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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목회자 청빙의 문제와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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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03  11: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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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목회자 청빙의  문제와 대안    

다음 글은 101회기 우리교단 총회장 이성희 목사가 예전에 발표한 글이다. 최근 후임 목회자 청빙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시점에 선견지명으로 목회자 청빙에 대한 문제점에 대안을 제시한 글이다.  연동교회 담임목사이며 연세대 철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풀러신학교(신학석사, 목회학 박사)와 샌프란시스코신학교(신학박사)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학교 재단이사, 장로회신학대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교회행정학이 전공이다.

/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최근 한국교회의 화두는 단연 소위 '목회직의 세습' 문제일 것이다. 담임목사의 선정 및 청빙의 과제도 목회직의 승계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목회자직의 부자 승계나 담임목사의 청빙 문제도 한국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발생된 것으로서 교회성장이 나은 또 다른 과제인 것이다. 우선 문제의 발단은 교회 성장으로 인한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차별성이 담임목사의 청빙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하고 있으며, 당회의 권위주의가 담임목사의 청빙을 권위적으로 만들고 있다. 오랜 전통의 개혁교회들은 한국교회와 같은 청빙의 절차나 위임이란 과정을 생략한다. 단지 부임(installation)으로 청빙 절차를 마친다. 지나친 권위주의는 과정의 혼란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특수성에 비춰본 선정 및 청빙에 대하여 몇 가지로 분류하여 문제점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1. 담임목사 청빙 유형

(1) 승계

한국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의 첫 번째 유형은 승계이다. 승계란 부자간의 목회직 승계 외에 부목사가 담임목사로 승계 되는 경우 혹은 친족이 승계하는 경우 또는 사제지간의 승계 등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승계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특수한 경우의 승계가 문제가 되고 그 문제가 일반화 되는 것이 문제이다.
사제지간 혹은 그 외의 관계의 승계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다. 성경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를 통하여 승계의 유형을 제시한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나 그들의 사역은 팀의 성격을 띄고 있었고 엘리야의 승천으로 엘리사가 사역을 승계한다. 그러나 그 지위(position)는 승계가 되지만 그 역할(role)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다. 지금도 승계란 그 지위이지 그 역할은 아니다. 목회자란 지위와 역할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으므로 한 가지만의 승계로 완전한 승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공모
많은 교회들이 공모라는 형식을 통하여 담임목사를 청빙한다. 공모란 가장 공정한 청빙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담임목사로 자격을 갖춘 인물에게 가장 형평성 있는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고, 가장 적격한 인물을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성경적 원리를 적용한다면 공모란 성경적 청빙 과정은 아니다. 담임목사로 당사자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자격자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임명(designation)을 통하여 어느 개인에게 지위가 주어지고 그 지위와 함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준비되고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으로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선지자나 사사가 그러하였고 왕도 세습하였지만 사울이나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의 일방적 자격 부여에 의한 임명이었다.

또 한 가지의 문제는 공모가 요식 행위로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모 이전에 담임목사 후보를 내략적으로 결정하고 들러리로 공모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에 청빙공고가 나지만 청빙공고는 형식적이고 실제로는 이미 결정해 놓은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3) 추천
추천은 담임목사 청빙에서 실제적으로 가장 흔한 사례일 것이다. 교단이나 교계의 원로들이나 신망 있는 인물들로부터 담임목사 후보를 소위 '알름'을 통하여 추천 받는 것이다. 해당 교회를 잘 이해하는 존경받는 인물의 천거는 가장 바람직하고 권위 있는 청빙의 형식이 될 것이다.

성경도 추천의 경우가 있다.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하였다(롬 16:1). 물론 로마 교회의 담임 교역자는 아니었지만 바울이란 권위 있는 사도의 추천은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교회는 바나바란 당대의 가장 지적인 목회자를 고린도교회에 청빙하려고 바울에게 의뢰한 흔적이 나타난다. 고린도교회는 바나바를 원했고 바나바는 당장은 갈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갈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16:12).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바나바를 추천하고 그에게 권고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후에 바나바는 바울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자천하거나 천거서를 부치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고후 3:1).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추천서를 받아 교회에 왔고 바울은 추천서가 없다고 하여 반대를 받은 듯하다.

