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나는 설교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설교
하은규 목사  |  ㅇㄴ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11.07  20:23:46
트위터 페이스북

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시편 85:8-13, 마 5:9)
한반도 위기의 때에, 평화를 생각한다.

/ 하은규 목사(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 

   
 

1. 오늘 처럼 우리 나라와 사회에 "평화"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북핵 위기와 한반도 평화를 말하고, 미국과의 2자회담과, 이어서 미국과 일본과의 3자회담에서의 주요의제가 모두 한반도의 북핵위기와 평화의 정착 문제였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북한 지도자 사이의 험한 말들과 위협이 오가고, 북한 외상의 기자회견 발언도 모두 평화와는 거리가 먼 말싸움으로 번져 가지만, 정작 그 말들이 현실이 되지 않을까 하고 우리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2. 신약성서가 쓰여진 그리스어의 원래 "평화"의미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자세와 태도, "평화의 때", "평화의 상태"와 같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전쟁 사이의 막간의 때를 순전히 뜻했습니다.

라틴어의 평화(pax)는 첫째로 두 당사자 사이의 상호 법적인 관계를 가리키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치하의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강력한 황제의 통치로 생긴 "법과 질서"(law and order)의 로마가 다스리는 세계 평화를 의미했지만, 평화(είρήνη)는 무엇보다 먼저 '전쟁'과 '전투'(πόλεμος)에 대해 열정적으로 주장하고, 정서적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반대를 의미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외적인 소란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바람직한 마음의 평정의 상태(apatheia)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평화"는 고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현대에서도 구원에의 갈구의 반향이고, 모든 사람이 누리는 "황금 빛 시대"(Golden Age)에의 향유를 바라는 말입니다.

[1] 성서에서 가르치는 평화의 뜻:

(1) 구약성서에서의 평화(shalom,שלזם):

신약성서의 근원인 구약성서에서 '평화' (shalom,שלזם)는 '화평/평안(peace)', 요즈음 화두가 된 '복지(well-being)', 우리가 인사할 때 "안녕하십니까?" 라고 말하는, 그 '안녕'이란 뜻입니다.

1.구약성서에서 '평화'(shalom)는 무엇보다도 야훼(Yahweh)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단을 쌓아 바친 후, 그 제단을 "야훼(여호와) 샬롬"(The LORD is Peace)라고 불렀습니다. (사사기 6:24)    하나님은 '평화'를 인간의 모든 일들 위의 하늘에서 만드시고 (욥기25:2), 인간에게 '평화'를 약속하시고, '평화'로 축복하십니다. (시편35:27-"주님은 위대하시다. 그를 섬기는 사람에게 기꺼이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다."[새번역]; 시편 147:13-14.) 다윗과 그의 자손들이 '평화'를 체험하기를 바라시고 (왕상 2:33), "예루살렘에 평화가 깃들도록 기도하여라"(시편122:6-9)로 권면하십니다.   특히 "평화를 비는 기도"인 시편 85편에, 참으로 '평화'는 오직 야훼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현실을 노래합니다.

2.'평화'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예언자들은 메시지에는 "참 평화"와 "거짓 평화"과 서로 긴장을 일으키고 갈등하며 마침내 투쟁으로 치닫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거짓 예언자들은 '평화'를 선포하고, 참 예언자들은 평화 대신 '위기'와 '불안'을 말합니다.  

참 예언자 에레미야는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4), "…슬퍼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이곳에서 여호와께서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렘 14:13-14)라고 선포하면서, 거짓 예언자 하나냐와 투쟁하다 고초를 겪습니다.(렘 27-28장)   예레미야 보다 앞서 열왕기 상 22장에는, 아합 왕 때에 참 예언자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거짓 예언자 그나아아의 아들 시드기야 사이의 투쟁의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13장에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날카롭게 대조하면서 그들의 심판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서 견디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몰아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냐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뜨리리라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허물어서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모두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3:1-16)

3.구약성서에서 '평화'는 종국적 피안의 현실이 아니고, 종말론적 기대 한가운데 있는 현실, 무엇보다도 국내외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평화를 말합니다. (렘4:10; 16:5)   

나아가서 이 평화는 종말론적 지평 속에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48:18; 57:19; 66:12, 렘29:11, 슥9:10) 무엇보다 이사야 9:5에서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지며", 이어서 9:6에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며, 그 메시아는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무엇보다도 '평화의 왕'"이라고 선언합니다. 마침내 11장에 묘사한 페러다이스(paradise)의 현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사11:6) "평화의 나라"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사 11:5) 메시아의 오심으로 성취될 것을 꿈꿉니다.

