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넘어서 생태사회로”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칼럼/기고/강연
“핵을 넘어서 생태사회로”장윤재의 JPL(정의 평화 생명)
예장뉴스  |  oikos78@ms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2.07.17  09:15:05
트위터 페이스북

                                   “핵을 넘어서 생태사회로”

 

이글은 지난 6월 25일 기독교 생명평화연대가 주관한 월례 세미나에서 발표된 것임

 장윤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오클로 자연 원자로가 멈춰선 지 20억년이 지난 후, CP-1이라는 세계 최초의 인공 원자로가 시카고대학 운동장의 서쪽에 있는 스쿼시 코트에 들어서게 되면서 인류는 조물주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1)                                      -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들어가는 말

 오클로 자연 원자로는 아프리카 가봉에 있는 노천 우라늄 광산이다. 과학자들은 여기서 수 십 만년 동안 우라늄 235가 스스로 핵분열 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멈춘 지 20억 년이 지난 후, 인간은 미국 시카고대학 한 구석에 최초로 ‘인공’ 원자로를 설치했고 거기서 사상 처음으로 핵분열에 따른 연쇄반응 실험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인간이 이렇게 얻은 핵에너지로 가장 먼저 한 일은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다. 실험 3년 후인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의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을 가진 한 사막지대에서 사상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다. 엄청난 뇌성과 충격파가 사막을 집어삼켰다. 상공 9킬로미터까지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장엄하고, 두려웠다”고 한 육군 장성은 회고했다. 멀찍이서 이 폭발을 지켜보고 있던 실험의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2)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소년)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다. 며칠 후 나가사키에는 ‘팻맨’(뚱보)이라는 이름의 세 번째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16만, 8만이 사망했다. 미국에 뒤이어 소련이 핵무장을 했다(1949년). 영국(1952년)과 프랑스(1960년)와 중국(1966년)이 뒤를 이었다. 동서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에 지구촌에는 약 6만기의 핵탄두가 발사대기 상태에 있었다. 숨도 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냉전이 끝난 지금도 지구촌에는 약 2만기의 핵탄두가 있다. 숫자는 줄었지만 파괴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 중 2천기는 지금도 단추만 누르면 발사가 가능한 상태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핵무기로 인한 전 지구 생명공동체 멸절의 위협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핵발전으로 인한 피폭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진 후, 그 가공할 파괴력에 대한 죄의식까지 한 몫 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이른바 “핵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이라는 구호를 표방하게 되었고, 이 때 ‘폭탄용’ 원자로는 ‘상업용’ 원자로로 변형을 거치게 된다. 그 결과 1956년 영국에 셀라필드(Sellafield), 1957년 미국에 십핑포트(Shippingport) 핵발전소가 세워지면서 핵산업(nuclear industry)이라는 것이 태동한다. 하지만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핵발전소 폭발과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참사로 핵산업은 급격히 위축되다가, 이후 각국이 지구온난화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기사회생 하는가 싶더니, 작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대재앙으로 다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다음은 후쿠시마 대재앙 1년이 지난 뒤 이 곳을 찾는 사람의 방문기이다. (과장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보수신문의 보도를 인용한다.)

 후쿠시마 원전 일대는 지옥 상황이다. 젖소들은 물 한 모금을 먹겠다고 마른 수로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방사선에 피폭한 애완동물들이 인적 끊긴 거리를 헤매고, 소와 돼지 사체가 곳곳에 널려 썩어가고 있다. 논과 밭에는 키만큼 자란 잡초만 우겨져 있다. 바닷가인 후쿠시마 원전에서 반경 20킬로미터 반원형 지역 628제곱킬로미터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서울(605제곱킬로미터)보다 넓은 면적이 유령 지대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를 회수하고 시설을 해체하는 데는 30~40년이 더 걸릴 거라고 한다. 도쿄 사람들은 규슈 쌀을 사다 먹고, 수돗물이 겁나 생수를 사 마시고, 원전 사고 이전에 만든 통조림만 아이에게 먹인다는 주부도 많다. 일본 정부는 향후 10년간의 복구비용을 23조엔(약 314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3)

 우리는 핵무기와 핵발전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핵은 - 무기든 발전이든 - 생명에 대한 근원적 위협이고 정의에 대한 철저한 모독이며 평화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핵에 기초한 문명을 넘어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고 생명이 꽃피는 생태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나는 그것이 ‘핵 시대’(nuclear age)에 대한 철저한 신학적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1. 카우프만과 맥페이그의 ‘핵 시대의 신학’,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핵무기의 위협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 미국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은 핵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적이며, 그 자체로 성령의 역사에 반대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핵 시대의 도래’가 가진 문명사적 의미와 신학적 함의를 깊이 성찰했다. 핵 시대의 도래로 인류는 지구 위 모든 생명을 파멸시킬 수 있는 권세(power)를 갖게 됐다. 이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교적 상황(context)이다. 이 상황은 기독교든 다른 어느 종교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대 혁명적 상황이다. 그러므로 핵 시대의 도래는 신학자들은 물론 모든 종교인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의 사유와 담론에서 당연시했던 모든 전제들을 근원적으로 다시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카우프만은 핵 시대의 신학이 전통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전통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완전히 새로운 ‘상상적 구성’(imaginative construction)을 필요로한다고 강조했다.4)

카우프만이『핵시대의 신학 Theology for a Nuclear Age』에서 급진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전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주권’(divine sovereignty)이었다. 인류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구 생명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렇게 철저하게도 새롭고 또한 근본적으로 유일무이한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과 돌보심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카우프만은 그 둘 사이에 중대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함을 보았다.5)

카우프만은 먼저 핵을 ‘종말론’과 연결시켜 사유했다. 그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핵 대학살’(nuclear holocaust)의 가능성은 더 이상 아무런 구속적(redemptive) 의미가 없는 종말론적 사건이라 단언한다.6) 전통적으로 서구신학의 종말론에서 역사의 종말은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창조주와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 형태가 궁극적 파국이든 아니면 궁극적 구원이든, 종말은 언제나 하나님의 행위의 절정이고 궁극적으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의 성취로 보는 것이다.7)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숙고해야 할 종말은 ‘핵 대학살에 의한 종말’로서,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카우프만은 강조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어떤 원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명의 소멸 혹은 전적인 말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희망의 종말, 모든 바람의 종말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희망하는 자들의 종말, 모든 미래 세대의 종말이다. 핵폭발 이후 찾아올  핵겨울(nuclear winter)은 지구 위 모든 생명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며, 지구를 생명이 없었던 초기의 황폐한 상황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8)

요약하면, 전통적 종말론에서는 늘 어떤 긍정적 의미가 있었다.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은 이와 전적으로 다르다. 핵으로 인한 종말은 아무런 긍정적 의미도 찾을 수 없게 한다. 거기에서는 아무 적극적 의미도 산출될 수 없다는 것이 카우프만의 통찰이다.9)

카우프만은 이러한 근본적으로 특이한 상황에 대해 두 가지의 신학적 응답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이러한 종말을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나 행위로, 즉 노아시대에 하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이 인류의 멸절을 홍수가 아니라 핵폭탄을 통해 이루신다고 보는 것이다. (핵전쟁을 지상 최후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결단코 그런 불행한 파국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10) 후자는 전자와 같이 극단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둘 다 ‘핵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신학적 응답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1)

카우프만에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오늘날 인류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밝혀주기보다 도리어 감추어 줄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서구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원리는 이제 “낡았고”(outmoded), “잘못 인도하며”(misleading), “위험하기”(dangerous)까지 하다.12) 사도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 없다”(롬 8:38-39)고 말했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이 말이 더 이상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온 “진정으로 열린 우연성의 미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13) 한마디로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사’(salvation history)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핵무기로 인한 종말의 가능성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핵무기로 인한 멸절의 가능성은 “우리 남자와 여자들”, 혹은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시민들 손에” 달려 있다.14)

하나님이 우리를 핵으로 망하게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문제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책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에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쥐어진 상황에서 이제 인간의 행위는 신적인 삶(divine life) 그 자체에 비참할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이제 지구 위에서 생명이 지속되도록 우리 인간이 완전한 책임을 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 그러니까 카우프만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로 한 어떤 신학적 응답도 해결책이 아니다. 카우프만은 유대-기독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인격적 신 개념 역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핵 위기 앞에서는 점 점 더 옹호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있다고 본다.16)

이와 같은 문제제기 속에서 카우프만은 핵 시대를 사는 신학자들은 더 이상 물려받은 전통의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각 세대의 신학자들은 각각 자신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물려받은 전통을 재해석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신학자들이 주로 주어진 전통에 충실했다면 오늘날 핵 시대의 신학자들은 그들보다 과감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핵 시대의 신학자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탈구축’(deconstruction)하고 ‘재구축’(reconstruction)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우프만은 특히 이 작업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상징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17)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카우프만에게 ‘하나님’은 누구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카우프만에게 ‘하나님’이라는 상징의 기능은 어떤 실재나 존재를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간화(humanize)하고 상대화(relativize)할 수 있는 우리의 의식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18) 그리고 과거에는 인간의 구원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와 땅에 있는 자녀들 사이의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특정한 개별적 인격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카우프만은 어느 개인적 인격도 그러한 종류의 절대적 중요성과 모두에게 유효한 우주적 효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개별자들은 복잡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역시 더 이상 단독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며 그 생명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일하는, 생태적이고 역사적인 생명의 그물망을 일치시키는 상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19) 구원 역시 더 이상 어떤 단일한 과정이나 활동이 아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 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어떤 일방적 행동이 아니다. 구원에는 인간사 안에서 폭력과 소외와 착취, 그리고 모든 형태의 역사적이고 제도적인 억압을 극복하는 행동과 과정도 포함되어야 한다.20)

그런데 카우프만의 문제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화답한 이는 생태여성주의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이다. 카우프만이 ‘핵 시대’ 도래의 혁명적 의미와 그 깊은 신학적 함의를 잘 포착하고 새로운 상상적 구성을 주장했다면, 실제로 의미 있는 신학적 재구성을 시도한 이는 맥페이그라 말할 수 있다. 핵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하나님의 그림언어(imagery)가 군국주의나 도피주의를 조장하는 방식들과 맞서 싸우라는 카우프만의 요청에 응답하여, 맥페이그는『하나님의 모델들 Models of God: Theology for an Ecological, Nuclear Age』21)에서 새로운 하나님 은유와 모델을 제안한다.

맥페이그 역시 핵 문제를 우리 시대의 ‘가장 중대한 문제’로 규정한다.22) 카우프만을 따라 그 역시 ‘인간의 책임’을 고취시키지 않는 어떤 신학적 해석도 거부하며, 싫든 좋든 이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인간이 하나님과 ‘공동의 창조자’가 되었고, 따라서 과거에 하나님의 힘과 우리의 힘의 관계가 ‘이원적’이고 ‘비대칭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3) 또한 카우프만을 따라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에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 밖에 존재하며 단독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핵 시대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24) 대안으로 맥페이그는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 의존하는 당신 하나님”의 은유와 모델로서 ‘어머니’ 하나님, ‘연인’ 하나님, ‘친구’ 하나님을 제안한다. 이 세 가지 은유나 모델의 공통점은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사랑의 힘을 강조한다는 것이다.25)

다시 말하면 맥페이그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지배와 통제, 절대 지배권과 주권으로 이해되는 힘(power) 이해이다. 그 힘이 지금까지 서양의 하나님 견해에서 핵심적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핵 문제와 정치사회적 억압의 문제 사이에는 내적 연관성이 있다. 그것 역시 힘의 문제, 즉 누가 힘을 행사하고 그것은 또 어떤 종류의 힘인가가 문제이다.26) 문제의 핵심은 ‘지배로서의 힘’ 이해인 것이다. 지배와 통제, 절대적 지배권과 주권으로 이해되는 힘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힘 이해는 핵 시대에 적합하지 않고 유해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런 힘 이해에 바탕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하나님 이해도 바뀌어야 한다.27)

예를 들어 유대-기독교의 하나님 묘사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형용사는 ‘전능하신’이다. 물론 그러한 견해가 반드시 지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맥페이그에게 문제는 여전히 힘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힘은 공유될 수 없는 힘이다.28)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나온 개념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인데, 맥페이그는 이 견해를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 편에서 싸우고 그들의 적을 물리치는 왕이며, 이를 “더욱 세련되게 해석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아버지라는 말이 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전자의 하나님 이해는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후자의 하나님 이해는 ‘도피주의’를 강화한다. 실제로 오늘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그룹으로 갈라져 있다. 하지만 맥페이그는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지배로서의 힘’은 핵 학살로 귀결되고, 도피주의를 지지하는 ‘섭리로서의 힘’은 우리를 복종으로 잠재운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 둘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안의 시작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힘과 인간의 힘의 관계를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9) 맥페이그는 정확히 카우프만의 입장과 함께 하고 있다.