추천은 지금도 많이 이용되고 있는 청빙의 방식이며 가장 용이하고 권위적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후보자에 대한 추천자의 주관적 판단이 절대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추천자가 판단하는 후보자의 자질이 교회의 정서나 성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권위 있는 다수의 추천자의 추천이 오히려 선택에 혼돈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2. 담임목사 청빙 과정의 문제점

(1) 채용
담임목사는 청빙에서부터 성직자로서의 예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흔히 일반 직장에서의 형식을 교회가 도입하여 청빙이 아니라 채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빙이란 모셔오는 것이고 채용은 고용하는 것이다. 청빙의 경우는 담임목사를 모시는 교회의 입장(좁은 의미로는 당회의 입장)이나 목회자의 입장이 동일하게 청지기가 되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지만 채용의 경우는 교회는 고용주가 되고 목사는 고용자가 되기 쉽다. 실제로 사람이란 칼자루를 쥔 사람은 칼날을 쥔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힘을 사용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된다.

(2) 경쟁
공모나 추천 등의 청빙 방식은 가장 일반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게 된다. 공모의 경우는 후보자들 사이의 자기 과시 내지는 상대방 비방이 가능하게 된다. 추천의 경우는 후보자들을 내세운 추천자들 사이의 대리전(代理戰)의 양상을 띠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현실적인 면에서 청빙 과정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생존경쟁의 한 단면일 수 있다. 최근 교회의 개척과 증가의 수에 비하여 목회자의 증가가 상대적으로 월등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 심리는 결국 교회로 하여금 목회자의 선택자가 되게 하고 목회자의 자질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3) 기준
목회자의 청빙 공고의 내용에서 청빙 대상의 기준은 비 현실적이며 비 성경적인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전통 있는 교회들이나 나름대로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이런 유의 오류를 쉽게 범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발표한 기준과 그 후에 청빙한 목사의 자격은 실제의 거리가 먼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교회가 공개한 청빙의 기준은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감독자의 자격은 도덕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딤전 3:1-7, 딛 1:5-7). 그리고 성경에 타나난 초대교회의 일곱 사람(집사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그 사람들이 집사라는 말은 없다. 그리고 디아코노스는 '집사'라기 보다 '목회자'가 더 가까운 의미이다)의 자격은 영성과 도덕성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영성과 도덕성보다는 지성에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다. 이런 비성경적인 기준이 비인격적인 목회자를 양산해내는 결과를 낳게 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런 그릇된 기준이 목회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뿐만 아니라 영적 해이(spiritual hazard)를 촉발하는 것이다.

(4) 개교회주의
교회란 공교회이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교회란 노회이다. 교회란 지교회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단에 따라서 목사의 소속이나 위치 그리고 청빙의 절차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교회는 교회로서의 공감(consensus)이 있다. 그 것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내 교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중요하며 내 교회만 잘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잘 되어야 내 교회가 잘 될 수 있다는 교회관이 우선되어야 한다.

더구나 새로운 시대, 세계화의 시대란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인 새로운 구도의 시대이므로 개체와 더불어 연합체가 더불어 중요한 시대이다. 정보시대는 일치와 공동창조의 시대이며 연합과 조화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내 교회만 생각하고 흔히 '목사 빼오기', '스카웃 경쟁'등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교회가 목회자에 대한 예우를 미끼로 기관이나 학교 등에 가장 적격인 목사를 교회로 모셔오기는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것이며 넓은 의미에서 목회 혹은 사역이라고 볼 때에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개교회가 덕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관점은 하나님이 덕보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손해보시는 일은 교회도 결과적으로 덕이 되지 못한다.