(2) 신약성서에서의 평화(είρήνη)

1. 신약성서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넓은 의미에서 '평화'는 만물의 정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고 말할 때, '평화'는 '무질서'(άκατασταςία)와 대비되는, 만물의 정상적이고 건강한 상태로, 구약성서의 샬롬 (shalom,שלז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연관되어 사람의 내면적이고, 외면적인 상황 뿐 만이아니라, 전 우주의 영역에 까지 확장되는 평화를 말합니다.

2. '평화'는 전 인류의 종말론적 구원을 뜻합니다.

그 평화는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누가2:14;)이고, "하늘의 평화"(누가19:38b)이며,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의 발을 인도해 가는 평화"(누가 1:79)이고, 지금 "우리들 눈에 숨겨져 있는 평화"(누가 19:42)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날 때"(계시록 12:10;19:1)에 드러날 '평화'입니다. 

신약성서는 이 '평화'를 가져다 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속에 이루어졌다고 증언합니다. (계시록 12장, 히브리서 13:20) 우리는 "평화의 하나님"(히13:20)께서 멜기세댁을 이은 "의의 왕"이시고,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히7:2)를 통해서 전하신(행10:36)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해야 한다고 명함을 받고 있습니다.(엡 6:15)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기" (엡2:17)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와 허무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평화"(요한 14:27)이며, 단지 '평화'를 영혼의 내적 평안으로 말하는 것에 대한 경고이고, 모든 근심(불안)과 두려움(공포)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평화'이고 "이 세상이 주는 모든 환난(affliction,θλȋψις)과 핍박과 박해에서 세상을 이기는 평화" (요한16:33)입니다.

3. '평화'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화해)'를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17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고 말할 때, 그 '평화'는 이사야 57장 19절의 으미에서 "현재적인 평화"를 뜻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적대적이고 원수가 된 유대와 이방 사이의 적대성(hostility, έχθρα)과, 보다 근원적인 인간들이 가진 하나님께 대한 적대성을 그리스도께서 허물어 버리신 '평화'를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πρός τον φεόν)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새번역)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일 때…하나님과 화해"된 현실을 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4.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썼을 때, 그 '평화'는 종교적이나, 윤리적이나, 명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기는평화를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 쪽에서 이혼을 요구한다면 수락하라는 권면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평화롭게 살게 하셨기"(고전 7:15)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에게 주는 권면에서도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딤후 2:22)라고 말하면서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멀리하십시오, 그대가 아는 대로, 거기에서 싸움이 생깁니다" (딤후 2:23)라고 구체적인 삶의 인간 관계에서의 '평화'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온갖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지만, "위에서 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어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데, 그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야고보서 3:16-18)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5. 마지막으로 신약성서의 '평화'는 영혼의 평화를 말합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영혼의 평화는, 오늘 우리나라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성운동, 수도원 운동, 기도원등의 영혼의 평안과, 신약성서 당시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이 추구하는 영혼의 평정(tranquility, γαλήνη)과도 다른 의미입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해주시기를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기쁨과 떼어놓을 수 없는 전 존재의 정상적인 구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2] 위의 성서적 평화에 근거하여, 오늘 우리나라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다음의 두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남한) 사람과 이방(북한)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유대(남한) 사람과 이방(북한)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켰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4-18)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남한)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북한)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의 땅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내가 그들을 한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이 범죄한 모든 곳에서, 내가 그들을 구해 내어 깨끗이 씻어 주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에스겔 37:15-23)

(1) 한반도의 영세중립국 선언.