정리하면, 맥페이그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세계 밖에 존재하면서 단독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일방적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는, 지고하고 거룩한 인격적 존재라고 보는 관점은 쉽게 분리와 이원론 그리고 통제의 개념들을 수반한다.30) 그래서 맥페이그는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 의존하는 당신 하나님”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 하나님의 새로운 은유와 모델로서 ‘어머니’ ‘연인’ ‘친구’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 은유와 모델들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고 세계의 하나님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부추기는 위계론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이론적인 은유와는 거리가 멀다. 이 은유들은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초월적이고, 또한 전능한 하나님 개념 대신 상호성, 책임 공유, 호혜성,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한다.31)

나는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단지 혹은 주로 전통에 대한 해석, 즉 고대의 신조들과 개념들을 오늘날의 문화와 상관 짓는 일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오히려 신학은 자의식적으로 구성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맥페이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찬동한다.32) 하지만 맥페이그의 핵 시대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하고 순진한 면까지 있다. 그녀는 핵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핵무기를 터뜨리지 않더라도 실제로 날마다 피폭을 당하고 있는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라늄 채굴 광산 주위에 사는, 미국과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에게 핵전쟁은 사실 매일 경험하는 실재다. 실제로 미국에서 우라늄 채굴 광산은 주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아울러 핵발전으로 그리고 인공방사능의 ‘내부피폭’으로 날마다 사실상의 핵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맥페이그는 아직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카우프만과 맥페이그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문제로 삼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가 핵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와 도전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앙의 언어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궁극적 주권이 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powers and principalities, 골 2:15, 엡 6:12)에게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제 아무리 그들의 힘이 강해도 그들의 지배는 정의롭지 않다고 선언하는 신앙의 언어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legitimacy)에 대한 물음이고 실재를 넘어선 것에 대한 희망이다. 맥페이그는 위계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개념들, 예를 들어 왕, 지배자, 주인, 통치자와 같은 하나님의 은유들을 비판하지만, 이런 개념은 핵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주권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 땅의 왕, 지배자, 주인, 통치자들을 ‘상대화’하는 언어로 여전히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약화되거나 간과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주권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엡 2:2)에게 있지 않다면 거기에 순응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맥페이그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다른 생명들을 파괴할 힘이 있다는 ‘지식’과 그 지식이 동반하는 ‘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과연 지식에서 책임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책임은 사랑과 열정 그리고 분노와 소명에서 나오지 않던가. 더욱이 맥페이그는 마치 ‘우리’ 모두가 세상을 멸절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처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여러 군데에서 “우리의 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이고 또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녀가 말하는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는 지구상 대부분 나라의 국민들도 그가 말하는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 아니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그의 나라의 국민들조차 그 ‘우리’에 속해 있지 않다. 과연 핵보유국가의 시민들이 핵무기 발사권과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정말 그들의 정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 자신도 갖고 있지 못한 권한을 ‘우리’ 모두가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는가? 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을 ‘인간’으로 일반화시키는가? 핵에 대한 권력과 지식은 일부에게 독점되어 있고 정보의 공개와 투명성은 언제나 문제였다. 그 힘이 왜 핵보유국, 핵 마피아, 팩 패밀리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힘인가?

맥페이그와 카우프만은 공통적으로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발전도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카우프만은 핵무기 경쟁을 중지시키고 핵무기의 전적인 폐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핵발전에 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33) 두 사람 다 핵무기와 핵발전이 동전의 양면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카우프만은 20세기 이후 기독교 신학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핵 시대의 도래’라는, 글자그대로 혁명적인 상황을 우리가 보게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핵 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제안에 전폭적으로 화답하여 구체적인 작업을 펼친 맥페이그 역시 핵 시대에 대한 깊은 지식과 대안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나는 오히려 맥페이그에게서 그가 단지 자신의 ‘은유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소재나 도구로서 핵 시대를 거론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인상도 받았다. 카우프만과 맥페이그는 핵 시대 도래의 혁명적 의미와 신학적 함의를 잘 포착하고 ‘핵 시대의 신학’(theology for a nuclear age)을 상상하고 구상하자고 제안했지만, 정작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theology for a nuclear-free world)을 상상하고 구상하는 데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2.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그래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과 실천은 ‘피폭자’(被爆者)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3자의 관찰자의 자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인들은 종종 자신들이 피폭자였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피해자의 10분의 1은 ‘조선인’(朝鮮人)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식민주의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름답기로 소문난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원폭박물관에는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다.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은 오늘도 사람들의 망각과 무관심 속에 고통 받으며 살고 있다.34) 지금도 희생자들을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사회가 먼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먼저 피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1945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지 않았어도 모든 한국인들은 지난 30여 년간 이 땅 위에 지어진 수많은 핵발전소로부터 이미 많은 피폭을 당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이 땅 위에 전술 핵무기가 배치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피폭자였고 지금도 피폭자인 것이다.  

우리는 핵보유국의 눈이 아니라 피폭자의 눈으로 핵 문제를 보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만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세대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눈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괄하는 전 우주 생명공동체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분명한 입장에 서서 핵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핵 문제는 과학기술적으로 복잡한 문제여서 섣부른 판결을 내릴 수 없는 양면 가치의 문제’라는 애매한 태도에 빠질 수 있다. 실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에서 이루어진 에큐메니컬 토론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35)

WCC는 1974년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Bucharest)에서 열린 ‘과학과 기술에 대한 세계 협의회’(World Conference on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처음으로 핵에너지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협의회는 “종교는 핵 기술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준비된 답이 없으며...  교회와 종교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도덕적으로 우위의 입장에 있지 않고 단지 우리의 현대문화를 괴롭히는 불확실성을 공유할 뿐”이라는 모호한 결론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인간의 역사는 갑자기 바뀔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의 노력에 모호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빌미로, 핵 문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표명에서 빗겨나갔다. 물론 강력한 기독교 반핵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36) 하지만 WCC는 결국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분명한 합의, 즉 ‘핵에너지 문제에 대해 교회가 앞으로도 최대한 많은 토론을 해야 한다’는 합의만 할 수 있었다. 당시 WCC가 이 논의를 전개할 때의 에큐메니컬 패러다임은 JPSS(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였다. 이런 패러다임 아래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공적인 토론과 책임 있는 참여이다. 그러다보니 희생자의 편에서, 피폭자의 눈으로, 생명과 평화의 패러다임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세계교회의 핵에 대한 첫 토의는 ‘핵에너지라는 첨단 과학기술에 대해 교회가 내릴 수 있는 절대적 판단의 기준이 없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로 교회는 첨단 과학기술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일까?

이환진 교수는, 최근 필자가 조직한 한 심포지엄에서,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핵과 성서의 긴밀한 연관성을 발견한다.37) 저 유명한 바벨탑 이야기(창 12:1-9)에서 사람들은 돌 대신 ‘벽돌’로, 그리고 진흙 대신 ‘돌 기름’[石油]으로 높은 층대를 쌓는다. 이환진은 이 두 가지가 오늘날 컴퓨터 칩을 만든 것만큼이나 당대 최첨단 과학기술임을 환기시킨다. 고대 메포소타미아인들은 이 혁신적인 신기술 덕분에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신기술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흩어짐이었다. 분열이었고 불통이었다. 이환진은 그 때나 지금이나 분열과 불통의 한가운데에는 소위 최첨단 신기술이 자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신기술을 앞세워 모든 제국의 식민지가 하나 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포로를 경험한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은 도리어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라고 꼬집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핵 역시 최첨단 신기술로 선전되고 있다. 핵 보유국들은 마치 이를 통해 인류가 편리함과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환진은 핵이라는 바벨탑 사건을 통해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의 실상이 흩어짐이고 분열이며 또한 불통이고 재앙임을 읽어낸다.  

과학기술이 아니다. 피폭자의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이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의 시작이고 끝임을 우리는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생명과 평화의 신학은 생명을 빼앗기고 평화가 부인당하는 현장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학자들의 언어유희로 끝난다. 김정수 박사는 실제로 피폭자의 자리에서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십자가의 대속론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38) 실로 한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피폭자와 희생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방사능 노출에 더욱 취약하여 각종 암과 대사장애, 불임, 그리고 기형아 출산 등의 고통을 세대를 이어가며 당하고 있다. 김정수는 땅 덩어리가 좁은 한국에서 한번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서울이나 수도권도 핵 방사능 오염의 ‘사정거리’ 안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우리가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핵 문제를 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잠재적 피폭자’로서 혹은 ‘유예된 피폭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피폭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십자가 대속론’의 의미를 다시 성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십자가의 신학은 부활신학을 준비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졌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의 금요일은 영광과 기쁨의 부활 새벽을 위해 존재하는 임시 징검다리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불식중에 가능하면 그 십자가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니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다는 위로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김정수는 이런 대속론적 십자가 이해를 유비론적으로 따르면 핵발전소 사고의 피폭자들과 피폭된 자연은 수도권 지역의 사람들이 값싼 전기를 사용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불가피한 희생양이라는 왜곡된 정당화의 위험성을 동반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모두가 피폭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속적’ 십자가는 없다. 그렇다면 “피폭자들의 얼굴은 우리의 얼굴임을...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김정수는 모든 피폭자들을 타자화하는 거리두기를 중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곧 회개(메타노이아)임을 주장했다.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한국교회가 할 일이 많이 있다. 우선 원폭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는 일이다.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재한 원폭피해자 1세에 정부는 한해 월 10만원씩 분기별로 진료보조비를 지급하고 있으나 이는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다. 희생자들을 위해 추모예배와 추모제를 열어주는 것도 한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둘째로 핵발전소 온배수로 피해를 입은 전국의 어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들 또한 ‘피폭자’다. 지난 한겨레신문 6월 13일자에는 노현웅 기자의 “원전 온배수 ‘콸콸’ ... 쭈꾸미 없는 ‘쭈꾸미 명품마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전라북도 고창군 구시포항 입구에는 ‘쭈꾸미 명품마을’이라는 비석이 놓여 있는데 영광 핵발전소에서 온배수를 내뿜고 또한 1km가 넘는 방류제를 쌓은 이후 수온이 높아지고 물길도 바뀌어 이제는 쭈꾸미 없는 ‘쭈꾸미 명품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원래 구시포항이 있는 고창과 영광군 앞바다는 ‘칠보 해안’이라 불릴 정도로 해산 자원이 풍부했다. 그러던 2002년 영광 핵발전소가 5 · 6호기 추가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온배수 배출 통로를 만든다며 1,132m 방류제와 342m 돌제(퇴적물 방지 및 수심 유지를 위한 인공 둑)를 바다를 가로질러 건설하고 난 뒤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영광 핵발전소가 1초에 쏟아내는 온배수는 300t이 넘는다. 365일 24시간 내내 바닷물보다 섭씨 7~8도나 뜨거운 물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여름이면 바닷물 표면이 최고 섭씨 41도까지 오르고, 겨울에는 유독 온배수 배출구 쪽에만 안개가 끼곤 한다. 그 결과 영광군과 고창 지역의 어장은 어장으로서 기능을 이미 상실해버렸다. 당연히 관광객도 줄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려 오는 피서객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생계가 막막해진 어민들이 피해보상을 원하고 있지만 한국수력원자력은 10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왜냐하면 구시포의 어민들이 정식 어업권을 허가받은 것이 1995년의 일인데, 이 때는 이미 영광 핵발전소가 가동된 뒤였고, 이 탓에 고창군은 어민들의 어업권에 ‘부관’(조건)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온배수로 인한 피해보상 청구는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이 한 문장이 ‘주홍글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싸움은 한수원과 고창군의 싸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참다못한 어민들이 지난 5월 18일에 한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고송을 냈다. 영광 핵발전소 5호기가 가동되기 시작한 2002년 5월 20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인 10년을 바로 코앞에 둔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한수원은 “전국 각지에서 온배수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방적인 민원을 모두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수원이 제대로 말했다. 핵발전소의 온배수 문제는 정말이지 “전국 각지”의 문제인 것이다. 피폭자의 자리에 서서 핵 없는 세상을 기도하고 실천하려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전국 각지”에서 핵발전소 온배수로 인해 살 길이 없어진 약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셋째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피폭자’인 밀양의 노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연대해야 한다. 밀양에서 초고압 송전탑 공사에 반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치우씨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한국전력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밀양 주민들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게다가 손해배상 소송과 별개로 주민들에게 ‘벌금 폭탄’을 내릴 수 있는 공사방해금지 가처분신청도 냈다고 한다. 공사방해 행위에 대해 1인당 하루 100만원씩 과태료 처분을 내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송 및 가처분신청을 제기당한 주민은 모두 15명인데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라고 하니 기가 찰 일이다. 이 분들은 농사를 짓거나 달리 하는 일이 없는 무직자들이다. 이들 중 당뇨 합병증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곽정섭씨는 “버는 돈도 없이 남의 집에 얹혀사는 내게 한전이 하루 백만 원씩 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말”이라며 “지금이라도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콱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39)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피폭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 핵을 넘어서 생태사회로 진입하는 길에는 지름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 하셨던 것처럼 고난 받는 자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이 핵은 넘어 생태사회로 나아가는 유일하고 참된 길이다.

