하의 사람으로 취급하여 보증을 설 수 없는 사람으로 함께 식탁을 나눌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율법에서는 이방인들과는 결혼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룻이 나오미와 함께 정착한 베들레헴은 이렇게 인종차별로 사람을 차별하는 그곳이었다.

성 차별 : 룻이 당면한 베들레헴 땅은 남성중심의 종교가 뿌리를 내린 곳이요 남성중심의 문화가 뿌리 깊게 내려오던 여성억압과 각종 성차별의 장소였다. 창세기 19장엔 두 천사가 소돔 땅에 있는 롯의 집을 지나치다가 롯의 간청으로 그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이 때 동네 사람들은 두 천사를 내어달라고 급박을 하였을 때, 롯은 두 딸을 그들에게 내어주겠다고 한 사건을 비롯하여, 성폭생 당하여 이름없이 사라진 레위인의 둘째 부인의 죽음과 주인의 딸의 죽음(삿 19장), 입다의 딸의 죽음(삿 11:29-40),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요 8:10-11) 등은 성폭행 당하도록 방치한 남성들의 폭력을 쉽게 볼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러므로 룻이 도착하여 뿌리를 내리고자 한 곳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온 차별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룻기의 저자는 이방 여인 룻이야말로 공동체의 생명과 온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 일한 인물임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도착한 베들레헴은 빈곤으로부터 오는 쓰라린 가난과 배고픔, 여성에 대한 억압, 그리고 타향살이라고 하는 삼중의 고생은 “생명죽음”의 세력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룻은 그 어떤 생명죽임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온 공동체의 모두를 위해 생명을 살려내고, “풍성한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헌신하는 새로운 인간성의 한 모형이 되었고 나아가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믿음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베들레헴 마을로 이주해 간 다문화가정 룻의 사역은 자신이 당면한 경제적 빈곤과 종교적 차별과 그로 인한 인종차별과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3중의 장애물들을 도전해나가면서 풍성한 생명을 창조한 생명살림의 증언자였던 것이다. 또한 룻은 작게는 자신과 마을이 당면한 겹겹의 문제를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면서 모두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본을 보여준 사례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룻이 도전해나가고 극복해나간 부익부빈익빈의 심각한 경제적 차별, 인종적 차별 그리고 성적 차별 등의 문제는 오늘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문제들이기에 룻을 통해 보여주는 마을목회는 오늘 우리들에게 글로컬(glocal)한 시각으로 마을목회를 확장해나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갈릴리 마을의 예수

갈릴리 마을과 함께 한 예수 그리스도 : 예수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을 때(마가 2:16; 마태 11:19; 누가 7:34) 예수께서는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금식할 수 있냐?”고 되묻는다.(마가 2:19) 예수 그리스도의 밥상공동체에 나온 무리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많은 갈릴리 마을 사람들은 예수의 가난하고 소외된 회중, 오클로스(ochlos)였고 예수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온 굶주린 마을 사람들 5000여명을 먹이셨으며(마태 14:15-20, 마가 6:31-44, 누가 9:10-17, 요한 6:1-13) 그리고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방 마을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한 애원을 보시고 그의 달을 낫게 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나온 4000여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막 8:1-10) 여기에는 당시 계산의 수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여성들이 들어 있고, 어린이들도 들어 있었다.

예수의 밥상공동체에 나온 무리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많은 무리들은 특별한 제자들이나 종교인들이 그 구성원들이 아니었다. 예수의 밥상공동체에 참여한 사람들은 사상과 이념이 다른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죄인과 세리도 병자들도, 어린이들도 그리고 서로 원수된 모든 굶주린 사람들이 그 구성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회중 오클로스였고 예수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서광선 교수는 “거기(예수의 밥상공동체)에는 남쪽 사람도 있고 북쪽 사람도 있으며 거기에는 지방색과 이데올로기를 모두 초월한 공동체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을공동체를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밥상공동체로서 마을목회는 단지 배고픈 사람들을 초청하여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밥 속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해방의 뜻을 나누어 갖자는 것이며 동시에 밥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나라 곧 ‘생명․정의․평화’를 실현해 나가자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여성신학자 셀리 멕페이그(Sallie Mcfague) 교수는, 오늘의 교회가 오늘의 교회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늘의 교회가 내일의 교회와 세상을 향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렇기에 마을목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주변부의 이웃과 사회와 세상을 섬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참 신앙운동이며 방향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를 향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대안목회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마을목회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개혁해내는 종교개혁운동이요 교회개혁운동인 것이다.