정부는 우리나라가 영세중립국임을 선언하고, 주변 4대 강국인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나아가서 전 세계와, 유엔 등 세계기구에 통보하고 천명하며, 미군철수와 북한과의 평화협정과 핵무기 동결과 파기, 나아가서 상호 군축협상을 시작함으로 평화체제를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스위스가 평화를 애호하여 영세중립국이 된 것이 아니라, 독일(프로이센)과 프랑스, 이탈리아, 합스브르크의 오스트리아 등의 강대국에 둘러싸여 국익을 위한 생존전략으로 1851년 이래 영세중립국이 된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1) 먼저 우리나라의 크리스천들과 국민들과 정부에 촉구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남한으로 온 한경직 목사님과 그가 창립한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공산주의는 무신론이어서 기독교와 반하고, 크리스천들을 박해한다는 데 근거하여, 기독교=반공주의라는 공식을 세워 반공기독교를 확립하고, 반공만 내세우면 독재정권도 용인하고, 심지어 그들을 위한 대통령 조찬기도회도 주도하면서 기독교를 반공 이데올로기의 하녀로 종속시키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회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대한 확고한 보루와 사회정의를 위한 옹호자가 되지 못하고, 지난 촛불혁명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드러났듯이 민주주의의 종양처럼 자란 태극기 집회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앞장서서 나오는 민주주의 역사의 반동으로 작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회는 변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며, 아직도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의 성공과 출세, 행복, 건강의 바알과 아세라의 종교로 전락한 한국교회가 대형교회 목사들의 교회와 부와 특권의 세습과, 불의의 권력과 타협하고,재정비리와 헌금의 사유화 등 온갖 비리와 불의로 가득찬 현실을 고쳐야 합니다.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에스겔 36:26-27)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호세아 6:1-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공산주의 등 의 모든 이데올로기와 그 어떤 사상과 그 무슨 체제 위에 종말론적인 승리의 이미 이루어진 현실과 그 약속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미국을, 미군을 미국의 첨단 무기들을 하나님처럼 믿을 것인가? 선택과 결단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주님은 뭇 나라의 도모를 흩으시고, 뭇 민족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신다. 주님의 모략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에 품으신 뜻은 대대로 끊이지 않는다. 주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한 나라 곧 주 하나님이 그의 기업으로 선택한 백성은 복이 있다." (시편 33:10-12)

"…당신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오직 주님만 섬기십시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 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여호수아 24:14-15)

2) 국민들과 현정부도 사고의 혁명적 변화를 감행해야 합니다.
일반 국민들 가운데 미국이 우리나라의 안보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이 너무 확고하고, 미군이 철수하면 나라가 망하고 공산화되고 말 것이라는 공산주의 공포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당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미국에 몰려가 전술핵을 비치해 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우스광스러운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외교 안보 담당자들도 대부분 미국에서 교육받고, 국제 기구 등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길들여져서, 어느 교수가 지적했듯이 지금은 우리가 중-선진국가에 진입했는데도 한국동란 당시의 약소국 사고에 갇힌 외교를 하고 있다고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미국 대통령으로 잘못 선출된 트럼프는 미국의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The Founding Fathers)"과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대통령이 만들어 온 민주주의와 인권과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정신에 기반한 미국(늘 미국 역사가 그러해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을 내부로 붕괴시키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 미국 우월주의 사고 방식을 갖고, 북한에 대해 거친 협박을 내뱉으며, 공포를 팔아 미국 값비싼 첨단무기를 우리나라에 팔고자 하는 전쟁상인(war-monger)에 지나지 않고 트럼프 이후의 미국은 세계 중심국가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정신채려야 합니다. 미국의 고가의 무기를 살 돈으로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을 충분히 돌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은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 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요, 우리의 방패이시니, 우리가 주님을 기디립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이름을 의지하기에 우리 마음이 그분 때문에 기쁩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시편 33:16-22)

(2) 국가 카드(국민 카드/주민 카드)제도와 국민 기본소득 제도 시행.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내가 듣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백성 주님의 성도들이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구원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니, 주님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일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내려주시니, 우리의 땅은 열매를 맺는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시편 85:8-13)

시편의 시인은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춘 현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기본 조건은 정의입니다. 정의가 없는 곳에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있는 곳에 정의는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설교에 '정의'에 대한 말씀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축복과, 개인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두고 두고 말해지지만, '정의', 특히 '사회 정의'(social justice) 에 대한 증언은 한국 교회 설교에서 거의 말해지지 않습니다.