 3. 핵과 평화는 양립할 수 없다

 핵은 워낙 많은 거짓과 신화로 가려져 있어서 ‘핵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끈질긴 성찰과 공부를 요구한다. 우리가 핵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는 핵무기(nuclear weapons)는 군사용이고 핵발전(nuclear power plant)은 평화용이라는 거짓 신화부터 넘어서야 한다. 원자력은 처음부터 군사적 이용, 즉 원자탄개발을 위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원자로 하면 발전(發電)을 연상하지만, 원자로란 본래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라늄238을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239로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핵무기이고, 그것을 천천히 발산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핵발전이다. 핵무기와 핵발전의 뿌리는 하나라는 말이다. 실로 수많은 나라들이 민간 핵발전이라는 덮개 아래서 핵무기를 개발했다. 잘 알다시피, 핵은 안전하지도, 깨끗하지도, 또 싸지도 않다. 핵 과학자들도 그것을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핵발전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핵발전이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해주기 때문이다. 간 나오토 전 일본총리의 말대로 후쿠시마 사고로 일본 열도의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인과 관료, 재계는 어떻게든 핵발전 산업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핵발전에서 핵무기의 원료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핵발전은 핵무기에 대한 욕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핵무기가 문제라면 핵발전도 동시에 문제여야 한다. 이 연결고리를 잃어버리면 ‘핵 없는 생태사회’는 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라는 구호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주소년 아톰’을 아직도 정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핵발전과 핵무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핵은, 무기이든 발전이든, 평화와 양립할 수 없다.

오히려 핵발전이 많아지면 평화를 더욱 위협한다. 핵발전소에 대한 군사적 혹은 테러 위험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핵발전소는 현대 비대칭 전쟁에서 공격목표 1번 중 하나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의 핵발전소들은 북한 장사정포의 전략적 타격지에 포함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다. 핵은 그 원료를 생산하는 지역의 평화마저 심각히 위협한다. 실제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우라늄 부족은 수 십 년 전부터 분쟁의 씨앗이 되어 왔다. ‘피 묻은 다이아몬드’(bloody diamond)만 있는 게 아니다. ‘피 묻은 우라늄’(bloody uranium)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라늄은 오래전부터 경제적 투기의 대상물이다. 그것을 둘러싼 전쟁은 석유를 둘러싼 전쟁만큼이나 세계평화를 위협한다. 그러니까 핵은, 그것이 무기든 발전이든, 결코 평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4. 핵발전은 지구온난화 극복을 위한 대안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계 핵산업은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핵발전소 폭발과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참사 이후 급속히 쇠퇴하는 듯 했지만, 지구온난화를 빌미로 기사회생했다. 지금도 핵발전은 마치 기후변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핵에너지가 온실가스를 방출하지 않는 저탄소 청정에너지라는 거짓 신화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설사 발전부문에 국한해서 핵발전이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핵발전의 전 과정에서, 특히 우라늄의 채굴과 가공 및 농축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그런데도 핵발전이 기후변화의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설상가상으로 핵발전은 발전부문에 있어서도 낭비가 심한, 대단히 비효율적인 에너지다. 물리적으로 핵발전 과정에서는 핵분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단 3분의 1만이 전력으로 전환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섭씨 30도가 넘은 온배수(溫排水) 형태로 바다에 버려져 주변 생태계를 심각히 오염시킨다. 게다가 핵발전은 전력의 낭비를 조장하는, 극도로 융통성이 떨어지는 에너지다. 핵발전은 한번 가동을 시작하면 전력수요에 맞추어 출력을 조정하지 못한다. 낮이나 밤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1년 내내 동일한 출력으로, 그것도 언제나 최고의 소비 시점에 맞추어 전기를 생산해야만 한다. 그래서 핵발전에는 언제나 ‘남는 전기’라는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지난 수 십 년간 그렇게 이른바 ‘심야 전기’를 사용하라고 권장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한 사회의 에너지 소비 전체를 과도하게 만들어 도리어 지구온난화에 기여한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사실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모든 핵발전소가 생산하는 전력이 전 세계 총 에너지 수요의 고작 2%만 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달리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는 벌써 오늘날 전 세계 에너지 소비의 약 13%나 충당하고 있다. 결국 화려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핵은 한낱 틈새기술에 불과하며 기후붕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적 에너지가 아닌 것이다. 이미 수많은 과학적 연구와 사례들은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로 인류의 에너지 공급을 100% 충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가 화석연료와 핵에너지로부터 탈피하여 재생가능 자연에너지의 시대를 여는 것은 이제 과학기술적으로도 가능하다.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햇빛과 바람과 지열과 파도와 같은 재생가능 자연에너지가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길임을 확신한다. 핵발전은 오히려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로의 전환을 방해한다. 전력낭비를 부추기고, 미래의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위한 투자도 억제한다. 그러므로 핵에너지와 지속가능성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핵에너지는 결코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로 가는 중간과정의 징검다리 에너지도 아니다. 핵무기가 세계평화에 대한 틀린 해답이었듯이, 핵발전도 지구온난화에 대한 틀린 해법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핵발전이 지구온난화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확언하기 위해 넘어야 할 한 산이 있다. 지구를 살아있는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Gaia)로 정의내림으로써 환경운동에 크게 이바지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라는 큰 산이다. 뜻밖에도 러브록은 기후변화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핵발전을 옹호하고 있다, 그는 ‘핵에너지를 사랑하는 환경론자들’(Environmentalists For Nuclear Energy, EFN)라는 이름의 환경단체의 회원인데, 이 단체가 핵발전 대국인 프랑스의 환경단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왜 제임스 러브록이 이 단체의 회원인지 우리는 솔직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기후변화를 핑계로 핵발전을 소생시켜보려는 전 세계 핵관련자들에게 그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40)

진상현 교수가 제임스 러브록의 행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41) 러브록은 지금 인류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정도가 아니라 지구가열(global heating) 상태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상황은 절박하다. 이런 급박한 위기 속에서 러브록은 수소경제로의 이행만이 궁극적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수소연료는 이산화탄소가 전혀 배출되지 않는 청정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로는 수소연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핵발전을 이용한 수소연료전지 생산이 가장 바람직하다. 알다시피 원자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이 가능한데, 하나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과 같은 무거운 원자를 쪼개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핵분열’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수소 같은 가벼운 원소를 합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핵융합’ 방식이다. 러브록은 후자는 선호한다. 실로 그는 전화번호부 크기의 작은 상자형 핵융합 발전로를 집집마다 보급하는 미래를 상상할 정도로 핵융합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갖고 있다.

사실 러브록은 가이아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을 출간했던 1979년부터 핵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그 이유는 - 뜻밖에도 - ‘폐기물 처리가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석연료는 이산화탄소라는 막대한 양의, 그것도 공중으로 흩어져 수집하기 힘든 폐기물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발전소 한구석에 매립이 가능한 방사성폐기물은 가이아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심지어 콘크리트로 잘 처리된 고준위폐기물을 집집마다 한 덩어리씩만 보관하면 가정용 난방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러브록은 이렇게 방사능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도리어 그는 제3세계 사망자의 대부분이 원자력이 아닌 과로, 영양부족,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방사능으로 인한 암 발생과 핵전쟁에 대한 서구인의 두려움은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는 원자력과 관련해서는 “두려움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루즈벨트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중국 양자강의 삼협댐 건설과 비교하면서 체르노빌을 저평가한다.

그런데 러브록은 왜 이렇게 방사능 오염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일까? 사실 러브록에게 진정한 오염원은 원자력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가이아론을 이야기하는 초기부터 러브록은 지속적으로 “지상에는 오직 한 종류의 오염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라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인류가 탄생한 이래 환경파괴에 일조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에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이 부분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스스로를  ‘행성 의사’(planet doctor)라 자임하는 러브록에게 가이아의 암적 존재는 핵발전소가 아니라 인간인 것이다.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로 분류될 수 있는 러브록의 사상에서 중요한 것은 가이아의 위대한 능력이지 가이아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아니다. 그리고 러브록이 핵발전 자체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도 ‘초월의 지평’을 상실한 심층생태주의적 사고가 작동하고 있다. 러브록이 핵발전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원자력을 ‘대단히 자연적인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러브록에게 우주의 본질적인 에너지, 즉 별을 빛나게 하는 근본적인 에너지는 원자력이다. 그러니까 이런 우주적인 입장에서 보면 지구상에 있는 풍력, 수력 등은 오히려 대단히 희귀한 에너지다. 그러니까 그에게 원자력이나 방사능 물질은 ‘정상적인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가 핵발전 그 자체와 거기서 배출되는 핵폐기물의 위험성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원자력은 위대한 가이아의 일부분이 아니던가!

여기서 우리는 초월의 지평을 상실한 심층생태주의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볼 수 있다. 결국 세계관의 차이다. 러브록에게는 초월에 대한 이해가 없다. 기독교의 창조신앙이 가지고 있는 초월의 지평이 없다. 그래서 가이아에 대한 비판의 지렛대가 없다. 이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원자력을 이 땅의 불이 아닌 ‘하늘의 불’로 생각한 다카기 진자부로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원자력은 하늘의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지구상에서 태워야 하는 불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의 자연과학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자의 불이 타고 있는 것입니다.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을 보고 있으면 번쩍 하고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핵분열이죠. 핵이 빛나는 것, 핵이 별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우주의 불, 하늘의 불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물은 하나도 살지 않습니다. 역시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는 다르기 때문에 하늘의 이치가 있는 데는 생물이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생물이 있는 세계에 이런 핵의 불이 있으면 그건 재앙의 불이 됩니다.

 러브록은 이 ‘하늘의 불’을 ‘자연의 불’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게는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카기 진자부로에게 하늘의 불은 우주의 불로서 이 땅의 불과는 구분되는 어떤 것이다.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 이유는 이 땅에 생명이 존속하기 위해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지구라는 것은 태고시대에 우주의 부스러기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성되었을 당시는 방사능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불이 남아 지구에 죽음의 재가 가득히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이러한 타고 남은 찌꺼기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꽤 강한 방사능이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지구에 생물이 없었던 시대였죠. 아주 원시적인 생물이 생기는 데 10억 년쯤 걸렸다고 합니다... 수 억 년이 걸려서 방사능이 차츰 식은 후에야 마침내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물이 살 수 있게 된 지구에 다시 인공적으로 새 방사능을 만들어서 방사능의 불을 일으킨 것이 바로 핵발전인 것입니다. 확실히 하늘의 불을 훔친 것은 인간의 오만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42)

 러브록에게 원자력은 가이아의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다카기 진자부로에게 원자력은 오만해진 인간이 하늘에서 훔쳐온 불이다. 이런 우주론적 세계관의 차이가 한 사람은 핵발전을 찬성하게 다른 사람은 반대하게 만들었다. 세계관이 중요하다. 신학이 중요하다.

다카기 진자부로는 핵에너지가 일상적인 세계의 에너지와 완전히 이질적인 에너지임을 강조한다. 일상의 조건에서 원자는 안정되어 있다.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은 항상 안정되어 있고, 원자핵의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가 이러저러하게 결합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가 공업적으로 생성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인체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생명의 세계란 바로 그러한 세계다. 즉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발 딛고 사는 세계는 “원자핵의 안정을 토대로 이루어진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핵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에서 본래부터 전제되어온 원자핵의 안정성에 감히 도전함으로써, 즉 원자핵의 안정성을 깨뜨려 방대한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이 위협한다.