예수께서 차려주신 구원의 밥상 : 공관복음에서 만나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서 우리는 구원의 밥상을 만난다.(마 26:26-28, 막 14:22-28, 눅 22:19-20) 이 날은 니산월 14일에 시작되는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었고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케 하신 해방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찬양하는 만찬이었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월절의 그 어린양임을 암시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유월절만찬을 나누시다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그 빵을 떼어 받으라고 말씀하신다.(막 14: 22) 그리고 포도주의 잔을 들어 감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다 마시자 이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 24)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과 함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도 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몸과 피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비해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비교되는 성찬식 본문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6장에서 성찬식 신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수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유월절 전날 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장면을 통해서도 구원의 성찬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요 13:1-11) 예수께서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 5000명을 먹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27, 33)고 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고 말씀하신다. 그런 후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기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고 한다.

이런 점에서 4복음서는 갈릴리 마을 사람들과 혹은 이방마을 사람들과 밥상을 함께 하여 배불리 먹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밥상머리의 주인이셨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몸, 자신의 살과 피를 인류구원의 먹이로 내어놓으시고 친히 구원의 먹이가 되어 주신 만찬이요 거룩한 성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먹이가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또한 밥상의 먹이가 되자는 신앙운동을 넘어 이웃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밥의 불의”와 맞서 싸워나가는 정의운동이요 모든 생명을 온전한 생명되게 하는 생명운동이며 나아가서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분단된 남과 북이 함께 하나 되어 뗄레야 뗄 수 없는 상생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이며 북과 남이 서로 아끼고 나누며 서로 사랑하는 평화운동이요 통일운동이기도 하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구원의 먹이로 내어 놓으시고 자신의 모든 것 아낌없이 다 쏟아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살과 피,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어놓으신 구원의 주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생명을 부수어버리는 폭력과 전쟁, 전쟁으로 인한 난민, 인간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절규하는 자연생태계, 절대적 빈곤으로 신음하는 가장 변두리의 신음하는 마을 곧 오늘의 인간과 세상 및 모든 생명공동체를 향한 목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VI.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인도의 간디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란 책을 쓴 바 있는데 마을 하나를 구하는 것이 인도에 있는 70만개 마을을 살리는 길이며 인도의 70만개의 마을 살린다는 것은 세계의 모든 마을을 구하는 지름길임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세계 구석구석에서 기독교적 공동체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부르드호프, 후트라이트, 아미쉬, 메노나이트, 퀘이커, 쉐이커 등은 자신들의 마을에서 단순하고도 검소한 신앙생활공동체, 자립적인 생활, 친환경유기농, 건강한 먹을거리 운둥을 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태양광을 이용한 생태환경, 인류의 평화를 위한 교육과 봉사, 난민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 미래의 지도자를 위한 품격있는 교육, 철저한 자녀교육 등을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마을이기도 하며 새로운 사회를 향한 대안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들이 지향하는 마을목회는 오늘의 목회와 교회를 개혁해나가는 대안적 목회요 동시에 교회개혁운동이다. 갈릴리 주변부의 마을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온전한 생명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구원을 선포하며 마을목회를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한국교회를 살리고 이웃과 사회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을목회에 우리 모두 헌신하면서 앞서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마을이 보이면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면 마을이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가 헌신하며 섬겨나가는 마을을 통해 사람이 들어오고 이웃이 들어오며, 우리의 사회가 들어오고 분단된 민족이 들어오며 그리고 세상과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공동체가 들어오는 마을목회,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목회이다. 그리하여 마을목회를 통해 다시 사람 속으로, 이웃 속으로, 사회 속으로 분단된 민족 속으로 그리고 세상 속으로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야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 목회가 될 것으로 믿는다. 그리하여 이웃과 사회와 세상과 교회를 살리는 마을목회를 통하여 한국교회와 사회에 생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돌봄으로 정의를 실천하며, 나눔으로 평화를 만들어가고, 화해와 치유를 통하여 구원의 길로 우리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국 YMCA가 창립 80년 되는 해 경주에서 총회를 가진 바 있었는데 당시 개회예배 때에 부른 “마을이 보인다 사람이 보인다”는 찬송을 부른 적이 있었다. 이 노래가 마을목회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 같아 이 노래로 결론을 맺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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