1) 요즈음 사회 정의(social justice)의 근간은 경제 정의(economic justice)입니다.
국가 카드, 국민 카드, 혹은 주민 카드 등, 이름을 무엇이라 하든, 삼성, 현대, 롯데 등의 대기업들과, 은행들이 금융에 진입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는 카드 사업을 모두 회수하여, 국가가 관리하는 국가 카드 제도를 시행하기를 정부에 촉구합니다.
이 생각은 한신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강남훈 교수가 오래 전부터 제창했던 아이디어입니다. 국가 카드 제도가 되면 국민들이 거기에 저축하고 출입금하면서, 국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정한 이율을 적용하고, 출금과 입금의 한도를 저축과 소득 수준에 따라 정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2) 아울러 국민 기본소득 제도를 만들어 1인당 월 50만원 기준으로 국가 카드에 정부가 입금해 줌으로, 모든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도록 정부와 경제계에 촉구합니다.
강남훈 교수님과 뜻있는 사람들이 이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200만원 소득을 국가가 보장해 줌으로 모든 국민의 경제적 인권과 인간 생활의 존엄성이 지켜지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국민들과 정부와 경제계에서 지혜를 모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할 의지가 있느냐/없느냐? 입니다.
재벌 기업들은 수백조의 사내 보유금을 적립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연구 개발과 기술 투자를 위한 경비 이외에는 국가가 환수해서 운용할 방법을 경제 부처들은 찾아야 합니다.
삼성은 국민들이 다 아는대로, 밀수와 권력층에의 뇌물과 특혜로 재벌이 되었습니다. 창업자를 거쳐 그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 총수가 지금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삼성은 카드 등 금융업 보다는, 반도체와 전자산업과 미래의 국민 먹거리 창출에 집중하도록 카드 사업을 회수해야 합니다. 감옥에 있는 총수를 사면해 주더라도 사내 보유금을 국민들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는 정책을 찾아야 합니다. 

현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수출품들은 제대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국내 내수용 자동차들은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 수많은 국민들을 죽이거나 부상하게 만든 결과, 오늘 날 엄청 난 규모의 사내 비축금을 쌓아 놓고 있음으로, 국민들에 대한 빚을 크게 지고 있습니다. 그 빚을 갚게 만들면 다른 재벌 기업과 더불어 국민 기본 소득 제공을 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OECD국가들 중 가장 낮다는 우리나라 기업들과 부자들의 담세 능력을 제대로 감당하게 소득세 등의 세율을 소득 수준과 재산 보유 상태에 따라 올려야 합니다.  이 일에 교회가 앞장 서 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은혜를 베풀면서 남에게 꾸어 주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영원히 기억된다. …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넉넉히 나누어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는 영광을 받으며 높아질 것이다.
악인은 이를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갈다가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욕망은 헛되이 꺽일 것이다." (시편 112:5-10)

[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여라!

마태복음 5장의 유명한 "산상보훈"의 일곱 번째 행복한 사람의 가르침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peace-lover)"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peace-maker)"이 행복하다고 선언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곧 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고, 이 세상의 불의는 깊고 넓게 퍼져 있으며, 사실 상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더 막강하고 더 힘이 셉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는 데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와 친지들의 오해와 몰이해와 버림받음, 나아가서 고난과 박해와 투옥과 고문,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데도 마찬가지 일들이 따릅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추앙받는 두 사람, 나치 치하의 본훼퍼(D. Bonhoeffer) 목사님과, 미국 흑인이 노예로 취급되고, 흑백분리와 차별의 역사의 한가운데서, 흑백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살았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님의 삶들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투옥과 죽음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살았노라고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장 9절)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5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6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본 교단 채영남 총회장 행보 언론들 주목
10
쓰레기 시멘트 '맞짱' 뜨던 목사, 이렇게 산다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