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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얀마의 종교(불교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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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2  16: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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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미얀마의 종교(불교와 기독교)

불교의 전래
미얀마는 인종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얀마에 인도의 종교인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불명확한 점이 많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아노여타(Anawrahta) 왕이 스리랑카에 상좌부 불교를 요청(1057년)하기 이전에 불교가 이미 미얀마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가 적지 않다.

미얀마는 기원전부터 아쌈(Assam), 마니뿌르(Manipur)에서의 육로와 남인도, 스리랑카의 해로에 의한 인도 상인의 교역 루트가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유입할 기회가 많았다. 고고학 및 문헌학의 단편적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5~6세기경까지 상좌부 불교가 삐(Prome, pyi)에 전래되어 있었고, 대승불교의 밀교(密敎)도 전래되어 그 후 11세기경까지 두 계통의 불교가 모두 신봉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북부 미얀마는 일찍이 대승 불교와 그 후에 나온 밀교(Tantrism)뿐 아니라, ‘낫(nat)" 신앙이라 불리우는 정령신앙 등 힌두교가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정황으로 볼 때 9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중엽까지의 미얀마는 역사적으로 공백기간이었다. 버마족이 나차오의 지배를 벗어나 미얀마로 이주해 온 것은 이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미얀마 북부 짜욱세(Kyaukse) 지방에 우선 정착했다.

영국 식민통치 시대
우 옥뜨마와 마찬가지로 우 위자라(U Wisara)도 이 시대에 위대한 순교자의 한 사람이었다. YMBA의 회원이기도 했던 우 위자는 경찰의 제지를 무시하고 반정부적인 설법을 하여 1926년에 체포되었다. 2개월 후에 출옥한 우 위자는 반정부적 설법을 했다는 죄로 다시 투옥되었다. 그는 정치범에 대한 처우개선, 승려복의 착용 등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단식에 들어갔다. 1928년에 석방된 우 위자라는 그 해11월에 반정부적인 언동으로 세 번째 체포되었다. 그러자 단식으로 대항하다가 단식 166일째인 1929년 9월에 옥사하였다.

우 옥뜨마나 우 위자라 등 청년 승려의 민족주의 운동은 반영 운동을 표방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정치사상을 그 바탕에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보다 조직적인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는 1930년대에 시작되어 아웅 산(Aung San)등의 청년 인텔리의 지도를 받았다. 여기서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청년층이 쥐고 있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반영 운동에 불교 승려가 가담하고, 또한 서로 관련을 맺을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영국 정부는 미얀마를 합병한(1886년)후에 승려의 신분 제도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격한 반영주의를 표방하는 승려수가 급증하여 이들에 의해 민족주의 운동의 도화선이 당겨졌다. ․ 마을의 정치적 지도자는 승려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을 정도로 승려는 마을의 유력자로 남아있었다. 승려는 정부의 지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다. 승려는 무소유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영국 정부에 대해 큰 책임 없이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전통적으로 높고, 마을에서의 상담역이나 교육자였으므로 민중에게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어느 마을에나 승원이 있고 이 승원은 사가라는 조직체에 의해 통제되고 있어, 정치적 목적을 신속히 전달할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승려가 민족주의 운동에서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미얀마 - 특히 지방의 마을 - 에 있어서 승려의 키리스마적 존재, 그리고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상가의 조직력이라는 두 가지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다. 어쨌든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민중 사이에 충만해 있던 반영 감정은 승려가 지도자로 등장이면서 비로소 대중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성과 불교 평의회의 설치
“불교평의회는 미얀마의 모든 불교도를 대표하는 단체로서 종교상의 지도성을 갖는 조작체이다. 이의 설립 목적은 종교적 실천을 통해 미얀마의 전 국토에 불교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고, 불교를 그에 대한 논박에서 지키고, 불교 포교사를 기독교 포교사 파견과 함께 외국에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 있다.” 1950년에 마련된 ‘불교평의회 조령’의 조령에 따르면, 불교평의회는 집행부와 지역 대표부의 80명을 넘는 위원으로 구성되고 자문 위원회와 같은 성격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임무가 주어졌다.