3. 담임목사 청빙의 대안

(1) 청빙 예의
담임목사 청빙의 대안은 위에서 거론한 청빙의 문제점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는 성경 시대와 같은 직접 계시 시대가 아니므로 하나님이 어떤 목사에게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로 계시하셨는지 알 수는 없다. 청빙의 방법이 승계이든, 공모이든, 추천이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최선의 방법은 성경적이 말하는 원리에 합하며, 이성적인 판단으로 합리적이며,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인격적이어야 한다. 우선 청빙의 예의를 갖추게 되면 상당히 많은 청빙 과정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고용한 목회자들 통하여 교인 스스로가 은혜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고용된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존경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교회와 담임목사 사이의 청빙의 예의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심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모세의 호렙산 조우(遭遇)는 이러한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부적격을 들어 끝까지 거절하는 모세와 그에게 자격 부여를 들어 마침내 보내시는 하나님의 관계가 교회와 목회자의 관계이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편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두려운 마음으로 고사(固辭)할 수 있는 겸허함이 있어야 할 것이며 교회의 편에서는 교회를 위하여 목사를 깍듯한 예로 모시고 올 수 있는 자세가 엿보여야 할 것이다.

(2) 객관적 추천
교회가 교회의 직원을 선택할 때 필요한 성경적 자세가 사도행전 6장의 일곱 사람의 선택에서 나타난다. 첫째, 교회가 정한 자격에 정확하게 합치한 인물을 뽑는 것이다. 둘째, 교회에 적합한 인물을 뽑는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뽑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교회가 정한 수대로 뽑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담임목사의 청빙 절차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우선 그 자격이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승계나 추천의 경우는 객관적 자격이 결여될 확률이 상당히 크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자격의 객관성보다 흔히 우리 사회의 병리라고 하는 삼연(三緣) 즉 혈연, 지연, 학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자격의 객관성이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적합한 인물을 청빙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보자의 자격을 선정할 때에 그 자격이 객관성이 있어야 하며 그 자격을 정한 다음에는 모든 교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 자격 심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객관성이 교회와 담임목사와의 조화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지명
위에서 말한 청빙 과정의 폐해는 거의가 무계획한 목회자의 수급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 시대나 초대교회 그리고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60년대까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이후 90년대까지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목회자의 수는 공급과잉 상태에 이르렀고 채용과 경쟁의 반복이 이루어졌다.

초대교회의 문헌에 나타난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의 예는 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목회자가 부임하는 단순한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라는 보편적 직분(universal office)이 있어서 모든 교회를 섬길 수 있었고 그 기능이 어느 한 교회에 제한되지 않았다. 동시에 감독, 장로, 집사, 목사 등의 지역적 직분(local office)이 있어서 그 기능이 어느 한 교회에 제한되는 직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직분이 무엇이든지 철저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부르심의 응답이었지 자신의 지원에 의한 직분의 수행이 아니었다.

성경 시대나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나라의 경우도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수요과잉에 비하여 공급부족 현상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교회의 급속 성장은 수요와 공급의 반전 현상을 나타내었다. 수요부족에 비한 공급과잉 현상이 뚜렷하게 된 것이다. 이런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담임목사 청빙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우리 시대가 하나님의 직접 계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목회자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지명이라는 절대적 의존이 필요할 것이여 이러한 자세가 가장 은혜로운 청빙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4. 담임목사 제도의 새로운 패러다임

(1) 팀
미래 목회는 철저하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는 새로운 목회이다. 기존의 산업 사회 유형의 목회는 더 이상 정보 사회에 적응력과 경쟁력을 제공하지 못한다. 지금까지의 산업 사회 형태의 목회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수용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본질의 상실이 아니라 본질의 보존을 위한 부대를 새 것으로 준비하는 것이며, 물동이를 버리는 일이다.