이제 우리는 제임스 러브록과 결별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그를 떠나겠지만 그는 우리에게 ‘하늘’이라는 초월의 지평이 생명과 평화의 신학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반면교사로 남을 것이다.

 5. 핵폐기물로 인한 지구오염은 창조질서의 파괴이고 신성모독의 죄다

 러브록은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간과했지만 사실 이것은 핵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신학적 문제의 하나이다. 정말 믿기지 않지만, 인류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 백 개의 핵발전소를 지구 여기저기에 지어왔다. 하지만 단 1그램의 핵폐기물도 안전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이른바 폐연료봉의 재처리는 더 많은 핵폐기물을 만들어낼 뿐이다. 인류는 아직도 핵폐기물의 최종보관 방법을 모른다. 핵폐기물은 100만년 동안이나 방사선을 내뿜지만 그것을 생태계와 격리시키는 인간의 드럼용기 수명은 고작 40년 간다.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까지 고준위폐기물을 안전하게 최종적으로 보관할 장소는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핵발전소 수조에는 약 1만 1,370우라늄톤의 폐연료봉이 ‘임시로’ 보관되어 있다. 오는 2016년이면 그 보관용량이 한계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폐연료봉들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할지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또 한 차례 핵폐기장 문제를 놓고 한국사회가 깊은 분열과 민란에 가까운 진통을 겪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엄청난 핵폐기물을 후손들에게 떠넘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대손손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이며 범죄행위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창조질서에 대한 파괴행위일 뿐이다. 나아가 그것은 그것을 지으신 분에 대한 모독이다. 현재와 미래의 모든 생명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명의 축복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우리 세대가 잠시 편하자고 다른 생명과 또 앞으로 올 생명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지으시고 성실하게 양육하시며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모독이다.

 6. 에너지 탐욕과 소비주의에 기초한 핵문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핵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의 탐욕과 이기심에 대한 영적 회심을 포함한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었고 공범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핵발전소가 생산한 전력을 맘껏 사용하는 호사를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가 9기던 1991년에 2,312kWh이던 1인당 전력소비량은 2005년에 7,403kWh로 3배나 증가해 이미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를 앞질렀다. 2010년에 우리나라는 그 4배나 되는 9,493kWh의 전력을 소비했다. 이 과정에서 피폭자였던 한국인들은 동시에 ‘핵 생산자’, ‘핵 소비자’, 나아가 ‘핵 가해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잔치’는 끝났다. 이제부터 우리는 핵폐기물의 처리와 핵발전소의 폐쇄라는,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문제와 부딪쳐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우리가 핵발전을 통한 전기의 풍요라는 ‘단맛’을 봤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핵발전소의 폐쇄와 핵폐기물의 처리라는 ‘쓴맛’을 보아야 하는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1950년대에 시작된 인류의 핵발전은 이제 공통적으로 수명을 다한 핵발전소의 폐기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한국은 1978년 부산 기장에 고리발전소를 지으면서 매 18개월마다 1기씩의 속도로 지금까지 총 21기의 핵발전소를 지어왔다. (2기가 곧 추가 가동될 전망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매 18개월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1기씩의 핵발전소를 철거해나가야 한다. 핵발전소 1기당 철거해체 비용은 무려 6,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짓 풍요’의 기반을 냉철히 돌아보도록 촉구한다. 산업화를 위한 에너지 과용은 인간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무한 경제성장과 이윤극대화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체제는 필연적으로 에너지 과소비와 소비주의로 귀결된다. 이계삼은 우리가 이러한 핵발전을 유지하면서 유지하고자 하는 생활양식이라는 데 무엇인지 그 실상을 이렇게 폭로한다.

 새벽 세시, 네시가 될 때까지 미친 듯 깜빡이는 술집들의 네온사인, 밤을 모르는 환한 밤거리, 열두시, 한시까지 꺼질 줄 모르는 심야학원의 불빛,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방방곡곡 온 학교에 밤늦은 시간까지 쉭쉭 돌아가는 냉방기와 난방기들... 그저 밤에는 불 끄고 잠자리에 들면 될 것을.

 이정배 교수는 한국전력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한 노인의 죽음으로 귀결된 밀양의 송전탑 반대 투쟁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삶의 양식을 달리하지 않으면 탈핵, 탈원전을 부르짖는 것이 약자의 죽음을 언제든 방조할 수 있는 것이라 경종을 울린다.43) 결국 탈원전은 내 삶과 욕망과 길들여짐과 너무도 깊게 연루되어 있기에, “밖을 멈추기를 원한다면 내 삶에서도 멈춰야 할 것이 분명히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생명가치를 본질로 하는 종교적 힘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실로 그렇다. 핵에 대한 물음은 곧 우리 문명의 근본을 묻는 물음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기가 필요하다는 현대문명의 신화로부터 과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물음이다. 한 달에 단 한 시간도 소등하지 못하는 우리의 ‘밝음의 문화’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허황된 것인지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여 항상 전자에 모든 긍정과 가치를 부여한 기독교의 전통적 사유체계 자체를 근원적으로 돌아보는 작업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최근 서울시도 ‘원전 하나 줄이기 종합 대책’에 나섰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건물 1만 여 채 지붕에 태양광 발전소를 세우고, 수소연료전지 발전서 131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2011년 현재 2.8%에 그치는 서울의 전력 자급률을 2014년에 8%, 2020년에는 20%까지 높인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핵발전소인 영광 5호기가 생산하는 발전량에 해당하는 전력을 절약하고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서울시는 우선 주요 선물이나 옥상이나 지붕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하는 ‘햇빛도시’ 건설에 나서겠다고 했다. 설치를 원하는 민간단체에는 설치비 30% 범위에서 연리 2.5%의 장기 융자 혜택도 준다고 했다. 나아가 공공시설 26개소에 30MW 규모의 ‘나눔발전소’를 짓고, 자치구별로 1곳씩은 외부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에너지 자립 마을’도 조성하겠다고 했다. 이번 종합대책 추진을 위해 2014년까지 총 3조 2,444억 원(시비 6,366억, 국비 2,321억, 민자유치 2조 3,757억)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각 지자체의 이런 사업들이 계획대로 전개되는지 살펴보고 이미 열심히 추진하고 있는 녹색교회 운동 등과 연계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끝없는 에너지 탐욕과 소비주의 위에 번성하고 있는 핵문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작년 3월의 후쿠시마 대재앙은 인류가 핵으로부터 시급히 문명사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는 일대 경종이었다. 당장의 소비지향적 삶을 위해 사회와 자연에 해악을 끼치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다. 이와 달리 절제와 인내로 재생가능 자연에너지를 촉진하려는 노력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다.(마태 7:13-14)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7. 한국정부는 핵발전 중심의 사이비 녹색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한국정부는 ‘녹색성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 정부가 말하는 녹색의 핵심은 핵발전이다. 한국정부는 전력에너지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 오는 2030년까지 약 40조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추가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부는 지난 2010년에 핵발전소를 전략 수출산업으로 지정했고, 2011년 후쿠시마 대재앙을 계기로 앞으로 20년 동안 전 세계에 80기의 핵발전소를 수출해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3대 핵발전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는 야심만만한 구상을 세워두고 있다. 아울러 오는 2014년 만료되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앞두고 일본처럼 핵 처리 권한을 갖기 위해 은밀히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난 2012년 3월 26-27일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렸었다. 하지만 우리는 핵무기는 국가나 세계의 안보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협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핵발전은 녹색발전이 아니며 핵안보는 생명안보가 아님을 천명했다. 진정한 안보는 핵보유국들의 안전이 아니라 전 지구생명공동체의 안전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화’(요한 14:27)임을 고백했다.    우리는 정부와 국민에게 핵발전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해 강조해야 한다. 핵발전 사고는 매일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매일 일어나고 있다. 핵발전은 실수 없는 인간을 요구하지만,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후쿠시마를 보고 혀를 찰 때가 아니다. 얼마 전에 우리도 고리 핵발전소에서 후쿠시마 바로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기 때문이다. 한 협력업체 직원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지난 2012년 2월 9일 고리 1호기에서 블랙아웃(blackout) 사고가 일어났다. 회사는 조직적으로 그것을 은폐하다 한 달이 지나서야 술자리에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문제는 고리 1호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후한 핵발전소이고 30년의 수명을 다한 지난 2008년에 이미 폐쇄되었어야 하나 당시 안전검사 ‘미달’에도 불구하고 10년 수명연장을 받아 지금 추가 운전 중이라는 사실이다. 수명연장 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원자로를 둘러싸고 있는 압력용기의 내구성이다. 이 압력용기는 장시간 방사능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성자로 인해 매우 약해진다. 깨지기 쉽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정전 사태가 일어나면 원자로를 식히기 위해 긴급(노심)냉각장치(ECCS)가 가동되는데, 이 안전장치가 오히려 ‘비수’가 될 수 있다. 뜨겁게 데워진 유리잔에 갑자기 찬물을 부으면 ‘쨍’하고 깨지듯, 오랫동안 사용해서 약해진 원자로에 갑자기 냉각수를 부으면 금이 가거나 심지어 폭발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리 1호기는 압력용기 파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수명이 연장되었다. 이유는 엄격한 파괴검사에서 부적합 판정이 나오자 느슨한 방식의 비파괴검사를 실시하여 거기서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조직검사에서 암으로 나왔는데, 초음파검사에서 암이 안 나왔으니 괜찮다는 논리”이다.44)  지금 우리는 후쿠시마를 바라볼 때가 아니다. 바로 우리 집 앞마당에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리1호기를 반드시 폐쇄시켜야 한다. 고리1호기는 1977년 6월 임계(핵연료가 처음 열을 발생시킨 시점) 이후 35년이 지난 국내 최고령 핵발전소다. 폐쇄여부의 최종결정권을 가진 대통령 직속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결국 지난 7월 4일 재가동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이 정부는 전 세계에서 현재 가동 중인 435기 핵발전소 가운데 30년이 지난 것이 전체의 41%인 178에 달한다는 점, 그리고 40년 이상 가동 중인 핵발전소도 32기(7.4%)에 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핵발전에 대한 반대는 만성적인 전력수급 불안과 국가 재정 부담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고리1호기 재가동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고리1호기는 향후 30년 이상 가동한 노후 핵발전소 처리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재 월성1호기(1982년 11월 임계)는 오는 11월에, 고리2호기(1983년 4월)는 내년 4월에 각각 설계수명 30년의 시한을 채우게 된다.45) (그러고 보니 WCC 부산총회가 열릴 때 세계교회와 함께 폐쇄요구를 해야 노후 핵발전소는 고리1호기뿐만 아니라 고리2호기까지이다.) 고리 핵발전소 30km 안에 있는 주민은 약 342만 명, 월성의 경우는 127만 명이다. 전 세계적으로 고리 핵발전소만큼 대도시에 인접해 많은 수의 원자로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여기에는 대규모 산업시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번에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핵무기 보유능력을 갖추겠다고 이야기한 정몽준이 지배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의 울산공장은 고리 핵발전에서 약 26km, 월성 핵발전소에서 약 22km 거리에 있다. 현대자동차의 울산공장은 고리에서 약 27km, 월성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다. 울산지역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기준으로 전국 생산액의 13.56%, 전국 수출의 15.31%나 된다. 그러니까 고리나 월성에서 사고가 날 경우 인구는 물론이지만 이 나라의 경제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빤하다. 앞서 언급한 사실이긴 하지만, 탈핵법률가 모임인 해바라기 대표 김영희 변호사도 핵발전소 사고는 고장이나 자연재해 말고도 북한이 미사일이나 제트기로 테러를 가하는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는 데, 이 경우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국내 핵발전소의 격납건물은 연료탱크가 가득 찬 상태인 점보비행기의 충돌에 견딜 수 없다. 김변호사는 따라서 진정한 공포의 대상은 핵발전소이며, 핵발전소를 폐쇄하는 것만이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강조한다.46) 최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 연대>는 유효 가동 기간이 지난 고리 1호기 재가동 승인을 즉각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30년이 넘는 핵발전소를 순차적으로 폐쇄하고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핵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모든 단체와 연대해 고리1호기가 폐쇄될 때까지 기도하며 행동해야 한다.