단독으로 혹은 다른 조직과 협력해서 미얀마 연방 내외로 불교 사상을 선포하여 그 발전에 힘쓴다. 미얀마 연방 내욍 불교 전도센터를 설립하고, 그 목적에 따라 필요한 연구 시설을 마련하다. 불교 성전의 필기 및 구술시험을 시행하는 등, 불교 성전을 진흥하기 위한 행사를 계획․ 실행한다. 불교 성전의 교설(敎說)을 장려하기 위한 업무를 행한다.

불교의 국교화 문제와 군부의 대두
1961년경부터 미얀마에서는 헌법상 불교를 국교로 하자는 정치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47년의 헌법에서 불교는 특수적 지위를 승인 받고 있었는데, 그 후에도 상가?? 를 중심으로 한 불교도들은 정부의 불교 진흥책에 편승하면서 공화국에 있어서 보다 유리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국교화 추진 압력 단체로서 정부에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정부는 국 교화 추진 압력 단체로서 정부에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정부는 국교화의 움직임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비(非)불교도에 대한 배려에서 그것을 저지할 움직임도 보여, 제3차 헌법 개정에서 국 교화는 일단 실현되었지만, 곧 제4차 개정에서 비(非)불교도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그러자 불교 단체는 정부의 모호한 태도에 반발하기 시작해 정세는 불안해졌고 급기야 군사정부가 이를 수습한다는 구실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불교의 국교화 문제는 이미 1947년에 시작되었다. 1947년 5월 독립 운동의 지도적 단체인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은 양공에서 서로 만나 헌법을 기초(起草)했는데, 이 때 불교 국교화가 제안되었다. 그러나 그 조항은 국가의 단합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져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수 민족에 대해 다수 민족의 종교를 강요하는 기획이라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5월 23일 AFPFL의 전체 회의가 열려 ’국가는 종교문제에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입장이 승인되었다.

미얀마의 기독교 전파
미얀마는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지 약 450년이 되었다. 1689년에 프랑스인에 의해 미얀마에 기독교인 선교회가 설립되었고, 1813년에 저드슨(Judson)선교사는 미국 침례교선교회(American Baptist Mission)를 설립하였다. 그 후 여러 민족과 종파의 헌신적인 선교사들이 다양한 형태로 기독교를 전파하였으나 그 성과는 거의 미흡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불교의 방어적 자세는 확고부동하였다. 기독교 선교사의 시각으로 볼 때 미얀마의 소수 산악종족을 제외하고는 기독교가 전파되리라고 기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최근 들어 미얀마에서 보편화된 불교이론의 개념이 기독교의 영향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교리에 철두철미한 불교도조차도 기독교의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추세라고 주장한다. 혹시 불교가 점차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의해 자극을 받아 그러한 경향이 미얀마 불교에 스며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짐은 과연 기독교인들의 복음 전파에 기인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아마도 미얀마 불교에 있어서 기독교 정신에 따른 변화의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전파 때문이라기보다는 서구의 권위와 그 위광(威光)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정신보다는 서구의 유물론 사상에 더욱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저드슨 부부
한 때 케리의 사역에 참여하기도 했고 특히 케리의 아들 펠릭스(Felix)와 일하기도 했던 아도니람 저드슨(Adonniram Judson)과 그의 부인 낸시(Nancy Judson)는 1812년 인도에 도착했다. 저드슨 부부와 다른 6명의 선교사들은 미국 최초의 해외선교사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들 미국 선교사들 역시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동인도회사의 방해공작으로 인도를 떠나도록 명령받았다. 몇 달 간 이에 대하여 항의와 타협을 하는 동안 저드슨 부부는 다른 선교사들을 떠나 미얀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일생동안 배타적이고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미얀마인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1788년 메사츄세츠에서 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겨우 16세에 브라운 대학교(Brown University)에 입학해 4년 과정을 3년만에 수석으로 졸업해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했다. 학창시절에 저드슨은 제이콥 임즈(Jacob Eames)라는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는 자신이 자라났던 보수적인 회중교회가 철저하게 배격하는 자연신론(Deism)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임즈의 사상은, 더 이상 아버지의 신앙에 지적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어린 저드슨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졸업 후 저드슨은 고향으로 돌아가 학원을 개설하고 두 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으나 아무런 만족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간절한 권유를 뿌리친체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뉴욕으로 가 극작가가 되려고 하기도 하였다.