새 패러다임 요청의 당위성은 정보 사회로의 변화는 이전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 현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정보 사회의 특징은 조화와 일치의 사회이며. 세계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경쟁과 분리의 패러다임에서 조화와 일치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정보 사회는 철저하게 전문성을 요청하므로 혼자서 모든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정보 사회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요청하는 시대이므로 팀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한 목회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는 담임목사 제도의 개혁은 팀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수용이다. 티드웰(Charles Tidwell)은 바람직한 팀 구성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팀을 구성한 목회자는 서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이런 인정과 존경 없이는 팀을 이룰 수 없다. 둘째, 모든 목회자는 교회에 의하여 청빙을 받은 의식을 가져야 하며 특정한 업무의 부서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거나 부서에만 소속되었다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셋째,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상호 신뢰를 유지하고 신뢰감을 넓혀 나가야 한다. 넷째,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규칙적이며 빈번하고 명확한 의사소통이 있어야 한다. 의사소통이 끊어지면 오해가 생기고 업무의 중복이나 공백이 생기고 팀이 와해된다. 다섯째, 팀을 구성하는 목회자는 서로 친근하게 가까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비록 육체적으로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늘 친밀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가 말한 위와 같은 팀의 원리를 통하여 담임목사의 청빙의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담임목사 제도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성화
영성이란 말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언어이다. 영이란 원래 하나님의 숨을 의미하듯이 영성이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의미한다. 고대 교부의 위대한 교부인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영성이란 '그리스도와 일체된 삶'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영적, 종교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한다.

기독교의 기능을 두 가지로 크게 대별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며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성적 기능을 가진 영성적 종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가진 예언자적 종교라고 한다. 그러므로 담임목사의 자격도 영성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으로 가늠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정보 사회인 동시에 영성 시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래학자들은 한결같이 21세기를 영성 시대라고 정의한다. 영성이 중요한 사회 구성 요인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21세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는 영성이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고 사회가 이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같은 맥락이다. 같은 의미에서 영성의 양극화(polarization)도 극대화할 것이 분명하다. 영성적 양과 질도 시간이 갈수록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서 영성적으로 충만한 사람과 영성적으로 빈곤한 사람의 간격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정보 사회는 기술시대이다. 과학기술이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고 기술이 가치를 동반하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들에게는 목회 기술을 요청하고 기술 목회에 익숙해져 간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목회 상황을 바라보면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자료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집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무한한 목회자료들과 CD Rom에 저장된 목회 기술들이 목회에 도움도 되겠지만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목회의 기능공이 되게 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은 이런 유의 목회 자료가 없었고 목회 자료 없이도 훌륭하게 목회하였지만 거의 모든 목회를 자료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는 목회 기술이 아니라 목회 영성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목회자의 영성은 미래 교회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영성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영성 시대 즉 정보 시대를 목회하는 목회자들의 책임이며 하나님의 요청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영성이 극대화된다면 담임목사의 청빙의 요건이나 과정의 영성적으로 변하며 은혜롭게 될 것이다.

(3) 전문화
지난 세기까지의 한국신학은 교역자 양성이라는 폐쇄적 의미밖에 가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신학이란 성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으로 좁은 의미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신학이 사회변동에 적응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으며 이러한 자구적 노력은 신학적 사고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사고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증대되고 있다.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미래현상을 바라보면서 시대적 긴급성 가운데서 한국신학은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신학이야말로 사회를 알고 사회를 안고 해야 하는 학문이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한국신학은 세계 안의 신학, 세계를 위한 신학, 세계와 더불어 가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세계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며 세계화를 수용할 수 있는 포괄적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신학은 이제 한국이나 아시아라는 좁은 궤도를 벗어나서 세계라는 넓은 궤도로의 진입을 서둘러야 하며 담임목사의 기능도 다양한 전문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래사회는 극도로 발전하는 전문화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육은 비전문적으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가 수업연한에 비하여 가장 전문인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의 전문화 교육은 전문직으로서의 목회를 인정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래목회를 위하여 신앙과 영성을 겸비한 '인간형성'이 어떤 차원에서든 보완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전문직 양성'이 지금까지보다는 강조될 수밖에 없다.

현장의 필요성에 따라서 교회의 전문 지도자의 양성이 요구되는 이때에 한국의 신학교육은 아직도 모든 신학생들의 최종 목표는 담임목사이고 목회자 양성은 당회장 양성이라는 등식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신학대학교에는 '당회장과' 밖에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이런 근시안적 전세대적 사고를 미래를 위한 사고로 전환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이다. 나아가서 한국신학은 미래목회를 위한 전문화를 위하여 전문목회를 광범위하게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목회자의 최종 목표가 담임목사가 아니라 전문화 목회를 지향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통하여 목회에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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