핵은 결코 안전한 에너지가 아니다. 핵은 사회와 국가 그리고 지구 전체의 생명안보를 위협하는 자멸의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핵무기의 전면적 폐기와 핵발전의 완전한 종결을 요구해야 한다. 핵우산을 통한 방어든, 핵 공격을 통한 방어든, 핵을 통한 안보는 진정한 안보가 아니다. 한국정부는 핵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이비 녹색정책에서 벗어나 재생가능 자연에너지에 기초한 진정한 녹색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각국 정부는 더 이상의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고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완전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핵에너지 체제를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거기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그리고 희망2013승리2013원탁회의가 공동으로 발행한 <“희망2013” 비전 선언 2012 총선 범야권공동정책 - 민주진보진영이 제안하는 대한민국의 비전>을 보면, 제13항에 “원자력 등을 주축으로 하는 에너지체제를 녹색 대안 에너지체제로 전환하고,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중시하는 생태적 사회경제구조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핵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원전 추가 건설을 중단하며 원전정책을 전면 재검토한다”라고만 말하고 있다. 아직 선언에 머문 느낌이다. 더 다듬고 협의해서 각 정당의 정책이 될 수 있도록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힘과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8. 핵 지뢰밭 동북아시아에서 생명의 연대가 시급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하면, 현재 전 세계에는 모두 440여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이며, 550여기가 새로 건설 중이거나 앞으로 건설될 계획이다. 한국에는 1978년에 첫 핵발전소인 고리발전소가 부산 기장에 들어선 이래 현재 모두 21기의 (곧 23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인데, 원자로 가동 대수로 한국은 세계 5위이지만 (미국이 104기로 1위, 프랑스가 58기로 2위, 일본이 54기로 3위, 그리고 러시아가 31기로 4위), 핵발전 밀집도에 있어서는 세계 1위다. 일본은 54기나 되는 원자로를 가지고 있고, 중국은 현재 14기를 가동 중인데 후쿠시마 대재앙 이후에도 중국의 동해 연안에 27기의 원자로를 추가로 짓고 있다. 한마디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는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지뢰밭’이다. 만약 앞으로 다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확률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다. 중국과 북한은 이미 핵무기 보유국이고, 일본은 핵무기 비보유국이면서도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재처리 시설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곧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일본은 이미 막대한 잉여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고 엄청난 양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한 복판에 서있다. 이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생명의 연대를 이루는 일은 곧 세계평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의제가 되었다.

백낙청 교수는 현 정부가 들어서서 ‘비핵 · 개방 · 3000’이라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작년 11월 29일 담화에서 북의 자발적 핵포기 가능성을 배제해버렸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정책의 실질적 파탄을 자인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이 채택한 9·19 공동성명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합의는 북이 핵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핵무장을 어떻게 방지하느냐에 대한 합의였다. 그런데 지금은 북이 핵실험을 2회나 했고, 우라늄 농축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해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의 성격도 달라져 있다. 게다가 문제해결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북미간 불신이 더욱 깊어진 상태다. 북의 김정은 체제가 안착하고 오바마가 재선된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겠으나, 김정일 위원장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칭송되는 핵무기 보유를 북이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비록 김위원장 자신이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주석의 유훈’임을 거듭 강조하긴 했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것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백낙청 교수의 핵심적 제안은 북핵문제는 결코 핵문제에만 매달려서는 풀 수 없는, 전체 한반도 문제의 급소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부시 행정부가 - 실은 한때 클린턴 행정부도 - 대북강경노선으로 기울었을 때 김대중 · 노무현 정부와 한국측 전문가들의 끈질긴 설득이 미국의 강경노선을 경제하고 마침내 방향을 바꾸는 데 기여한 바가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한국정부의 주도력이 중요한데 이 한국정부의 정책을 바꾸거나 정부 자체를 교체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국민뿐이며 그 점에서 남한의 민간사회라는 ‘제3당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북이 완전한 비핵화에 동의하려면 이른바 체제보장에 대한 북측의 요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할 터인데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수교 그리고 대규모 경제원조가 더해지더라도 남한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감안하면, 한반도의 재통합 과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할 ‘국가연합’이라는 장치가 마련되어갈 때 비로소 북측 정권으로서는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자체개혁의 모험을 감행할 그나마의 여건이 충족되는 것이라고 백낙청 교수는 강조한다. 그는 현단계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의 핵심현안인 국가연합 건설작업과 북핵문제 해결의 현실주의적 인식 사이에 뜻밖의 친화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2013년 이후 한반도가 6.15 시대의 재가동을 시작으로 9.19 공동성명의 이행과 남북연합의 건설과정에 들어설 때, 남북이 공유하는 ‘2013년 체제’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47)

우리는 백낙청 교수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면서 특히 최근의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일본의 핵무장을 저지하도록 에큐메니컬 네트워크를 활성화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48) 지난 제2차 대전에서 패전한 뒤 만들어진 일본의 군사 관련 3가지 금기 사항이 최근 들어 모두 해제되었다. 첫째로, 1969년에 우주를 군사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우주의 평화 이용 원칙’은 1998년에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 시험을 하자 “우주 이용을 ‘국민의 안전을 위해 추진한다는 다섯 글자를 넣어” 군사용 첩보위성 4기 체제를 선언하면서 깨뜨려버렸다. 둘째로, 2011년에 무기 수출 금지 3원칙을 수정하여 무기 공동 개발과 수출을 허용함으로써 도 하나의 금기도 깨뜨려버렸다. 셋째로, 결국 지난 6월 22일 일본 정부는 원자력기본법을 개정하면서 “국가의 안전 보장에 이바지한다”는 조항을 추가해 마지막 금기마저 깨뜨리고 기어이 핵무장화의 길을 내딛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에 이어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를 계기로 중단했던 플루토늄-우라늄 혼합산화물(MOX) 연료 가공 공장의 추가 공사를 승인함으로써 핵발전소가 폐지되더라도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플루토늄 관련시설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세상에 천명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핵발전소 존폐와 상관없이 군사용 핵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롯카쇼무라 재처리 시설을 존속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아오모리 현 롯카쇼에 위치한 롯카쇼무라는 일본 핵관련 시설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전국의 핵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보아 플루토늄을 추출해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고가 끊이지 않아 사실상 가동이 중단되었던 상태였는데, 이번에 MOX를 대량생산하는 공장의 추가건설이 허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 공장의 완공예정은 2016년이다. 하지만 MOX를 원료로 사용하는 고속증식로 몬주는 2050년에나 상업화가 가능하다. 여기서 이번 공장 건설 허가의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도 분명히 드러난다.  

현재 일본이 공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플로토늄의 양은 국내에 6.7t, 영국과 프랑스 재처리시설에 23.3t 등 총 30t이다. 핵폭탄 수천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북한이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기급 플루토늄은 고작 30~50kg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일본이 고도의 핵개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근거 중 하나는 ‘고속증식로 몬주’의 존재이다. (몬주는 대승불교에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의 문수를 의미한다. 우리의 동해쪽 후쿠이 현 쓰루가 시에 세운 몬주 고속증식로는 1995년 가동 4개월 만에 고장이 났고 재가동 3개월 만인 2010년에 또 고장을 일으켜 현재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고속증식로는 핵연료의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꿈의 원자로’로 불린다. 여기서는 무기로 사용 가능한 순도 97.6%의 플루토늄이 나온다. 일반 원자로에서 사용한 ‘사용후 핵연료’에도 플루토늄이 포함되어 있지만 군사용으로 전용하기에는 순도가 낮다.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도 소위 꿈의 원자로라는 고속증식로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사고 위험과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사실상 상용화를 포기한 상태이다. 현재는 인도와 중국과 러시아 정도가 고속증식로를 개발 또는 운영 중인데 이것은 사실상 군사용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사고 위험은 높은 반명 상용화 가능성이 낮은 몬주를 천문학적 비용(향후10년 간 몬주의 유지와 연구와 개발비로 연간 약 3천억 엔, 한화 약 4조 3천 억원을 투입할 예정)을 퍼부어가며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이유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문제는 미국이 이를 허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핵연료 재사용을 명분으로 1960년대부터 고속증식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핵개발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미국은 냉전체제에서 소련과의 대결 상황을 감안하여 이를 용인했다. 일본은 이 속에서 ‘당장 핵무기는 보유하지 않지만 핵무기 제조의 경제적이고 기술적 능력은 항상 보유한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결국 1987년 미일 정상회담에서 관세 등 미국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미국의 허가 없이도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미일 원자력협정을 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비교해 한국은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로만 있을 뿐이다. 일본은 원자로에 사용되는 농축우라늄을 만들 수 있는 원심분리기와 연 800t에 달라는 폐연료봉 재처리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라늄 핵폭탄과 플루토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모든 기초 시설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일본은 핵무기를 개발할 때 꼭 핵실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5대 핵 보유국은 핵무기 검증 실험을 컴퓨터 모의실험으로 하고 있는데 미국은 NOVA, 영국은 VALCAN이라는 핵융합 실험 장치를 갖고 있다. 일본도 GEKKO-XII라는 핵융합 실험장치가 있어 일본은 사실 북한보다 핵무기 개발에 더 근접한 나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핵무기를 대륙간탄도탄과 결합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는데 일본은 이미 OREX라는 대기권 재돌입 실험 장치를 통해 대륙간탄도탄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를 축적해 놓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올여름 2회에 걸쳐 지구 대기권 재돌입 실험을 다시 한다고 한다. 즉각 발사가 가능한 고체연료 로켓 M-V는 이미 세계 정상급이다. 이는 언제든지 대륙간탄도탄으로 전용될 수 있다. 북한이 시도하는 액체연료 형식 로켓과 관련해 일본은 지구 저궤도에 16t짜리 인공위성을 올려놓을 수 있는 실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 일본은 이렇게 ‘평화’라는 미명 하에 핵무장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소리 없이 갖추어 놓은 것이다.

일본이 핵무장으로 나아가는 명분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북한이다. 두 차례에 걸린 북의 핵실험은 이미 모든 능력을 갖추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데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둘째는 중국이다.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을 이미 갖고 이는 중국, 유인 우주선을 성공시키고 항공모함을 일본의 해양 교통로로 내보낼 수 있는 중국, 중국 남단 해남도 해저에 잠수함 기지를 건설한 중국에 일본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니까 실로 2차 대전에 끝난 지 60여년 만에 지금 한반도 주변 정세가 다시금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6자 회담이 북의 핵개발을 막지 못하면 일본의 핵무장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그리고 북한과 일본의 핵 개발을 저지하지 못하면 한반도 주변에 핵무기 제조 능력이 없는 나라는 남한 밖에 없게 된다. 남한도 심각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동북아는 명실상부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지뢰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동북아시아에서 ‘생명의 연대’가 시급하다. 우리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생명의 연대를 이루는 일은 곧 세계평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의제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에큐메니컬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동북아시아에서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 근래 일본의 반원전 · 자연에너지 운동가 이다 데쓰나리가 최근 한국을 방문하여 한중일 3국의 시민사회종교단체가 연대해 한중일 3국 중 어느 나라에서 핵발전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자국민은 물론 이웃나라들에게도 필해를 줄 경우 국경을 초월해 사고를 낸 전력회사, 핵연료 제조업자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벌이는 등 무한책임을 묻는 운동도 벌여나가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한마디로 핵발전소가 파산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49) 이런 아이디어도 동북아 생명연대에 참고할만한 제안일 것이다.

 9. 핵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김영락 목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떤 원리로 창조하셨는지 이야기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93가지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 93가지의 원소 중에 가장 가벼운 것(원자번호 1번)이 수소이고 가장 무거운 것(원자번호 93번)이 우라늄입니다. 그 가운데는 산소, 질소, 칼슘, 철, 알루미늄, 납, 금, 은 등이 있습니다. 이들 원소들은 상온에서 기체, 액체, 고체로 존재하는데, 서로 결합하여 물, 도리, 나무 등 온갖 생물과 무생물을 이룹니다. 이렇듯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최소 단위는 원자인데, 그 원자는 태양계와 같이 가운데에 핵이 있고 주변에 전자가 돌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가장 작은 원자의 세계와 가장 큰 우주의 모습이 닮은꼴이니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런데 원자는 또 ‘핵(核)’과 ‘전자(電子)’로, 그리고 ‘핵’(혹은 원자핵)은 다시 ‘양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핵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원자력’이라고 합니다. 핵을 분열시키거나 융합시키면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는데, 그 원자력을 순간적으로 발산시키는 것이 ‘핵폭탄’이고, 천천히 발산시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핵발전’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이 같은 핵발전은 ‘현대판 선악과’요 ‘물질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물질의 구조를 인위적을 깨뜨리면서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도 한 ‘제3의 불’을 취하려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리고 핵반응은 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데, 그를 통해 에너지를 취하려는 것은 ‘교만’입니다.50)

 실로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간은 그동안 불변의 것이라고 믿었던 원자핵을 쪼갤 수 있고, 원자핵이 쪼개지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가장 근원적인 자연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폭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51) 원자력은 사실 그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프로젝트였고,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었다. 플루토늄은 하나님이 지으신 물질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물질 가운데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에서 플루토늄이라는 맹독성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세계를 멸절시킬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플루토늄은 각설탕 5개 정도의 크기만 가지고도 일본 인구 2억을 멸절시킬 수 있는 정도의 ‘맹독성’ 물질이다.