저드슨 부부의 미얀마선교의 헌신
저드슨은 낸시라는 여인과 교제하면서 낸시는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의 짐을 스스로 감당하려고 하였으며 인도로 가는 것이 “결코 세상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순종”···하나님의 소명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812년 결혼하고 그로부터 13일 뒤 인도를 향해 떠나 6월 중순 켈커타에 도착했다. 동인도 회사와 미리 교섭하지 않아서 인도에 오래 머물수 없었다. 다시 방향을 전향하여서 동부 아프리카의 해안에 있는 프랑스령 섬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말레이 반도의 페낭(Penang)에 가서 선교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페낭으로 가는 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추방당하지 않으려고 미얀마로 가는 배에 올랐다. 재미있는 것은 미얀마는 원래 저드슨이 가서 사역하려고 했던 곳인데 외국인을 가혹하게 박해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선교지를 바꿨던 곳이었다.

버마인들의 개종과 선교사역 동참
1820년 여름에는 10명의 신실한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미얀마인들은 개종하자마자 선교사역에 동참하였다. 한 여자는 학교를 세우라고 자신의 집을 개방하였고, 또 한 젊은이는 보조 설교자가 되었으며 땅을 회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이 잘 진행되어나가다가 저드슨 부부에게 탈이 생겼다. 미얀마에서 정부 박해 다음으로 선교사역에 장애를 주는 것은 열대성 열병이었다.

아도니람과 낸시는 이 병에 자주 걸려 죽을 뻔했던 일도 있었다. 죽음은 어느 때라도 그들을 덮칠 수 있었다. 그들이 랭군에 정착하던 해 그들의 아이 로저(Roger)가 태어났는데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6개월이 못 되어 열병으로 숨졌다. 1820년에 아도니람은 낸시를 치료하기 위하여 몇 달 동안 랭군을 떠나 켈커타로 갔다. 그러나 낸시는 병이 더욱 악화되어 1822년 아도니람을 떠나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낸시가 없는 동안 아도니람은 성경번역에 몰두하여 1년이 안 되어 신약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버마어 성경번역
성 경번역은 굉장한 주의를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업으로서, 복잡한 언어인 히브리어를 또 하나의 어려운 언어인 미얀마어로 번역해야 하므로 매일 25절 내지 30절씩 해도 구약을 다 번역하려면 2년이 필요했다. 그는 번역에 착수했으나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어서 1840년, 그의 아내 낸시가 죽은 지 14년이 지나서야 겨우 버마어 성경의 마지막 원고를 인쇄소에 보낼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성경의 개역작업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1834년, 46세의 나이로 저드슨은, 남편이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미얀마에 머물며 선교사역을 계속하던 30세의 미망인인 사라 보어드맨(Sarah Bordman)과 재혼하였다. 그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데 다만 가족이 늘어난 사라의 사역에 지장이 조금 있었을 뿐이었다. 결혼 후 10년 동안 사라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역에 너무 지쳐 1845년 마지막 아이를 낳고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임종하였다. 저드슨과 3명의 아이들도 같이 동행하였는데,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보겠다는 기대속에 가다가 이러한 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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