원자력은 전대미문의 권력과 지배의 상징이다. 그것은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국가들에게 욕망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절대 권능에 대한 금단의 유혹이다.52) 인간은 그것을 얻기 위해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악마와 거래했다. 핵기술은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악마에게 담보로 건낸 ‘파우스트의 거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핵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핵 문제는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로 판명된다. 다카기 진자부로는 구약성서의 욥기에서 핵발전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좋은 계시’를 찾았다. 잘 알다시피, 욥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나 온갖 재난을 겪는다. 친구들의 위로도 욥의 고뇌를 풀어주지 못한다. 결국 욥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다카기 진자부로가 욥기에서 특히 영감을 받은 구절은 38장 31절 이하이다.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네가 철을 따라서 성좌들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큰곰자리와 그 별 떼를 인도하여 낼 수 있느냐?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 (욥 38:31-33)

 여기서 욥은 욥 개인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이다. 그 인간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이치를 아느냐고 물으신다. 자연계는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묻는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고. 자연의 깊이, 자연의 균형, 그런 것도 알지 못하면서 오만하게 그것을 개조하려는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를 보내신다. 그래서 다카기 진자부로는 “지금 환경의 위기라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위기입니다”고 말한다.53)  

실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CP-1이라는 세계 최초의 인공 원자로를 시카고대학 운동장의 서쪽에 있는 스쿼시 코트에 지으면서 조물주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말하기를 너는 네가 신이라고 하고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래서,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에스겔 28:2) 실로 죄는, 생태학적 의미에서, 우리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레리 라스무센(Larry L. Rasmussen)의 말대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유한성을 무시하고 뛰어넘는 것이요, 그 가능성과 한계를 부인하는 것이며,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도 “인간의 범죄는 단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오류, 자기소외, 자기중심성, 자기 폐쇄성만이 아니라, 광기와 영웅주의, 하나님의 영광의 찬탈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그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죄인은 자신을 거짓 신으로 만든다”도 질타한 바 있다. 오래 전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바와 같이, 죄란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형의 교만이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핵은 하나님 없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골 2:15, 엡 6:12)의 절대 권능에 대한 욕망이고,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 9:6, 욥 25:2, 딤전 6:15)을 거부하고자 하는 현대판 선악과 사건이며, 또한 하나님이 지으시고(창 1:1) 사랑하신(요 3:16) 모든 지구 생명체를 멸절시킬 수 있는 “사망의 권세”(시 49:15)이다. 그래서 핵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할 수 없다. 핵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과학기술공학체제(Technocracy)와 대량살생의 군사무기 및 무한성장을 통하여 지정학적 패권과 이윤극대화를 도모하려는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융합으로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권력체제이다. 이런 체제와 기독교 신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핵무기를 지지하거나 핵발전을 옹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모순어법이기 때문이다.

강원돈은 이러한 핵체제를 보면서 욥기 41:1-34에 등장하는 ‘레비아탄’을 떠올렸다. 배현주는 이 땅 곳곳에 시한폭탄처럼 박힌 핵발전소들을 보면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마가 13:14)을 연상했다. 실로 핵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생명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마성적으로 악용하는 죄악이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을 힘을 통해 다스리고자 하는 집권자들 앞에서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핵에 의한 평화(Pax Nucleus)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의 길이 아니다. 나아가 그것은 스스로 죽음에 대한 사랑(necrophilia)에 빠져들어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으시는 생명의 영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핵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반이며, 자신과 지구 전 생명 공동체의 진정한 안보, 즉 생명안보를 위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자멸의 길인 것이다.

 나가며

 지금 우리는 핵무기와 핵발전으로 말미암은 총체적 생명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지금 우리는 핵 위주의 에너지 과다소비 사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재생가능 자연에너지 중심의 지속가능한 생태사회로 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40년간의 광야생활 후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삼아 “너희와 너희의 자손이 살려거든, 이제 생명을 택하여라”(신 30:19)고 명령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피폭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나누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과 평화의 길이 되어주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탄식하시며(롬 8:22) 모든 생명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핵에 대한 유혹과 환상,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탐욕에서 벗어나는 영적 대각성이 우리의 신앙적 과제이고 신학적 의제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핵의 실상을 바로 알리고, 피해자의 아픔을 나누며, 피폭자의 고통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을 신앙적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탈핵 에너지 전환운동’에 힘쓸 수 있도록 핵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론, 즉 ‘생명평화 교회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 일을 생명의 지혜를 보유하고 있는 모든 종교 ․ 문화 ․ 사상을 수렴하고 융합하면서 이웃종교와의 생명연대 속에 추진해야 한다. 기술만능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윤리를 비판하면서 핵문제에 대한 종교와 과학간 대화를 꾸준히 실행해야 한다. 마침 2013년 10월 30일~11월 8일 열흘 동안 제10차 WCC 총회가 한국의 부산에서, 불행히도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밀집 지역에서 열린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환기시키고, ‘핵무기와 핵에너지’ 문제가 ‘생명’ ‘정의’ ‘평화’를 주제로 하는 WCC 제10차 부산총회의 핵심의제로 채택되기를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총회 기간 동안에 회의장 바로 앞 고리 핵발전소로부터 오는 전기 사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기 없는 예배’ 등의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행위들을 구상하고 실행하자고 제안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생명과 평화의 길을 가는 우리들은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사는 ‘위험사회’ 안의 ‘제도화된 무책임성’을 고발한다. 오늘의 위험사회 속에서 누구도 위험에 대해 독자적으로 책임질 수 없고 전문가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위험이 일상화되어 위험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고, 설사 느낀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어느 때보다 대학과 언론과 그리고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성서적으로 보면 이 역할은 파수꾼의 역할이다. 파수꾼은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거짓 평화와 안보를 이야기할 때에 눈앞에 닥친 위험을 알려야 한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데살로니가전서 5:3) 그런데 두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만약 우리가 이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시겠다는 말씀이다. 에스겔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에스겔 33:6)

--------------------------------------------------------------------------------------------------------------------------------------------------------------------

 보론 : 생태사회를 향하여

 지금 인류는 기후변화로 인한 총체적 생명의 위기 앞에 서 있다. 기나 긴 지구의 생명의 역사 안에서 지금 우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여섯 번째 대멸종의 시기를 막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인류는 동과 서, 북과 남을 떠나 ‘정말 우리가 이 지구상에 더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공통의 질문 앞에 서 있다. 핵 문제도 이 ‘절박한 생명의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 아래 있다. 이 위기는 지역(local)과 지구(global)를 관통하는 위기다. 신학적으로 이 위기는 ‘하나님의 집’(oikos)의 위기다. 생태(ecology)라는 말은 ‘한 집안’ 혹은 ‘생명 공간’을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스’(oikos)에서 유래했다. 에큐메니컬(ecumenical)도 이 오이코스에서 파생된 ‘오이코메네’(oikoumene)에서 유래했다.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집, 즉 우리와 다른 모든 생명체의 삶의 공간이 인간의 탐욕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새로운 생명사회는 우리의 진정한 ‘생태적 회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과업’이 될 것이다. 자신을 신학자(theologian)가 아니라 지구신학자(geologian)라고 불러주길 원했던 토머스 베리 신부는 이제 우리가 신생대로부터 생태대(Ecozoic)로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대(Technozoic), 즉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는 문명에서 생태대로 ‘출애굽’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처럼 인류가 기술대를 선택치 않고 생태대로 진화하는 것을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이라 불렀다. 바로 이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야 우리가 가나안 땅, 새로운 생명사회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위대한 과업’인가? 물론 ‘절제’ 혹은 ‘검약’을 핵심으로 하는 다양한 환경실천과 운동을 우리는 전개할 수 있다. 우리의 ‘조금 불편한 삶’이 지구 생명체 모두의 행복한 삶에 매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당연히 핵발전소로부터 오는 전기를 줄이고 안 쓸 수 있다. 신학자들은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쳐 여전히 지구를 천국행(영혼구원)을 위한 임시거처 정도로 여기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그래서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는 여관쯤이고 또한 세상 만물은 한번 쓰고 버리는 ‘클리넥스’와 같다고 여기는 기독교인들에게, 진실로 생태적이고 통전적인 신학적 세계관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오늘날 생태계 파괴의 ‘역사적 뿌리’가 바로 기독교의 ‘지독한 인간중심주의’에 있다는 린 화이트의 1967년 테제에 보다 더 성실하게 응답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태계 파괴의 ‘역사적 뿌리’뿐만 아니라 그것의 오늘날 ‘구조적 뿌리’, 혹은 ‘깊이 숨겨진 뿌리’, 즉 밀본(密本)까지 바로잡지 않고서 우리에게는 21세기 생태사회란 없다. 구조적 뿌리, 그것은 결국 ‘돈’의 문제다.

프랑스 생태학 창시자의 한 사람인 앙드레 고르가 강조하는 것처럼 이제 ‘탈(脫)성장’은 인류와 다른 생물 종(種)이 지구라는 이 행성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결행해야 하는 일이다.54) 하지만 지금 세계 각국은 성장주의 경제정책을 조금도 수정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전 세계 GDP는 향후 2050년까지 3~4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지구 온난화의 최대치가 그 임계점인 섭씨 2도를 넘지 못하게 제한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발생을 85%나 줄여야 하는데 긴박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걸림돌인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공업국의 생산과 소비를 관통하고 있는 ‘성장 강박증’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성장에의 강요’ 혹은 강제며 압력이다. 미하엘 엔데는 성장에의 강제는 ‘돈’의 문제, 즉 돈의 발행, 관리, 운영, 보증 등을 포함하는 금융구조 전체에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55) 화폐란 본래 금화나 은화와 같이 그것 자체에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폐의 발명 이후 오늘날의 돈은 더 이상 그 자체로 물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은, 완전히 추상적인 수치요 가치의 상징일 뿐이다. 금괴는 마음대로 양을 증가시킬 수 없어도 지폐는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그래도 과거 금본위제(金本位制) 시대에 발행된 지폐는 물질적 가치를 가진 금과의 관련에서 보증되었다. 하지만 1971년 닉슨독트린으로 국제통화 달러는 금과의 연계가 단절되었고, 이후 닻을 잃어버린 달러가 세계를 표류하면서, 각국의 통화와 달러는 상품으로 거래되는 머니게임의 시대가 열렸다. 이른바 ‘금융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지구 생태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러시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한 예로 돌이켜보자.

바이칼 호수의 사람들은 그 지방에 지폐가 도입되기 전에 나름 좋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자신들의 식탁에 물고기를 올리고 남는 일부를 팔 수 있는 만큼의 양을 잡아 생활했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넉넉했다. 하지만 어느 날 지폐가 도입되면서 은행의 대부가 이루어졌다. 어부들은 대부금으로 큰 배를 샀고 효율 높은 어로기술을 채용했다. 냉동 창고가 세워지고, 잡은 물고기는 더 멀리까지 운반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모든 어부들이 경쟁적으로 큰 배를 사고, 더 효율 높은 어로기술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떠 빨리, 떠 많이 잡았다. 오직 대부금 이자에 원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오늘날 바이칼호수에는 물고기의 씨가 말랐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오늘날의 화폐경제가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가게에서 빵을 사기 위한 ‘구입대금으로서의 돈’과 주식거래소에서 취급하는 ‘자본으로서의 돈’이 사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질적인 돈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증가하고 성장한다. 특히 선진국의 자본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증가하면서 세계의 5분의 4를 갈수록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본의 성장은 어디선가 누군가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폐를 실제의 노동이나 물적 가치의 등가물로 되돌려놓는 일은 인류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앞으로 생존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예수께서는,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막 3:27)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연 이 ‘힘센 사람’(strong man)이 누굴까. 우리는 그를 “묵어 놓은 뒤에야” 21세기 생태사회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오늘날 이 ‘힘센 사람’은 신의 반열에 올랐다. 오래된 문화도시 중심에 늘 신전이나 사원 혹은 교회가 있듯이, 오늘날 대도시의 중심에는 은행이라는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돈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빵을 돌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종종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는 돈은 불멸이라는 성질까지 가지고 있다. 실제의 물건이나 재화는 시간이 가면서 소멸한다. 하지만 자본으로서의 돈은 소멸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속성이 있다.

사실 우리는 - 그리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 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모른다. 폴 그리뇽에 의하면, 놀랍게도 대부분의 돈은 정부의 조폐창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56) 우리의 잘못된 상식과 달리, 은행은 자신이 번 돈이나 예금자가 맡긴 돈을 대출해주지 않는다. “은행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돈을 준다는 약속을 할 뿐이다.”(경제학자 어빙 피셔) 즉 은행은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서약을 근거로 대출을 하면서 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이 대출을 할 때마다 새로운 신용이 창조되고, 새로운 예금이 만들어지며, 전혀 새로운 돈이 만들어진다.”(전캐나다은행 총재 그레엄 F. 타워프) 이렇게 이른바 ‘통화승수’(通貨乘數)라 알려진 메커니즘을 통해 은행은 코도 안 풀고 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57) 돈이라는 인공적 세계에서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준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로 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돈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 그것이 돈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정부의 조폐창에서 끊임없이 돈을 찍어내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부가 만드는 돈은 대개 총통화의 5% 이하를 차지할 뿐이다.

결국 오늘날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돈의 95% 이상은 누군가가 은행에 부채를 짐으로써 만들어진 돈이라는 말이다. 그 결과 오늘날 정부, 기업, 소기업, 가정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엄청난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어찌 그리 되었을까? 어떻게 저렇게 빌려줄 돈이 많이 있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 비결 아닌 비결은 은행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채를 발행함으로써 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채는 잠정적으로 무한정한 것이기 때문에, 돈의 공급도 무한정 가능하다. 문제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렇게 손쉽게 ‘무한정’ 만들어지는 돈이 ‘무한정’의 생산과 거래를 구조적으로 강제한다는 점이다. 화폐공급이 증가하는데 실제 세계에서의 생산과 거래량이 같은 규모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돈의 가치는 갈수록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실제 경제가 영구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의 자원과 에너지 사용이 영구적으로 가속화되어야 한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오직 달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매년 갈수록 더 많은 자연이 쓰레기로 변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이 날마다 채무자로 탄생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현재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일은 지금의 국제 금융시스템이 부채를 창출함으로써 (가치가 아니라) 돈을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급속하게 축적되고 있는 국제 금융자산의 대부분은 빌려온 돈, 즉 부채라는 말이다. 데이비드 코튼(David C. Korten)은『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때(When Corporations Rule the World)』에서 현대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돈의 본질이 무엇이며 (돈은 이제 거의 순수한 추상물이 되고 있으며 화폐의 창조는 가치의 창조에서 분리되고 있다),58) 어떻게 현재의 재무체계가 실질 가치를 창조하지 않고도 부채의 창출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지,59) 그리고 어떻게 자산 가치의 증식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60) 이러한 변화를 최근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자본주의는 끝났다”고까지 이야기하면서 대신에 “빚으로 수익을 내서 빚을 갚은 채무주의(debtism)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61) 사실 유럽 4위의 ‘경제 무적함대’라는 스페인이 최근 구제금융을 받게 된 최악의 사태 역시 빚을 내서 집을 샀던 채무주의 시대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62)

실제로 우리 모두가 생활을 위해 사용하는 물건과 서비스에 은행 돈이 가하는 압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산업국가에서 물가의 약 30%는 이자분이다. 이 압력 때문에 경제는 계속적인 성장을 강요당한다. 한정된 경제규모 안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착취함으로써 은행 빚을 갚을 수 있겠지만,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흔히 다음 세대의 몫까지 미리 끌어당겨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환경오염과 환경파괴를 수반하는 경제개발이다. 이러한 경제재발은 다른 말로 - 쉬운 말로 - 미래세대에 대한 착취다. 하지만 여전히 은행 돈 상환압력은 사회적 약자나 자연을 착취하는 것만으로도 충족되기 힘들다. 그래서 국가 간 수출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수출을 통해 획득하는 외화도 따지고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은행 빚이다. 그러니까 무역흑자라는 것도 결국은 다른 나라의 사회적 약자와 자연에 대한 간접적인 착취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다가 이것도 저것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마침내 전쟁이다. 김종철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전쟁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 금융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63)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생태사회’를 향하고 나아가길 원한다면 오늘날 생명 파괴의 역사적 뿌리뿐만 아니라 구조적 뿌리까지도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것을 물어야 한다. 계속 가속적인 성장을 하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는 현재의 화폐시스템 대신에 어떤 지속가능한 대안적 경제를 상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생명의 문제의 요체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경제적 민주화’의 핵심적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화란 독재와 노예제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경고했었다. “화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다. 화폐가 오래된 노예제와 다른 점은 그것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즉 주인과 노예 사이에 아무런 인간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부채로서의 돈’이라는 근대 화폐제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쯤, 영국 국왕의 허가를 받아 2:1의 준비율로 금에 대한 수령증을 빌려주면서 잉글랜드은행이 창설되었을 때 탄생했다.64) 지금 이 시스템이 온 세계를 지배하면서 사실상 무(無)에서 무한정의 돈을 만들어내고 있다.("creatio ex hinilo" 즉 ‘무로부터의 창조’?) 그 결과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정부, 회사, 개인을 막론하고 은행가들에게 ‘무거운 빚’을 지고 있다. 이를 청산하기는커녕 오히려 끊임없이 커가고 있는 빚의 노예가 되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진자를 용서[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빚]를 용서[탕감]하여 주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그러기에 21세기 진정한 생태사회는 우리가 화폐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화폐 주권’을 회복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사회다. 우리는 화폐가 교환수단으로서의 본연의 기능을 떠나 자신을 축적수단으로 삼을 때 온갖 비극과 재난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재물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로 가르치셨나보다. 21세기 생태사회라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 손에 새로운 돈이 들려 있어야 한다. 교환수단으로서의 제 기능에 충실한 화폐, 그리고 가급적 빨리 순환하는 화폐 - 이러한 대안적 지역화폐가 들려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가나안이 더 이상 가나안이 아닐 것이다.

결국 21세기 생태사회는 ‘한계 안에 사는 지혜,’ 즉 미국의 원주민 신학자 조지 팅커(George E. Tinker)가 말하듯이 ”창조세계와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필요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깊은 영적 각성“ 위에서 가능하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인간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사실 21세기 에큐메니컬 신학과 운동이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다른 모든 만물과의 관계성을 부인하고 지구 위에 그리고 생명의 그물망 밖에 군림하려는 ‘전능하신’ 인간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다른 세포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저 혼자 무한히 증식하는 이기적인 세포를 암세포라고 부른다. 한자에서도 암(癌)이란 산(山)처럼 먹고[口], 먹고[口], 먹어서[口] 드러누운 병(病)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우주 안에서 우리 인간이 암세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른 동료 피조물이 죽는지 사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탐욕과 편리의 무한한 확대에만 혈안이 된 우리 인간은 어느새 ‘하나님의 몸’인 이 우주 전체를 열병에 걸려 죽게 하는 ‘암 덩어리’가 되었다. 그래서인가. 시인 최승호는「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비탄하게 하나님의 고통을 노래했다.

 끙끙 앓는 하느님 /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 온 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하략)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인간경제는 인류 역사에서 고작 5백 여 년 밖에 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은 규모의 지역 자립경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탈성장’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한국교회도 탈성장의 시대를 살아야 하고 인류 경제도 탈성장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인류와 다른 생물 종(種)이 지구라는 이 하나뿐인 행성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결행해야 하는 일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경제발전이라 부른 것은 지구 위의 모든 인간과 모든 자연을 산업경제 시스템 속으로 쑤셔 넣으려는 시도였다.65)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구가 견디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은 어떤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면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66) 왜 지속가능하지 않은가. 인류는 오래 전 경제의 규모(scale) 면에서 이미 성장의 최종적인 생물-물리적(biophysical)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가? 인류는 ‘최적의 규모’(optimal scale) 즉 더 이상의 성장은 그 성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만드는 어떤 지점을 이미 통과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유한한 에너지와 지구 자원의 한계에 조응하도록 경제 전체의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발전(진화) 하지만 성장하지는 않는” 지구의 에코시스템에 인간의 경제가 순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과정신학자 존 캅의 말처럼 살아야 한다.

 한계선을 받아들이고 그 한계 안에서 모두가 품위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라. 다른 생물 종(種)들과의 균형 속에서, 그리고 지구행성의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살아라. 또한 기술적 진보에 비추어 합의될 수 있는 정도로만 재생 가능하지 않은 자원을 사용하라.67)

 우리는 이제 ‘성장’(growth)과 ‘발전’(development)을 구별해야 한다. 성장은 물질의 증가 혹은 양적 크기의 증가를 말한다. 발전은 보다 완전하고 이번보다 다른 상태로의 질적 진화를 의미한다. 미국의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Herman E. Daly)가 이야기하듯이 성장에 대한 대안은 ‘지속가능한 성장,’ 소위 ‘녹색 성장’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이다.68) 이러한 발전의 동의어는 ‘성장 없는 발전’(development without growth)이다. 사실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나쁜 모순어법‘에 속한다. 성장에다가 지속가능한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거나 녹색 물감을 칠함으로써 마치 여전히 성장이 가능한 것처럼 믿도록 우리를 속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지금 단행해야 할 문명사적 전환을 다시금 연기시킴으로써 결국 그 전환의 고통을 배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핵발전을 녹색성장의 기조로 생각하는 지금의 정부가 꼭 경청해야 할 말이다. 인간 경제라는 생태계의 하위 시스템은 그것을 안에 포함하고 있는 상위 에코시스템에 의해 영속적으로 유지되거나 지탱될 수 없는 규모를 넘어 성정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자식이 어미를 삼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구라는 상위 에코시스템의 하위시스템으로서의 인간 경제는 언젠가 성장을 멈춰야 하지만 계속해서 발전할 수는 있다.

21세기 생태사회는 더 이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철폐’(사회주의)도 아니고 ‘엄청난 부의 생산을 통한 가난의 제거’(자본주의)도 아니다. 한 때 인구와 경제 활동의 면에서 무한 팽창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세계가 생물-물리적으로 한계를 가진 세계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제 21세기 새로운 생명사회의 기본원리는 일정한 한계 이상의 성장 바로 그것의 불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기타 어떤 체제를 막론하고 ‘산업의’(industrial), ‘비재활용의’(non-renewing), 그리고 ‘자연을 쥐어짜는’(extractive) 경제 그 자체의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바로 이 체제가 핵에너지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21세기 생태사회는 우리의 근원적인(radical) 상상력과 실천을 요구한다. ‘핵 없는 세상’도 이러한 근원적인 상상과 실천의 일부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되며, 변화의 시작은 ‘경제’와 ‘생태’ 사이의 끊어졌던 연결을 복원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즉 경제가 지구라는 ‘하나님의 집’(oikos)을 정돈하는 규칙으로, 나아가 인간이 다른 생물 종(種)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번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규칙으로 새롭게 이해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지역(the local)이 인류 문명의 새로운 터전으로 떠오르는 이 때 한국교회는 자신이 속한 각각의 지역에서 새로운 인류 문명과 희망을 잉태하는 ‘종말론적 씨알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거기서 ‘깊은 에큐메니컬 정신’(deep ecumenism)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의 하나가 바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실천일 것이다.*

 


1) 클로드 알레그르 외 지음, 이소영 옮김,『원자력, 대안은 없다 : 핵발전을 멈출 수 없는 이유』(흐름출판, 2011), 201.

2) 정인환, “핵안보정상회의가 북핵을 막는다고?” <한겨레 21> 제903호 (2012. 3. 26)

3) 조선일보 2012년 3월 10일자 사설 중에서.

4) Gordon D. Kaufman, Theology for a Nuclear Age (Oxford: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85), viii.

5) Ibid., ix.  6) Ibid., 2f.    7) Ibid., 3f.    8) Ibid., 4.    9) Ibid., 6.    10) Ibid., 7.

11) Ibid., 8.   12) Ibid., 9.   13) Ibid., 11.   14) Ibid., 6, 7, 12.   15) Ibid., 46.   16) Ibid., 9.

17) Ibid., 13.   18) Ibid., 37.   19) Ibid., 56.  20) Ibid., 57.

21)한국어로는 정애성 옮김,『어머니 연인 친구 - 생태학적 핵 시대와 하나님의 세 모델』(서울 : 뜰밖, 2006).

22) 위의 책, 44.   23) 위의 책, 48.  24) 위의 책, 49.   25) 위의 책, 53.  26) 위의 책, 45.

27) 위의 책, 46.  28) 위의 책, 47.  29) 위의 책, 48.  30) 위의 책, 49.    31) 위의 책, 51.

32) 위의 책, 53.  33) 위의 책, 14.

34) 올해 82살의 안월선 할머니는 7살이던 1937년 일제의 공출로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온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5살이 되던 해 1945년 8월 6일에 그는 히로시마에서 온 몸에 유리 파편이 박히고 다리에 화상을 입었다.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20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몸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내고 흉터를 없애는 수술을 해야 했다. 안할머니는 “일본 정부에도 화가 나지만 우리 정부에는 더 화가 난다”고 했다. 정부가 무관심하니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들은 우리나라에도 원폭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35) 아래의 내용은 WCC, "The Churches and the Debate about Nuclear Energy," in Faith, Science and the Future, Charles Birch et al, ed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8)에서 요약하여 소개함.  

36) 1970년대에는 미국교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핵운동이 전개되었다. 1977년에 미국에서 시작된 Mobilization for Survival이란 기독교 단체는 4가지의 운동 목표, 즉 핵무기 완전한 폐기, 핵발전의 전면적 금지, 무기경쟁의 절대적 중지, 그리고 핵에 투자되는 재정을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일로 돌리기 등을 제창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미감리교회(UMC) 사회국은 목회서신을 내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임무선언(mission statement)를 패러디하여, “핵은 가난한 자에게 나쁜 소식을, 자유로운 자에게 종살이를 선포하고,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을 눈멀게 하며, 모든 사람의 자유를 발로 짓밟고, 악마와 같은 중성자의 해(demonic Year of the Neutron)를 선포하려 한다”고 일갈했다.

37) 이하의 내용은 <핵 없는 세상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 연대 창립 기년 심포지엄>에서 이환진(감신대 구약학)교수의 발제문, “핵과 성서”에서 인용함.

38) 위의 심포지엄에서 김정수(평화를만드는여성회 공동대표) 박사의 발제문, “피폭자와 십자가”에서 인용함.

39) 한겨레신문 2012년 7월 6일자, 10면.

40) EFN 홈페이지를 한번 방문해보라. 거기에는 핵발전소를 그리고 있는 화가의 그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화가는, 놀랍게도, 콘크리트 덩어리인 핵발전소를 꽃이 피고 잎이 나는 생명체로 묘사하고 있다.

41) 이하 러브록에 관한 경북대 행정학부 진상현 교수의 “러브록의 착각, 원자력”에서 인용함.

42) 다카기 진자부로, “생명의 자리에서 핵발전을 생각한다,”「녹색평론」제118호 / 2011년 5-6월호, 95-96.

43) 위의 심포지엄에서 이정배(감신대) 교수의 발제문, “원전과 송전탑”에서 요약함.

44)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기후에너지국장의 이야기.

45) 이상 사실 관계는 한국경제 2012년 7월 3일자, A9면.

46) 김영희, “진정한 공포의 대상은 원전이다,” 한겨레신문 2012년 6월 7일, 30면.

47) 이상 백낙청,『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에서 요약함.

48) 이하 일본의 핵개발에 관련된 내용은 김경민, “북한보다 핵무기 개발에 더 근접한 일본,” 조선일보 2012년  6월 25일자 기고 및 이영완, 차학봉, 박영석 기자의 조선일보 2012년 6월 28일자 A3면 기사에서 정리함.

49) 한겨레신문 2012년 5월 14일자.

50) 유미호, “핵발전에 의한 신음소리를 듣는 순간,”「한국여신학자협의회 회보」2011년 7월 30일자에서 인용.

51) 이계삼,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녹색평론」제118호 / 2011년 5-6월호, 143.

52) 정용일, 164.

53) 다카기 진자부로, “생명의 자리에서 원자력을 생각한다,”「녹색평론」제118호 / 2011년 5-6월호, 96-98을 보라.

54) 앙드레 고르,『에콜로지카』(생각의나무, 2008), 31.

55) 이하 미하엘 엔데, “돈을 근원적으로 묻는다,”「녹색평론」 114호 (2010년 9-10월), 33이하에서 인용.

56) 폴 그리뇽,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113호 (2010년 7-8호)

57) 은행이라는 닫힌 회로 속에서 연쇄적으로 예금-준비금-대출-예금-준비금-대출 과정이 반복되면서 은행 전체로 볼 때 원래 예금 100만원으로 900만원까지 새 돈을 만들어내는, 가장 기본적인 재무기법을 말한다.

58) 코튼에 의하면, 돈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창조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이지만 각 단계의 개혁은 화폐를 물건의 실질적인 가치로부터 분리시키는 각각의 단계를 형성했다. 특히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금을 요구하는 국가에 달러를 교환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전 세계에 선언한 이후, 달러는 여러 가지 숫자가 난해한 삽화가 찍힌, 미국 정부가 발한 고급 종잇조각 이상의 것이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일단 컴퓨터가 널리 사용되자, 그 다음 단계는 종이를 제거하고 컴퓨터에 단순히 수치만을 저장하는 것이다. 동전과 지폐가 지속적으로 유통되고 있지만 갈수록 더 많은 세계 통화 거래가 컴퓨터간의 직접적인 전자 이체로 이루어지고 있다. 화폐는 이제 거의 순수한 추상물이 되고 있으며 화폐의 창조는 가치의 창조에서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코든,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때』 [세종서적, 1997], 267-279를 참조하라.)

59) 코튼에 의하면, 실질 가치를 창조하지 않고 부를 창조하는 방법의 하나는 부채를 창조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자산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먼저 전통적인 교본을 이용해 먼저 재무체제가 피라미드식으로 부채를 축적함에 따라 부를 창출하는지 예를 들어보자. A라는 농부가 1,000달러어치의 밀을 팔고 10%의 적립금을 유지하는 M이라는 은행에 그 돈을 저축했다고 치자. M은행은 B라는 사람에게 900달러를 대출해 주고, B라는 사람은 N은행에 있는 자신의 계좌에 그 돈을 저축한다. 이제 A라는 사람은 M은행에 1,000달러의 현금자산을 소유하고 있고, B라는 사람은 N은행에 900달러의 현금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10%의 적립금을 유지하면, N은행은 C라는 사람에게 또 다른 810달러를 대출해 줄 수 있고, C는 O은행에 그 돈을 저축하고, O은행은 D에게 729달러를 대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대출과 예금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실질적인 인간이 소비할 실질적인 생산물을 생산하여 벌어들인 본래의 저축액 1,000달러로 재무체제는 부차적인 새로운 저축에서 최종적으로 9,000달러를 생성해낼 수 있었으며, 이 새로운 저축액은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부채 9,000달러를 생성한 데 따른 것이다. 이렇게 돈은 생산에 필요한 단 하나의 실질 가치도 없이 창조될 수 있다. 이 연쇄적인 거래에 개입된 은행들은 이제 새로운 대출금 9,000달러와 함께 밀 판매로 얻은 1,000달러의 원 저축액에 입각한 대출로 새로운 저축금 1만 달러를 소유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이자의 수령을 예상한다. 그 이자율을 6%라 치자. 이는 재무체제가 최소한 연간 540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 수익은 재무체제가 기본적으로 무로부터 창조해낸 돈에 따른 수익이다. 따라서 이 요인은 금융업을 너무나도 강력하고,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상 코든, 위의 책, 267-279.)

60) 조엘 쿠르츠만은 그의 저서『돈의 죽음 (The Death of Money)』에서 뉴욕 주식 시장의 다우존스 산업 주가가 단 하루 만에 22.6%나 하락했던 1987년 10월 19일의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만약 1987년 8월의 시장 수준에서 측정한다면, 투자자들은 2개월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1조 달러를 초과하는 손실을 낳은 셈이다…… 1조 달러는 2년간 전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절대 빈곤층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는 금액이다. 이는 원자력 항공모함 1,000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 1조 달러는 단지 사람들이 돈을 먹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단 5초 동안도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없다. 주식 시장 가치의 붕괴는 단 한 톨의 쌀알만큼도 세계의 실질적인 식량 공급을 증가 혹은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단지 특정 회사의 지분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격만이 변동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식 가치가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잠재적인 구매력을 의미하는데도, 이 가치는 시장에 대한 모든 투자자들의 총구매력에 정확하게 반영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증권으로는 많은 것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시장 투기가 부의 환상을 창조하는 상황’이다. 이 환상은 그것을 가진 자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전달하나, 이는 단지 풍선이 부풀어 있는 때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재무체제에서 결정은 점차 비전(秘傳)의 수학 공식에 입각하여 컴퓨터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공식이 갖고 있는 단 하나의 목적은 순수한 추상물인 부를 복제하는 것이다. 코튼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자유 시장’에 지배되는 세계의 현실이다. 지금 세계적 재무체제는 그 주인인 생산 경제의 살에 기생하는 약탈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 코든, 위의 책, 267-279).

61) 그는 이솝우화의 비유를 들면서 지금 "미국과 영국, 남유럽은 (게으른) 베짱이이고, 독일과 중국, 일본은 (부지런한) 개미"라며 이 때문에 일어나는 글로벌 불균형이 2008년 월가 붕괴 이후 세계 경제 위기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미국은 외상소득으로 미래소득을 당겨 소비했고, 남유럽 국가들은 불로소득으로 일하지 않고, 일본은 미래 재정을 앞당겨 쓰는 외상재정으로 '손자들 돈'까지 써버렸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박재현 기자 2012.6.5일자.

62) 스페인 위기는 1999년에 스페인이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가입 전 연 12.75%(1995년)에 달했던 10년 만기 스페인 국채 금리는 가입 후 계속 낮아져 2005년에는 약 3%까지 내려갔다. 저금리는 부동산 붐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금융권은 대학생들에게까지 돈을 빌려주면서 부동산 구매를 부추겼다. ‘스페인 축제’(Spanish Fiesta)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스페인은 1994-2007년까지 연평균 3.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부동산 호황이 경제성장으로 이어진 셈이다. 하지만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가 터지자 거품은 급속히 꺼졌다. 2008년 이후 스페인 부동산 가격은 고점 대비 약 25% 추락했다. 부동산에 기댄 경제성장이 멈추자 실업률은 2007년 8.3%에서 2012년에는 25%대까지 치솟았다. 현재 스페인 금융권의 부동산 대출(빚) 규모는 약 4,000억 유로인데, 이 중 1,800억 유로는 사실상 회수 불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월가의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스페인에서 재연된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2012년 6월 11일자 A3면)

63) 김종철, “돈과 자유,” 「녹색평론」 115호 (2010년 11-12월)

64) 최초의 근대식 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이 1649년에 설립되면서 국가의 화폐발행권이 민간금융업자의 손으로 넘어간다.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융업자들에게 돈을 빌리려 했다. 이 때 런던의 금융업자들은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에 ‘부분준비제’에 의한 화폐발행권을 국왕이 정식으로 인가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 요청이 수락되었다. 바로 이것이 근대식 은행의 출발점이다. 1913년 설립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마찬가지다. 명칭만 들으면 국가기관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미국의 이 중앙은행은 민간은행이다. (잉글랜드은행은 1946년에 국립은행이 되었으나) 이 두 선구적인 근대적 은행은 이후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모델이 되었고 ‘부분준비제’에 의한 은행의 신용창조 방식이 큰 저항에 부딪치지 않고 기본적인 관행으로 굳어져왔다. (김종철, 위의 글에서)

65) 더글러스 러미스,『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2)를 보라.

66) Herman E. Daly and Kenneth N. Townsend, Valuing the Earth (Cambridge, Mass.: MIT Press, 1993) 중에서 인용.

67) Cobb, Sustainability, 7.

68) Daly, "Sustainable Growth: An Impossibility Theorem"에서 인용. 

[관련기사]

예장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5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10
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 성동구 성덕정 17길-10, A동 202호   |   사무소 : 서울 종로구 대학로 3길 29, 100주년 610호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daum.net   |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왕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